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어나더어스 주의

사클레치아 왕국의 보수정당
군주당 자유군주당 자유군주당 자유군주당
(율리우스파)
통합군주당
자유시민단 (일부 제외) 분당 임페로이 사클레치아
(엠페로우파)

자유군주당 (영어: Liberty Monarchist Party of Saculechia, 自由君主黨, LMP)은 사클레치아 왕국의 집권여당이자 군주주의, 강성 국민주의 성향의 정당이었다. 상징색은 핑크, 정식으로는 자유군주 핑크이다.

IY 200년 4월에 친귀족 성향의 자유귀족당, 전체주의, 제국주의 성향이 강한 제국당, 대안 우파 성향인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와 통합하여 통합군주당이 되면서 소멸되었다.

IY 116년 2월 사클레치아 왕국을 지도하던 헨리 4세가 끝내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2월 혁명으로 폐위되고, 이를 주도한 세력들이 군주당에 대거 들어오게 되었다. 이 중 전제군주제를 주장하는 율리우스가 세력과 국가주의 성향의 친엠페로우 세력이 등장했으나 전당대회를 통해 율리우스 카이저 1세가 당선됨에 따라, 117년 4월 자유군주당을 출범시킨다.

120년 4월 제12대 의회선거에서 35석으로 선전하였으나 다수당인 자유당을 막지 못했으며 124년 4월 율리우스 카이저 1세 사후 율리우스 2세가 취임하였으나 일명 필리노이의 난이라는 반군주당 운동이 터지면서 백성의 지지를 잃었고 농노들과 일부 평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당이 백성들의 지지를 크게 얻어 130년 7월 제13대 의회선거에서 13석으로 추락하면서 소규모 정당이 된다. 그러나 전당대회와 계파 갈등 해결을 주도하면서 140년 12월 제14대 의회선거에서는 연립 다수당이 되었으나 이 선거를 계기로 율리우스파 급진파인 알버트 작센이 선출되면서 다시 율리우스파 급진파들이 당권을 잡게 되었으며 141년 6월 알버트가 사클레치아의 황제로 즉위하여 독재 정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유로아스피아 전쟁 이후 제15대 의회선거에서는 80석으로 제1당이 되었으며 이는 제16·17대를 제외한 제19대 의회선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제16대 의회선거에서 카이포스의 행보로 인하여 대부분의 양 파벌이 카이포스의 퇴진을 빌미로 탈당을 주도하면서 대규모 분당 사태를 겪었고 166년 보궐선거에서 자유당이 30석을 얻어 제3당으로 추락하였다. 이후 제18대 의회선거에서 선거연합을 통해 다수당이 되었다가 엠페로우파 의원 35명이 당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버렸으며 독자 행보를 벌인 율리우스파를 비판하면서 탈당하였고 친귀족정당인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를 결성하였다. 그 후 195년 5월 초대 지방선거에서 1,100석을 흭득하였으며 198년에는 자유귀족당, 제국당과 미래군주연합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결국 200년 3월 자유귀족당과 제국당 뿐만 아니라 일부 엠페로우파가 탈당하여 결성한 임페로이 사클레치아, 기타 중도, 보수우익 정당, 시민단체 등과 합당하면서 통합군주당이 되었다.

역사

사클레치아 2월 혁명

앵글로색슨계와 사클레치아계 사이에서 태어난 사클레치아 왕국의 왕인 헨리 2세는 IY 100년 3월 간접선거를 통해 38세의 나이로 취임하면서 그 동안의 국정 운영 방식이 아닌 자본가, 평민, 여성, 외국인, 노예, 군사지도자 등 각 대표를 통한 국정 운영으로 나라에 대한 기틀을 다졌고, IY(이세계년) 109년 11월에는 신생 정당인 자유당과 손잡고 함께 연립 정부를 차리게 된다. 하지만 귀족들과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사클레치아의 전통적인 분위기를 헨리 2세가 망쳤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어 110년 3월 두 번째 간접선거에서 헨리 2세가 재선을 하게 되었으나 곧바로 경제 침체가 일어났다. 그래서 헨리 2세는 새로운 경제 계획인 헨리 계획을 발표하는데, 이는 미국의 뉴딜 정책과 유사하다. 당연히 대부분의 대표는 찬성표를 던졌고 이에 대한 경제 안정화를 시작하게 된다. 한편, 평범한 그리스계 농민이었던 율리우스 이메타리우스가 살고 있는 북부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흉년이 일어났는데, 율리우스가 가지고 있던 가축이 모두 굶어죽자 농민으로서의 삶을 그만두고 자신이 그동안 모은 여행 자금으로 수도인 일리오스로 떠난다. 그 후 율리우스는 일리오스에 와서 그의 형제였던 올리베르를 만났고, 올리베르는 자본가, 농노, 평민 등을 대변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해보자는 제의를 한다. 율리우스는 이에 수락하였고 이렇게 해서 신흥 조직인 을 만들게 된다. 율리우스는 이 때부터 어느 자유주의 학자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유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올리베르는 헨리 2세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해갔다. 115년 3월 다시 만난 두 형제는,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우리는 전통을 파괴시키는 헨리 2세로부터 사클레치아의 전통을 지키고 자본가들과 함께 자유주의를 퍼뜨릴 것이다!"라는 공보를 써 일리오스 전역에 퍼뜨렸다. 그러나 헌병군에게 걸려 반역죄로 체포되는 일도 빈번했었다. 그러던 115년 5월 자본가들이 두 형제의 집에 찾아와 함께 헨리 2세를 몰아내자는 동맹을 제안했고 그 결과 의 회원 수는 300명으로 늘어나 여기에 군주주의자, 중도주의자, 보수주의자, 전통주의자, 일부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자유시민단을 조직한다. 한편 농노들은 영주들의 가혹한 행위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 틈을 타서 자유시민단은 더 많은 자본가는 물론, 국수주의자, 국민주의자, 귀족들과 합류하여 헨리 2세의 폐위를 요구했다. 115년 11월 헌병군의 대대적인 시위 진압으로 회원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본 이메타리우스 형제는 원래 목적이 헨리 2세의 폐위가 아닌 사클레치아 왕국의 체제를 바꾸자는 것으로 태세전환했으며, 116년 2월, 마침내 300만명이 무기를 들고 일리오스 궁전에서 혁명을 일으켰으니, 바로 사클레치아 2월 혁명이다. 이로 인하여 헨리 2세는 참수형으로 처형당했고, 각 국정 대표들도 타국으로 탈출했다. 한편 헨리 2세가 국왕이 되기 전 입당했던 자유당 측은 반발하였고 이메타리우스 형제를 반역자라고 주장하였다.

자유군주당의 탄생

이메타리우스 형제는 향후 국정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대해 율리우스는 "자유군주제"를 주장했고, 올리베르는 "절대왕정"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자유시민단이 분열될 위기에 처했으나 일반 군주제를 지향하는 군주당이라는 정당에 들어가자 대부분의 자유시민단 회원들도 형제들을 따르겠다며 군주당으로 대거 입당하였다. 한편 군주당의 지도자인 밀로스 욜라키치는 이메타리우스 형제와 자유시민단을 내쫒으라고 명령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밀로스와 그 간부들은 쫒겨났고, 끝내 당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둘은 자유시민단을 흡수하면서 곧바로 자유군주당을 탄생시킨다. 올리베르는 "황제"라는 뜻의 엠페로우라는 별칭을 쓰게 되고 율리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저 1세라는 이름으로 임시 국왕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17년 5월 율리우스가 이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올리베르는 지지자들과 이를 옹호하는 세력들을 모아 엠페로우파를 이끌게 되고 율리우스 세력과 경쟁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120년 4월 12대 총선에서, 전체 의석인 100석 중에 35석을 흭득하였다. 120년 8월에는 율리우스가 자동으로 국왕이 되면서 탈당 처리되었으며 율리우스의 동생인 율리우시아 이메타리우스가 최고지도자가 된다.

필리노이의 난과 13대 총선 참패

120년 8월 율리우스 1세는 국정 운영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헨리 2세가 추진해온 헨리 계획을 폐기하고 시장 경제론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신경제계획이란 계획 경제가 아닌 유럽/미국식 시장 경제, 자본화를 추진하여 경제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백성들은 환호하였으나 자유당은 이에 대해 "과도한 자본화는 신분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라며 비판했으며 당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또, 이에 대한 시행이 예상보다 늦어져 백성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123년 11월 율리우스 1세는 동상을 세우기 위해 총 100만 보루를 투입하기로 결정하자 필리노이가 유일하게 반대했고 분노한 율리우스 1세는 필리노이를 경질, 동시에 제명과 입당 금지 조치를 내렸다. 이후 필리노이는 정치 탄압이라고 비판하여 여러 지식인들과 해방당을 조직한다. 이후 자유군주당과 율리우스 내각에 실망한 백성들이 이 당에 점점 들어오게 되었고 124년 1월에는 당원 수가 10만을 넘어 중소정당이 되었으며 준군사조직인 "해방조직"을 결성한다.

124년 2월, 중도파 의원들은 동상 건설을 중단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엠페로우파는 필리노이 측에 가담한 중도파들을 일부 배척하고, 율리우스 1세는 건강이 쇠약해지며 국정 지지도까지 떨어지자 결국 율리우스 1세가 퇴위하게 되었다. 124년 4월 율리우스 케로베스가 국왕이 되었고 동시에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나, 율리우스파 내 중도파와 온건파의 갈등이 절정에 달한다. 124년 5월 새벽, 필리노이 장군을 중심으로 무려 3만 명의 백성들과 해방조직 세력이 일리오스 시내를 점거하여 을 일으켰다. 당사에서는 중도파와 온건파 정치인들이 점거한 상태였으며 율리우스 2세의 잘못된 방법으로 백성들을 탄압하자 스스로 물러난다.

율리우스 2세는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위기가 더욱 악화되었는데 율리우스 1세가 백혈병으로 죽게 되자 조금씩 모면하는 모습을 보였고 군주당은 북부 지역의 귀족,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아 원내 진입 5%를 넘으면서 9%를 기록했다.

결국 율리우스파가 끝내 힘을 잃고 엠페로우파는 잠시동안 당권을 잡고 운영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30년 3월 군주당의 당원인 페페르치니 베뢰스티가 자유당 내부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제명되자 지지도도 점점 줄어들어 7%를 기록하면서 원내 진입률 5% 이하까지 떨어질 위기에 처했고, 당 쇄신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당 쇄신을 시작했다며 당내 비판이 이어졌으며, 결국 13대 총선에서는 13석을 기록하면서 대참패를 당해 엠페로우파는 초국가주의와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과격파와 국민주의를 주장하는 온건파로 쪼개진다. 양 측은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물리적인 폭력 등을 이용한 몸싸움까지 벌이기도 했다. 한편 엠페로우파의 창시자 올리베르는 율리우스 1세의 사망, 엠페로우파의 분열과 처참하게 패배한 자유군주당의 상황에서 "우리 당은 이제 끝났을 것이다. 오늘로써 나는 정계를 떠날 것을 선언한다. 그렇게 되면 평범한 농민으로 돌아갈 것이다"고 밝혀 탈당 및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당 내 혼란 극복, 14대 총선 약진

130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엠페로우파에 유리 소크토라바, 율리우스파에 율리우스 코루바 주니어, 중도파에 앙리 존슨이 출마하였다. 코루바는 율리우스파 중에서 가장 중도적인 편에 속하며 소크토라바는 엠페로우파 급진파, 존슨은 어떤 파벌에 속하지 않는 중도파에 속한다. 전당대회 결과 새 최고지도자에 율리우스 코루바 주니어가 선출되었다. 특히 엠페로우파의 온건파 세력 대부분이 코루바 후보를 선호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코루바는 율리우스 3세로 추대되어 당 내 혼란과 국정 문제를 해결하기에 이른다.

133년 5월 자유당이 신생정당인 미래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려 하자, 자유군주당은 어떻게든 반대를 외치면서 자유당-미래당과의 연립 정부 구성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자유당이 미래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할 경우 55석인 자유당은 미래당 7석을 합친 62석이 되며 개헌선 (60석)을 넘게 된다. 그러던 중 윌리엄스 1세 내각 기간동안 각종 사건에 휘말리면서 지지도가 40%로 떨어지게 되었고, 이 때를 노린 군주당은 미래당을 구색정당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미래당 대표 오라니아 헤스는 반발하면서 자유군주당을 비판했으나, 나중에 군주당 당원들이 미래당을 장악했고 미래당 당원들을 감금시키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미래당 당원들은 군주당을 "무능한 정당"이라고 비판하면서 구 미래당 당원들과 함께 탈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미래당은 자유군주당의 구색정당이 되었으며 이름도 "개발당"으로 변경하였다.

136년 5월 윌리엄스 1세가 독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자유당은 이 사건의 배후에 자유군주당이 있다고 주장했고 자유군주당은 이를 부인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14대 총선에서 관련 이슈로 꼽힌다. 급기야 율리우스 3세가 전제정치를 실시하자 내각을 해산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자유당은 쿨리지의 행보와 자유군주당을 비판하였으며 일부 군소정당들도 동참하여 자유당은 반군주당 연합이라는 선거연합을 구성하게 된다. 137년 4월 자유군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원내지도자에 중도파 율리우스 네막시스, 부지도자에 온건파 율리우스 아르시스를 선출했으며, 9월에는 파시오이즘을 표방하는 정당인 파시오당을 흡수합병했다.

그리하여 140년 7월 14대 총선에서는 39석을 얻어 개발당 의석만 합쳐도 50석이 되어 처음으로 제1당을 차지한다. 코루바는 "이번 선거에 대해 동감하며 하늘에 계시는 주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사클레치아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고 밝혔다.

그리고 140년 9월 중도파와 온건 율리우스파 의원들이 선거인단 100인을 통해 실시되는 간선제로는 선거에 한계가 있다며 백성들이 투표할 수 있도록 직선제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140년 10월 자유당 대표 빌헬름 폰 파우스트와의 회동을 끝으로 찬성 85인, 반대 3인, 기권 22인으로 정족수인 60석 과반을 넘기게 되면서, 건국 114년만에 간선제가 폐지되고 직선제를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율리우스 4세의 집권으로 인해 1년도 안되어 폐지되었고 다시 간선제가 실시되었다.

율리우스 4세의 독재와 당의 극우화

14대 총선 이후 전제정치로 정권을 잡고 있던 율리우스가 중도파인 율리우스 3세와 군주당의 당권을 쥐고 있던 율리우스파 중도파들은 힘을 잃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율리우스가 급진세력은 조금씩 성장하게 된다. 엠페로우파의 온건파 대다수가 율리우스파로 전향하였고 과격파와 소수 온건파만 남아 엠페로우파 역시 힘을 잃었다. 140년 10월 급진파와 중도파, 엠페로우파 중도세력들이 11월에 전당대회를 열기로 합의하였고, 각 세력들은 후보 경선을 준비하게 된다. 11월 전당대회에서 율리우스가 급진파인 율리우스 알버트 작센이 중도파인 제네로 아루파치와 맞붙게 됐는데, 나머지 후보들은 전부 탈락하거나 결선 후보들을 지지하였고, 당내에서도 양 후보간의 지지 선호도가 팽팽한 차이를 보였다 (50.1% vs 49.8%).

전당대회 결과 알버트가 최고지도자로 선출되었고, 141년 3월에는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4세가 된 알버트는 전제정치를 이어나갔는데, 141년 6월 이른바 "국가대개혁"을 발표하여 사실상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노조와 반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친정부 자경단들을 대거 조직시켰는데, 142년 5월에는 모든 자경단들을 통폐합시켜 자유십자단을 조직하였고 준군사조직이 된다. 한편 유로아의 나라들은 율리우스 4세의 행보에 전쟁이 올지 두려워하거나 전쟁에 대항하는 반응을 보였다.

유로아스피아 전쟁 기간

쾨니히스오스테 사건 이후 벌어진 유로아스피아 전쟁 기간 동안에는 침공에 대비하여 지하당사를 만들어 이곳에서 정당 활동을 하기도 했다. 군주당은 정부 홍보와 징집 홍보를 통해 다수의 백성들을 전쟁에 참가하라는 포스터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였다.

전후 처리 및 사클레치아 재건 운동

자유군주당 지도부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여 전원 사퇴하였고 율리우스파 중도파인 율리우스 카이포스가 곧바로 최고지도자, 국왕이 되었다. 그래서 카이포스는 사클레치아 국왕 중에서 유일하게 칭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국왕이라 불린다. 카이포스는 사클레치아를 재건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150년 9월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백성들의 큰 지지로 80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한편 율리우스 4세의 출당에 반발한 율리우스파 급진파 정치인들은 엠페로우파와 손을 잡고 반카이포스 연대를 만들어 카이포스 사퇴 운동을 벌였고, 카이포스는 불순 세력, 분열 종자라고 비난해 반카이포스 연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심지어 151년 4월 첫 보궐선거에서는 친카이포스파인 말리코 에보니가 반카이포스파 에르빈 폰 루터의 지역구인 루스메카르주 6구에서 당선되는 등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151년 7월에는 자유당 의원 13명이 발의한 징수세 인하 법안이 자유당+친카이포스 의원들의 찬성으로 의결되자 반카이포스파가 징수세 인하를 반대하는 장외투쟁을 벌였다. 카이포스는 이들을 영구 제명하였으며 영구 제명에 반발한 반카이포스파는 카이포스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 무소속 의원들과 혁명당을 결성한다. 152년 8월 카이포스의 지지도는 점점 떨어졌고 동시에 군주당 내 중도층, 무당층이 자유당과 혁명당에 분산되면서 자유군주당 지도부는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예상을 딛고 자유당과의 연정을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그 후 자유당과 수차례 접촉하여 연정을 제안했으나 어떠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56년 1월 자유당에서 좌파 성향의 크리스 반 루게스테른이 당대표에서 선출되자 자유군주당을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연정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분당과 카이포스의 사퇴

157년 3월 엠페로우파의 급진파 의원인 에케로스 디오니소스가 카이포스를 암살하려 했다는 의혹이 친카이포스파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디오니소스는 카이포스를 암살하지 않았다고 부인했지만 카이포스가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 사람이 디오니소스라고 해명하여 결국 제명되었고 입당 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일부 엠페로우파 의원들이 디오니소스를 복당 운동을 벌였고 카이포스는 지금이야말로 당을 지키지 못하면 위험하다며 각 파벌과의 회동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엠페로우파 급진파는 디오니소스의 복당부터가 먼저라며 반대하였고 율리우스파 온건파는 회동에 찬성하는 등, 엠페로우파 급진파 때문에 회동에 차질이 생겼고, 끝내 무산되었다.

159년 7월에는 보수당, 개발당과 선거연합을 구성해 160년 3월에 치러진 16대 총선에서는 91석으로 연립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앨리스 소피아보른 의원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혁명당과 카이포스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물론 당 내 엠페로우파는 반발했고 5년 안에 배후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으면 탈당을 하겠다고 밝혀 분열을 예고하였다. 혁명당도 이에 동참하였고, 율리우스파 일부 역시 동참하면서 사실상 제2차 반카이포스 연대를 형성한다. 제2차 반카이포스 연대의 등장에 카이포스 내각은 혁명당을 정당이 아닌 반정부단체로 간주하여 정치 금지는 물론, 강제 해산까지 갈려는 상태였다.

165년 3월 보수당과 군주당의 회동을 통해 정당연합인 보수연립을 결성하면서 보수 진영에 유리한 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생겼으나 65년 7월 혁명당 내 엠페로우파 세력이 보수당을 비난하자 보수당이 반발하여 보수 진영이 중도보수와 급진보수 진영으로 갈라졌다.

결국 165년 11월 엠페로우파 중립파였던 율리우스 에르도안이 카이포스의 행보에 실망하여 탈당을 선언한 이후 엠페로우파와 율리우스파 세력들이 줄줄이 탈당하였으며 165년 12월에는 47명의 반카이포스 의원들이 탈당하였다. 결국 제3당이 되면서 각자의 정당을 창당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율리우스파 급진파, 엠페로우파 급진파들은 각각 국가당애국당을, 친귀족 성향의 의원들은 귀족당을, 일부 중도파는 정의개발당을, 소수 계파는 백성의지당을, 혁명당에 동참한 반카이포스 세력들은 구색정당인 혁명군주당을 각각 창당하면서 반카이포스 진영에 큰 이득을 얻는다.

결국 카이포스는 최고지도자와 국왕직에서 사퇴하였고 동시에 지도부도 총사퇴를 하면서 원내지도자인 유리아 율리시아가 최고지도자 권한대행을 맡았다.

제4당으로 추락

율리시아는 166년 1월 17대 총선을 앞두고 최고지도자 직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동시에 보궐선거대책위원장이 된다.

당시 사클레치아의 정계는 17대 총선을 앞두고 각 의원들이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당들이 지지도 감소로 인하여 타 정당에 흡수되는 일이 많아졌고 자유군주당 역시 총선을 앞두고 각 의원들이 불출마를 선언하여 의석 수가 점차 감소한 상태였다. 이렇게 되면 무려 60석이 공석이 되며 나머지 40석은 군주 19+보수 13+자유 3+애국 1+무소속 4가 되기 때문에 사실상 '미니 총선'이라는 보궐선거가 된다. 166년 3월 사클레치아 선거관리위원회는 166년 보궐선거를 5월로 결정하자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펼친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군주당이 자유당에 30% 뒤쳐지는 것으로 나타났고 다른 지역구의 역시 모두 자유당 후보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보수 텃밭이던 일로키구에서는 자유당 후보가 40%를, 헬로프구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60%를 넘겨 군주당 후보를 앞서는 등 군주당은 이미 참패나 다름 없었다.

결국 166년 보궐선거에서 달랑 4석 정도 건지면서 참패했는데 그 중 자유당이 30석을 얻어 제1당에 올랐으며 무소속 의원들도 당선되면서 각각 보수당과 자유당으로 입당하기도 했다. 결국 자유당, 보수당에 이어 제3당이 되었으며 지도부는 일부 사퇴, 율리시아는 168년 12월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으며 17대 총선에서는 보수당과 다시 한번 선거연합을 치뤘으나 개헌저지선 (30석)마저 확보하지도 못해 군주당은 아예 원내교섭까지 잃을 위기에 처했다. 한편 자유당은 선거 직후 루이스 반 아르스토이아를 국왕으로 삼고 "루이스 1세"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루이스는 취임 3개월 만에 사퇴하였다.

율리시아는 이번 선거의 책임을 지고 지도부와 함께 총사퇴하였는데, 최고지도자 권한대행을 맡았던 아베노 신지가 간암으로 사퇴하자 율리우스파 급진파인 율리오스 히페리우스가 최고지도자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그 후 율리우스파 내 친카이포스 세력을 출당시키고 혁명당에 있던 대부분의 율리우스파 급진파들을 흡수하면서 다시 율리우스 4세 당 체제로 환원시키려고 했으며 루이스 1세 사퇴 직후 국왕직을 맡게 된다. 그러자 자신을 율리우스 5세라고 불리면서 다시 한번 군주당에 힘을 실어달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하였으나 백성들은 율리우스 5세를 싫어했고 이를 의식했는지 율리우스 5세는 백성들을 대변하기 위한 정책을 추후에 추진하기로 밝혔다.

당의 재도약기, 2차 분당 사태

173년 4월 공산당과 유사한 단체인 사클레치아 마르크스당이 좌파 테러를 벌이면서 300명이 사망하였고, 자유당 정권이 이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자 군주당 내에서 공산주의를 척결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율리우스파 급진파는 강경 대응을 주장했고, 비주류 계파였던 엠페로우파도 강경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당은 폭력적인 공산당은 척결하되,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공산당은 척결하지 말아야 하는 온건적인 반공주의를 주장하였고 동시에 적색 테러를 벌이는 마르크스당을 척결하여 그들에게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율리우스 5세는 만약 군주당이 자유당과 힘을 합친다면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하겠다고 밝혔으나 자유당 지도부는 "굳이 우익 군주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필요가 없다"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던 중 174년 3월 마르크스당의 지도부가 대법원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당하자 율리우스 5세는 "마르크스당은 사라졌지만 아직 우리 국가와 타국의 사회주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어나더어스라는 이세계에는 곧 20년 안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사라질 것"이라며 어나더어스 국제 연합에 경고하였으나 유엔에이 측은 "모든 사상에서는 자유롭지만 율리우스 5세의 발언은 지구에서 전파된 사회주의 이론과 사상을 아예 멸종시키는 것이다"라고 밝혀 이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175년 2월 자유당 정권의 지지도는 40%로 추락하였으며 동시에 자유당에 대한 불만이 속출하자 군주당은 이 때를 노려 당의 재건을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175년 3월 어나더어스 소유 여론조사 기관인 어스미터에서는 2,856명의 사클레치아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사클레치아 내의 정당 지지율은 자유군주당이 57.1%, 자유당이 31.1%로 나타났고 차기 국왕 선호도로는 율리오스 히페리우스 (율리우스 5세)가 60.4%로 28.2%를 기록한 자유당의 루이스 반 아르스토이아를 누르고 1위로 나타나 자유당은 정권교체 9년만에 야당이 될 위기에 처했다.

175년 12월 애국당이 명칭을 우리애국당으로 바꾼 후 군주당과 선거연합을 맺을려고 했으나, 율리우스 5세는 곧바로 거절하였고 보수당과 선거연합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그러던 중 178년 3월 보수당이 친밀리아파와 반밀리아파로 분열, 그 중 반밀리아파가 탈당을 선언하자 보수당은 9석이 되면서 원내교섭 지위를 상실했고 동시에 개헌저지선마저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는 군주당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곧바로 18대 의회의 다수당일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고, 보수당도 여론조사에서 자유당에 이어 제3당으로 약진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기도 하였다. 178년 4월 여론조사에서는 우리애국당이 원내 진입선 5%를 넘어 6%를 기록하자 강성 엠페로우파를 지지하던 강경 보수층이 우리애국당으로 이동하였다는 문제가 생기자 엠페로우파 세력들은 우리애국당이 10석을 가져가지 않기 위해 방법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율리우스파가 공석이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차지하면서 엠페로우파 후보들을 줄줄이 컷오프시켰고 이에 반발한 엠페로우파는 만약 율리우스파가 선대위에서 떼지 않는다면 탈당도 불사하겠다며 율리우스파의 행보를 비판했으며 이후 178년 5월에는 39명의 엠페로우파를 후보로 확정시켰다. 그러나 61명의 율리우스파 후보보다 많았고 179년 6월에는 보수당은 물론, 공명연단의 전신인 니치렌당과 선거연합을 맺었으며 그 결과 18대 총선에서는 처음으로 우익 선거연합이 100석에 가까운 99석을 흭득하였고 동시에 군주당은 78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보수당은 21석을 얻어 예상보다 제2당이 되었고 니치렌당은 1석을 얻었다. 율리우스 5세는 보수당 대표인 밀리아 스칼렛과 니치렌당의 대표인 요나카 가츠히로를 만나 총선 승리에 대한 공식 회동을 가졌으며 동시에 군주-보수-니치렌 연립 정부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당의 재도약기는 사실상 이루어졌고, 율리우스 5세의 집권이 연장되면서 집권에 힘을 실어주는 듯 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그나마 1석을 건졌고 백성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민주국민당과 다른 야당들도 0석을 얻어 존폐 위기에 몰리자 야당들은 정당연합인 입헌민주동맹을 결성하였고 자유군주당을 비판하였다. 율리우스 5세는 이들을 정치범으로 몰아 불법 체포하면서 대부분을 정치범 수용소로 가뒀고 자유당도 반정부 행보를 우려하여 정당 활동을 금지당하는 것은 물론 해산 위기까지 맞았다. 자유당은 "이러한 행동이 곧 독재로 가는 거 아닌가"라며 군주당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군주당 내부에서도 탈당 움직임이 일어났고 율리우스파는 이들을 수습하여 사태를 잠재우려고 했으나 엠페로우파는 "율리우스파는 당의 정통성을 버리고 독자적으로 가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당의 배신이며 우리는 사클레치아의 자유군주주의, 사클레치아만의 시장경제, 사클레치아라는 조국을 위하여 당을 떠난다"며 줄줄이 탈당을 선언하였다. 심지어 35명의 엠페로우파 의원들도 이에 동참하여 탈당하였으며 181년 8월에는 당원 65,000명, 의원 35명을 포함하여 새로운 친귀족정당인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를 창당하였다. 이렇게 되면 53명이 되며 군주당은 제1당을 유지하는 한편 다수당이 야당의 무제한 토론을 중단시킬 수 있는 정족수 (75석)에 미치지 못하지만 과반 정족수 (50석)를 유지한다. 그리고 연립정당인 보수당과 니치렌당 의석을 합쳐도 64명이 되며 야당의 무제한 토론을 중단시킬 수 없다.

183년 3월에는 니치렌당이 불교를 사클레치아의 제2국교로 삼자는 안이 발의되었는데, 군주당 내 엠페로우파 의원 9석과 보수당 내 반밀리아파 의원 3석을 제외한 52명으로 무난하게 통과하자 자유당은 "신흥종교의 꼭두각시 정당이 주장하는 일본식 불교는 우리나라 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비판하였다. 그러자 니치렌당은 "우리식 불교는 가톨릭교회와 같이 가야 종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맞받아쳤다.

율리우스 6세 체제

186년 9월 자유당의 민주계, 민주국민당, 사회당, 입헌민주당, 카네이션 연합 등 30여 개의 정당과 정치단체, 시민단체들이 뭉치면서 중심이 된 민주당이 창당하였다. 군주당과 율리우스 5세는 처음엔 민주당을 혐오하면서 이를 반국가단체로 인식하여 이를 해산시키고자 했으나 민주당원의 수가 폭발적으로 급증하면서 정치 탄압 반대 집회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자 결국 율리우스 5세는 자유당의 정치 활동 금지를 해제시켰고 민주당을 정당으로 인정하였다.

187년 3월 율리우스 5세는 68세의 나이로 폐암에 걸렸으며 지지도도 61%에서 점점 떨어졌고 이에 대한 행보로 인해 대중들의 지지를 잃자 결국 정상적인 집권기를 유지하지 못하고 국왕에서 사퇴하였다. 이로써 백성들은 환호하였으나 3개월 후 율리우스 카프카샤 로이치가 곧바로 국왕이 됨에 따라 율리우스 6세가 되었으며 187년 현대 행정부의 행정부처를 대신하는 부국왕이 신설되면서 율리우스 6세의 아들인 율리우스 카프카샤 로이치 주니어를 초대 부국왕으로 선출하자 백성들은 신종 세습 정치라고 비판하였다. 또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맺은 자유당도 동시에 율리우스 6세를 비판하면서 율리우스 체제의 부활이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188년 1월 사클레치아 인구 비율에서 동성애자가 1%를 기록하자 당 내에서는 동성애 척결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율리우스 6세도 동성애자를 추방시키는 정책을 피기 시작했고, 189년 1월 인구 조사에서는 0.1%로 나타나 대부분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190년 4월 19대 총선에서 59석을 얻었으며 보수당 11석, 공명당이 3석을 흭득하였다. 다만 18대 국민의회와는 달리 의석 수가 73석으로 26석 줄었으며 민주당이 12석, 자유당이 14석을 얻어 진보야당이 다시 원내에 입성하였다.

192년 3월 어스미터 여론조사에서 민주당과 자유당의 지지율이 전에 비해 각각 9%, 6% 상승하였고 보수당과 공명당 지지율이 각각 6%, 1% 하락했는데 군주당은 15% 하락하였다. 때문에 민주당 지지율과 3%p씩 격차가 좁아지더니 결국 193년 1월 여론조사에서 추월당했다. 193년 3월 율리우스 6세가 국가가 개인의 사유 재산, 경제 활동 자유화를 지원하는 국가시장제도를 도입하여 시장경제 체제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백성 67.3%가 반대했다. 때문에 이 제도에 대한 시행 반대 시위가 이어졌고 국왕이 타국으로 방문했을 때는 왕궁 앞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4년 6월 부국왕을 폐지하고 총리를 신설하여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로 선출하는 방법과 지방선거 실시에 대한 헌법 개정안이 발의되었고 97석이 찬성, 3석이 반대하면서 의결됨에 따라 부국왕은 폐지되었고 총리가 신설되었다. 이 때문에 자유군주당이 지향하는 전제군주제 색채가 사라지는 거 아니냐는 엠페로우파의 우려가 있었고 율리우스파 급진파 역시 우려를 표하였다. 195년 1월에는 초대 지방선거가 실시됐고 그 결과 2,600석 중에 1,100석을 얻어 처음으로 제1당이 되었다. 민주-자유 연합은 1,092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고 이렇게 해서 민주 진영은 군주당과 라이벌로 급성장한다. 196년 3월 미래당이 신화당과 합당하여 미래신화당이 되자 신화당은 군주당과 정당 연합에 참여하면서 198년 미래군주연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군주-신화-공명-보수 정당연합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던 197년 3월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에서 분당된 자유귀족당제국당이 군주당과의 정당연합을 추진하자, 신화당과 공명당, 보수당은 군주당의 독자 행보를 우려하여 반대를 선언하였다. 군주당은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신화당과 공명당, 보수당과의 정당연합에서 결별하기로 결정하면서 정당연합인 미래군주연합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신화당과 공명당, 보수당은 정당연합인 보수연합을 구성하여 군주당의 행보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보수연합은 시작부터 위기를 맞았다. 공명당의 친불교적인 성향을 놓고 반불교 성향인 미래신화당, 보수당과 충돌하면서 공명당의 퇴출을 요구하였으나 공명당은 퇴출에 반대했었으며 이 틈에 미래군주연합은 국민의회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공명당에 선거연합 러브콜을 수차례 보내왔지만 거절했다. 하지만 율리우스 6세는 군주정당 통합을 추진하기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군주정당 통합

율리우스 6세는 196년 12월 여러 명의 지식인들과 자유군주연구원 직원들이 모여 결성한 국가플랫폼 자유통합은 사클레치아 내 친왕정 보수단체 대표들을 만나 군주 보수세력의 통합을 주장했다. 율리우스 6세는 "지금 우리 당은 율리우스파와 엠페로우파라는 거대 파벌이 존재하는데, 지난 총선에서 당 내 엠페로우파 대부분이 우리의 행보 때문에 결별하고 말았다. 오히려 공화주의와 사회주의에 찌들어있는 분노한 백성들이 주도한 반동정당들이 힘을 불리면서 우리를 위협할려고 한다. 지금이 이럴 때가 아니다. 자유군주 세력들을 모아 반동정당과 공화주의, 사회주의로부터 사클레치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 주장에 동참한 30여개의 왕정보수단체들은 율리우스 6세의 획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도층을 확보해야 하는 한계가 있었고 율리우스 6세는 다수의 중도층부터 우익층까지 대변할 수 있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중도층 대부분은 양당을 지지하지 않는 무당층이며 자유당과 민주당, 군주당을 지지하는 중도층은 각각 중, 소, 극소수였다.

율리우스 6세는 197년부터 국가안정정책을 추진시키기 시작했다. 그동안 중도층, 진보층, 농노 계층에 회의적이던 징수제를 56년만에 폐지하기로 결정했고 당 내 준군사조직이던 자유십자단의 병력 수를 100,000명으로 줄였으며 국가지원제를 농노, 평민 계층까지 확대하기 시작하면서 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시작한다. 또,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였다. 198년 3월에는 자유귀족당, 제국당 연합에 합류하여 공명-보수-신화 연합과 결별하면서 미래군주연합을 구성하기 시작했고 곧 군주보수통합론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하였다. 198년 6월 급진중도 성향인 중도당이 논평에서 "우익 정당인 자유군주당은 중도층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고 국가 상태도 안정적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제는 통합을 외치면서 무너진 군주정당들과 뭉쳐 하나로 나아가자고 한다. 우리는 급진중도와 군주정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서 오늘부로 자유군주당과의 통합에 합류할 것이다"고 밝혔다. 중도당 지도부는 이 논평 이후로 1차 전당원투표를 진행하였고 총 66.3%가 통합에 찬성하였다. 그러자 중도당에서 내분이 일어난다. 중도우파 성향의 자유중도파와 혁신그룹, 중도성향의 개혁파는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중도좌파 성향의 입헌중도그룹과 중도성향의 중립정치단계 일부가 군주당과의 합당에 반대하면서 탈당을 선언하자 진보그룹의 아베 노리야키는 "군주당은 우익 정당인데 굳이 우리 당과 통합을 하자고 하냐"고 불평을 토로했으며 중립정치단의 엘리자베스 워즈도 "우리 당은 중도로 나아가자고 하는데 뼛속까지 극우인 독재정당과 합당하는 것은 처음 봤다"며 비판하였다. 198년 9월 군주당은 임페로이 사클레치아 당수인 빌헬름 쿠르츠와 회동을 한 끝에 임페로이 사클레치아 지도부는 통합신당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쿠르츠는 "처음에는 율리우스파의 행보 때문에 갈라섰으나 가면 갈수록 급진적인 사람들이 떠나고 우리처럼 강한 사람들이 몇몇 없어서 존폐가 예상되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고 반응하였다.

199년 1월, 자유군주당은 끝내 군주정당 통합을 희망하는 전당원투표를 실시하였고, 투표 결과 99.9%로 찬성하면서 의결되었다.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도 전당원투표에서 88.6%로 의결되었고 자유귀족당과 제국당도 의결 상태였다. 하지만 중도당은 2차 전당원투표에서 51.5%가 찬성함에 따라 정족률 50%를 넘었기 때문에 이를 의결하기로 하자 다수의 진보그룹, 중립정치단계가 중도당을 탈당하면서 각각 자유당과 민주당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힘을 잃기 시작한 중도당은 끝내 199년 3월 통합신당 중앙당 창당을 눈앞에 두고 사실상 통합신당 참여 불참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면 통합신당 구성원은 임페로이-군주-귀족-제국당이 된다. 199년 5월 율리우스파와 엠페로우파 정치인들은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하나 된 통합신당과 함께하자는 서약을 만들었으며 사클레치아 내 보수단체들은 통합신당에 참여하여 꼭 정계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군주당은 율리우스 6세와 쿠르츠를 통합신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을 맡고, 보수성향 시민단체 출신 빌헬름 안과 루이스 미테랑, 제국당의 에릭 소크라티나,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의 빅토르 체트셴코를 창당지원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인 합당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199년 11월까지 20여개의 보수 시민단체들과 원외 중도우파 ~ 우익정당인 국가부활대혁명당가톨릭보수당, 혁신당 등 8개 정당이 통합신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200년 1월 율리우스 6세가 사클레치아의 전제군주제를 포기하고 사실상 군주국임을 인정하는 선언문을 발표했었고 도리어 20대 총선이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으로 200년 9월로 확정짓자 200년 2월 신당명칭 선정에서 군주당과 6개 정당이 추천한 통합군주당과 기타 정당이 추천한 통합동맹당 중에서 통합군주당이 만장일치로 선정되었으며 통합동맹당을 추천했던 기타 정당들은 너무 아쉽다고 밝혔다.

마침내 200년 3월, 군주당은 통합신당에 참여했던 모든 구성원들과 통합하게 되면서, 보수 진영의 통합정당인 통합군주당으로 새롭게 탈바꿈하게 된다. 이로서 자유군주당은 창당 89년만에 자연스레 해산되었고 모든 권한은 통합군주당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통합군주당은 기대와는 달리 중도층과 온건 보수층의 질타를 받아 지지층이 이탈하면서, 결국 최저 지지율인 19.1%을 기록하다가 20대 총선에서 참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성향

자유군주당은 전제군주제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율리우스파는 자유보수주의와 사회보수주의를, 율리우스파보다 파시오 성향이 강한 엠페로우파는 국가주의, 신자유주의를 지향한다. 다만 양측 모두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스탠스를 취하지만 율리우스파는 유럽식 시장 경제를 국가의 경제 체제로 내세우자는 반면 엠페로우파는 사클레치아만의 시장 경제를 주장한다. 그 중 극소수는 시장 경제가 아닌 계획 경제를 주장하는 중도 세력이 존재한다. 다만 과거 대부분의 중도파들은 시장 경제를 추구하는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자본가, 성직자, 귀족, 영주들의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일부 길드도 이에 대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세계 가톨릭교회를 내세우는 당이기 때문에 이를 믿는 지지 세력도 대부분 존재한다. 농촌, 중소 도시, 공업 도시를 중심으로 지지하는 자유당과는 달리, 자유군주당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지한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강경 스탠스를 취하며 양 파벌에서는 동성애자는 백성이 아닌 반역자며 이는 국내에서 추방하거나 사형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율리우스 6세 정권 초기 동성애자를 국내에서 추방시키는 정책을 폈는데 사클레치아 정부가 발표하는 인구 조사에서 188년에 1%였던 비율이 189년에 0.1%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어나더어스 허가 비영리단체인 이세계 성소수자 연합은 사클레치아 왕국의 인권 문제를 지적하면서 동성애 박해에 대해 비판적이다.

사클레치아의 주변국에 많이 분포하는 엘프인들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경멸하며 이들마저도 반역자 취급을 하고 있다. 엠페로우파의 경우 오크족들은 소수의 인간보다 우월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오크 우월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율리우스파는 오크족과 인간들의 평등을 추구한다며 오크와 인간간의 평등주의를 주장한다.

공화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다. 율리우스파는 자국의 소수 공화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나 다름이 없다며 소수 공화주의자들의 척결을 주장하지만 엠페로우파는 공화주의를 아예 사회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중 자본가경제협의회, 사클레치아 경제인연합, 캐피탈리스트 유니온 등의 친자본가 길드 단체들과 기독교신앙회, 신성자유단, 하나님의 축복단 등 이세계 가톨릭교회에서 파생된 신흥 종교 교단들도 이 당을 지지하고 있다.

계파

자유군주당의 계파로는 율리우스파와 엠페로우파로 나뉜다. 그 중 율리우스파는 충성파, 신파, 개혁파, 급진파, 변혁동맹, 사회정의혁명단 등이 존재하며 엠페로우파는 전진 사클레치아, 자유의 아침, 국가혁명연합, 사클레치아 애국동맹 등이 존재한다. 극소수로는 중도주의/중립파적인 스탠스를 띄며 구 율리우스파 중도파와 온건파들이다.

과거에는 율리우스파의 파벌 중 급진파, 중도파, 온건파 등 다양했으나 중도/온건파는 인도네시아 출신 중도파 정치인인 필리노이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벌인 필리노이의 난으로 인해 중도파와 온건파가 비주류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후 의원총회에서 중도파 정치인들을 당 지도부에 유입시겨 사실상 당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중도파와 온건파는 율리우스 4세 체제부터 당권을 빼앗겼으나 전후 처리에서 당권을 다시 탈환하였으며 16대 의회선거부터 카이포스가 집권하면서 양 파벌의 실망으로 탈당을 겪다가 자신 역시 은퇴함에 따라 결국 대부분이 쪼그라들고 사실상 사라졌으며 통합군주당부터는 대거 탈당하여 중도정치연합에 들어간다. 충성파는 초기에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신생 충성파, 구 급진파 세력들이 다수 들어오면서 주류 세력이 되었다.

과거 카이포스파와 반카이포스파라는 두 개의 세력이 등장했으며, 카이포스파는 실용주의, 자유주의 우파를 지향하는 반면 반카이포스파는 권위주의, 정통 보수주의 우파를 지향하는 편이지만 이후 반카이포스파가 분당으로 타 정당으로 넘어갔고, 그 후신이 되는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는 반카이포스파와는 달리 약간 급진적인 형태를 띈다.

선거 결과

국민의회 의회선거

선거년도 합계 득표율 의석 +/– 집권 여부
120년
35 35%
35 / 100 (35%)
증가 35 야당
130년
13 13%
13 / 100 (13%)
감소 22 야당
140년
50 50%
50 / 100 (50%)
증가 37 여당(LMP-DPP)
150년
6,792,840 71.3%
80 / 100 (80%)
증가 30 여당
160년
6,792,840 71.3%
69 / 100 (69%)
감소 11 여당
(LMP-DPP-CP)
170년
3,210,091 43.3%
12 / 100 (12%)
감소 57 야당
(LMP-CP)
180년
4,989,071 43.3%
78 / 100 (78%)
증가 66 여당
(LMP-CP-NCP)
190년
3,912,203 51.3%
59 / 100 (59%)
감소 19 여당
(LMP-CP-NCP)

지방선거

선거년도 합계 득표율 지방선거의원 +/–
195년
6,985,103 69.9%
1,100 / 2,600 (42%)
신생

논란 및 사건사고

백성 대변 능력 부족

백성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율리우스 1세 당시에는 신경제계획을 주장하였으나 엠페로우파와 율리우스파 간의 갈등이 있었고, 이 때문에 국왕의 예상보다 실행이 늦춰지는 사태가 발생하여 백성들의 공분을 샀으며, 덩달아 이에 반감을 가진 백성들이 필리노이의 난을 주도하면서 결국 사퇴까지 이어졌으며 율리우스 5세 당시 백성들이 이를 싫어하자 백성들을 대변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했으며 지지율은 점점 줄어든데다가 폐암으로 인하여 사퇴했고, 율리우스 6세 역시 임기 초반에선 백성들의 비판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임기 중반부터는 국가안정정책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자유십자단의 만행

유로아스피아 전쟁 당시 군주당은 지하당사를 만들어 활동하였었고, 중소 준군사조직이었던 자유십자단은 이를 동원하여 자유군주당과 율리우스 4세를 홍보하는 등의 부역 행위를 저질렀다. 당연히 반대하는 사람들은 고문을 당해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는데, 십자단은 사람들을 일리오스 지하수용소라는 곳에서 수용시켰고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비슷한 대학살을 자행했다. 또, 수용된 사람 일부를 실험에도 쓰이기도 했다. 한편 여성들은 이들에게 성고문을 당했었는데, "생명의 잉태"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무려 30,000명의 남성 십자단원들이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19세 청소년은 물론, 49세 중년까지 다양한데다가 이 곳에서 무려 10,000명의 여성과 성관계를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 205년 조사 결과 350,000명이 강간을 당했으며 2,500명이 임신, 170명이 야외 노출을 강제로 시키기도 했고 4,000명은 불법으로 성노예가 되었다고 과거사조사위원회가 밝혔다.

이 때문에 전쟁 종료 직전, 수많은 십자단 부역자들은 자신의 자택에 지하실을 만들어 연합군이 오기 전에 노예들을 가져가 계속해서 자신들의 성적 욕구 해소용으로 썼었다는 소문이 전국에 나돌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십자단원, 십자단 부역자들은 1,500명에 불과하였으며 207년 율리우스 아페렌스 총리의 과거사 청산 캠페인으로 인해 대부분이 사형을 당하거나 종신형으로 수감된 상태이다.

이후 자유십자단은 부역자들과 유사 조직을 수차례 결성하였으나 해산되기도 했으며 이는 180년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군주당도 전쟁 협력과 홍보를 위해 부역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고, 지도부 측은 "사실 이건 십자단이 그랬다. 우리는 전쟁 당시에 지하당사로 이전한 것 밖에 없다"고 밝혔는데, 소수당원들은 지하당사에서 십자단의 부역 행위를 위해 돈을 지원해준 거 아니냐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지도부의 발언이 일부 의원들에게 전해지면서 군주당의 십자단 부역 지원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고 특히 구 엠페로우파 소속 엘리나스 율리오스 의원은 197년 3월 논평에서 "만약 이 당이 십자단 부역행위를 지원했다면, 우리는 파시오스트인가?"라는 망언을 해 논란이 일었다.

생명의 잉태 관련 사건에서도 망언은 끊이지 않았는데 율리우스파 급진파 성향의 니키 에로스 의원은 199년 4월 "만약 우리를 전쟁 부역자들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들은 남자들 못 사귀어보고 결국엔 그 남자들한테 훅 가버려서 인권따위 집어쳐버린 창녀들 아닌가?"라고 망언을 하여 윤리위원회까지 간 사례가 있었는데, 니키는 과거 197년 5월 연설에서, "과거사 청산? 필요 없습니다. 부역 행위? 그건 거짓된 사실입니다. 그냥 우리들 보고 나가라는 말 아닙니까?"라고 말하여 보수당 의원들과 야당 의원들이 반발한 적이 있다. 결국 니키는 윤리위에서 제명을 확정했는데, 니키는 "맞는 말 했는데 왜 제명이냐"며 반발했고 결국 제명 처리를 하루 앞두고 탈당하여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에 입당하다가 몇몇 무소속 의원들과 함께 사클레치아의 대안을 창당하였다.

당 내 갈등과 사건사고 미흡

사클레치아 전문가 33인의 증언에 따르면, 자유군주당은 당 내 갈등과 사건사고 대처에 미흡하다는 평이 있다. 필리노이의 난에서는 동상 건설에서 시작된 갈등이 곧 국왕 퇴진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율리우스 2세는 진압 작전을 펼쳤으나 중소도시, 대도시를 제외한 일부 지역에만 그쳤고, 심지어는 백성들을 색출해내어 시위자가 나올 시 강력 처벌하는 대책을 내놨으나 오히려 백성들만 사망하고 여성들은 고문실로 끌려갔기에 반발이 커지면서 결국 군중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퇴진 운동이 점차 거세졌다는 평가가 있다.

성 관련 논란

189년 11월 티파 율리오시아 의원이 의원실에서 남성 직원을 성추행했다는 논란이 일었고, 그 후 제명되었다. 하지만 그 전에는 성폭행 논란이 있었는데, 165년 3월 오카르 네페르시아 의원이 그의 동료 2명과 함께 4명의 여성을 강간한 사고가 터졌었다. 그러나 군주당은 이를 제명하지 않고 오히려 당선에만 집중했다는 지적이 나오자 이에 대한 해명이 나오지 않아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196년 9월 예제프 로베르트 타야프 의원이 10살 어린이를 성추행했다며 제명되었고, 200년 1월 게르마스-앵본계 혼혈인 에르빈 노다카 의원이 앵본에서 살 당시 성인물을 판매하고 있었다는 논란이 드러나자 곧바로 제명을 확정지었다.

군주정당 합당 이후 전망

자유군주당은 통합을 통해 통합군주당으로 합당하였으며, 과연 이번 합당을 통해서 중도부터 우익 내지 극우까지 스펙트럼을 넓혔으나 과연 백성들을 어떻게 대변할지, 당 내 갈등과 사건사고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가 문제다.

자유군주당은 필리노이의 난부터 사상 초유의 1·2차 분당 사태 등을 겪었고, 특히 당 내 갈등과 카이포스의 행보가 제1차 분당을 촉발시켰으며 당의 정체성마저 상실해버린 율리우스파의 행보로 인해 엠페로우파 다수가 탈당하여 제2차 분당을 일으켰다.

또한 자유십자단의 만행과 유로아스피아 전쟁 어나더어스 측에서는 경고를 받아 30년 안에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래서 군주당은 합당 이후에도 다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전쟁 방지·과거사 청산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는 207년 과거사 청산 캠페인이라는 정책을 실시하여 과거사를 어느 정도 해결하기도 했지만, 아페렌스 총리의 돈세탁 의혹 등으로 프로젝트가 중단되기도 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