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만주전쟁 (서태평양 연대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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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제1차 만주전쟁은 1931년 9월 18일~1932년 10월 10일 기간동안 대청제국과 대화제국을 중심으로 대한제국, 우량카이공화국, 대일본제국, 만주제국 등이 참전한 전쟁이다. 1918년 2월 청국의 '관내상실'과 대화제국 건국으로 촉발된 양국간의 갈등과 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된 사건이며, 1세기에 걸친 한만동맹 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동아시아 최초 공화혁명인 만주혁명의 촉발과 만주 국민국가 체제의 형성, 정복왕조 체제의 종식 등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 사건이나 만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이후 제2차 만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배경==
요동과 만주의 영유권은 동아시아사에서 남방-북방간 오랜 갈등의 소재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당은 평양-요동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지배하였으나 토번, 돌궐, 거란 등과의 전쟁을 겪는 와중 발해의 서진으로 요동 영유권을 상실하였고, 이후 만주는 요, 금, 원 북방 정복왕조의 영토가 되어 장성 이남의 정주민 지역과는 별개의 구역으로 통치되었다. 명이 흥기하여 요동에 총병관을 두면서 700여년만에 화하계 왕조가 요동을 지배하였고, [[정통의 변(서태평양 연대기)]]으로 수립된 후원 왕조 역시 요동과 만주를 강역에 두었다. 1580년 후요가 건국되면서 만주는 잠시 회북과 단절되었으나, 1636년 청의 입관으로 만주와 회북은 다시금 연결되었다. 역사적으로 936년 요의 연운 16주 획득 이후 1918년 청의 관내상실까지 거의 1천년 세월동안 만주와 회북, 특히 연 지방은 서로 다른 혈통, 언어, 풍습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국가로 지낸 역사가 채 100년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 만주는 낮은 농업생산력과 인구부양력으로 인해 회북을 침공하지 않고서는 자체적으로 국체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회북은 북방인들이 언제든지 자신들을 공격, 정복할 수 있는 거점인 요동을 내버려두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이유가 없었다.
1918년 2~3월에 걸친 직례지역 반만주 폭동과 이로 인한 관내상실을 겪은 청조는 멸망 직전의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의 개입으로 산해관 이동지역을 건사하고 이른바 '''북청'''으로 불리는 체제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청 시기 관내에서 누리던 기득권을 잊지 못했던 관내파 만주인들은 금, 청에 이은 제3의 입관, 관내 회복을 주장하며 만주 내 민권운동을 탄압했고, 청조를 회북에서 축출하고 건국된 대화제국 역시 국내 공화주의자들과 군벌들을 진압하고 제국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할 방안으로 '''중화 회복'''을 부르짖으며 그 첫 과제로 '''고토 요동 회복'''을 제시했다.
1918년 멸망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청조는 만주에서 군사력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재정의 악화와 국내외의 반발로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관내 청조는 만주가 한국과의 교역으로 벌어들인 부를 수도 북경으로 거둬가는 데 급급하여 만주의 통치·행정체계 구축과 정비에 별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만주 현지에서 한국의 도움으로 구축한 통치체계는 청조가 그 때 그 때 정치상황에 따라 만주 왕실을 폐하고 복설하고를 반복하면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웃한 한국 사례를 익히 듣고 보아왔던 관외 만주인들은 만주 방위가 아닌 재입관, 자신들은 통관조칙<ref>통관(通關), 즉 산해관을 통과하는 데 관련하여 내려진 조칙. 이 조칙에 따라 관외인들의 관내 진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관내에서 발급된 통행허가증이 없이는 산해관을 넘어올 수 없었다. 만일 관외인이 해로나 몽골 등을 경유하여 관내에 진입했다가 적발되면 최대 참수까지도 가능했다.</ref>으로 가보지도 못한 관내 회복을 위해 군입대를 해야 한다는 데 극력 반발했고, 징병령에 대해 '''헌법, 의회, 선거'''로 대표되는 민권 보장을 요구했다. 요동 침공을 벼르고 있던 화국은 당연히 청의 재입관론을 들먹이며 화-만 분쟁이 '내전'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주변국의 개입을 차단하려 하였고, 안그래도 1차대전 패전국으로 국제적으로 입지가 위태롭던 청은 1920년대 패전국들의 가입 행렬과 상임이사국인 한국 및 일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ref>사실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은 별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청의 가입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ref> 화국과의 분쟁을 선해결하라는 권고를 받으며 국제연맹 가입이 번번이 좌절되었다.
1918년 이래 양국의 국력은 잘 개발된 농업생산력과 산업시설, 1억 인구의 소비시장을 갖춘 화국이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화국이 만주를 곧장 침공할 수 없었던 것은 우선 한국과 일본의 개입을 우려한 것과 함께, 화국 내부의 정치투쟁과 옌시산 등 서부 군벌과의 내전 등 여러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특히 건국 직후인 1919년 홍헌제 위안스카이가 훙하고 함원제 위안커원이 승계하는 과정에서 위안스카이의 장자 위안커딩의 반발이 심했는데, 이 틈을 타 공화주의, 공산주의 혁명이 빈발했고 펑궈장을 위시한 군부는 이런 혁명과 시위들을 때려잡으면서 발언권을 키웠다. 1924년 이후 화국 정권은 펑궈장-우페이푸로 이어지는 군부세력이 주도하였고, 1926년 산시의 옌시산 토벌에 성공하면서 만주 침공을 위한 국내 여건 조성을 착착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1928년, 일본이 화국과 전격 수교했다. 이는 팽창주의 성향의 타나카 기이치 내각이 만주에서 한국의 견제에 영향력 확대가 한계에 부딪치자 기존의 대만주 정책을 바꿔 화국에 접근한 것으로, 대놓고 화국의 만주 침공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청은 강력히 반발하였고 한국도 이에 동조하였으나 정작 한국 역시 재입관을 주장하며 동아시아 구상을 어그러뜨리는 청조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한국은 청이 만주에서 국민국가를 건설하여 화-일 합작을 가로막고 일본의 팽창와 중화권 통일을 막는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을 원하였으나 재입관주의가 만주 내부 정세의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화국의 팽창주의를 가속화시킨다고 보아 불만이 컸다. 이에 한국은 전 만주국왕 훙루이의 딸 아이신교로 시하 공주가 1928년 할빈 봉기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신병을 확보, 망명을 성공시켰고 청조는 만주 왕실의 유일한 계승권자를 손에 넣은 한국을 극도로 경계하며 양국의 관계는 한국이 언제 만주에서 쿠데타를 사주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험악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references />

2021년 9월 30일 (목) 13:26 판

제1차 만주전쟁 (서태평양 연대기)
날짜1931년 9월 18일~1932년 10월 10일
장소대청제국(만주 6로지역)
상태 종결
교전국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대한제국 대한제국
틀:나라자료 우량카이공화국
틀:나라자료 대화제국
틀:나라자료 대일본제국
만주제국 만주제국
지휘관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아이신교로 푸이(서태평양 연대기)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아이신교로 시하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아이신교로 시치아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타타라 알러하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마기야 잔샨
대한제국 이철
대한제국 강현
틀:나라자료 우량카이공화국 오로고드 아바타이
틀:나라자료 대화제국 위안커원
틀:나라자료 대화제국 우페이푸
틀:나라자료 대화제국 쑨촨팡
틀:나라자료 대일본제국 미나미 지로
틀:나라자료 대일본제국 이시와라 간지
만주제국 장기야 조린
군대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300,000명
대한제국 8,500명
틀:나라자료 우량카이공화국 7,850명

총 합: 387,000명
틀:나라자료 대화제국 270,000명
틀:나라자료 대일본제국 3,600명
만주제국 28,400명

총 합: 302,000명

개요

제1차 만주전쟁은 1931년 9월 18일~1932년 10월 10일 기간동안 대청제국과 대화제국을 중심으로 대한제국, 우량카이공화국, 대일본제국, 만주제국 등이 참전한 전쟁이다. 1918년 2월 청국의 '관내상실'과 대화제국 건국으로 촉발된 양국간의 갈등과 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된 사건이며, 1세기에 걸친 한만동맹 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동아시아 최초 공화혁명인 만주혁명의 촉발과 만주 국민국가 체제의 형성, 정복왕조 체제의 종식 등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 사건이나 만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이후 제2차 만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배경

요동과 만주의 영유권은 동아시아사에서 남방-북방간 오랜 갈등의 소재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당은 평양-요동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지배하였으나 토번, 돌궐, 거란 등과의 전쟁을 겪는 와중 발해의 서진으로 요동 영유권을 상실하였고, 이후 만주는 요, 금, 원 북방 정복왕조의 영토가 되어 장성 이남의 정주민 지역과는 별개의 구역으로 통치되었다. 명이 흥기하여 요동에 총병관을 두면서 700여년만에 화하계 왕조가 요동을 지배하였고, 정통의 변(서태평양 연대기)으로 수립된 후원 왕조 역시 요동과 만주를 강역에 두었다. 1580년 후요가 건국되면서 만주는 잠시 회북과 단절되었으나, 1636년 청의 입관으로 만주와 회북은 다시금 연결되었다. 역사적으로 936년 요의 연운 16주 획득 이후 1918년 청의 관내상실까지 거의 1천년 세월동안 만주와 회북, 특히 연 지방은 서로 다른 혈통, 언어, 풍습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국가로 지낸 역사가 채 100년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 만주는 낮은 농업생산력과 인구부양력으로 인해 회북을 침공하지 않고서는 자체적으로 국체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회북은 북방인들이 언제든지 자신들을 공격, 정복할 수 있는 거점인 요동을 내버려두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이유가 없었다.

1918년 2~3월에 걸친 직례지역 반만주 폭동과 이로 인한 관내상실을 겪은 청조는 멸망 직전의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의 개입으로 산해관 이동지역을 건사하고 이른바 북청으로 불리는 체제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청 시기 관내에서 누리던 기득권을 잊지 못했던 관내파 만주인들은 금, 청에 이은 제3의 입관, 관내 회복을 주장하며 만주 내 민권운동을 탄압했고, 청조를 회북에서 축출하고 건국된 대화제국 역시 국내 공화주의자들과 군벌들을 진압하고 제국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할 방안으로 중화 회복을 부르짖으며 그 첫 과제로 고토 요동 회복을 제시했다.

1918년 멸망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청조는 만주에서 군사력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재정의 악화와 국내외의 반발로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관내 청조는 만주가 한국과의 교역으로 벌어들인 부를 수도 북경으로 거둬가는 데 급급하여 만주의 통치·행정체계 구축과 정비에 별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만주 현지에서 한국의 도움으로 구축한 통치체계는 청조가 그 때 그 때 정치상황에 따라 만주 왕실을 폐하고 복설하고를 반복하면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웃한 한국 사례를 익히 듣고 보아왔던 관외 만주인들은 만주 방위가 아닌 재입관, 자신들은 통관조칙[1]으로 가보지도 못한 관내 회복을 위해 군입대를 해야 한다는 데 극력 반발했고, 징병령에 대해 헌법, 의회, 선거로 대표되는 민권 보장을 요구했다. 요동 침공을 벼르고 있던 화국은 당연히 청의 재입관론을 들먹이며 화-만 분쟁이 '내전'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주변국의 개입을 차단하려 하였고, 안그래도 1차대전 패전국으로 국제적으로 입지가 위태롭던 청은 1920년대 패전국들의 가입 행렬과 상임이사국인 한국 및 일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2] 화국과의 분쟁을 선해결하라는 권고를 받으며 국제연맹 가입이 번번이 좌절되었다.

1918년 이래 양국의 국력은 잘 개발된 농업생산력과 산업시설, 1억 인구의 소비시장을 갖춘 화국이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화국이 만주를 곧장 침공할 수 없었던 것은 우선 한국과 일본의 개입을 우려한 것과 함께, 화국 내부의 정치투쟁과 옌시산 등 서부 군벌과의 내전 등 여러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특히 건국 직후인 1919년 홍헌제 위안스카이가 훙하고 함원제 위안커원이 승계하는 과정에서 위안스카이의 장자 위안커딩의 반발이 심했는데, 이 틈을 타 공화주의, 공산주의 혁명이 빈발했고 펑궈장을 위시한 군부는 이런 혁명과 시위들을 때려잡으면서 발언권을 키웠다. 1924년 이후 화국 정권은 펑궈장-우페이푸로 이어지는 군부세력이 주도하였고, 1926년 산시의 옌시산 토벌에 성공하면서 만주 침공을 위한 국내 여건 조성을 착착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1928년, 일본이 화국과 전격 수교했다. 이는 팽창주의 성향의 타나카 기이치 내각이 만주에서 한국의 견제에 영향력 확대가 한계에 부딪치자 기존의 대만주 정책을 바꿔 화국에 접근한 것으로, 대놓고 화국의 만주 침공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청은 강력히 반발하였고 한국도 이에 동조하였으나 정작 한국 역시 재입관을 주장하며 동아시아 구상을 어그러뜨리는 청조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한국은 청이 만주에서 국민국가를 건설하여 화-일 합작을 가로막고 일본의 팽창와 중화권 통일을 막는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을 원하였으나 재입관주의가 만주 내부 정세의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화국의 팽창주의를 가속화시킨다고 보아 불만이 컸다. 이에 한국은 전 만주국왕 훙루이의 딸 아이신교로 시하 공주가 1928년 할빈 봉기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신병을 확보, 망명을 성공시켰고 청조는 만주 왕실의 유일한 계승권자를 손에 넣은 한국을 극도로 경계하며 양국의 관계는 한국이 언제 만주에서 쿠데타를 사주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험악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1. 통관(通關), 즉 산해관을 통과하는 데 관련하여 내려진 조칙. 이 조칙에 따라 관외인들의 관내 진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관내에서 발급된 통행허가증이 없이는 산해관을 넘어올 수 없었다. 만일 관외인이 해로나 몽골 등을 경유하여 관내에 진입했다가 적발되면 최대 참수까지도 가능했다.
  2. 사실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은 별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청의 가입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