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민국 38)/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2번째 줄:
{{틀:민국 38}}
{{틀:민국 38}}
==개요==
==개요==
중화민국 (민국 38)의 역사를 다룬다.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사는 위키백과등의 타 사이트를 참고 바란다. 또한 민국 38 세계관에서의 중화민국의 근현대사 구분법은 헌정 이전시기는 신해혁명-임시정부, 북양정부, 국민정부 순으로 나뉘고 헌정이후 부터는 제1공화국 (1947-1978), 제2공화국 (1978-2000) 그리고 제3공화국 (2000-현재)로 나뉜다.
중화민국 (민국 38)의 역사를 다룬다.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사는 위키백과등의 타 사이트를 참고 바란다. 또한 민국 38 세계관에서의 중화민국의 근현대사 구분법은 헌정 이전시기는 신해혁명-임시정부, 북양정부, 국민정부 순으로 나뉘고 헌정이후 부터는 제1공화국 (1947-1982), 제2공화국 (1978-2000) 그리고 제3공화국 (2000-현재)로 나뉜다.
<center>{{목차}}</center>
<center>{{목차}}</center>
==헌정 이전==
==헌정 이전==

2021년 3월 20일 (토) 01:26 판

[ 국가 목록 ]
[ 세계관 소개 ]
[ 문서 목록 ]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개요

중화민국 (민국 38)의 역사를 다룬다.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사는 위키백과등의 타 사이트를 참고 바란다. 또한 민국 38 세계관에서의 중화민국의 근현대사 구분법은 헌정 이전시기는 신해혁명-임시정부, 북양정부, 국민정부 순으로 나뉘고 헌정이후 부터는 제1공화국 (1947-1982), 제2공화국 (1978-2000) 그리고 제3공화국 (2000-현재)로 나뉜다.

헌정 이전

신해혁명-임시정부

1911년 청나라의 무능과 열강의 중국 침탈에 분노한 (한족 중심의) 혁명파들은 10월 10일에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우창봉기 이후 당시 청나라의 24개의 성 중 17개의 성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16개 성 대표들의 찬성으로 쑨원이 새로운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공화국의 운명은 바람앞에 등불과 같았다. 청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육군대신직에 앉혀 현대화 된 북양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앞에 혁명군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버리는 수 밖에 없었고 신생 중화민국의 내정은 복잡하기에 그지 없었다. 힌편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는 허수아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쑨원은 공화국의 보전을 위하여 위안스카이에게 수도를 난징으로 옮기고 공화국을 유지하는 조건(달리 말하자면 청나라를 무너뜨리는 조건)을 전제로 협상을 시작하였고 위안스카이가 이를 받아들여 중국의 군주제는 막을 내렸다.(단 청황실 자체는 청황실 소조정으로 현제까지 북경에 존제한다.)

북양정부

이렇게 임시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혁명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도 공화국을 근본부터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는 국민당(1912년)을 해산시키고 의회의 기능을 폐지하였으며 자신의 측근들로 구성된 중앙정치회의에서 모든 국사를 결정하였다. 혁명파는 분개하였으나 실질적인 힘이 없었고 다시 봉기를 시도하나 무참히 진압되어 버린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이고 황제를 자처하여 중화제국을 선포하나 5.4운동이 일어나고 측근들초차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결국 제정복고를 취소하였으나 이미 막차는 떠난 후였고 그는 중화민국 대총통 직에서 내려와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로써 중앙화 된 군 사령부가 사라지자 중국대륙 전역에는 군벌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중화민국 국회가 재건되었으나 헌법 제정 문제로 인하여 국회는 혼란스럽기만 하였고 부원지쟁과 장훈복벽을 거쳐 중화민국 국회가 다시 해산되면서 중국 전역은 크게 남부와 북부 그리고 그안에서도 무수히 많은 군벌들로 나뉘어 중국을 혼돈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1921년 러시아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공격으로 인해 1919년 외몽골 출병으로 수복한 외몽골 지역이 다시 날아가는 등 국력의 소모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러던 와중 봉천군벌의 장쭤린이 대원수 자리에 오르면서 중국을 통일하는가 했으나 1926년부터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많은 북양정부 소속의 군벌들이 쓸려나가거나 국민정부에 합류하면서 전쟁은 점점 장쭤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도를 봉천으로 옮기고 항전을 이어나가려고 하였으나 동북에서의 영향력을 넓히려던 일본의 무리수로 인해 암살당했다. 이후 그의 아들 장쉐량이 실권을 잡지만, 동북역치로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북양정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국민정부

광저우 국민정부

국민정부 자체는 북벌 이전에도 존재하였으며 이 정부의 전신은 1923년에 수립된 3차 광둥정부이다. 1925년 7월 1일 정식 수립된 이 정부를 '광저우 국민정부'라고 부른다. 광저우 국민정부 당시에는 쑨원과 국민당이 북양정부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제1차 북벌을 준비하였으며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또한 소련의 지원으로 국민혁명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왕징웨이가 주석으로 추대되었으며 정부제도가 정비되었다, 또한 현대 중국의 행정구역 제도의 기원이 되는 성현제가 광둥성 전역에 실시되었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후 대부분의 중앙정부 기관들이 우한으로 옮겨가면서 소멸하였다.

우한 국민정부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후 대부분의 중앙정부 기관들이 우한으로 옮겨오면서 성립되였다. 하지만 4.12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고 제1차 국공합작이 붕괴되면서 국민정부는 난징 정부와 우한정부로 분열되었고, 이후 장제스가 하야하고 광시파벌이 난징 국민정부를 장악하면서 난징과의 통합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광시파벌은 세력과 자금력의 부족으로 결국 장제스가 복귀하였다.

난징 국민정부

대부분 국민정부라고 하면 이 문단에 서술된 정부를 가리킨다. 1928년 공식적으로 국민혁명이 완수되었고 중국은 통일되었다. 난징은 새로운 통일중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모든 정치권력의 중심지가 되어야 했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난징-상하이와 장쑤, 안후이등의 주변부 지역은 국민당과 장제스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중앙 집권체제를 완성시켰으나 그 이외의 지역은 여러 군벌들의 개인 왕국이였고 티베트와 외몽골은 각각 독립국을 형성하였으며 만주는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대만은 아예 일본의 식민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