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한국전쟁(한중전쟁)
Second Korean War(Sino-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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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2024년 12월 19일 – 2026년 1월 8일[1]
장소 한반도 전역
원인 김정은 사후 북한의 내전과 한,중 양국의 개입
교전국 및
교전 세력
한국 중국
대한민국
이북5도위원회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정부
지휘관 홍준표
강신철
시진핑
병력 대한민국 국군 상비군 약480,000명
예비군 약1,770,000명[2]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 상비군 약 1,000,000명
예비군 약 1,500,000명
피해 국군 약 180,000명 전사
민간인 약 240,000명[3]사망
인민해방군 약 600,000명 전사
결과 한국의 승리,제2차 군벌시대 개막
영향 아시아 경제침체의 시작

개요

제2차 한국전쟁은 2024년말부터 2026년초까지 이어진 전쟁으로 북한내전과 그에대한 개입,한중간 전쟁까지 벌어진것이다.

전쟁 전

2024년 7월 28일,대한민국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총격을 당해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7.28 사태)
이러한 사실상의 공안정국속에서 북한이 배후로 의심되었고,그와중에 민주당에서의 북한을 두둔하는 발언이 나오며 직전에 민주당이 유리한 판세에서 분위기가 역전되며 국민의힘의 홍준표가 당선되는 일이 일어나게된다.이러한 상황속에서 10월 22일 김정은이 사망했다.이러한 상태에서 11월로 넘어가며 북한은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결국 11월 30일,김여정이 김주애와 김정은 충성파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키며 내전으로 돌입했다.이러한 정보는 주변국 정보기관에 넘어갔고,각각 한국,중국이 12월 19일,12월 21일에 각각 충무9000계획,병아리 작전을 실행한다.

한중 양국의 개입

북한으로 진격중인 국군 기갑부대,2024년 12월 20일
압록강에 집결중인 중국 인민해방군,2024년 12월 21일

12월 19일 대한민국 국군은 제7기동군단을 비롯하여 전방사단들과 해병대,공수부대들을 대대적으로 북한으로 진격시킨다.[4]
19일 제1군단이 개성으로,2군단이 평강,김화로,3군단이 금강,고성으로,5군단이 철원,장단으로 진격했고,제7기동군단은 전방병력이 무력화되자 빠르게 평양을 향해 돌격했으며,해병대 2사단이 연안으로,백령도의 해병대 6여단이 웅진으로,연평부대가 해주근교에,포항의 해병대 제1사단이 흥남근교에 상륙했다.
다음날인 20일에 전방의 사단들은 평산,곡산에 이르렀고 해병대 9여단과 미8군이 남포인근에 상륙했으며,해병대가 상륙한 흥남 외곽의 함주,정평에 동원사단들과 22사단이 일부 증원되어 함흥,원산으로 진격했다.그리고 점령지역들에 민생작전을 개시한다.
21일 중국이 본격적으로 병아리 작전을 개시했다.[5]인민해방군 북부전구의 78,79집단군이 압록강,두만강을 넘기 시작하였고,의주,만포,혜산등이 중국군손에 떨어졌다.
한편 한국군도 중국의 남하를 차단할 목적으로 공수작전을 개시,1공수여단을 문덕군에,제3공수여단을 안주시에,제7공수여단을 개천시에,제9공수여단을 덕천시에,제11공수여단을 맹산에 투입했고,남포 외곽에 상륙해 증산,평원에 이른 해병대와 추가투입된 13특임대에 지원을 명령했다.그렇게 개전 4일차인 22일에 이르러 한국군은 황해도,강원도,함경남도 남부,평안남도 서부를 장악했고,남포,함흥,해주,사리원등의 북한 주요도시들이 한국군에 점령되었고,원산과 평양에서 포위전이 개시되었다.중국또한 대대적으로 남하해 나선,청진,강계등을 장악하였으나 이미 지도부또한 평양 점령은 불가능할것으로 판단했긴 했으나 한국군이 진을친 청천강 이북과 양강도,함경북도지역을 점령해 완충지대 구축및 동해의 항구확보를 목적으로 진격을 계속한다.한국이 포위해 진격중인 평양,원산에서 시가전이 계속되었고,12월 24일 원산은 함락되었지만,평양에서는 크리스마스에도 피는 계속 흘렀다.제1차 평양전투는 12월 31일 그해의 마지막날에 함락되며 잠시 총성이 잦아든채로 2025년 새해가 밝았다.

양국의 협상시도

한국과 중국은 청천강과 개마고원을 사이에두고 대치했다.2025년 1월 어느때보다 겨울은 차가웠다.
한국은 중국의 북한철수를,중국은 현상유지와 조선인민공화국 정부의 인정을 요구했다.
이러한 협상속에서 타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3월 3일 2달간의 일시적 평화가 끝나고 한중간 전면전이 일어났다.

한중간 전면전

드론으로 촬영된 전투가 한창인 평양,2025년 6월 2일

영변군-개천시 경계에서 상호간오해로 발생한 총격전을 시작으로 전면적인 포격까지 일어나고 이틀뒤 중국군이 청천강을 도하했다.
일주일만에 청천강방어선은 붕괴했고,중국군은 평양을 향했다.대한민국 국군은 평양에서 북한군이 그랬듯이 시가전을 개시했고,그렇게 제1차 평양전투보다도 더 길고 처절한 제2차 평양전투가 시작되었다.3월 10일,평양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입하기 시작했다.평양의 선전용 건물들 사이로 대규모 시가전이 벌어졌다.대규모 포격,대규모 부대간 전투는 물론,화학무기까지 동원되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파멸적인 전투가 7달간 이어지며 평양,남포,함흥등 전선의 도시들이 불타올랐고,그속에서 양측에서 수십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10월에 이르자 중국 점령하 북한에서 반중 봉기가 터져나왔고,평양에서 한국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동시에 대대적인 경제제제를 받던 중국에서 대기업이 쓰러지고,경제가 흔들리자 내부 불만이 터지고 곧 대대적인 폭동으로 이어지며 중국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중국군의 철수

반전 시위가 폭동으로 번진 톈진,2025년 11월 5일

2025년 11월부터 중국내에서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함에 따라 중국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중국군이 일부 철수하며 11월경 전선은 청천강 일대로 돌아왔다.그러다 12월 말 중국이 내전 사태에 빠져들자 북부전구 군대가 전면철수를 개시했고,1월 8일 북한전역을 국군이 장악하자 홍준표 대통령은 "드디어 북부의 불법정권이 86년만에 척결되었다."라며 사실상 통일을 선언하였다.

여파

가장 큰여파는 중국이 전쟁에서 지지부진하다 내부불만이 확산해 완전히 붕괴해버린것이다.
사실상 일본군 재창설외의 여파는 이로인한 파생적인것이다.자세한것은 제2차 군벌시대 (2080)참고

  1. 실질적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이 완전철수한 일자
  2. 이북지역에서 약300,000명이 지원하여 참전했다.
  3. 이남지역 약 30,000명,이북지역 약 210,000명
  4. 홍준표 대통령이 작전개시를 발표하며 헌법상 영토내의 반국가단체 소탕을 명분으로 개입하였다고 전했다.
  5. 북한내 소요사태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