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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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연방제 오권분립 민주공화국으로서, 대만의 요소(오권분립)와 미국의 요소(순수 대통령제)를 절충하여 정치체제를, 대만, 한국, 일본, 필리핀의 헌법을 절충하여 헌법을 만들어낼 정도로 정치적 영향을 골고루 받아 혼합이 상당히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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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연방제 오권분립 민주공화국으로서, 중화민국의 요소(오권분립)와 독일식 연방제를 절충하여 정치체제를 만들었으며, 대만, 한국, 일본, 필리핀, 심지어는 독일의 헌법을 절충하여 헌법을 만들어낼 정도로 정치적 영향을 골고루 받아 혼합이 상당히 되어있다. 중앙 오권과 지방(연방구성체) 오권이 모두 존재하나, 독일식 연방제 특성 상, 지방(연방구성체) 오권의 힘이 중앙 오권보다는 약하다. 그래도 연방제인 만큼, 각 연방구성체(직할시/현)는 독자적 헌법과 법률을 만들 수 있으며,지방(연방구성체) 오권 위에는 중앙(연방정부) 오권이, 중앙(연방정부) 오권 위에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 국민대회가 놓여 있어, 정권과 치권이 분리되고, 치권을 오권에서 권력을 분립하여 담당한다.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는 국민당, 자유당, 민주당, 진보당,  농민당, 녹색당 이 6개의 정당이 주요 정당으로서 기능하는데, 이들은 자유당, 민주당, 농민당,녹색당을 제외하고는, 당의 역사 자체가 대만의 정당의 지역조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민당은 대만의 중국국민당의 잉청저우 직할시/신잉청현 지역당들을 재편하여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진보당의 경우에도 대만의 민주진보당의 잉청저우 직할시/신잉청현 지역당들을 재편하여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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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청저우 제도 연방에는 국민당, 자유당, 민주당, 진보당,  농민당, 녹색당 이 6개의 정당이 주요 정당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이들 원내 6당 체제 하에서 정책연대/연정 등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들은 자유당, 민주당, 농민당, 녹색당을 제외하고는, 당의 역사 자체가 대만의 정당의 잉청저우 일대의 지역조직이나 미국의 정당의 이스트코스트 일대의 지역조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중국국민당의 잉청저우 직할시/신잉청현 지역당들을 재편하여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진보당의 경우에도 중화민국의 민주진보당의 잉청저우 직할시/신잉청현 지역당들을 재편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에 국민당에서 당내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신자유주의/자유방임주의) 계열과 공화주의-보수주의-삼민주의 계열 간의 내분이 일어났고, 결국 1993년, 보수당 내의 자유주의 계열이 뛰쳐나와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1990년대중반에는 잉청저우와 이스트코스트의 연방 통합 문제를 둘러싸고 진보당 내 혁신진보파(진보당 좌파)와 중도파(진보당 우파)가갈라져 싸우다 1997년에 진보당 내 중도파가 뛰쳐나와 민주당을 세웠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에 국민당에서 당내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신자유주의/자유방임주의) 계열과 공화주의-보수주의-삼민주의 계열 간의 내분이 일어났고, 결국 1993년, 보수당 내의 자유주의 계열이 뛰쳐나와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1990년대중반에는 잉청저우와 이스트코스트의 연방 통합 문제를 둘러싸고 진보당 내 혁신진보파(진보당 좌파)와 중도파(진보당 우파)가갈라져 싸우다 1997년에 진보당 내 중도파가 뛰쳐나와 민주당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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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1998년부터 경제성장-안보외교-내부의제-지역의제-그 외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대만의 범람/범록의 투쟁과 미국의 양당제 투쟁을 양 진영의 투쟁으로 바꾸어 적절히 섞어놓은 듯 한 정치 패턴인 국민자유 선거정책연합/진보민주 선거정책연합의 양대 연합 정치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술된 대로, 2018년 선거 이후로 그것이 깨져 국민당, 자유중도연대(자유당-민주당), 진보환경연대(진보당-농민당-녹색당)의 3파전으로 흐르게 된다.
 
그 이후 1998년부터 경제성장-안보외교-내부의제-지역의제-그 외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대만의 범람/범록의 투쟁과 미국의 양당제 투쟁을 양 진영의 투쟁으로 바꾸어 적절히 섞어놓은 듯 한 정치 패턴인 국민자유 선거정책연합/진보민주 선거정책연합의 양대 연합 정치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술된 대로, 2018년 선거 이후로 그것이 깨져 국민당, 자유중도연대(자유당-민주당), 진보환경연대(진보당-농민당-녹색당)의 3파전으로 흐르게 된다.
 
한편, 선거에서는 1998년, 2008년에는 국민자유, 2003년, 2013년에는 진보민주가 승리하는 등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었으나, 2018년에는 사상 최초로 민주당과 자유당이 손잡고 자유중도연대를 이끌어내고, 국민당이 독자출마를, 진보당-농민당-녹색당이 진보환경연대를 이끌어내어 자유중도연대가 압승하는 등의 전례 없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선거에서는 1998년, 2008년에는 국민자유, 2003년, 2013년에는 진보민주가 승리하는 등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었으나, 2018년에는 사상 최초로 민주당과 자유당이 손잡고 자유중도연대를 이끌어내고, 국민당이 독자출마를, 진보당-농민당-녹색당이 진보환경연대를 이끌어내어 자유중도연대가 압승하는 등의 전례 없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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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오권의 위에 있는 국민대회의 경우 의석은 80석이다.
  
 
연방의회 의석은 단원제 하의 320석이며, 160석은 각 구(잉청저우 15개구+이스트코스트 6개 구는 인구에 따라 1개 구당 2~3선거구(잉청저우 36선거구, 이스트코스트 14선거구, 기준선 340,046명), 신잉청현, 동도현은 시의 경우에는 기준선 이상이면 독립선거구로 두되, 그 외의 기준선 이하 인구의 시향진 몇개를 1선거구화)에서 지역구로 선출한다. 물론 중선거구제를 채택해서 1선거구당 2명의 의원을 선출하기에, 지역구는 80개이다. 나머지 160석은 비례대표로 선출한다. 과반기준의석은 160석 혹은 161석이다.
 
연방의회 의석은 단원제 하의 320석이며, 160석은 각 구(잉청저우 15개구+이스트코스트 6개 구는 인구에 따라 1개 구당 2~3선거구(잉청저우 36선거구, 이스트코스트 14선거구, 기준선 340,046명), 신잉청현, 동도현은 시의 경우에는 기준선 이상이면 독립선거구로 두되, 그 외의 기준선 이하 인구의 시향진 몇개를 1선거구화)에서 지역구로 선출한다. 물론 중선거구제를 채택해서 1선거구당 2명의 의원을 선출하기에, 지역구는 80개이다. 나머지 160석은 비례대표로 선출한다. 과반기준의석은 160석 혹은 161석이다.
  
 
지방자치의 경우에는 보통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래도 중앙집권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듯 하나, 미국풍, 일본풍 혹은 대만식의 지방자치가 이뤄져 오다가 연방화 된 것이 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지방자치의 경우에는 보통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래도 중앙집권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듯 하나, 미국풍, 일본풍 혹은 대만식의 지방자치가 이뤄져 오다가 연방화 된 것이 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연방입법원 의석은 자유중도연대 170석(자유당 90석, 민주당 80석), 국민당 88석, 진보환경연대 62석(진보당 30석, 농민당 20석, 녹색당 12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제==
 
==경제==

2020년 1월 16일 (목) 08:55 판

틀:공사중 민주의 여명 세계관 틀.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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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瀛城州 諸島 聯邦
일본어: 瀛城州 諸島 連邦
영어: Yingchengzhou Islands Federation
언어 오류(ph): Pederasyon ng Mga Isla Yingchengzhou
잉청저우 제도 연방
삼색백일기.png
국기
국가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국가|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국가]]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행정구역도.png
행정구역도
수도 잉청저우
최대 도시 잉청저우
정치
공용어 잉청저우표준화어(대만 궈위(대만식 표준중국어)의 잉청저우식 변형), 한국어, 일본어, 영어, 잉청저우어(잉청저우 원주민어)
국민어 한국어?
지역어 광둥어(廣東語), 오어(吳語), 대만민난어(臺灣閩南語), 하카어(客家語), 잉청저우 산둥관화(瀛城州 山東官話), 필리핀어, 류큐어(琉球語)
총통 안징후이
부총통 미자와 요시헤이
역사
정부수립  
 • 단수이 협정 1956년 7월 20일
 • 이스트코스트 독립 1956년 5월 9일
 • 잉청저우 제도 대통합 1956년 8월 9일
지리
면적 21,055km2
시간대 YWST(동도현 제외), YEST(동도현) (UTC+8(YWST), +9(YEST))
인구
2020년 어림 25,538,419명
경제
 • 일인당 67,737$
HDI 0.928 2020년 조사)
통화 잉청저우 제도 연방 파운드 ()
기타
ISO 3166-1 YC, YCJ
도메인 .YC, .瀛城州, .瀛城州諸島聯邦
국제 전화 +8568

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동아시아 남동방의 잉청저우 제도에 위치한 국가이다. 1998년 잉청저우 민주국이스트코스트 자유국의 합병 하에 생겨났다.

지리

잉청저우 직할시•신잉청현 지역

본래의 잉청저우 섬이었던 신잉청현 신잉청군과 옛 피란 섬에 해당하는 본시내 지역(시내구 지역 중 둥, 난, 중, 베이, 시, 기타요시, 주오, 중정, 주산, 아키나가 10개구)구를 제한 매립지와 간척지가 잉청저우 섬의 30%, 옛 피란 섬으로 하여금 만들어진 북잉청 평야가 약 30% 하여 잉청저우 섬은 약 60%가 평야(매립지/간척지+옛 피란 섬을 합친 잉청저우 대평원)로서, 현재의 신잉청현 내륙에만 산이 좀 있는 하나의 평야 위주의 섬으로 존재한다. 그 있다는 산은 남잉청산지가 있는데, 400만년 전에 판과 판이 충돌하여 화산활동으로 생성되었다. 그러나 심해였던 점으로 인해 2천 미터 가까이까지만 올라가고, 이마저도 침식 작용과 여러 차례의 화산 붕괴(240만년 전, 185만년 전, 117만년 전, 72만년 전, 44만년 전, 13만년 전, 6만년 전, 기원전 4000년, 기원후 39년, 782년, 1322년, 1983년)로 인해 분화구가 사라지고 일반적인 산같이 남아 현재의 1200m~1600m의 산지가 되었다. 북태평양과 남중국해의 경계에 있고, 위치 상 아열대기후인 점까지 작용하여 비가 많이 내리며,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자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심지어 동쪽 저우제, 아키나가 동부 2개 구 전체와 신잉청현 잉청저우 섬 남부 부분, 기타요시구 동부, 장이구 남동부는 잉청저우 섬 윗부분에서 바로 앞바다가 바로 난카이 트로프서 이어지는 유라시아판과 필리핀판의 경계로 인해 형성되는 해구이고, 잉청허와 남방 제도들을 통해 난 대단층(잉청저우 거대단층)이 형성되어 지진 다발 지역으로서 유명하다. 이는 잉청저우 지역의 내진설계 고강도화 의무-강제화에 영향을 주었다. 신잉청현 도서지역의 경우에는 전부 판 경계 근처에다 대단층에 위치한 탓에 대부분 10만년 전까지 화산분출로 형성되었다.


그 외에도 잉청저우 제도 서남부의 길게 늘여져 놓인 5개 섬들(바시제도(巴士諸島)와 난링다오(藍陵島))의 경우에도 잉청저우 섬에서 시작되는 열점 선을 따라 300만년 전을 전후하여 바다에서 솟아 나왔으며, 대부분 최고 해발고도가 1000m를 넘지 못한다.

한편, 잉청저우와 신잉청현의 유일한 강이자 잉청저우 섬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잉청허(瀛城河)는 약 190Km의 길이로 신잉청현을 굽이치다 잉청저우 시내와 그 근교 위성도시들 지역의 직선화된 수로로 흘러들어 둥구(東區)와 기타요시구(北吉區)의 육상 경계의 끝인 하구에서 동중국해(잉청북해)로 흐른다. 잉청허는 본래 짧았으나, 간척사업의 결과로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게 흐르게 되었고, 잉청저우 시내 구간과 그 근교 위성도시들 구간은 1915년, 1949년, 1986년 3차례에 걸쳐 치수사업에 의해 직선화된 결과로, 현재와 같이 흐르게 되었다. 그 결과로 잉청저우의 고질병인 물난리(홍수)가 사라졌으나, 잉청허의 길이가 20~30Km 가량 단축되었으며, 환경파괴가 수반되었다. 그 외 큰 강은 난링다오(남릉도)의 산 카를로 강과 펀완허(分灣河)가 있다.


이스트코스트 지역

잉청저우 섬, 타이완 섬, 일본 열도가 생겨날 적에 생겨난 화산대지이다. 하지만 섬의 본류는 대략 고생대 즈음에 생겨서 지금까지 유지될 정도로 고생대엔 좀 컸다가 중생대, 신생대까지 계속된 대륙 이동과 판 이동으로 인해 지금의 이스트코스트 섬이 평평한 지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1억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의 미크로네시아 제도 근방에 위치했었을 정도(!) 이다. 그리고, 이스트코스트는 위도도 낮게 있지만, 북태평양 한가운데에 위치해서 열대우림기후이며, 스콜이 자주 세차게 내리는 특성 상, 상시 방재가 이루어 질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린다. 여기도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자리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강으로는 뉴온타리오 강과 레스트 강만이 존재할 뿐이다.


동도현 지역

옛날 열점의 한가운데에 존재하여, 판이 대략 지금의 경계로 굳은 5천만년 전부터 분화하여 약 100만년 전에서야 분화를 멈추고 지금의 모습이 된 상태며, 그로 인해 심해에서 바로 솟아올라 평균 1500m의 최고 고도를 유지하고 있는 안습한 지역이다(...) 기후는 당연히 열대 기후 그 자체이며, 또 여기도 태풍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 아니 그냥 잉청저우 제도 연방 전 국토가 그냥 다 태풍의 길목이다. 매년 태풍한테 걍 털린다 ㅅㅂ(...) 미야코지마보다 동쪽이라 그런지(...) 동도현만 유일하게 UTC+9 시간대를 채용한다(...) 강은 파날리칸 섬에 있는 와탄나가와 강, 해밀턴 섬의 카마키가와 강, 스화가와 강, 이스트랜드 강이 있다.

정치

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연방제 오권분립 민주공화국으로서, 중화민국의 요소(오권분립)와 독일식 연방제를 절충하여 정치체제를 만들었으며, 대만, 한국, 일본, 필리핀, 심지어는 독일의 헌법을 절충하여 헌법을 만들어낼 정도로 정치적 영향을 골고루 받아 혼합이 상당히 되어있다. 중앙 오권과 지방(연방구성체) 오권이 모두 존재하나, 독일식 연방제 특성 상, 지방(연방구성체) 오권의 힘이 중앙 오권보다는 약하다. 그래도 연방제인 만큼, 각 연방구성체(직할시/현)는 독자적 헌법과 법률을 만들 수 있으며,지방(연방구성체) 오권 위에는 중앙(연방정부) 오권이, 중앙(연방정부) 오권 위에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 국민대회가 놓여 있어, 정권과 치권이 분리되고, 치권을 오권에서 권력을 분립하여 담당한다.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는 국민당, 자유당, 민주당, 진보당, 농민당, 녹색당 이 6개의 정당이 주요 정당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이들 원내 6당 체제 하에서 정책연대/연정 등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들은 자유당, 민주당, 농민당, 녹색당을 제외하고는, 당의 역사 자체가 대만의 정당의 잉청저우 일대의 지역조직이나 미국의 정당의 이스트코스트 일대의 지역조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중국국민당의 잉청저우 직할시/신잉청현 지역당들을 재편하여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진보당의 경우에도 중화민국의 민주진보당의 잉청저우 직할시/신잉청현 지역당들을 재편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에 국민당에서 당내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신자유주의/자유방임주의) 계열과 공화주의-보수주의-삼민주의 계열 간의 내분이 일어났고, 결국 1993년, 보수당 내의 자유주의 계열이 뛰쳐나와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1990년대중반에는 잉청저우와 이스트코스트의 연방 통합 문제를 둘러싸고 진보당 내 혁신진보파(진보당 좌파)와 중도파(진보당 우파)가갈라져 싸우다 1997년에 진보당 내 중도파가 뛰쳐나와 민주당을 세웠다.

농민당과 녹색당의 경우는 정국을 주도하는 6개 당 치고는 창당배경이 특이한데, 일단 농민당은 1995년 잉청저우-미국 FTA 반대운동을 이끌면서 창당되었다. 당시 한국의 시장개방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던 시장개방 및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하여 잉청저우의 농민들은 엄청난 적자에 허덕이는 손해를 수년 째 보고 있었음에도, 유리한 품목이 2차/3차 산업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였음에도, 당시 잉청저우 정부에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밀어붙이고 있었음이 알려지자, 농민들은 트랙터를 몰고 잉청저우 시내의 중정구의 중정광장으로 모두 집결하고서는 248일동안 시위를 함을 통해서 역사적인 농민운동(벼이삭 운동)을 진행, 이후 벼이삭 운동을 계기로 농민대의정당 창당운동을 통해 농민당을 창당하여 농민이 농민 스스로를 대표하는 정당을 만들었다. 녹색당의 경우, 1990년대 온갖 환경파괴 참사(1993년 슐수이광 연안 비닐봉지 유류사건, 1991년 잉청허 카드뮴 오염사건, 1995년 잉청허 석분(石粉)오염사건, 1994년 잉청저우 스모그 사태, 1990년 신잉청현 대규모 산사태, 1992년 장이구-주산구 집단 납중독 사건 등)들이 터져나올 때에 일부 생태주의자들이 시민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코자 1995년 창당되었다.

1998년에 잉청저우와 이스트코스트가 연방을 형성하며 합병했을 때, 이스트코스트 공화당은 국민당으로, 이스트코스트 민주당은 성향에 따라 민주당으로, 이스트코스트 사회민주대중당은 진보당으로 들어갔고, 이스트코스트 자유지상당은 자유당으로, 이스트코스트 녹색당은 녹색당으로 합당했다.

그 이후 1998년부터 경제성장-안보외교-내부의제-지역의제-그 외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대만의 범람/범록의 투쟁과 미국의 양당제 투쟁을 양 진영의 투쟁으로 바꾸어 적절히 섞어놓은 듯 한 정치 패턴인 국민자유 선거정책연합/진보민주 선거정책연합의 양대 연합 정치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술된 대로, 2018년 선거 이후로 그것이 깨져 국민당, 자유중도연대(자유당-민주당), 진보환경연대(진보당-농민당-녹색당)의 3파전으로 흐르게 된다. 한편, 선거에서는 1998년, 2008년에는 국민자유, 2003년, 2013년에는 진보민주가 승리하는 등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었으나, 2018년에는 사상 최초로 민주당과 자유당이 손잡고 자유중도연대를 이끌어내고, 국민당이 독자출마를, 진보당-농민당-녹색당이 진보환경연대를 이끌어내어 자유중도연대가 압승하는 등의 전례 없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중앙 오권의 위에 있는 국민대회의 경우 의석은 80석이다.

연방의회 의석은 단원제 하의 320석이며, 160석은 각 구(잉청저우 15개구+이스트코스트 6개 구는 인구에 따라 1개 구당 2~3선거구(잉청저우 36선거구, 이스트코스트 14선거구, 기준선 340,046명), 신잉청현, 동도현은 시의 경우에는 기준선 이상이면 독립선거구로 두되, 그 외의 기준선 이하 인구의 시향진 몇개를 1선거구화)에서 지역구로 선출한다. 물론 중선거구제를 채택해서 1선거구당 2명의 의원을 선출하기에, 지역구는 80개이다. 나머지 160석은 비례대표로 선출한다. 과반기준의석은 160석 혹은 161석이다.

지방자치의 경우에는 보통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래도 중앙집권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듯 하나, 미국풍, 일본풍 혹은 대만식의 지방자치가 이뤄져 오다가 연방화 된 것이 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경제

잉청저우 직할시 지역

동북아의 남서방에 횡꽁[1]이 있다면, 동북아의 남동방에는 잉싱치우[2]가 있다.

시민들이 전형적인 국제도시 특성을 이용해 잉청저우 직할시가 중화권, 일본,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간의 민간 무역의 중심지가 되고, 홍콩을 보조하는 성격에서 출발했으나, 중화권,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사이의 돈을 잇는 금융 허브이자, 공업의 중심기지가 되어 수많은 돈을 벌고 있는 구조를 형성케 하고 있으며, 근래에는 연방 출범 이후로 이루어진 산업 다각화의 결과로 뜻하지 않은 호황을 맞이하여, 동아시아에서 1인당 GRDP 5만불, 6만불, 7만불을 제일 먼저 달성한 곳으로 유명해지고 있다. (울산보다도 빠르거나 비슷하다,) 외국인을 상대하거나 회담, 세미나, 컨퍼런스, 전람회, 박람회 등을 관광과 연계시키는 MICE 산업, 첨단 하이테크 제조업과 오폐수 및 공해 정화장치가 잘 되어있는 친환경적인 중화학공업및 친환경적인 경공업 등이 주력 산업이며, 최근에는 수백년의 노하우와 판 경게 코앞이라 지진과 맞서 싸워온 결과물인 탄탄하면서도 지진과 현피를 뜨면 그 어떤 유형이든, 그 어떤 지진 규모든, 그 어떤 진도든 상관없이 승리하는 잘 버티는 내진설계를 기초삼아, 토목사업도 주력 사업으로 진입하고 있다. 다만, 4차 산업혁명의 상황을 예의주시하여, 인공지능-드론 등의 첨단산업도 유치하려고 애쓰고 있다. 농림어업은 대부분 신잉청현으로 이동했으며, 슐수이광 어업항 등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잉청저우와 신잉청현 지역의 상업 특수

한편, 잉청저우와 신잉청현은 대만에서 독립해 나온 것과 일본계의 존재 때문인 지, 2.28 사건 추모제 및 위령제를 대규모 행사로 열고 있고, 심지어 시치고산이 다가오면 참배객들이 신사에 몰려든다. 이런 점 때문인 지 제사나 2.28 사건 추모제에 쓰일 용품, 참배 공물 등이 불티나게 팔리는 특수가 존재한다.

이스트코스트

이스트코스트는 미국인이 주요 민족의 지위에서 한국계와 결합해서 독립을 유지해서 그런지 미국이나 한국의 대중문화를 수입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대중문화와 관련된 산업이 특화되어 있다. 유명 음반사들의 지사가 이스트코스트의 센트럴 구 북단에 모여있는 것을 보고 그 밀집한 거리를 음반거리라고 부를 정도니 말 다한 셈. 심지어 패스트푸드 산업도 발달했다 보니, 잉청저우보단 문화산업과 패스트푸드 판매업이 발달했으며, 이런 연유로 수많은 대중문화 예술가들과 패스트푸드 애호가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이스트코스트 경제의 주 수입원으로 작용하여 잉청저우보단 낮은 1인당 GRDP(5만 3천불)를 기록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잉청저우는 생산-소비 복합도시인 데 반해서, 이스트코스트는 순도 100% 소비도시인 셈.

신잉청현

애초에 자연환경만 봐도 농림어업이 최선이다. 그러나 잉청저우 근교는 죄다 베드타운이다. 8개 현할시가 30만~40만 사이에서 베드타운을 이루고 있으며, 그 외는 죄다 향진으로 지정될 정도로, 인구가 대부분 농림어업에 종사하고, 인구가 희박하다. 잉청저우의 혐오시설이 죄다 신잉청현에 자리한 탓에, 잉청저우와의 미묘한 소지역주의가 존재할 정도로, 농림어업과 인구희박지의 대명사이다. 여기서 알수 있는 부분은 잉청저우의 혐오시설들에 근무하는 사람들, 잉청저우 근교 8개 현할시 시민을 제외하고는 죄다 농림어업에 종사한다. 어업은 대부분 필리핀계가 바탄제도의 풍습이 퍼져 이루어진 전통 농업으로만 잡아서 생산량이 떨어짐에다가 양식이 2000년대 중반에 겨우 도입되었고(...), 농업은 농기계로 상당부분 대체되었지만 아직도 소규모 자영농의 비중이 어느 정도 높은(전체 농업에서 37%) 상태에서, 전통 방식과의 공존을 꿈꾼다. 생산량은 그로 인해서 더 높일 수 있는 여력임에도 정체중이다. 임업은 산지에서 이루어지는데, 1500m를 넘지 않는 환경으로 인해서 열대목 조림 농장만 있을 정도(...)다. 게다가, 기후로 봐도 신잉청현은 전부 열대기후로 들어가는 모양새라서, 인삼, 산양산삼이나 온냉대기후의 버섯종 등은 시설을 빼고는 재배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그래서 결론은 신잉청현의 부의 87%는 잉청저우로 출퇴근하는 통근객이 쥐고 있는 도농 격차 자체가 아예 기울어진 운동장 그 자체인 대환장파티 빈익빈 부익부 그 자체라는 것이다(...)

동도현

이스트코스트에서 바다를 맞댄 두 개의 위성도시(서부 2현할시, 西部二縣轄市, 20만명대)와 해밀턴섬 4개 시(4중거점, 四重據點, 10~20만)을 제외하고는 2차 산업과 3차 산업 중에서 내수계 서비스업(사업자 서비스업과 소비자 서비스업 중 관광객을 주로 대하는 업종들을 제외한 서비스업을 합쳐 이르는 잉청저우만의 사회용어)이 빈약하며, 농림어업, 광업, 관광산업으로만 먹고 산다. 하지만 농림어업의 실태는 미국계 농민과 한국계 농민의 존재로 인해 기계농업과 대규모 경작 농업이 흔해서 현 전체 농지의 83%(!!!)나 되는 점을 제외하고는 신잉청현과 똑같은 상태(...)인 것이 흠일 정도로 GRDP를 크게 깎아먹는다. 필리핀계 농림어민과 류큐계 농림어민은 그 수준으로 영세하고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광업은 주로 몬테 섬과 해밀턴 섬에서 무연탄, 역청탄, 석유, 흑연, 구리, 망간, 철 등을 최소 채산성이 되는 수준으로 묻혀 있는 것을 캐서 잉청저우로 광석이나 원유 등의 원자재를 파는 수준이긴 하지만, 잉청저우의 산업이 독자적으로 태동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는 정도가 된다.

문화

잉청저우 직할시와 그 근교 지역

전통문화와 대중문화

류큐문화, 일본문화 그리고 타이완-푸젠-광둥으로 대표되는 중국 남방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역사로 인해 전통문화에서는 그 셋의 전통문화가 혼재되어 나타나거나 퓨전된 문화가 나타난다. 다다미방(육첩방)에 대만식 도교 제단이나 대만식 불단이 놓여있다던가, 우육면에 중국당면 대신에 라멘 생면이나 소바 면을 넣어먹는 문화처럼 말이다. 그 때문인 지, 대중문화에서는 이런 역사 속에서 J-POP과 대만 대중음악, 일본과 대만의 대중문화 등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며, 서브컬쳐가 강세를 나타낸다. 특히, 중국계가 70%를 넘는 잉청저우 특성 상, 중화권 음악시장에서 대만 다음으로 큰 시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0.2%를 차지하는 한국계와 그 외 소수의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는 한류가 영향을 끼친다. 써닉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장후이메이(阿妹)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장국영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BTS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모무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AKB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트와이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가뽕모창도 있고 심영물 즐기는 얘들도 있고 덕후분들도 있고 그냥 다 섞여있다. ㄹㅇ ㄷㄷ

언론

중화권과 일본의 신문의 진출이 1880년대부터 지금까지 빈번하게 존재하고 있다. 특히 방송은 자체 공영 지상파 방송국이 라디오는 1988년 독립 직후에 시설을 받아 개국했지만, 텔레비전은 2004년에 와서야 겨우 개국(!)하는 바람에, 자체 방송이 늦어버린 관계로 대만의 방송국들이 세운 기존 중계소들에, 1988년부터 중구난방으로 홍콩의 민간 방송국들, 일본 오키나와 지역 민간 방송국들이 세워버린 중계소를 2014년에 합동송신소를 세워 송신소와 중계소들을 통폐합해 그 방송국들의 국외 지상파 송신소 형식으로 송신하고 있으며, 합동송신소에서 공영 텔레비전 방송도 송신 중이다. 하지만, 케이블 SO의 경우에는 2009년에서야 겨우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케이블이 대만에 비해 늦게 활성화 된 것이다. [3]

그리고 잉청저우의 독자적 신문인 에이세이슈민포, 에이세이신문, 잉청저우일보, 잉청저우시보는 빈과일보가 잉청저우에 상륙한 2012년 이후로 죄다 빈과일보식 과다 멋꾸미기(...)에 물들어버렸다. 결국 신문도 타이완화 되어버렸다. 모든 일의 원흉은 빈과일보다. 모든 일의 원흉은 빈과일보다. 그런데 그 빈과일보도 정작 홍콩에서 넘어온거다. (검열삭제) 라고는 하지만 일본 신문들이 넘어온거는 이상하게 타이완화 안되었다. 그러니 그 신문들을 보라. 어? 그런데 산케이는 극우라서 거르고, 요미우리도... 보되 걸러서 봐야 하니... 우리는 아사히, 마이니치, 주니치만 보란 소리???? 시국을 생각하면 뭣같은데?

다문화에 기초한 도시문화

본래 잉청저우에는 다수의 중국인, 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그리고 잉청저우 원주민이 있어서 기본적으로 다문화사회였으나, 2차대전 종전 이후에 중화민국의 국민정부는 중화문화를 제한 나머지를 탄압하고 강제동화를 시도했으나, 독립으로 무위로 돌아갔다.1990년대 잉청저우 원주민 문화의 재부흥이 일어나고, 국제도시화에 힘입어 일본인과 한국인의 문화를 재부흥 시키었고, 일본인 중 류큐인들은 국민정부시기 숨겨져 보존하던 류큐문화도 부흥하게 되었고, 다문화에 기초하여 도시 문화를 일구었는데, 수많은 전통문화와 대중문화가 3천 4백 제곱킬로미터 남짓한 도시국가에 펼쳐지고 있다. 이를 이용하여 잉청저우 다문화축제를 10월 중순 즈음에 연다. 이 축제는 가끔씩 대한민국의 이태원지구촌축제와 연계되기도 한다.(물론 가상의 설정이다. 실제로 알아들으면 모 위키 대문 안내에 나온 것처럼 심히 골룸하다.(...))

이스트코스트 지역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무인도였던 이 섬을 미국인들이 식민지로서 개척하고, 한국인이 미국인들에 고용되어 그 다음에 들어온 탓에다가, 상기한 것의 결과인 서양열강의 내습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서양풍 문화가 남았다. 대개 주거문화가 많이 남아있어서, 유럽풍의 주택이나 미국풍의 목조/석조 주택이 이스트코스트의 센트럴 구와 하버 구에 걸친 구시가지에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현재는 한국과 미국의 대중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이유로 한류가 기승을 부리며, 10대~20대 여성 중엔 사생팬이 좀 있다(...) 그런데 이거 빼고 할 말이 없다. 정말로 빈약한 문-화 ㅠㅠ... 여기는 주요 아이돌 사생팬, 양덕들 아니면 청년이나 청소년은 살 수가 읎다! 취소선에 나온 내용이 사실인 지 잉청저우 사람들은 양덕에 대해서는 터치를 안하나, 아이돌 사생팬 계층에 한해 타 부류에 대한 존중도 없고 돈과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하여 조롱거리로 삼다가 빈번하게 폭행사건이나 언어폭력 사건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며[4], 학창시절의 경우도 양덕 등으로 대표되는 서브컬쳐를 향유하는 경우는 어느정도 세력이 있어서 존재가 가능하지만, 각 아이돌 사생팬 간에 상호 배척성이 높은 편이다. 심지어 주요 아이돌 사생팬들이 청소년/청년 계층을 쥐고 누르고 있다. 그렇다고 친구 될 사람은 친구 다 되지만. (...) 아무튼, 한국과 미국에서 따올 건 다 따왔다 보면 된다.

신잉청현

신잉청현은 잉청저우섬 남단과 도서지역을 나눠서 보면, 잉청저우 섬 남단은 잉청저우 섬의 본래 지역이었으며, 잉청저우 원주민들의 본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만에서 건너온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정착해 원주민들이 기원한 곳이기도 하다. 그 때문으로 원주민들의 전통양식이 국민당 정권의 탄압에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을 정도로 산골 아니면 시골 그 자체여서, 전통문화는 원주민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다. 잉청저우 직할시의 잉청저우 원주민과는 도시문화를 잘 받아들인 점을 제외하면 다르지는 않다. 잉청저우어는 잉청저우에 있던 왕조의 멸망 이후의 기록과, 구어로만 이어지다가, 일제 식민통치나 미국 식민통치, 대만 귀속 혹은 독립기를 거치면서 문자표기도 마련되었다.

한족 이주민도 일부 있지만, 그들은 잉청저우 직할시의 한족들과 똑같은 양상을 보인다. 도서지역을 보면,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배 하고 이 도서지역을 개척할 적에 필리핀인을 보내 개척시켰으므로, 필리핀의 문화가 강하게 배어있다. 그래서 그런 지,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 선진적인 생활수준에 걸맞지 않게 지프니 등이 보이기도 한다. 원래 생활수준이라면 그런 운송수단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도 되겠지만, 이스트코스트 쪽에서 속했던 도서지역으로서 전통문화로서 보존의 대상이 되었기에, 대체되지 않고 그대로 운행중이라고 한다. 물론 시대에 맞게 대기오염을 저감할 수 있도록 수없이 개조되고 있다.

동도현

류큐인들이 표류하면서 살았던 마을은 1930년대를 전후로 일부 류큐인들의 집단 이주 하에 재건되어 소수 류큐인이 남아있는 동도현 특성을 보면, 전통문화에는 류큐의 문화, 미국의 문화 등이 이식된 모양새이며, 그 때문인 지, 동도현의 전통 가옥은 대개 류큐식 가옥이나 미국식 석조-목조 가옥이 대다수이다. 그 외는 이스트코스트와 양상이 비슷하다.

국방

잉청저우 제도 연방 연방군은 1957년 창설된 이스트코스트 시군(市軍)과 1988년 독립과 동시에 중화민국 국군에서의 잉청저우 방위지휘부(육군), 잉청저우 기지지휘부(해군)을 넘겨받고 공군을 새로 창설하는 식으로 만들었던 잉청저우 시군(市軍)을 모태로 하여 1998년 잉청저우-이스트코스트 연방통합 직후 두 모태를 발전적으로 통합하여 만들었다.

창군 초기에는 중국이 패권을 부리기 전에다가 대만과 중국 간의 전시상태 종료 상황이었으나, 2000년대부터 중국의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일어난 군비증강과 그 이후의 패권 창출 개시,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 사태와 맞물려 군의 대대적인 보강이 이루어졌다. 병역자원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징집병<자원병의 통계라는 웃지못할 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경제위기 속에서 대기업이 고용을 줄이고 기술혁신을 이루고, 공기업도 한계가 있던 만큼,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 공권력 내 일자리나 공무원을 지향하거나 창업을 지향하는 등의 사태로 인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대만과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똥군기 문화와 도를 넘는 부당대우와 인권침해로 인해서 엄청난 국민의 반발이 해당 문제가 1990년대 수면 위로 오른 이후부터 오랜 시간동안 일어난 끝에, 전시상태 종료도 수십년 지났고, 군의 최신화를 위해서 자원병으로만 편성해서 사기를 높여야 한단 측면까지 불거져, 결국 2015년부터 장비의 최신화를 유지하되, 모병제로 전환하고, 2개월의 기초군사교육과 추가 2개월의 군사특기교육만 받도록 전환하고, 미국의 징병대상 등록대장제도를 벤치마킹하여 전시병역대상 등록제도를 실시, 도입하였다.

창군 당시 총병력은 상비 약 8만, 예비 약 33만이었으나, 현재는 상비 약 14만, 예비 약 62만까지 늘어놨다.

역사

잉청저우 섬

16세기 이전의 잉청저우 직할시의 역사에는 구석기시대에 대만섬보다 늦은 시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나, 기원전 2500년 즈음에 현재의 잉청저우 원주민의 조상이 되는 원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넘어왔다. 그들은 2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잉청저우 지역의 고립된 환경에 놓여있었고, 그로 인해서 대만 원주민과 다른 민족인 잉청저우 원주민으로 분화하였다. 한편으로, 《삼국지(三國志)》에서 오(吳)나라가 종종 이주(夷洲)(현재의 중화민국 대만성, 잉청저우 섬)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며, 《수서(隋書)》에는 "유구국(현재의 오키나와 현 또는 현재의 중화민국 대만성 또는 현재의 잉청저우 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젠안(建安)군(현재의 푸젠성(福建省))의 동쪽이며, 배로 5일을 가야 이른다." 라 하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590년에는,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인들이 타이완 섬에 내렸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 때, 포르투갈 선원들이 초록으로 덮인 타이완 섬을 보고 "포르투갈어: Ilha Formosa"("아름다운 섬"이란 뜻)라고 서양식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타이완 성을 "포르모사"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 때 포르투갈인 등의 여러 서양인들이 타이완 근처의 잉청저우의 두 섬까지 도달하여 탐험하면서, 아니면 중국인들에게 소문을 들으면서 현재의 지명인 "영성주", 즉 잉청저우가 알려졌다. 물론 이때부터 영성주를 瀛城州와 贏城州로 혼용해서 쓸 만큼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서구에서는 잉청을 각각의(두개의 각) 표기인 赢城 혹은 瀛城을 음차한 "뷰티풀 캐슬"이나, "씨 캐슬" 이라고도 가끔씩 불리고는 한다. 하지만 현재 영성주, 그러니까 잉청저우의 표기는 瀛城州이다.

한편 본래의 잉청저우 섬이었던 산지지역에서는 타이완의 다두왕국과 같은 연합왕국인 세판 왕국이 성립했다가 이것이 중앙집권화를 거치면서 중세 왕조같이 되었다. 세판 왕국은 언어 통합 작업을 벌여 언어를 통합하고, 각 부족간의 통혼을 장려해 잉청저우 원주민들을 민족화된 여러 부족에서 한 민족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 사이 17세기 명나라 대(明代) 말부터 유럽 상인들이 앞다투어 타이완으로 찾아 들어오면서 한족(漢族)들의 타이완 이주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잉청저우를 알게 된 일부 한족들이 넘어갈 대로 잉청저우로 넘어가면서 현재의 시내에 해당하는 잉청저우 2개 섬 중 비교적 평평한 북쪽 섬, 피란 섬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본성인이라는 대만과 잉청저우의 중국인의 구분 분류가 탄생하게 되었다. 원래 잉청저우 섬은 현재의 신잉청현 신잉청군에 해당하는 땅만 물 위로 솟아있고, 지금의 시내에는, 역사설정에 계속 "북쪽의 섬"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하나의 평평한 큰 섬(피란 섬)이 있었는데 그 두 섬 사이의 바다를 강화도처럼 수백년 걸쳐 간척해 나가면서 1893년에 와서야 완전히 메꿈과 동시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다. 첫 간척은 1584년인데, 잉청저우 섬에 있었던 당시 세판 왕국의 백성들이었던 잉청저우 원주민들이 잉청저우 섬의 산지의 비율이 너무 높음으로 인해서 농지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간척작업에는 잉청허에 대한 준설 및 치수 공사에서 나오는 흙을 썼다고 한다. 그 평평한 섬에서는 1618년에서야 당시 이주해 정착한 한족에 의해 간척사업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1624년, 펑후 제도를 점거하던 네덜란드(和蘭) 상인과 명(明)나라 군대는 네덜란드이 동인도회사가 펑후 제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타이완 섬의 서남부(현재의 중화민국의 타이난 시 일대)에 상업지구를 건립하는 데에 합의하였고, 네덜란드는 2차례 탐험을 통하여 잉청저우 섬 남단에 추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1626년~1642년에는 에스파냐인들이 타이완 섬에 들어와 타이완 섬 북부의 지룽(鷄龍, 훗날 한자명 基隆)과 서랴오섬(社寮島, 사료도, 현재의 허핑(和平) 섬 일대)를 차지하고, 산살바도르 성을 세웠다. 에스파냐는 이후에 점령지를 하쯔난(蛤仔難, 합자난. 현재의 중화민국의 이란(宜蘭) 현), 후웨이(현재의 중화민국의 신베이 시의 단수이 구) 까지 넓혔고 이 지역에 산토도밍고 성을 세웠으며, 이때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비슷한 수법을 썼지만 이제 막 한족들이 이주하는 북쪽의 섬에 식민지를 건립하였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에 진출한 네덜란드 세력과 에스파냐 세력 사이의 경쟁과 알력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642년, 네덜란드인들은 에스파냐의 타이완과 잉청저우 내의 점령지를 공격하여 빼앗고 에스파냐인들을 타이완 밖으로 몰아냈고, 이때 당시 네덜란드가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를 점령해 식민지배한 목적은 중국, 한국, 일본과 동남아 등지에서 무역우세를 점하고,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에 있는 식민지를 거점으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동아시아 지역 전역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1624년부터 1662년까지 네덜란드의 타이완 섬 및 잉청저우 지역 일부 통치는 정성공(鄭成功)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 1661년에 정성공은 타이완 섬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하였고, 1662.2.1에 정성공은 네덜란드 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타이완 섬에서의 철수와 타이완 섬의 모든 권리 이양, 그 뿐만 아니라 잉청저우 지역의 지배권까지 약속받은 정성공은 타이완 섬 역사상 최초로 한족 정권을 수립하였다. 잉청저우에는 정씨왕국령과 세판 왕국이 공존하였다.

그 뒤인 1662.2.1 이후로 정성공은 타이완을 청나라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아 통치할 목적으로 명경(明京)을 세워 동도(중국어 간체자로 东都, 중국어 정체자로 東都, '동쪽의 수도')라 칭하고, 펑후 제도를 포함한 타이완의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자기 휘하의 군인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온 푸젠 성 주민들을 섬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중국 본토를 수복하고 필리핀에서 에스파냐인을 몰아내고, 잉청저우에서 세판 왕국을 정복하여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662.6.23에 정성공이 병으로 급사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 정경이 그 뒤를 이었으며, 1664년에 정경은 동도를 동녕이라고 개명하여 동녕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였고, 정성공의 반청(反清) 유지를 받들어 대륙에서 일어나는 복명운동에 가담하였다. 특히 삼번의 난(三藩之亂)에 적극 동조하여 한때 푸젠 성의 일부를 공격하여 장악하고서는 세판 왕국까지 멸망시켜 점령하는 데에 성공(1675.3.29)했으나, 결국 1683년에 정경이 죽으면서 정씨 정권이 정성공의 손자에게 넘어가면서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청 정부는 뇌물을 이용해 이러한 내부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정성공으로부터 시작한 정씨 일가의 3대(代)에 이은 타이완 통치는 21년 만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21년동안 이어진 정씨왕국의 통치시기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정씨 정권과 상업협정을 맺으려 했는데, 당시 영국인들은 동녕왕국을 타이완 정씨왕국(台灣鄭氏王國)또는 명경왕국(明京王國)이라 칭하였다.

그 뒤 청나라 푸젠성의 일부로 존속하다가 여러번의 전쟁서 진 청나라에서 1683년(1732년)부터 푸젠성 관할이었던 잉청저우 지역과 타이완 섬과 그 부속도서를 지키려고, 1887년에 타이완 성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1895년, 동학농민운동의 결과로 벌어진 청일전쟁의 결과인 시모노세키(下關)조약으로 인해 타이완 성과 잉청저우 일대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타이완과는 비슷한 문화권이지만 다른 것임을 알고 있던 일본 식민당국은 잉청저우는 따로 떼네어 잉청저우 총독부(1932~1945까지는 잉청저우청)을 세웠으며,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잉청저우를 군수기지로 만들어 탈탈 털어서 전쟁을 진행하였다. 말 그대로 수탈이었다.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 등을 경험한 잉청저우는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중화민국이 잉청저우를 영토로 수복 할 것을 확약받는 등, 연합국 간의 협의에 따라 1945.10.25일에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중화민국이 대만을 접수한 직후, 그 다음날인 1945 년10월 26일에서야 잉청저우 총독부의 항복을 받고 중화민국이 잉청저우를 접수한다. 그 후 국부천대 및 국민당의 국공내전 패배 과정에서 광둥, 산둥, 저장-장쑤-상하이 출신의 잉청저우 지역 내의 외성인이 300만의 민간인과 곳곳에서 탈출에 성공한 패잔병 100만명이 잉청저우 일대로 몰려든다. 1988년에 독립하기 전에는 타이완 성 잉청저우 현이었다가 웨이팡 현과 시낭 현이 1963년에 잉청저우 현 인구 과다로 분할된다. 그런 잉청저우현은 이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잉청저우 시의 인구가 1967년 직할시 승격기준선인 120만을 넘고, 잉청저우 3개 현의 인구는 1966년 1000만을 넘어선다. 잉청저우 시가 직할시로 승격한 것은 가오슝의 직할시 승격과 동일한 1979년이었으며, 1979년 당시 잉청저우 시의 인구는 432만 명이었다.

하지만, 잉청저우는 과포화상태에 치달았고, 잉청저우의 광역권은 1300만의 인구를 가졌을 정도로 어마어마 하였고, 결국 1980년 3월에 잉청저우현 전역이, 1987년 9월에는 웨이팡 현의 허슝리(和雄里) 시, 우이칭(唔依清) 시, 웨이팡 시, 스거우 진, 허량(河浪) 진, 시커우(司寇)진과 시낭 현 시낭 시, 완잉(宛英) 시, 장이 시, 저우제 진, 원잉(溫迎)진, 취중(秋中) 진이 잉청저우 직할시로 편입되었고, 웨이팡 현과 시낭 현 각 2개 현의 잔존부를 합쳐 신잉청현을 만들어냈다.

본래 잉청저우는 대만과 역사적 궤적을 같이 했던 하나의 도시였으나, 식민지배를 다른 총독부로 받았었고, 미세한 역사적 차이도 근대로 오면서 상당해졌으나, 1970년대 이후로 이스트코스트의 성장과 발흥에 의해서 이미 1950년대에 독립된 이스트코스트와 하나의 도시권으로 기능하고 있었기에, 이를 알고 있던 장징궈 당시 중화민국 총통은 자신의 정책기조에 따라 더 이상 독립을 막지 못했고, 1987년 8월의 잉청저우 원탁회의를 통해 독립을 확정지은 뒤에, 1988.1.3에 故 장징궈 前 중화민국 총통(President)의 1.3선언에 의해 독립하였다.(잉청저우는 대만과 동시에 1987년 10월에 계엄령 해제.)

힘겹게 얻어낸 독립과 동시에 어렵게 출발한 정부였지만 이스트코스트와의 유기적 권역이 도시권을 넘어 국가 간의 통합을 조율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이스트코스트와의 연방화는 불가피했으며, 이에 봉합 차원에서, 1998년에 이스트코스트와 잉청저우를 대등합병한 연방국가인 잉청저우 제도 연방을 만들어냈다. 물론, 기한은 30년으로 하여 2028년에 일반적인 민주공화국으로 체제를 전환하게 된다. 그리고 연방이 형성되는 1998년을 전후하여 홍콩 반환 직후로 홍콩인도 60만 정도가 홍콩 반환을 전후로 하여 피난을 왔다.

그 뒤엔 잉청저우 직할시가 2003년 1천 5백만을 돌파하였으며,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인구가 1천 8백만 선에서 소폭 느는 등 정체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현재는 그 작은 1만 제곱킬로미터의 연방국가의 수부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다. 인구가 몰려서인지, 주택문제를 겨우 해결했으나, 이에 따른 교통문제는 지하철을 10호선까지 개통했음에도 사설철도, 광역전철까지 혼잡도 350%대에서 폭주하고, 도시 곳곳이 출퇴근 시엔 빗자루질 버스 배차간격에 버스마다의 가축수송으로 인해 정체투성이일 정도로 심각하다. 신잉청현에 속하는 잉청저우섬 남단의 경우 잉청저우 직할시 근교에 위치한 북단 8개 현할시의 사회적 인구 증가의 지속이 있으나, 그 외는 이촌향도 등이 겹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으나, 위성도시들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2010년대엔 신잉청현의 인구 추이가 증가세로 돌아섰으며, 2018년에는 약 260만까지 회복하였다.

이스트코스트 섬 지역

본래 남방의 동남아/북태평양의 오스트로네시아인이 기원후 1세기에 잠깐 거쳐갔다 무인도로 남았던 이스트코스트 지역에 15세기부터 명,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 등이 경쟁하기 시작하였으나, 결국 모두 경쟁에서 이득을 얻지 못하고 명이 멸망함으로 인해 모두 통째로 손을 놓고 있었던 곳을, 미국이 19세기 중반에 탐사를 통해 정보를 얻으면서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개척은 신잉청현의 도서지역을 1898년의 미서전쟁에서의 미국의 승전으로 인해 필리핀과 함께 개척함으로 인해서 시작되었다.

처음의 탐사 및 수십년의 시험개척 시에는 미국인만 들어갔지만, 인력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화교의 시초인 쿨리를 부르려고 고려했으나, 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하였다. 결국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하려는 수많은 한국인들은 북으로는 간도, 남으로는 이스트코스트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국외 이주를 결단하고 내려오게 되면서 20만이나 되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스트코스트에 정착하였다. 이 대규모 이주 전에는 이스트코스트의 인구가 30만밖에 안되었다.

이스트코스트의 한인들은 생계를 악착같이 이어나가며 개책해 일궈나가고, 결국 정착에 성공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들어들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 이스트코스트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만세행진이 대규모로 일어났으며, 이는 이스트코스트 한인들에게 한인단체 및 독립운동 기구의 필요성을 높였다. 이로서 1919년 6월에 이스트코스트 한인회의가 탄생하였으며, 이는 통합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동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되었다. 다만, 이스트코스트의 한인들은 조국이 광복을 맞는 1945년까지 독립운동과 생계 유지에 매진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당시 일본의 입장서 오키나와현, 잉청저우청 등과 인접하였던 이스트코스트는 결국 1942년 이스트코스트 전투를 통해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이에 즉각 일본군의 잔악함에 반발한 이스트코스트 주민들은 반일감정이 있던 한인들을 중심으로 게릴라 전쟁을 전개하면서, 차차 많은 미국계도 이 게릴라 전쟁에 한인들과 같은 레지스탕스로 참여하게 되어, 살아남기 위해서 낮에는 일장기를 걸고, 밤에는 성조기나 태극기를 걸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사이 일본은 이스트코스트의 시민을 학살, 강간, 강제징용하는 등의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결국 전쟁 직전 인구 70만 중 전쟁학살 피해 6만, 게릴라 전사 3만, 강간피해자 4만명, 강제징용 피해자 2만명 등을 남기며 전쟁 말의 공습 등과 함께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이스트코스트 시민들은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고, 전후 전쟁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시 정부 차원의 정신과 치료 지원 등이 이어졌고, 이는 독립한 이후에도 이어져 지금까지도 지원되고 있다. 다만 일본이 어떤 나라겠는가. 지금까지도 정부의 사죄를 못 받고 있다. 서양인과 동양인이 같이 산다고 해도 말이다.

이윽고 한인과 미국인이 손잡고 그렇게 다시 악착같이 일어나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일부 피난민의 이스트코스트 피난으로 재차 한인인구의 증가도 있었으며, 아무튼 그렇게 하여, 어떻게든 전후복구를 빠르게 끝마치려고 했으며, 이로서 1950년에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한다. 그리고 전후 이스트코스트 시민의 애향심이 독립 촉구의 원인으로 바뀜으로 인해서 독립 여론이 꾸준히 높아지고, 1956년, 독립 정부를 수립하는 선거를 통해서 정부를 수립하고, 미국 의회에서 "이스트코스트 및 잉청저우 제도 미국령 도서지역에 대한 독립기본법"의 통과로 독립에 성공한다. 독립이 늦어진 이유는, 독립을 하되, 전후복구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독립하자는 방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후 이스트코스트는 고도성장을 통해 냉전기 일본과 대만의 후방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여, 압력을 받치는 받침대로서 활용되었으나, 70년대 이후의 신흥지역화와 동시에 잉청저우와 유기적인 관계를 이끌어내면서 권역화되었고, 이는 냉전이 끝나고 1988년에 잉청저우가 독립하면서 연방화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를 봉합하고자,1998년에 이스트코스트와 잉청저우를 대등합병한 연방국가인 잉청저우 제도 연방을 만들어냈다. 물론, 기한은 30년으로 하여 2028년에 일반적인 민주공화국으로 체제를 전환하게 된다. 현재 이스트코스트는 잉청저우의 위성도시 겸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개 거점지로 기능하고 있다. 인구는 2013년 4백만을 넘었다.

신잉청현 도서지역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 도서지역은 북으로는 잉청저우 섬 바로 남단에서부터 필리핀 북단의 바탄제도(바타네스 제도) 근방까지 뻗어있다. 이들도 이스트코스트 지역과 같이 1세기 즈음에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필리핀을 통해 태평양과 마다가스카르 땅까지 곳곳으로 뻗어갈 즈음에 잠깐 거쳐간 땅에 불과하였다. 19세기까지 잉청저우와 필리핀에서 근접하는 지리적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버려졌던 이 땅은 19세기 후반 미서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며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 삼을 때 섬의 개척을 통한 식민화 가능성을 확인, 미국이 1913년 본격적인 개척을 시작함과 동시에 이스트코스트 속령의 일부로 편입하였고, 이때부터 1933년까지 20년동안 필리핀인 개척단을 무려 145차에 걸쳐, 8만을 선발하여 보내서 개척케 하였으며, 이스트코스트가 독립한 이후엔 이스트코스트 주의 웨스트 구로 편입되었다가, 1998년 잉청저우와의 연방화 통합이 되고 나서도 2004년까진 이스트코스트 주에서 분리되어 웨스트 이스트코스트 주로 개편되었으나, 2004년 행정개편 시에, 이 도서지역과 잉청저우 섬 남단의 기존 신잉청현을 합쳐 새 신잉청현으로 출범시켜서 지금에 이르렀다.

동도현

원래 이 지역은 서구 어느 나라도 아니고, 산잔시대 후반의 류큐 상인이 표류하면서(1308) 발견된 섬들이다. 이 섬들을 원래는 당시 상씨 왕조를 기리는 숭배하는 의미에서 쇼우슈가나시라는 지명이 붙었으나, 이 때는 자연만 우거진 채, 류큐인들이 개척해 잠깐 기지로만 쓰다 버려졌으나, 서구 국가들이 17세기 즈음부터 뒤늦게 발견하고 버려진 개척지들을 개보수해서 쓰다가 북아메리카 결국 미국이 19세기 후반부터 야금야금 집어먹다 미서전쟁으로 완전히 미국의 소유가 되었다가(...) 결국 2차대전으로 일본에 점령당했을 적엔 잠깐 오키나와 현에 편입되었다가(...) 종전 이후에 도로 미국의 이스트코스트 속령의 일부가 되었다가, 이스트코스트의 일부로 1956년 이스트코스트가 독립할 떄 같이 떨어져 나간 뒤에 잉청저우와 연합해 1998년 연방국가가 결성되고 나서 지금에 이른다(...)

행정구역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행정구역도.png

  • ↑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현행 행정구역도 4K 지원

행정체계

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다음과 같은 광역행정체계를 지니고 있다. 1998년 연방 출범 시부터 2004년 행정대개편 이전까지는 잉청저우 주와 이스트코스트 주, 웨스트 이스트코스트 주로 나눠져서, 잉청저우 주는 신잉청현+잉청저우직할시(산하 구) 혼용체제를, 이스트코스트 주는 산하 구 체제를, 웨스트 이스트코스트 주는 카운티 체제를 채용했었다. 성할시 제도도 있었으나, 연방 결성 이후 한번도 실행치 못하고 사문화되었다.


광역자치단체

직할시 -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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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자치단체

구 현할시/향/진(시/정/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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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행정단위(지방자치체 아님)

린(정) 동(현할시, 정)/리(향/진, 정)

행정구역 승격-분리 요건

구 - 분구 시의 피 분구 지역에서 분구하게 되는 지역이 인구 20만 이상인 지역 현할시 - 인구 5만명 이상, 주민 60% 이상이 해당 행정구역에서 2•3차 산업에 종사하거나 도시권이나 생활권 중심지로의 통근을 통해 2•3차 산업에 종사 진 - 인구 2만명 이상

행정구역 목록

현재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

잉청저우 직할시

  • 시구(西區)
  • 둥구(東區)
  • 베이구(北區)
  • 중구(中區)
  • 난구(南區)
  • 중정구(中正區)
  • 주오구(中央區)
  • 기타요시구(北吉區)
  • 아키나카구(秋中區)
  • 저우제구(周界區)
  • 장이구(姜宜區)
  • 주산구(州山區)
  • 리샤오구(李小區)
  • 거랴오구(葛遼區)
  • 신자이구(新嘉義區)

이스트코스트 직할시

  • 웨스트 구(West District)
  • 이스트 구(East District)
  • 노스 구(North District)
  • 사우스 구(South District)
  • 센트럴 구(Central District)
  • 하버 구(Harbor District)

신잉청현

  • 샤오왕 시(蕭往市)
  • 민셩 시(民生市)
  • 시왕 시(希望市)
  • 왕칭 시(瀇清市)
  • 잉청구팅 시(瀛城古亭市)
  • 우샨 시(武山市)
  • 스기 시(杉市)
  • 세이란 시(清蘭市)
  • 펀완 시(分灣市)
  • 양누(楊紐) 진
  • 틴사 진
  • 나부샤 진
  • 마카타오 진
  • 망알로반 진
  • 비피비피 진
  • 카시앗 진
  • 먄피바티 진
  • 우싱(武興) 향
  • 웨이칭(衛慶) 향
  • 커칭(可淸) 향
  • 잉펑(英豊) 향
  • 이린(宜林) 향
  • 양칭(楊晴) 향
  • 타갈로그 향
  • 부키드 향
  • 비사야 향
  • 이바탄 향
  • 아피얀 향
  • 이피만탄 향
  • 마킬로스 향
  • 칼리마타 향
  • 제네랄핑카밍테 향
  • 탄카만 향
  • 낭 마르테스 향
  • 낭 이스토치나스 향
  • 마카타요 향
  • 오리엔테 향
  • 난다시(南大西) 향

동도현

  • 카만스(嘉滿首)시
  • 와탄나(渡納)시
  • 카마키(鏡卷) 시
  • 스화(楚覇) 시
  • 시사이드-온-이스트코스트 시
  • 이스트아일랜즈(동도, 도시마, 둥다오, 東島) 시
  • 웨스트웨틀랜드 진
  • 시틀랜드센트럴 진
  • 진평 진
  • 미틀락 진
  • 락틀랜즈 진
  • 뉴메사추세츠 진
  • 뉴미시시피 진
  • 이스턴랜즈 진
  • 뉴오리건 진
  • 뉴애팔래치아 진
  • 노스웨틀랜드 향
  • 센트럴웨틀랜드 향
  • 이스트웨틀랜드 향
  • 시틀랜드웨스트 향
  • 시틀랜드이스트 향
  • 시틀랜드노스 향
  • 시틀랜드사우스향
  • 평안 향
  • 신가락 향
  • 재평 향
  • 남석 향
  • 구평(久平) 향
  • 채널 향
  • 뉴 로키랜즈 향
  • 클라우디비치 향
  • 파인트리타운 향
  • 뷰티풀플레인 향
  • 터틀포트 향
  • 호프랜드(hopeland) 향
  • 락마운틴즈 향
  • 인랜드(inland) 향

헌법

내용이 방대한 관계로, 잉청저우 제도 연방 헌법에서 다룹니다.

각주

  1. 홍콩을 광둥어로 이르는 이름
  2. 잉청저우를 대만민난어로 이르는 이름
  3. 대만에서 케이블 방송이 활성화 된 것은 산이 많아 난시청 환경에 놓인 지역이 상당하다는 점과, 외성인을 우대하고 내성인과 그 외 민족들을 차별하고 그들의 요소를 탄압하는 형태의, 헌정과 훈정을 섞었다(!)는 그 악명높은 국민당 주도의 3당 연정(사실상 일당독재) 때문이다. 그런데 잉청저우의 경우는 후자에는 속해도 전자에는 안 속하기 때문일 뿐더러, 외성인의 비율이 대만 평균보다 높다.(대만은 약 13~14%, 잉청저우는 약 16%) 그래서 필요성이 반감되니, 활성화가 더디었다.
  4. 아무리 뜻이 맞아 연방이 되었어도, 두 섬으로 서로 떨어져 있던 작은 섬나라들이 하나의 크기가 좀 있는 연방국을 이루면서도 서로 가치관을 맞추려면 최소 한 세대 이상은 걸린다. 분단국가들이 통일 이후에 겪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후유증과 증상이 완전히 똑같다! 심지어 이 두 지역들은 각각 통합 전에는 싱가포르처럼 섬 자체가 도시국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