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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font-size: 10pt | 윤정혁, 나루호 켄토, 율리안 발렌스카
| colspan="4" style="font-size: 10pt | 나루호 켄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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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2일 (목) 21:44 판


혁명세계관
윤주용 관련 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합 국가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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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정부수반
대표위원평의회 의장
초대
윤주용
2대
카일 먼슨
3대
수잔 칼아일
4대
시어도어 맥코니
대표위원평의회 총리
초대
시어도어 맥코니

소련 군사평의회 대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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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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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용
Yun Ju-Yong
국적
대한민국 → 독일
독일 사회주의 공화국소련
본명
이민준 → 율리안 리 발렌스카
다른 가명
나루호 켄토
출생
1997년 5월 13일, 대한민국 경기도 연천군
직위
태평양 과도위원회 부수반[1]
2048년 6월 11일 ~ 2051년 6월 12일
소련 임시전권의장[2]
2056년 6월 2일 ~ 2060년 6월 1일
소련 초대 대표위원평의회 의장
2056년 6월 6일 ~ 2080년 6월 4일
소련 2대 군사평의회 의장
2068년 6월 4일 ~ 2076년 6월 4일
당적
소련 공산당 (2056~)
배우자
레나 발렌스카 (2034~)
슬하 1녀


개요

대한민국 출신 독일, 소련의 공산주의와 아나키즘 사상가, 혁명가이자 정치인, 엔지니어.

대다수 좌파 지식인들마저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던 계급혁명을 줄기차게 주장했고 21세기 중반의 세계적 혼란 속에서 결국 이를 성공시킨 혁명가로 평가받는다.

윤주용은 필명이지만 사실상 본명으로 굳혀졌으며 나중에는 아예 개명했다.

생애

어린 시절

신원 미상의 친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맡겨졌으며 만으로 2살에 입양될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양부는 중소기업의 사장이었고 양어머니는 세무직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6살에 양부모가 이혼하면서 다시 보육원에 맡겨졌고 3년만에 양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양어머니와 생활하는 도중에도 몇년간 양부쪽의 잦은 언어적 폭력에 시달렸다. 그는 어린 시절의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평생 양극성 장애에 시달렸고 가족이라는 것에대해 집착했다.

그의 어머니는 높은 교육열로 인해 양부가 집앞에 찾아와 폭언을 퍼붓는 와중에도 결코 이사하지 않았고 접근금지 소송까지 벌이면서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과목에서 모두 낮은 성적을 얻었다. 하지만 사회, 물상 과목은 항상 높은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 성적이 높은 학생들이 많았던 고등학교를 중하위권 성적으로 졸업한다. 수능도 당시 지방거점국립대 상위 학과에서 서울 소재 대학 중하위권에 달했으나 그는 어머니가 실망할까봐 재수에 들어갔다. 하지만 성적은 몹시 떨어졌고 결국 삼수 끝에야 원래 성적을 회복해 모 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한다.

윤주용은 물질적으로는 전혀 부족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어머니가 이혼하면서 얻어온 상당한 금액의 위자료가 있었고 어머니의 소득도 낮지 않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철부지 공산주의자

2018년 3수끝에 입학한 대학에서는 상당히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특히 물리학과 열역학, 공업수학, 선형대수학등의 과목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2019년에는 경제학과 복수전공을 시작했는데 이로인해 졸업이 1년 늦어지게 되었지만 양쪽 과목에서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 시기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기 시작했으며 경제학과 철학에 깊게 빠져들었다. 이후 사회주의 동아리나 관련 학회 토론회 등에 참여했으나 몇몇이 주장하던 미군 철수등은 공상적, 비현실적이라며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공공연히 심각하게 자신의 정치사상을 드러냈으나 어머니부터 친구들까지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고 한다.
2023년 졸업한뒤 학교로부터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였고 2025년 병역을 마친다.
이후 좌파 계열 잡지등에서 칼럼니스트, 기자로 활동하다 2027년 경제학 대학원에 들어갔다. 이후 2029년 <소득격차의 발생원인에 대한 철학적, 수학적 양자적 접근을 통한 분석 결과의 수렴성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시기부터 그의 사상은 점차 급진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레닌주의등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2030년 2월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유학을 준비하던 도중 그가 속한 ‘한국공산당 창당준비위원회’가 누군가에게 고발당해 검찰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게 되었고 이를 큰 위협으로 여긴 그는 급히 독일로 떠났다.
그러나 몇개월후 검찰은 ‘혐의없음’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참여인사들은 반북 성향이 강했고 유럽공산주의등의 사상을 띄고 있어 별문제없이 넘어가는듯 하였으나 별건으로 윤주용이 쓴 무력혁명 구상, 구체적 논의등을 적은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창준위내 소수그룹이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등으로 기소되었다.
2030년 9월 윤주용은 독일에 난민 신청을 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기나긴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윤주용 본인은 자신의 2020년대를 ‘철부지 공산주의자’로 지냈다고 회고했다.

망명 생활

그는 이듬해 에어버스에 취직하였고 엔지니어 및 수리기사로 활동하며 드레스덴 공과 대학에서 공학 석사 과정을 밟았으나 중퇴하고 몇몇 대학의 철학과 청강을 하면서 지낸다.

어머니의 생활비 지원과 엔지니어 수입이 짭짤했던 터라 난민이라는 지위에 있는 것 치고는 상당히 안정적인 망명생활을 보냈다.
그는 동시에 독일 좌파당과 좌파 잡지등에서 활동하였으며 독일내 사회주의 운동에도 참여했하였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부 세력에게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으나 외국인 신분으로는 상당한 지지자를 얻었다.

2034년 자신이 청강하던 철학과 조교수 레나 발렌스카와 결혼했다. 그녀는 폴란드계 독일인이었고 윤주영보다 3살이 많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1980년대 초반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인해 폴란드에서 박해받던 자유노조원중 하나였고 천신만고끝에 서독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면서 그곳에 완전히 눌러앉게 되었다.
이 때문에 레나의 부모는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윤주용을 썩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후 윤주영이 모리셔스로 떠났을때 레나에게 이혼을 종용했었다고 한다.

2037년 독일 국적을 취득하였다.

2039년 딸 엠마 발렌스카가 태어났으나 윤주영의 사회주의 활동은 점점 심화되었다. 중국은 시진핑 사후 내부분열로 인해 혼란스러워졌고 미국도 극우 정권이 들어서고 인종갈등과 빈부격차로 시위와 폭력이 격화되면서 몰락해가고 있었다.
강대국들이 하나둘씩 몰락하면서 세계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야말로 세계는 자력으로 살아남지 않으면 안되는 ‘야만적 시대의 한창’을 지나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독일 내부도 극우와 극좌파가 갈등하고 있었고 정국의 혼돈이 이어졌다. 1년 간격으로 좌우정권이 교체되었고 동서대립도 격화되었다.

2042년 연방 하원 선거에서 극우파가 압승을 거두자 극우 정부는 연방헌법수호청을 조종해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한 극좌 인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윤주용의 가족은 모리셔스로 떠나는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모리셔스 정부는 알 수 없는 사유로 아내 레나와 딸의 망명을 거부했고 결국 레나와 딸은 바하마로, 윤주용은 모리셔스로 떠났다. 바하마에서는 반대로 윤주용의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모리셔스에서의 생활과 제5인터내셔널

윤주영은 모리셔스에서 독일과 한국내 사회주의 인사들과 접촉하였고 각국의 고압적 극우정부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다.
이후 윤주용은 모리셔스에서의 생활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반대로 세계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탄탄하게 다져지는 아이러니의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때부터 윤주용은 아프리카 인민들과의 연대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서는 일단 흑인민족주의를 이용할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미국의 흑표당, 유색인종연대등에 서한을 보내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한편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인종과 정부 문제를 논의했고 극우 파시스트 정부에 대항한 모든 인종의 단결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 반정부단체에 퍼지면서 윤주용의 이름이 미국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윤주용은 좌우이념을 떠나 전국가의 권위주의적 정권을 전복하고 전세계가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여 각 국가간의 전쟁을 막고 서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각국에서 내셔널리즘을 제거하고 진정한 인류애로 뭉치는 ‘야만적 시대의 종말’을 선언하고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미지 않는 ‘연대하는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주창했다.

이 시기 모리셔스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제4인터내셔널을 넘은 제5인터내셔널이 조직되어가는 시기였다. 각국의 사회주의 조직, 정당들이 거국적으로 참여하였고 제5인터내셔널은 제2인터내셔널 이후 최대의 사회주의 조직이 되었다.
제5인터내셔널은 모든 구성원들이 내셔널리즘을 완전히 탈피하고 애국자(pro-state)이기를 포기하며 친인류(pro-humanity), 친프롤레타리아(pro-proletariat)인 조직을 천명했다. 제2인터내셔널이 무너져갔던 전철을 절대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제5인터내셔널을 구성하던 사회주의자들 대부분은 본국에서 박해받아 망명중이거나 지하조직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국가간 불화에 애국주의, 내셔널리즘적 시각을 버린지 오래된 사람들이 많았다.

2045년 4월 25일, 점차 제5인터내셔널의 규모가 커지자 이들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모리셔스의 정부는 위협을 느끼고 이들을 탄압하려 하자 제5인터내셔널에 참여하던 모리셔스인들이 정부를 단 하루만에 무너뜨렸다. (모리셔스 혁명)
다만 윤주용은 모리셔스 구정부 인사들을 탄압하지 않았고 전 총리 아크샤이 암두카르와 회동을 가진 뒤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받았고 모리셔스 소비에트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즉시 빈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농업에 종사할 수 있게하는 한편 산업별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를 소집하고 사탕수수에 의존하던 농업을 여러 작물로 다각화 시켜나가며 자급자족을 위한 기반을 닦았으며 모리셔스 소비에트공화국은 이후 대대적으로 수립되는 사회주의 공화국들과 소련 체제의 프로토타입으로 높이 평가된다.

소비에트 정부 선포 이후 윤주용은 이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서한을 각국의 노동자조직에 보냈고 즉각적인 동시혁명을 촉구했다.

미국 내전에 뛰어들다

미국 내부의 정치상황은 점차 격화되어가고 있었다. 인종갈등, 빈부계층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2045년 12월 8일 뉴욕, 시카고등지에서는 연방정부에게 긴급 식량을 지원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경찰과 주방위군이 발포하면서 시위가 격화되었고 아예 몇몇 도시에서는 자경단, 민병대를 조직하여 주방위군과 경찰서를 공격하였다.
2046년 1월 8일에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오리건, 일리노이, 인디애나주 의회가 주방위군 철수와 경찰 발포 중단, 빈민들에게 식량지급을 결의했지만 제5인터내셔널의 공명한 미국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은 결국 친부르주아 정치인들이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기만술에 불과하다며 전국적으로 민중이 연대하여 체제를 엎을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2046년 2월 1일 미국 전국의 사회주의 조직들이 모여 새크라멘토에서 미국 통일공산당(America Communist Unification Party, CUP)을 결성하였고 제5인터내셔널에 참여, 캘리포니아주 내부의 빈민 민병대와 자경단을 결집시켜 노동자적위군(Worker's Red Guards)을 결성했다.
2046년 2월 19일 노동자적위군이 포함된 시위대와 민병대가 캘리포니아, 워싱턴, 오리건주에서 동시다발적인 봉기를 일으켜 주방위군과 투입된 일부 연방군과 나흘에 걸친 전투끝에 각 주의 주청사, LA시티홀등을 장악하였고 태평양 과도위원회(Pacific Interim Committee)를 수립한뒤 연방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 봉기와 동시에 유색인종 비율이 높거나 빈부격차가 심한 다른 5개의 주에서 동시다발적 봉기가 일어났고 주방위군, 연방군과 충돌했다.(2.19 봉기) 이에 연방정부는 2월 24일 이 봉기를 분리독립 시도로 간주하고 연방군을 통해 과도위원회를 분쇄하겠다고 선언하면서 12년에 걸친 미국 내전이 발발한다.

서부 태평양 지역에서의 봉기 성공 이후 CUP는 LA로 윤주용을 초청하였지만 과도위원회에서 CUP는 절대 다수가 아니었고 크게 주목받는 집단은 아니었다. 과도위원회 대부분은 이념 없이 국가 체제를 뒤엎는데에만 목적이 있었고 그 이후의 방편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족한면이 있었으며 사회주의라는 것에 대해 미묘한 반감도 있었다.
이에 CUP에서는 제5인터내셔널의 지도자격이었던 윤주용을 초청하여 순회연설, 토론 참여등을 요청한 것이었다.

소련 성립까지

집권기

퇴임, 그 이후

2080년 4월 7일, 당해 6월 3일 제9기 전소비에트대표자대회 임기가 만료되는 대로 차기 대표위원평의회 의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2084년 6월 20일 소련 군사평의회의 민간자문역으로 선임되면서 막후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그저 자문역을 수행할 뿐이고 소비에트 대회의 결정에 조언할 뿐이라고 일축했다.
윤주용은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에 거리를 두고있다고 밝혔으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시피하며 다만 내치보다는 외교, 군사 문제에 집중하고 있어 어느정도 실권이 있는 명목상 국가원수격 위치를 지니고 있다.
최근에는 혼란에 빠진 중국 본토와 인도 문제등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외교,군사적 방책등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또한 명목상 우두머리 직함을 다른 사람에게 내놓고 2선으로 물러나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집권 초기 그의 주특기이기도 하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그는 지나칠 정도로 '혁명'에 집착했다. 정치 혁명, 사회 혁명, 자유 혁명, 성별 혁명, 문화 혁명등 그의 집권기 이전 혁명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남발된적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혁명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만능 도구라고 생각했으며 개혁이라는 온건한 수단은 부르주아적이며 우매한 보수주의자들이나 쓰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 주앙 아세베도, 포르투갈 정치학자

윤주용은 엘리티시즘과 대중주의의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레닌의 전위정당론을 신봉하면서도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에 민주적 정당성과 권력을 부여하도록 하고 있다. 그와 새로운 정권은 민중의 힘을 온전히 이용하면서도 그들의 힘이 항상 공익을 위해 쓰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에 차있는채로 전위적인 공산당이 이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믿고있다. 윤주용은 마치 파시스트처럼 행동하며 결국 새로운 국가 전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수도 있다. 공산당의 이중적 태도는 나중의 결과를 놓고 보았을때 정당화될 수는 있어도 과정상의 문제는 부정되거나 옹호될 수 없을 것이다.

 
— 나가야마 준코[3], 정치가

그 자신은 부인했지만,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연설과 매체를 통한 선전, 선동에 매우 능했고 이를 통해 민중의 분노를 이끌어내 파괴적인 효과를 내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문제는 이런 선전 선동에는 가짜뉴스나 부풀리기등이 다분히 섞여들어가있었다는 것.
현대에 들어오면서 명확한 실체가 없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적을 인물, 집단으로 한정시키면서 부유층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프롤레타리아의 적은 인물 집단뿐만이 아니라 인민 개개인을 압박하는 시스템 자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중 한명한명에게 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시스템이 다시 침투할 빈틈을 주는 것이 된다며 ‘급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특정 인물, 집단에 대한 분노를 부추겼다.

이때문에 윤주용을보고 히틀러나 괴벨스가 생각난다는 의견도 있으며 소련 전체를 개인숭배 광풍으로 몰고갈 수도 있었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윤주용은 본인 스스로가 개인 우상화나 영구 집권등을 혐오했고 결과적으로 사회주의-아나키즘적 사회체제가 구축되면서 이런 비판은 윤주용의 혁명활동에 있어 과정상의 비판에 한정되고 있다.

사상

성격

상술한 유년기의 불행 때문에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었다. 초기에는 우울장애로 판정받았으나 2036년이 되어서야 양극성 장애로 진단받았다.
이런 병과 윤주용 자신의 다혈질적인 성격이 겹치면서 그를 짧게 만난 사람들은 그를 대화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평가했으나 그의 주위에 오래 있던 아내 레나 발렌스카나 여러 혁명 동지들은 그를 옹호했다.
실제로는 굉장히 예의바르고 듣는 사람이 낯부끄러울 정도로 칭찬을 자주하는 사람이었으며 소심한 면도 없지 않았다.

양극성 장애로 인해 몇주에서 몇달간 우울감에 빠져있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연설문이나 책을 썼다. 본인은 어렸을 때 조증 삽화가 찾아오면 창문 밖으로 물건을 던지거나 집안의 물건을 깨뜨리는 등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일삼았으나 점차 자라면서 이것이 파괴적이고 충동적이지만 번뜩이고 획기적인 내적 사고로 대체되어갔다고 회고했다.

그는 완벽주의 성향도 갖고 있었고 매사에 철저해서 사소한 것도 잊지 않고 없애고 빼버릴 것과 추가할만한 사항들을 꼼꼼하게 챙겼다. 그러나 무결점을 추구했다는 타인의 평가와는 다르게 그의 방은 몹시 어질러져 있었고 본인도 본인이 완벽주의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인은 그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본인의 행동만은 철저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서 그런 특징을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자신의 어질러진 방은 자신만의 공간이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어질러져 있었다고 유쾌하게 말했다.

사실관계나 결과같은 명백한 것을 빼고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일례로 윤주영 자신은 사형제 폐지론자였는데 사형제 찬성론자였던 북미 민주당 대표 조지 베스터와 토론했을 때 장장 18시간을 쉬지 않고 토론했고 발언시간의 대부분은 윤주용이 썼다. 결국 질려버린 베스터가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사실상 윤주용의 의견을 인정하고 나서야 토론이 끝났다.
물론 윤주용이 토론에서 항상 이기거나 한 것은 아니었는데 논리나 화술로 밀렸을때는 며칠을 분해하며 잠을 못이뤘다고 하며 끝끝내 여러 근거를 붙이고 논리를 완성해서 재토론을 신청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상대가 지쳐서 나가떨어져 앞의 문단과 같은 결말을 맞았다.

어록

시장경제 체제에는 항상 악인이 존재한다. 그 악인은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시스템을 옹호하며 그것을 경쟁이라는 ‘자연법칙’에 따른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이상적, 추상적 혁명노선만을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정치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현대 국가의 민주주의 체제는 인민에게 자신들이 국가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뜨리며 모든 것이 그들의 뜻대로 통제되고 있다고 거짓된 믿음을 준다. 하지만 실상은 선출되지도 않고, 견제받지도 않는 자본권력과 안보상의 문제라는 이유로 통제받지 않는 국가권력이 국가 전체를 좌우하며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선거는 누구를 뽑아도 이 체제를 위해 봉사하는 충실한자가 당선된다.
자본가들은 이렇게 합법적 수단과 비선출 권력을 이용해 영구히 인민을 속박하고 착취하는 세계를 만들며 그들의 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의회 내에 프롤레타리아가 있는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들의 대표를 스스로 참칭한 자가 있는가? 의회는 노동자대중을 대표하지 못한다. 거대 자본가 정당에 휘둘리며 그들에게 복무할 바에야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고취시키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명확하게 짚어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국가권력집단은 노동자인 우리를 민족이라는 틀에 가두고 다른 민족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공격케한다. 하지만 전통적 기득권 세력과 부르주아들이 결탁한 국가권력집단을 위해 우리 노동자들이 해줄 일은 없다. 적은 착취를 해왔던 집단 내부에 있는 자들이지, 다른 민족이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에 민족주의는 필요 없다.

인간은 분노와 격정적인 상태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순수한 면모를 내비친다.

불합리함이 느껴지는가? 지금이 바로 혁명을 개시해야할때다.

혁명하기 좋은 시대군!

 
— 2041년 독일 사회주의인민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일본 지배층이 한국을 항복시킨다고 해서, 한국 지배층이 일본을 굴복시킨다고 해서 양국 인민의 개인적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굴복시켜 이익을 보는 것은 각국의 지배층과 자본가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국 인민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 2052년 일본 혁명 직후 도쿄 연설에서

인류의 시대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듯이 인류의 새로운 시대 또한 아프리카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 2056년 아프리카 연합 정기총회 기조 연설중

세상이 미쳤을 때는 그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국가에 의한 검열보다 무서운 것은 인민들의 자기 검열이다.

자동차는 딱 세가지 요소만 따지면된다. 얼마나 오래달리는가, 얼마나 튼튼한가, 얼마나 편안한가이다. 누가 타고 다니는지, 누가 만드는지, 어떤 재료로 만드는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중요한 기치다. 하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누리기 위해 희생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차라리 모두가 약간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사회구성원 전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낫다.

Meine Erzfeindin, er nähert sich. Ich bin hier in Sicherheit und das weiß ich. Ich muss nur meinen Weg nach unten finden. Aber in letzter Zeit falle ich... Ich brauche nur etwas Zeit. Ich werde dich zu meinem machen. Ich werde dich wieder zu meinem machen. Ich brauche nur Zeit. Ich werde diese ganze verdammte Welt zu meiner machen.
적들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어. 난 여기서 안전하고, 난 그걸 알아. 그냥 나의 길을 찾고 있을 뿐이야. 하지만 최근 내가 무너지는 기분이야... 하지만 난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널 내것으로 만들겠어. 널 다시 내것으로 만들겠어.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이 엿같은 세상을 내것으로 만들겠어.

 
— 2044년 3월경 모리셔스에서 아내 레나 발렌스카에게 보낸 편지중
  1. The Vice Premier of The Pacific Interim Committee
  2. Temporary Chairman in Full Authority, 전소비에트대표자대회 초대 의장, 군사위원회 위원장, 공안협력위원회 위원장을 겸하는 임시직
  3. 2052년 동아시아 SFSR 참여에 거부하였고 윤주용이 전인민정치협상회의 의장직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소비에트는 그녀에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061년 북아메리카 연방이 소련에 편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뉴질랜드로 떠났다가 2070년 사망했다. 그녀의 사후 일련의 소련 공산당 비판은 파시즘 성향 세계지하투쟁조직 행동지침의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