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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주요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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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3월 24일에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로, 71.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의원 정수는 지난 총선과 동일한 299명으로 지역구는 13석 늘어났지만 전국구가 13명 줄었다. 아직까지는 전국구를 지역구 의석 비율로 배분하는 1인 1표제가 실시되었는데, 지역구 1당이 전국구 1/2를 독식하는 조항은 이번 총선에서 폐지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변화당, 민중당, 공명민주당이 참여했다. 당시 정당별로는 민주자유당의 과반수(150석) 확보, 민주당의 개헌저지선(100석) 확보, 통일국민당을 비롯한 다른 정당들의 원내교섭단체(20석) 확보가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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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여소야대로 재편되면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노태우 정부는 국정 운영에 어려움이 생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시민 운동이 태동하고 남북통일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으며, 사회 내에서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권위주의적 질서에 맞선 개혁의 열망이 나타나게 된다. 이어 TV 생중계를 통해 전파를 탄 제5공화국 청문회는 국민들의 큰 관심을 받게 되었고, 이후 검찰 수사를 통해 제5공화국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정계를 은퇴당하기도 했다.
결국 노태우 정부의 지지율은 상술한 청문회와 서울올림픽 이후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곤두박질쳤고, 보수 언론들은 정부에 대한 비판 보도가 쏟아져 나와 '물태우'라는 조롱까지 듣게 된다. 이에 민정당과 노태우는 '정계 개편'을 추진하기 시작해 사태를 잠재우기로 결정한다. 정계 개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민정당은 삼김에게 합당 제의를 하게 되지만 영수회담을 거쳐 김대중이 민정당과의 합당에 불참하고, 본래 불참하려던 김영삼, 민정당과 성향이 비슷한 김종필이 합당에 찬성하면서 1990년 1월 정식 발표를 선언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통합신당은 '민주자유당'이 되었고 이로써 217석에 달하는 거대 의석을 통해 국정 운영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통일민주당에서는 노무현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끝까지 반대에 나섰으며 끝내 합당 반대파들이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가 1991년 9월 16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이란 이름으로 합당해, 사실상 양당 체제로 재편된다.
한편 1992년에는 현대그룹 회장인 정주영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통일국민당'이라는 새 정당을 창당하게 된다. 같은 해 2월에는 김동길의 새한당과 흡수합당해 세를 불려갔고, 동시에 민주자유당과 민주당에 대한 대안 정당임을 자처했다. 통일국민당의 정책은 재벌 총수답게 친시장적이었으나 재벌 해체,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 정책, 여성부 설치 등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정책들로 화제가 되었고 이 기세를 몰아 창당 세 달 만에 치러질 총선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지 기대하고 있다.
또 양당에서 공천 탈락한 후보자들과 최불암, 강부자, 이주일과 같은 연예인들을 대거 영입시키는 한편, 현대그룹의 입김으로 인해 삼성, 럭키금성, 선경 등 경쟁 재벌들이 김영삼을 밀어주었다는 후일담이 존재한다. 이렇듯 통일국민당의 등장은 양당을 견제하기 위한 일명 제3지대 정당의 시초로 불리게 되었으며 훗날 통일당은 신민당을 거쳐 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면서 그 명맥을 잇게 된다.
1992년 3월 22일, 학생군사교육단 출신 이지문 육군 중위가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이하 공선협)라는 시민단체에서 기자회견에 참석하게 되는데, 군대에서 노골적으로 여당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정신교육을 실시하고, 부재자 투표에서 기호 1번을 뽑지 않으면 투표용지를 뺏거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이란 지시를 내린 사실을 알게 되어 이를 폭로하게 된 것이다.
또 폭로 사건이 있기 전 국가안전기획부에서는 무소속 후보들에게 압력을 가해 사퇴를 요구하는 의혹에도 모자라 상대 후보를 비방하기 위해 흑색선전 유인물을 살포한 바 있어 역시 민주자유당에게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부재자 투표 부정 사건을 폭로한 이 중위는 기자회견 직후 수도방위사령부 헌병들에게 연행되었고, 한겨레는 이 사건을 집중 보도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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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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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득표수 | 지역구 | 전국구 | 총합 | 지위 | ||||||||||||||||||
민주자유당 | 7,921,112 (38.5%) | 116석 | 33석 | 149석 | 제1당 | ||||||||||||||||||
민주당 | 5,531,733 (26.9%) | 74석 | 22석 | 96석 | 제2당 | ||||||||||||||||||
통일국민당 | 3,574,419 (17.4%) | 24석 | 7석 | 31석 | 제3당 | ||||||||||||||||||
무소속 | 2,372,005 (11.5%) | 9석 | 당선자 없음 | 9석 | - | ||||||||||||||||||
[ 기타 정당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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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당선자 복당 시 여야 구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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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149+21석 (56.9%) (43.1%) 129석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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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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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결과 민주자유당이 149석, 민주당이 96석, 통일국민당이 31석, 변화당과 신정치개혁당이 각각 1석, 무소속이 21석으로 나타나 민주자유당이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민주당은 96석을 확보하면서 목표치에 미달했다. 통일국민당은 30석 가까이를 확보하여 원내교섭단체 지위까지 얻었으며 박찬종이 이끄는 신정치개혁당과 변화당은 각각 1석을 얻는데 그쳤다. 민중당과 공명민주당은 한 석도 얻지 못하고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
특히 민주자유당은 217석에 달하는 거대 여당이란 명성이 무색하게 대참패를 하게 되었는데 선거 막판에 터진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과 더불어 자당 소속 공천 탈락자들이 대거 무소속, 통일국민당 후보로 당선되면서 대경권과 충청권, 강원도에 의석을 내줘야 했다. 결국 총선 직전에 비해 45석을 잃으면서 국정 운영과 정당 활동에 적신호가 켜지게 되었다.
지역별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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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정당 | 민주자유당 | 민주당 | 통일국민당 | 기타 · 무소속 |
서울 (44석) | 16석 | 24석 | 2석 | 2석 |
경기 (31석) | 18석 | 8석 | 5석 | 당선자 없음 |
인천 (7석) | 5석 | 1석 | 당선자 없음 | 1석 |
강원 (14석) | 8석 | 당선자 없음 | 4석 | 2석 |
대전 (5석) | 1석 | 2석 | 당선자 없음 | 2석 |
충북 (9석) | 6석 | 1석 | 2석 | 당선자 없음 |
충남 (14석) | 7석 | 1석 | 4석 | 2석 |
광주 (6석) | 당선자 없음 | 6석 | 당선자 없음 | |
전북 (14석) | 2석 | 12석 | 당선자 없음 | |
전남 (19석) | 당선자 없음 | 17석 | 당선자 없음 | |
부산 (16석) | 16석 | 당선자 없음 | 1석 | |
경남 (23석) | 16석 | 당선자 없음 | 3석 | 4석 |
대구 (11석) | 8석 | 당선자 없음 | 2석 | 1석 |
경북 (21석) | 14석 | 당선자 없음 | 2석 | 5석 |
제주 (3석) | 당선자 없음 | 3석 | ||
합계 | 116석 | 74석 | 24석 | 23석 |
수도권에서는 민주자유당이 39석, 민주당이 34석, 통일국민당이 7석을 가져갔다. 서울에서는 민주당이 과반을 넘는 24석을 차지했으나 민주자유당은 16석 밖에 얻지 못했고 보수 텃밭이던 강남 3구에서는 서초구 을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구를 모두 잃었다. 그나마 보수 성향이 짙은 경인 지역에서는 여당이 합계 23석을 확보했고 통일국민당은 총합 7석, 변화당과 신정치개혁당은 서울에서만 각각 1석 씩 확보했다.
강원도에서는 민주자유당이 8석을 가져가 강세를 보였으며 통일국민당은 14석 중 4석만 건져 제3정당으로서는 처음으로 강원도 제2당으로 올라섰다. 이 외에도 무소속 당선자가 강릉시와 삼척시·삼척군 선거구에서 나왔고 민주당은 몇몇 선거구에서 20%를 넘겼을 뿐 나머지 후보들은 전부 20%를 넘기지 못하였다.
충청권에서는 지난 총선과는 달리 민주자유당의 우세로 나타났는데, 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으로 흡수되면서 이루어진 강력한 보수 표심으로 총합 14석을 얻어 지역구 1위를 달성했다. 통일국민당은 6석을 확보하며 선전했고, 민주당도 총합 4석을 확보했다.
호남권에서는 이번에도 민주당의 석권이 확실해졌으나, 전라북도에서 2석을 민주자유당에 내주어 완전한 석권으로 가지는 못했다. 때문에 민자당은 후보들이 줄줄이 낙선에도 불구하고 충청권과 밀접해 있는 전북에서의 의석 확보를 통해 호남 제2당으로 갈 수 있었다. 통일국민당은 5~10% 정도의 득표율만 얻으면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하고 3위에 머무른다.
영남권에서는 3당 합당이 성과를 보게 되었는지 지난 선거에 비해 무려 50석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과반 의석 목표와 대경권의 무난한 승리를 예상한 민자당의 기대와는 달리 통일국민당이 7석을 가져갔고, 민자당에서 탈당한 무소속 후보들이 11명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친다. 제주에서는 세 곳 모두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었고, 정작 후보를 냈던 민주자유당이나 민주당은 선거에서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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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나타난 보수 여당의 과반 확보 실패는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던 노태우 정부에 레임덕을 가속화시켰고, 김영삼은 민정계 등에 의해 책임론을 지면서 혼란이 빚어지게 되는데 반대로 민주당의 김대중은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하게 된다. 또 통일국민당에서는 제3당 돌풍으로 인하여 정주영 또한 제3의 대권주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총선 이후 김영삼은 정부와 민정계에 책임을 물어 당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으며, 무소속 당선자들을 끌어모아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3당 체제로 축소된 정치권은 같은 해 치러질 대통령 선거를 통해 향방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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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롭게도 1992년에는 14대 총선과 14대 대선이 있었으며, 대선을 8개월 앞두고 치러진 선거였기에 사실상 선거 전초전으로 봐도 무방했다.
- 또 이순재, 최불암, 강부자, 이주일 등 원로 연예인들이 선거에 뛰어들었으며 그 중 세 명이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당선되는 이례적인 사례가 나타났다. 예외로 이순재는 1988년 정계 입문과 함께 선거에 참여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연예인 출신 정치인은 이 쪽이 최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