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실용}} {{공식 설정}} {{나무위키}} {{요나라}} {{키탄 국가 프로젝트}} {{요 황제}} {{전임후임 | 앞이름=전 대 | 뒤이름=후 대 | 전임자= [[요 도종]] 야율홍기 | 직책 = [[요나라|요]] 황제 | 대수= 10 | 임기= [[1101년]] ~ [[1125년]] | 후임자= [[요 덕종]] 야율대석 }} '''요 천조제 야율연희'''(遼 天祚帝 耶律延禧, [[1075년]] ~ [[1128년]])는 [[요나라]]의 제9대 황제(멸망군주) (재위 : [[1101년]] ~ [[1125년]])이다. 제8대 황제 도종(道宗)의 손자이다. == 생애 == [[1075년]] 제8대 황제 도종의 아들인 순종 장회태자 [[야율준]](順宗 章懐太子 耶律濬)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쟁으로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이것을 불쌍하게 생각한 할아버지 도종에 의해서 여동생 진진국장공주(秦晉國長公主)와 함께 길러져 양왕으로 책봉 되었다. 일시적으로 조부 도종은 조카 [[야율순]](耶律淳)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지만, 신하들의 견제를 받아 천조제가 황태자가 되었다. [[1101년]] 도종의 사망으로 황제에 즉위 한다. 즉위한 천조제는 어리석은 성격이며 정무를 돌아보지 않고, 가신의 간언에 대해서는 처벌로 임하는 등, 민심의 배반을 불렀다. 외교면에서도 [[1115년]]에 요나라에 종속되고 있던 여진족이 금나라를 건국하여 독립하면서, 토벌군을 파견했지만 반대로 대패하여, 요나라의 쇠퇴하는 결과를 불렀다. [[1121년]] 추밀사 [[소봉선]](蕭奉先)이 천조제의 적자 태자 후보인 진왕 [[야율오로알]](晉王 耶律傲盧斡)과 황족인 [[야율여도]](耶律余賭, 진왕의 숙모의 남편)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소봉선은 여동생 소원비가 낳은 진왕 [[야율정]](秦王 耶律定, 후의 북요의 2대 황제)을 태자로 삼기 위해서 야율여도에 의한 진왕 오로알 옹립 음모가 있다고 중상 모략하여, 천조제는 이 말을 믿어 버렸다. 그 때문에, 야율여도는 위험을 느끼고 금나라로 도망갔다. 머지 않아 진왕의 생모인 [[소문비]](蕭文妃)를 죽이고, 다음 해 1월에 반역죄로 진왕도 처형되어 버렸다. 소봉선의 예측대로 진왕(秦王)이 태자로 정해졌다. 1122년 3월 초 7일, 금(金)나라 태조 [[아구다]](阿骨打)와 내산(來山)에서 싸워 대패하여, [[창춘]]으로 피했다. 그 때문에 같은 달 13일에 황족 [[야율대석]](耶律大石)과 이처온(李処温) 등은 천조제의 종부(従父)의 야율순(耶律淳, 선종 천석제)을 옹립하여 [[북요]]가 건국되었다. 요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는 금나라는 요나라가 혼란해지자 호기라고 생각하여 [[1125년]] [[북송]](宋)과 동맹을 맺어 요나라에 침공한다. 송·금 연합군에 패배한 천조제는 운주(雲州) 음산(陰山)으로 도망가는 도중, 응주(應州)에서 금나라의 포로가 되어 금군에 항복, 요나라는 멸망 했다. 후에 천조제는 해빈왕(海濱王)으로 책봉 되어 [[백두산]](白頭山)으로 보내고 여생을 지냈다. 1128년 8월 54세에 병으로 죽었다. 요나라가 멸망했기 때문에, 야율대석은 중앙 아시아에 피하여 [[서요]]를 건국하였다. 그 때문에, 요나라는 재흥하게 된다. 덧붙여 천조제의 후예는 [[금 해릉왕]]에 의해 일족이 주살 당하여 후손이 없다. == 존호 == 즉위 후에 받은 존호는 '''천조황제'''(天祚皇帝)이고, [[1103년]]에는 존호를 가상하여 '''혜문지무성효천조황제'''(惠文智武聖孝天祚皇帝)라 하였다. [[분류:요나라의 황제]] [[분류:1075년 태어남]] [[분류:1125년 죽음]] [[분류:전쟁 중 포로가 된 군주]] [[분류:12세기 중국 사람]] 요 천조제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