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만주전쟁 (서태평양 연대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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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멸망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청조는 만주에서 군사력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재정의 악화와 국내외의 반발로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관내 청조는 만주가 한국과의 교역으로 벌어들인 부를 수도 북경으로 거둬가는 데 급급하여 만주의 통치·행정체계 구축과 정비에 별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만주 현지에서 한국의 도움으로 구축한 통치체계는 청조가 그 때 그 때 정치상황에 따라 만주 왕실을 폐하고 복설하고를 반복하면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웃한 한국 사례를 익히 듣고 보아왔던 관외 만주인들은 만주 방위가 아닌 재입관, 자신들은 통관조칙<ref>통관(通關), 즉 산해관을 통과하는 데 관련하여 내려진 조칙. 이 조칙에 따라 관외인들의 관내 진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관내에서 발급된 통행허가증이 없이는 산해관을 넘어올 수 없었다. 만일 관외인이 해로나 몽골 등을 경유하여 관내에 진입했다가 적발되면 최대 참수까지도 가능했다.</ref>으로 가보지도 못한 관내 회복을 위해 군입대를 해야 한다는 데 극력 반발했고, 징병령에 대해 '''헌법, 의회, 선거'''로 대표되는 민권 보장을 요구했다. 요동 침공을 벼르고 있던 화국은 당연히 청의 재입관론을 들먹이며 화-만 분쟁이 '내전'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주변국의 개입을 차단하려 하였고, 안그래도 1차대전 패전국으로 국제적으로 입지가 위태롭던 청은 1920년대 패전국들의 가입 행렬과 상임이사국인 한국 및 일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ref>사실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은 별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청의 가입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ref> 화국과의 분쟁을 선해결하라는 권고를 받으며 국제연맹 가입이 번번이 좌절되었다.
1918년 멸망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청조는 만주에서 군사력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재정의 악화와 국내외의 반발로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관내 청조는 만주가 한국과의 교역으로 벌어들인 부를 수도 북경으로 거둬가는 데 급급하여 만주의 통치·행정체계 구축과 정비에 별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만주 현지에서 한국의 도움으로 구축한 통치체계는 청조가 그 때 그 때 정치상황에 따라 만주 왕실을 폐하고 복설하고를 반복하면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웃한 한국 사례를 익히 듣고 보아왔던 관외 만주인들은 만주 방위가 아닌 재입관, 자신들은 통관조칙<ref>통관(通關), 즉 산해관을 통과하는 데 관련하여 내려진 조칙. 이 조칙에 따라 관외인들의 관내 진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관내에서 발급된 통행허가증이 없이는 산해관을 넘어올 수 없었다. 만일 관외인이 해로나 몽골 등을 경유하여 관내에 진입했다가 적발되면 최대 참수까지도 가능했다.</ref>으로 가보지도 못한 관내 회복을 위해 군입대를 해야 한다는 데 극력 반발했고, 징병령에 대해 '''헌법, 의회, 선거'''로 대표되는 민권 보장을 요구했다. 요동 침공을 벼르고 있던 화국은 당연히 청의 재입관론을 들먹이며 화-만 분쟁이 '내전'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주변국의 개입을 차단하려 하였고, 안그래도 1차대전 패전국으로 국제적으로 입지가 위태롭던 청은 1920년대 패전국들의 가입 행렬과 상임이사국인 한국 및 일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ref>사실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은 별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청의 가입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ref> 화국과의 분쟁을 선해결하라는 권고를 받으며 국제연맹 가입이 번번이 좌절되었다.


1918년 이래 양국의 국력은 잘 개발된 농업생산력과 산업시설, 1억 인구의 소비시장을 갖춘 화국이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화국이 만주를 곧장 침공할 수 없었던 것은 우선 한국과 일본의 개입을 우려한 것과 함께, 화국 내부의 정치투쟁과 옌시산 등 서부 군벌과의 내전 등 여러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특히 건국 직후인 1919년 홍헌제 위안스카이가 훙하고 함원제 위안커원이 승계하는 과정에서 위안스카이의 장자 위안커딩의 반발이 심했는데, 이 틈을 타 공화주의, 공산주의 혁명이 빈발했고 펑궈장을 위시한 군부는 이런 혁명과 시위들을 때려잡으면서 발언권을 키웠다. 1924년 이후 화국 정권은 펑궈장-우페이푸로 이어지는 군부세력이 주도하였고, 1926년 산시의 옌시산 토벌에 성공하면서 만주 침공을 위한 국내 여건 조성을 착착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1918년 이래 양국의 국력은 잘 개발된 농업생산력과 산업시설, 1억 인구의 소비시장을 갖춘 화국이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화국이 만주를 곧장 침공할 수 없었던 것은 우선 한국과 일본의 개입을 우려한 것과 함께, 화국 내부의 정치투쟁과 옌시산 등 서부 군벌과의 내전 등 여러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특히 건국 직후인 1919년 홍헌제 위안스카이가 훙하고 함원제 위안커원이 승계하는 과정에서 위안스카이의 장자 위안커딩의 반발이 심했는데, 이 틈을 타 공화주의, 공산주의 혁명이 빈발했고 펑궈장을 위시한 군부는 이런 혁명과 시위들을 때려잡으면서 발언권을 키웠다. 1924년 이후 화국 정권은 펑궈장-우페이푸로 이어지는 군부세력이 주도하였고, 1926년 산시의 옌시산 토벌에 성공하면서 만주 침공을 위한 국내 여건 조성을 착착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또한 화인들의 만주인 학살로부터 숨어지내던 청 황실 인사들을 보호하는 대가로 만주에 잠입, 쿠데타를 사주하는 등 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들 쿠데타는 단기적으로는 별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귀환 황족들의 잇따른 쿠데타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에 이른 청 황실은 급기야 1924년 2월 모든 귀환 황족들의 황위 계승권을 영구히 박탈해버리면서 수만명의 귀환 황족들과 황위계승권을 유지한 순친왕계가 대립하는 상황을 야기했다.


1928년, 일본이 화국과 전격 수교했다. 이는 만주에서 일본의 영향력 한계가 한국의 견제로 한계에 부딪치자 팽창주의 성향의 타나카 키이치 내각이 기존의 동아시아 정책을 바꿔 화국에 접근한 것으로, 대놓고 화국의 만주 침공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청은 강력히 반발하였고 한국도 이에 동조하였으나 정작 한국 역시 재입관을 주장하며 한국의 동아시아 구상을 어그러뜨리는 청조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한국은 청이 만주에서 국민국가를 건설하여 풍부한 부존자원을 바탕으로 경제를 개발하고(그 과정에서 한국도 한몫을 챙기고)<ref>만주의 철광석이나 석탄은 한국에게 오랫동안 인기있는 수입품목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만주 북부의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한국 시장에 저렴한 농축산물을 공급하는 역할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ref> 한국과 함께 회북을 견제하는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을 기대하였으나, 재입관주의로 만주 내부 정세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화국의 팽창주의만 가속화시킨다고 보아 불만이 컸다. 이에 한국은 전 만주국왕 훙루이의 딸 아이신교로 시하 공주가 1928년 할빈 봉기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신병을 확보, 망명을 성공시켰고 청조는 만주 왕실의 유일한 계승권자를 손에 넣은 한국을 극도로 경계하며 양국의 관계는 한국이 언제 만주에서 쿠데타를 사주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험악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1928년, 일본이 화국과 전격 수교했다. 이는 만주에서 일본의 영향력 한계가 한국의 견제로 한계에 부딪치자 팽창주의 성향의 타나카 키이치 내각이 기존의 동아시아 정책을 바꿔 화국에 접근한 것으로, 대놓고 화국의 만주 침공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청은 강력히 반발하였고 한국도 이에 동조하였으나 정작 한국 역시 재입관을 주장하며 한국의 동아시아 구상을 어그러뜨리는 청조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한국은 청이 만주에서 국민국가를 건설하여 풍부한 부존자원을 바탕으로 경제를 개발하고(그 과정에서 한국도 한몫을 챙기고)<ref>만주의 철광석이나 석탄은 한국에게 오랫동안 인기있는 수입품목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만주 북부의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한국 시장에 저렴한 농축산물을 공급하는 역할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ref> 한국과 함께 회북을 견제하는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을 기대하였으나, 재입관주의로 만주 내부 정세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화국의 팽창주의만 가속화시킨다고 보아 불만이 컸다. 이에 한국은 전 만주국왕 훙루이의 딸 아이신교로 시하 공주가 1928년 할빈 봉기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신병을 확보, 망명을 성공시켰고 청조는 만주 왕실의 유일한 계승권자를 손에 넣은 한국을 극도로 경계하며 양국의 관계는 한국이 언제 만주에서 쿠데타를 사주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험악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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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수교 당시 일본의 계획은 1930년경에는 화국과 함께 만주를 동서 양면에서 침공하여 무단강 이동지역을 할양받고, 만일 한국이 반발할 경우 한국계 인구가 많은 - 그리고 한국이 군사 점령하기도 한 - 남부 7~9개 현에 대해서는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이 계획은 하마구치 내각이 강력한 긴축정책을 추진하면서 무기한 연기되었으나, 대공황은 일본의 긴축 기조를 전면 붕괴시켰고 역시 대공황의 여파가 불어닥친 화국은 연일 일본 군부에 만주 침공 지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화국 역시 만화분단 이후 한국과 영사관조차 개설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어 무역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대공황이 닥쳤기 때문에 만주를 전면 합병하여 한국에게 관계개선을 강요하는 것만이 돌파구라고 여기게 되었다.
일화수교 당시 일본의 계획은 1930년경에는 화국과 함께 만주를 동서 양면에서 침공하여 무단강 이동지역을 할양받고, 만일 한국이 반발할 경우 한국계 인구가 많은 - 그리고 한국이 군사 점령하기도 한 - 남부 7~9개 현에 대해서는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이 계획은 하마구치 내각이 강력한 긴축정책을 추진하면서 무기한 연기되었으나, 대공황은 일본의 긴축 기조를 전면 붕괴시켰고 역시 대공황의 여파가 불어닥친 화국은 연일 일본 군부에 만주 침공 지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화국 역시 만화분단 이후 한국과 영사관조차 개설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어 무역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대공황이 닥쳤기 때문에 만주를 전면 합병하여 한국에게 관계개선을 강요하는 것만이 돌파구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변수가 발생했다. 1931년 2월 눈이우라로의 사르투라는 작은 마을에서 당시 추산으로만 가채량 수억 배럴 규모의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당연히 일화 양국에서 당장에라도 만주를 침공하자며 난리가 났지만, 군축주의자였던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리는 경제회복에 있어 서방 및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신념 아래 사르투 유전 개발 및 동청철도 개량에 일본이 참여하는 등 최대한 온건한 방식으로 대응하려 하였다. 한국 역시 일본 측의 움직임에 호응했으나, 이번에는 청 정부가 외국 자본의 사르투 유전 참여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references />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변수가 발생했다. 1931년 2월 눈이우라로의 사르투라는 작은 마을에서 당시 추산으로만 가채량 수억 배럴 규모의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당연히 일화 양국에서 당장에라도 만주를 침공하자며 난리가 났지만, 군축주의자였던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리는 경제회복에 있어 서방 및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신념 아래 사르투 유전 개발 및 동청철도 개량에 일본이 참여하는 등 최대한 온건한 방식으로 대응하려 하였다. 한국 역시 일본 측의 움직임에 호응했으나, 이번에는 청 정부가 외국 자본의 사르투 유전 참여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1923년 무리한 자무하 천도로 재정지출이 겉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대공황을 맞이한 청국은 사르투 유전으로 단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고, 무엇보다 수백년간 만주의 경제권을 쥐고 흔든 한국이 이제는 만주의 새로운 젖줄이 될 유전에까지 손을 댄다는 데 대한 황실과 관내계 조정 인사들의 반감이 매우 컸다. 그렇다고 대놓고 화국과 손을 잡아버린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청조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외국 자본을 배제하고 유전을 자체 개발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사르투 유전 탐사를 위해 미국 스탠더드 사에 보증을 해가며 기술진을 불러온 것은 청이 아닌 한국 금강사였기 때문에 반감이고 뭐고 간에 그냥 통수와 먹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ref>청국이 내세운 논리는 당시 한국과 일본 정부가 청국 기업에게 국내 광산의 채굴권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한국 기업의 채굴권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청국 기업이 만주 광산을 놔두고 한국에서 광산 개발 사업을 벌일 일 자체가 없었으니 두 나라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트집으로 치부되었다. 일반적으로 탐사권은 채굴권 획득을 위한 사전단계로 인식되므로 채굴권에 상호주의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탐사권부터 불허해야 했는데 한국 기업이 돈 들여 탐사시추 다 해놓으니까 갑자기 태도를 바꿔버린 행태는 금강사에게서 돈만 받으면 그만인 스탠더드 측에서도 맹렬히 비난할 정도였다.</ref> 청국도 나름대로 탐사비용 지불 의사를 내비쳤으나 당연히 개발이익에 비하면 택도 없는 규모였으니 금강사는 국제소송까지 걸어가며 극렬하게 반발했고 한국 정부도 이미 전세계적으로 최중요 자원으로 떠오른 석유가 엮인 사건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청 정부를 압박했다. 덩달아 미국 언론들마저 청을 '''강도(Robbery)'''라 부르며 맹비난했고 이는 이후 전쟁 초기 서방권이 對만주 지원에 시큰둥한 입장을 보이는 빌미가 되었다.<references />

2021년 10월 1일 (금) 01:10 판

제1차 만주전쟁 (서태평양 연대기)
날짜1931년 9월 18일~1932년 10월 10일
장소대청제국(만주 6로지역)
상태 종결
교전국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대한제국 대한제국
틀:나라자료 우량카이공화국
틀:나라자료 대화제국
틀:나라자료 대일본제국
만주제국 만주제국
지휘관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아이신교로 푸이(서태평양 연대기)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아이신교로 시하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아이신교로 시치아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타타라 알러하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마기야 잔샨
대한제국 이철
대한제국 강현
틀:나라자료 우량카이공화국 오로고드 아바타이
틀:나라자료 대화제국 위안커원
틀:나라자료 대화제국 우페이푸
틀:나라자료 대화제국 쑨촨팡
틀:나라자료 대일본제국 미나미 지로
틀:나라자료 대일본제국 이시와라 간지
만주제국 장기야 조린
군대
틀:나라자료 대청제국 300,000명
대한제국 8,500명
틀:나라자료 우량카이공화국 7,850명

총 합: 387,000명
틀:나라자료 대화제국 270,000명
틀:나라자료 대일본제국 3,600명
만주제국 28,400명

총 합: 302,000명

개요

제1차 만주전쟁은 1931년 9월 18일~1932년 10월 10일 기간동안 대청제국과 대화제국을 중심으로 대한제국, 우량카이공화국, 대일본제국, 만주제국 등이 참전한 전쟁이다. 1918년 2월 청국의 '관내상실'과 대화제국 건국으로 촉발된 양국간의 갈등과 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된 사건이며, 1세기에 걸친 한만동맹 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동아시아 최초 공화혁명인 만주혁명의 촉발과 만주 국민국가 체제의 형성, 정복왕조 체제의 종식 등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 사건이나 만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이후 제2차 만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배경

요동과 만주의 영유권은 동아시아사에서 남방-북방간 오랜 갈등의 소재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당은 평양-요동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지배하였으나 토번, 돌궐, 거란 등과의 전쟁을 겪는 와중 발해의 서진으로 요동 영유권을 상실하였고, 이후 만주는 요, 금, 원 북방 정복왕조의 영토가 되어 장성 이남의 정주민 지역과는 별개의 구역으로 통치되었다. 명이 흥기하여 요동에 총병관을 두면서 700여년만에 화하계 왕조가 요동을 지배하였고, 정통의 변(서태평양 연대기)으로 수립된 후원 왕조 역시 요동과 만주를 강역에 두었다. 1580년 후요가 건국되면서 만주는 잠시 회북과 단절되었으나, 1636년 청의 입관으로 만주와 회북은 다시금 연결되었다. 역사적으로 936년 요의 연운 16주 획득 이후 1918년 청의 관내상실까지 거의 1천년 세월동안 만주와 회북, 특히 연 지방은 서로 다른 혈통, 언어, 풍습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국가로 지낸 역사가 채 100년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 만주는 낮은 농업생산력과 인구부양력으로 인해 회북을 침공하지 않고서는 자체적으로 국체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회북은 북방인들이 언제든지 자신들을 공격, 정복할 수 있는 거점인 요동을 내버려두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이유가 없었다.

1918년 2~3월에 걸친 직례지역 반만주 폭동과 이로 인한 관내상실을 겪은 청조는 멸망 직전의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의 개입으로 산해관 이동지역을 건사하고 이른바 북청으로 불리는 체제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청 시기 관내에서 누리던 기득권을 잊지 못했던 관내파 만주인들은 금, 청에 이은 제3의 입관, 관내 회복을 주장하며 만주 내 민권운동을 탄압했고, 청조를 회북에서 축출하고 건국된 대화제국 역시 국내 공화주의자들과 군벌들을 진압하고 제국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할 방안으로 중화 회복을 부르짖으며 그 첫 과제로 고토 요동 회복을 제시했다.

1918년 멸망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청조는 만주에서 군사력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재정의 악화와 국내외의 반발로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관내 청조는 만주가 한국과의 교역으로 벌어들인 부를 수도 북경으로 거둬가는 데 급급하여 만주의 통치·행정체계 구축과 정비에 별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만주 현지에서 한국의 도움으로 구축한 통치체계는 청조가 그 때 그 때 정치상황에 따라 만주 왕실을 폐하고 복설하고를 반복하면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웃한 한국 사례를 익히 듣고 보아왔던 관외 만주인들은 만주 방위가 아닌 재입관, 자신들은 통관조칙[1]으로 가보지도 못한 관내 회복을 위해 군입대를 해야 한다는 데 극력 반발했고, 징병령에 대해 헌법, 의회, 선거로 대표되는 민권 보장을 요구했다. 요동 침공을 벼르고 있던 화국은 당연히 청의 재입관론을 들먹이며 화-만 분쟁이 '내전'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주변국의 개입을 차단하려 하였고, 안그래도 1차대전 패전국으로 국제적으로 입지가 위태롭던 청은 1920년대 패전국들의 가입 행렬과 상임이사국인 한국 및 일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2] 화국과의 분쟁을 선해결하라는 권고를 받으며 국제연맹 가입이 번번이 좌절되었다.

1918년 이래 양국의 국력은 잘 개발된 농업생산력과 산업시설, 1억 인구의 소비시장을 갖춘 화국이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화국이 만주를 곧장 침공할 수 없었던 것은 우선 한국과 일본의 개입을 우려한 것과 함께, 화국 내부의 정치투쟁과 옌시산 등 서부 군벌과의 내전 등 여러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특히 건국 직후인 1919년 홍헌제 위안스카이가 훙하고 함원제 위안커원이 승계하는 과정에서 위안스카이의 장자 위안커딩의 반발이 심했는데, 이 틈을 타 공화주의, 공산주의 혁명이 빈발했고 펑궈장을 위시한 군부는 이런 혁명과 시위들을 때려잡으면서 발언권을 키웠다. 1924년 이후 화국 정권은 펑궈장-우페이푸로 이어지는 군부세력이 주도하였고, 1926년 산시의 옌시산 토벌에 성공하면서 만주 침공을 위한 국내 여건 조성을 착착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또한 화인들의 만주인 학살로부터 숨어지내던 청 황실 인사들을 보호하는 대가로 만주에 잠입, 쿠데타를 사주하는 등 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들 쿠데타는 단기적으로는 별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귀환 황족들의 잇따른 쿠데타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에 이른 청 황실은 급기야 1924년 2월 모든 귀환 황족들의 황위 계승권을 영구히 박탈해버리면서 수만명의 귀환 황족들과 황위계승권을 유지한 순친왕계가 대립하는 상황을 야기했다.

1928년, 일본이 화국과 전격 수교했다. 이는 만주에서 일본의 영향력 한계가 한국의 견제로 한계에 부딪치자 팽창주의 성향의 타나카 키이치 내각이 기존의 동아시아 정책을 바꿔 화국에 접근한 것으로, 대놓고 화국의 만주 침공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청은 강력히 반발하였고 한국도 이에 동조하였으나 정작 한국 역시 재입관을 주장하며 한국의 동아시아 구상을 어그러뜨리는 청조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한국은 청이 만주에서 국민국가를 건설하여 풍부한 부존자원을 바탕으로 경제를 개발하고(그 과정에서 한국도 한몫을 챙기고)[3] 한국과 함께 회북을 견제하는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을 기대하였으나, 재입관주의로 만주 내부 정세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화국의 팽창주의만 가속화시킨다고 보아 불만이 컸다. 이에 한국은 전 만주국왕 훙루이의 딸 아이신교로 시하 공주가 1928년 할빈 봉기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신병을 확보, 망명을 성공시켰고 청조는 만주 왕실의 유일한 계승권자를 손에 넣은 한국을 극도로 경계하며 양국의 관계는 한국이 언제 만주에서 쿠데타를 사주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험악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이어 일본은 1929년 3월 상해에서 상국군 내 공화파 군인들을 지원, 3.13 상해 봉기를 일으켜 이른바 중화민국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상국은 이같은 사태에 당황하여 회수 전선의 병력까지 차출하여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노골적인 지원과 견제로 결국 상해를 회복하는데 실패하였고, 일본군 3개 사단이 상해에 주둔하여 화국의 최대 난적인 상국의 후방을 교란해주면서 화국은 본격적으로 만주 침공 준비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발단

1929년 말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은 동아시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국가는 단연 일본으로, 1923년 간토 대지진의 피해를 미처 복구하기도 전에 금해금으로 대표되는 긴축재정 기조를 유지하던 중 대공황을 맞이하여 농촌 경제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참사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이웃한 한국이 지속적으로 빈곤층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동시에 만주와의 경제블록화를 추진하는 모습은 일본 극우파를 자극하였다.

일화수교 당시 일본의 계획은 1930년경에는 화국과 함께 만주를 동서 양면에서 침공하여 무단강 이동지역을 할양받고, 만일 한국이 반발할 경우 한국계 인구가 많은 - 그리고 한국이 군사 점령하기도 한 - 남부 7~9개 현에 대해서는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이 계획은 하마구치 내각이 강력한 긴축정책을 추진하면서 무기한 연기되었으나, 대공황은 일본의 긴축 기조를 전면 붕괴시켰고 역시 대공황의 여파가 불어닥친 화국은 연일 일본 군부에 만주 침공 지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화국 역시 만화분단 이후 한국과 영사관조차 개설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어 무역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대공황이 닥쳤기 때문에 만주를 전면 합병하여 한국에게 관계개선을 강요하는 것만이 돌파구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변수가 발생했다. 1931년 2월 눈이우라로의 사르투라는 작은 마을에서 당시 추산으로만 가채량 수억 배럴 규모의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당연히 일화 양국에서 당장에라도 만주를 침공하자며 난리가 났지만, 군축주의자였던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리는 경제회복에 있어 서방 및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신념 아래 사르투 유전 개발 및 동청철도 개량에 일본이 참여하는 등 최대한 온건한 방식으로 대응하려 하였다. 한국 역시 일본 측의 움직임에 호응했으나, 이번에는 청 정부가 외국 자본의 사르투 유전 참여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1923년 무리한 자무하 천도로 재정지출이 겉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대공황을 맞이한 청국은 사르투 유전으로 단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고, 무엇보다 수백년간 만주의 경제권을 쥐고 흔든 한국이 이제는 만주의 새로운 젖줄이 될 유전에까지 손을 댄다는 데 대한 황실과 관내계 조정 인사들의 반감이 매우 컸다. 그렇다고 대놓고 화국과 손을 잡아버린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청조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외국 자본을 배제하고 유전을 자체 개발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사르투 유전 탐사를 위해 미국 스탠더드 사에 보증을 해가며 기술진을 불러온 것은 청이 아닌 한국 금강사였기 때문에 반감이고 뭐고 간에 그냥 통수와 먹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4] 청국도 나름대로 탐사비용 지불 의사를 내비쳤으나 당연히 개발이익에 비하면 택도 없는 규모였으니 금강사는 국제소송까지 걸어가며 극렬하게 반발했고 한국 정부도 이미 전세계적으로 최중요 자원으로 떠오른 석유가 엮인 사건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청 정부를 압박했다. 덩달아 미국 언론들마저 청을 강도(Robbery)라 부르며 맹비난했고 이는 이후 전쟁 초기 서방권이 對만주 지원에 시큰둥한 입장을 보이는 빌미가 되었다.

  1. 통관(通關), 즉 산해관을 통과하는 데 관련하여 내려진 조칙. 이 조칙에 따라 관외인들의 관내 진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관내에서 발급된 통행허가증이 없이는 산해관을 넘어올 수 없었다. 만일 관외인이 해로나 몽골 등을 경유하여 관내에 진입했다가 적발되면 최대 참수까지도 가능했다.
  2. 사실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은 별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청의 가입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3. 만주의 철광석이나 석탄은 한국에게 오랫동안 인기있는 수입품목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만주 북부의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한국 시장에 저렴한 농축산물을 공급하는 역할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4. 청국이 내세운 논리는 당시 한국과 일본 정부가 청국 기업에게 국내 광산의 채굴권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한국 기업의 채굴권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청국 기업이 만주 광산을 놔두고 한국에서 광산 개발 사업을 벌일 일 자체가 없었으니 두 나라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트집으로 치부되었다. 일반적으로 탐사권은 채굴권 획득을 위한 사전단계로 인식되므로 채굴권에 상호주의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탐사권부터 불허해야 했는데 한국 기업이 돈 들여 탐사시추 다 해놓으니까 갑자기 태도를 바꿔버린 행태는 금강사에게서 돈만 받으면 그만인 스탠더드 측에서도 맹렬히 비난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