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민국 38)/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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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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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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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공산당 최대강역.png|섬네일|왼쪽|신장 소비에트의 최대강역]]1948년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중국은 아직 혼란스러웠다. 가장 큰 이유는 국공내전의 재개였는데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신장과 칭하이, 닝샤와 산시등의 서북 지역을 장악하며 승승장구 하고있었다. 중일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던 중화민국 정부는 공산군을 막지 못했고 공산당은 중국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베이징을 점령당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는 실정이였다. 그러나 이 전세는 48년 중엽부터 역전되기 시작했는데 공산당이 분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산당과 신장 소비에트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장궈타오 중심의 소련파와 화궈펑-저우언라이 중심의 국내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파일:장제스취임식.jpg|섬네일|왼쪽|중화민국 초대 총통으로서 취임식을 가지는 장제스]]1948년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중국은 아직 혼란스러웠다. 가장 큰 이유는 국공내전의 재개였는데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신장과 칭하이, 닝샤와 산시등의 서북 지역을 장악하며 승승장구 하고있었다. 중일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던 중화민국 정부는 공산군을 막지 못했고 공산당은 중국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베이징을 점령당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는 실정이였다. 그러나 이 전세는 48년 중엽부터 역전되기 시작했는데 공산당이 분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산당과 신장 소비에트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장궈타오 중심의 소련파와 화궈펑-저우언라이 중심의 국내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진행되면서 펑더화이 같은 국내파 출신의 장군들이 전공을 쌓으며 당내의 지분을 점점 늘려가고 있었다. 이에 소련파는 당권을 잃을것을 우려하기 시작하였고 국내파의 당권 장악이 현실화 되기 시작하자 소련파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국내파 대규모 숙청사건'''을 일으켰다. 1948년 7월 6일 당시 중국 공산당 당수이자 신장 소비에트의 주석이던 장궈타오는 긴급 당대회를 소집하였고 저우언라이등 국내파를 국민당의 스파이로 몰아갔으며 11일에는 국내파 간부 대부분을 당과 군에서 몰아냈다. 화궈펑 등 일부는 쿠데타 시도까지 하였으나 소련파의 출동 요청으로 출동한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신장내의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일부는 홍콩이나 프랑스등으로 도피하였다. 소련파와 스탈린은 이에 대해 만족하였으나 이는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였는데 당시 공산당 내의 국내파는 군사 관련된 간부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리자 공산당의 군 관련 능력이 크게 감소하였고 군 내에서도 동요가 일어나 점차 중화민국 정부군에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였다. 결국 49년 위슈 전투에서 대패한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밀렸고 49년 5월경에 사실상 소멸하게 된다.[[파일:장제스 승전선언.png|250px|섬네일|1949년 5월 21일 승전선언을 하는 장제스]]1949년 5월 21일 장제스의 승전선언으로 국공내전은 막을 내렸고 그간 신장의 감옥에 수감되어있던 국내파 공산당원들은 중화민국 정부에 넘겨졌다. 전쟁은 막을 내렸으나 중국에는 많은 문제점이 남아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화폐문제였다. 국공내전 당시 공산군이 서북지역을 장악하며 서북지역의 군벌들은 사실상 권력을 잃었고 원난의 룽윈또한 국공내전 기간동안 몰락하였으나 남방의 군벌들과 4대가족이라 불리던 이들은 각자 소유의 은행에서 돈을 찍어냈고 화폐가치는 점점 떨어져 갔다. 장제스 또한 이런 문제를 알고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사회혼란과 정부의 권위 추락이 계속 될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1950년 7월 29일 새벽 장제스는 국민대회와 입법원을 소집하였고 소위 말하는 '1950년 은행법' 정식명칭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발전을 위한 은행및 화폐의 관한 법률'을 기습적으로 통과시킨다. 이 법률의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1:1950년 7월 29일부로 중화민국 중앙은행 이외의 은행에서의 화폐발행권을 무효화한다.
*2:1950년 8월 1일부로 신화폐를 발행하며 '중화민국 위안'만을 중국의 공식화폐로 하고 이외의 화폐는 무효화 한다.
*3:1950년 8월 29일까지 기존의 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하도록 하며 신화폐와의 교환비는 100만:1로 한다, 이 이후는 구화폐의 교환은 불가하며 구화폐의 사용은 불가하다, 교환은 중화민국 중앙은행 산하의 은행에서만 가능하다.
*4:1950년 7월 29일부터 기존의 모든 은행과 이후의 모든 은행은 중앙정부로 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며 허가를 받지 않은 은행에서는 모든 경제활동이 불가하다.
요약하자면 '''중앙정부에서 허가한 은행만 경제활동이 가능하며, 중앙정부에서 찍어낸 돈만 사용이 가능하다'''라는 소리였다. 이 소식은 다음날 중국 전역으로 퍼졌고 중국 전역은 발칵 뒤집혔다. 마음대로 돈을 찍어내던 군벌들과 재벌들은 경악했고 당시 난닝에 머무르고 있던 리쭝런은 난징으로 날아와 장제스에게 따졌으나 장제스는 '''"이는 당연한 조치인데, 뭐가 불만인가?"'''라고 받아쳤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하루아침만에 4대가족과 군벌들은 권력의 기반을 잃게 되었고 물가가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앙정부가 경제권을 틀어잡아 장제스의 권력또한 강화되었다. 장제스는 그들에게 쉴 틈을 주지않고 맹공을 퍼부었는데 9월 11일에 공식적으로 국영 농업, 공업, 상업은행 (줄여서 국영 3업은행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의 설립과 중앙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권을 무효화 한다는 발표들을 하였다. 이로 인해 군벌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국영 3업은행에서 장기 저리로 돈을 대출해 주기 시작하며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일부 군벌들은 반란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진압되었다.

2021년 3월 28일 (일) 20:2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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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개요

중화민국 (민국 38)의 역사를 다룬다.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사는 위키백과등의 타 사이트를 참고 바란다. 또한 민국 38 세계관에서의 중화민국의 근현대사 구분법은 헌정 이전시기는 신해혁명-임시정부, 북양정부, 국민정부 순으로 나뉘고 헌정이후 부터는 제1공화국 (1947-1982), 제2공화국 (1982-1994) 그리고 제3공화국 (1994-현재)로 나뉜다.

헌정 이전

신해혁명-임시정부

신해혁명 당시 상하이 시내

1911년 청나라의 무능과 열강의 중국 침탈에 분노한 (한족 중심의) 혁명파들은 10월 10일에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우창봉기 이후 당시 청나라의 24개의 성 중 17개의 성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16개 성 대표들의 찬성으로 쑨원이 새로운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공화국의 운명은 바람앞에 등불과 같았다. 청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육군대신직에 앉혀 현대화 된 북양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앞에 혁명군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버리는 수 밖에 없었고 신생 중화민국의 내정은 복잡하기에 그지 없었다. 힌편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는 허수아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쑨원은 공화국의 보전을 위하여 위안스카이에게 수도를 난징으로 옮기고 공화국을 유지하는 조건(달리 말하자면 청나라를 무너뜨리는 조건)을 전제로 협상을 시작하였고 위안스카이가 이를 받아들여 중국의 군주제는 막을 내렸다.(단 청황실 자체는 청황실 소조정으로 현제까지 북경에 존제한다.)

북양정부

위안스카이의 초상
5.4운동 당시 베이양(현 베이핑) 대학 시위대

이렇게 임시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혁명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도 공화국을 근본부터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는 국민당(1912년)을 해산시키고 의회의 기능을 폐지하였으며 자신의 측근들로 구성된 중앙정치회의에서 모든 국사를 결정하였다. 혁명파는 분개하였으나 실질적인 힘이 없었고 다시 봉기를 시도하나 무참히 진압되어 버린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이고 황제를 자처하여 중화제국을 선포하나 5.4운동이 일어나고 측근들초차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결국 제정복고를 취소하였으나 이미 막차는 떠난 후였고 그는 중화민국 대총통 직에서 내려와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로써 중앙화 된 군 사령부가 사라지자 중국대륙 전역에는 군벌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중화민국 국회가 재건되었으나 헌법 제정 문제로 인하여 국회는 혼란스럽기만 하였고 부원지쟁과 장훈복벽을 거쳐 중화민국 국회가 다시 해산되면서 중국 전역은 크게 남부와 북부 그리고 그안에서도 무수히 많은 군벌들로 나뉘어 중국을 혼돈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1921년 러시아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공격으로 인해 1919년 외몽골 출병으로 수복한 외몽골 지역이 다시 날아가는 등 국력의 소모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러던 와중 봉천군벌의 장쭤린이 대원수 자리에 오르면서 중국을 통일하는가 했으나 1926년부터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많은 북양정부 소속의 군벌들이 쓸려나가거나 국민정부에 합류하면서 전쟁은 점점 장쭤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도를 봉천으로 옮기고 항전을 이어나가려고 하였으나 동북에서의 영향력을 넓히려던 일본의 무리수로 인해 암살당했다. 이후 그의 아들 장쉐량이 실권을 잡고 동북역치로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북양정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국민정부

광저우 국민정부

국민정부 자체는 북벌 이전에도 존재하였으며 이 정부의 전신은 1923년에 수립된 3차 광둥정부이다. 1925년 7월 1일 정식 수립된 이 정부를 '광저우 국민정부'라고 부른다. 광저우 국민정부 당시에는 쑨원과 국민당이 북양정부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제1차 북벌을 준비하였으며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또한 소련의 지원으로 국민혁명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왕징웨이가 주석으로 추대되었으며 정부제도가 정비되었다, 또한 현대 중국의 행정구역 제도의 기원이 되는 성현제가 광둥성 전역에 실시되었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후 대부분의 중앙정부 기관들이 우한으로 옮겨가면서 소멸하였다.

우한 국민정부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후 대부분의 중앙정부 기관들이 우한으로 옮겨오면서 성립되였다. 하지만 4.12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고 제1차 국공합작이 붕괴되면서 국민정부는 난징 정부와 우한정부로 분열 되어버렸다. 초기에는 우한정부가 군사력 장제스에 비해서 군사력의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장제스가 양 정부의 통합을 위한다는 구실로 하야하고 광시파벌이 난징 국민정부를 장악하면서 난징과의 통합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광시파벌은 세력과 자금력의 부족으로 결국 장제스가 복귀하였다.

난징 국민정부

1930년대 중국의 거리

대부분 국민정부라고 하면 이 문단에 서술된 정부를 가리킨다. 1928년 공식적으로 국민혁명이 완수되었고 중국은 통일되었다. 난징은 새로운 통일중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모든 정치권력의 중심지가 되어야 했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난징-상하이와 장쑤, 안후이등의 주변부 지역과 광저우 일대는 국민당과 장제스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중앙 집권체제를 완성시켰으나 그 이외의 지역은 여러 군벌들의 개인 왕국이였고 티베트와 외몽골은 각각 독립국을 형성하였으며 만주는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후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이 세워졌으며 대만은 아예 일본의 식민지였다. 또한 공산당은 1931년 장시성을 중심으로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면서 국민정부는 난관에 봉착했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을 동원하여 초공작전을 별였고 그 결과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은 멸망하였고 마지막 제6차 초공작전으로 모택동의 사망이 확인되고 시신이 국민정부에게 발견되면서 공산당에 대해서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렇게 숨을 돌린 국민정부는 강력한 공업화 정책과 농촌 개혁을 시작하였다. 장강 삼각주를 중심으로한 산업화 정책이 실시되었으며 기반시설 확충과 농민들을 위한 은행 설립, 품종 개량, 상업 작물 보급 등이 이루어졌다. 1935년에는 영미 양국의 지원을 받아서 법폐개혁을 단행, 은본위제도 폐기, 은국유화와 관리통화제 등을 실시하였다. 이시기의 중국을 '황금 10년'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황금 10년'은 1937년에 끝나제 되는데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구실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1938년, 타이얼좡 전투에서의 중국군

중국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하여금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전술적 미숙과 장교진의 부족, 그리고 군대 내의 부패등으로 베이핑, 상하이 그리고 수도인 난징까지 잃으며 속수무책으로 우한과 광저우 까지 함락되어 버린다. 그리고 국민당 좌파의 거물 왕징웨이가 일본의 괴뢰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하며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어 갔다. 그러나 충칭의 국민당과 신장의 공산당이 제2차 합작을 선언하고 일본은 점점 진흙탕에 빠진 사람처럼 천문학적인 전비를 쏱아부어도 끝나지 않는 전쟁의 구렁텅이에 빠지게된다. 또한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에 선전포고하며 일본의 전황은 점점 기울어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당시 중국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가입하였다. 1943년에는 카이로 회담에서 전후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타이완, 만주, 관동주등의 반환을 공식적으로 약속받았다.

카이로 회담 당시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이후 카보네이드 작전으로 광저우, 우한등의 주요도시를 탈환하기 시작하였고 1945년 8월 17일 미국의 지원을 받고 난징으로 진격하여 난징을, 그리고 23일에는 상하이를 탈환하였으며 9월 8일에는 베이핑을 점령하고 11일에는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과 만났다. 이후 1945년 9월 13일 공식적으로 일본과의 종전협정에 서명하였고 중일전쟁을 매듭지었다. 1946년에는 국공내전을 재게하였다. 초기에는 신장에 위치한 공산군이 닝샤성 지역과 칭하이 지역 등 서북지역을 점령하면서 승승장구 하였으나 1947년 부터는 공산당 내 장궈타오 중심의 소련파 내전에서 전공을 쌓은 국내파 간의 내분으로 1947년 초 이후로 전선이 점점 고착되어갔다. 한편 중국 국민당은 삼민주의 이념의 [ 군정 => 훈정 => 헌정 ] 논리를 바탕으로 1946년 제헌 국민대회를 소집하였으며 1947년에는 행헌 입법원, 행헌 국민대회, 행헌 감찰원을 소집하였다. 이시기의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大) / 중국 청년당(中) / 중국 민주 사회당(小) 연정을 자연스럽게 연출하였다. 이 체제를 1946년 체제 혹은 3당 훈정 체제라고 하며 강력한 총통의 권한을 바탕으로 형식적인 헌정과 사실상의 훈정을 추구하는 이 체제는 75년 장제스 사망과 78년 입법원 선거까지 지속되었다. 1948년 4월 20일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가 열리고 장제스가 총통에 당선되면서 국민정부는 소멸하여 정식적으로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헌정 이후

제1공화국

중화민국 초대 총통으로서 취임식을 가지는 장제스

1948년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중국은 아직 혼란스러웠다. 가장 큰 이유는 국공내전의 재개였는데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신장과 칭하이, 닝샤와 산시등의 서북 지역을 장악하며 승승장구 하고있었다. 중일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던 중화민국 정부는 공산군을 막지 못했고 공산당은 중국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베이징을 점령당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는 실정이였다. 그러나 이 전세는 48년 중엽부터 역전되기 시작했는데 공산당이 분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산당과 신장 소비에트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장궈타오 중심의 소련파와 화궈펑-저우언라이 중심의 국내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진행되면서 펑더화이 같은 국내파 출신의 장군들이 전공을 쌓으며 당내의 지분을 점점 늘려가고 있었다. 이에 소련파는 당권을 잃을것을 우려하기 시작하였고 국내파의 당권 장악이 현실화 되기 시작하자 소련파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국내파 대규모 숙청사건을 일으켰다. 1948년 7월 6일 당시 중국 공산당 당수이자 신장 소비에트의 주석이던 장궈타오는 긴급 당대회를 소집하였고 저우언라이등 국내파를 국민당의 스파이로 몰아갔으며 11일에는 국내파 간부 대부분을 당과 군에서 몰아냈다. 화궈펑 등 일부는 쿠데타 시도까지 하였으나 소련파의 출동 요청으로 출동한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신장내의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일부는 홍콩이나 프랑스등으로 도피하였다. 소련파와 스탈린은 이에 대해 만족하였으나 이는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였는데 당시 공산당 내의 국내파는 군사 관련된 간부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리자 공산당의 군 관련 능력이 크게 감소하였고 군 내에서도 동요가 일어나 점차 중화민국 정부군에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였다. 결국 49년 위슈 전투에서 대패한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밀렸고 49년 5월경에 사실상 소멸하게 된다.

1949년 5월 21일 승전선언을 하는 장제스

1949년 5월 21일 장제스의 승전선언으로 국공내전은 막을 내렸고 그간 신장의 감옥에 수감되어있던 국내파 공산당원들은 중화민국 정부에 넘겨졌다. 전쟁은 막을 내렸으나 중국에는 많은 문제점이 남아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화폐문제였다. 국공내전 당시 공산군이 서북지역을 장악하며 서북지역의 군벌들은 사실상 권력을 잃었고 원난의 룽윈또한 국공내전 기간동안 몰락하였으나 남방의 군벌들과 4대가족이라 불리던 이들은 각자 소유의 은행에서 돈을 찍어냈고 화폐가치는 점점 떨어져 갔다. 장제스 또한 이런 문제를 알고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사회혼란과 정부의 권위 추락이 계속 될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1950년 7월 29일 새벽 장제스는 국민대회와 입법원을 소집하였고 소위 말하는 '1950년 은행법' 정식명칭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발전을 위한 은행및 화폐의 관한 법률'을 기습적으로 통과시킨다. 이 법률의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 1:1950년 7월 29일부로 중화민국 중앙은행 이외의 은행에서의 화폐발행권을 무효화한다.
  • 2:1950년 8월 1일부로 신화폐를 발행하며 '중화민국 위안'만을 중국의 공식화폐로 하고 이외의 화폐는 무효화 한다.
  • 3:1950년 8월 29일까지 기존의 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하도록 하며 신화폐와의 교환비는 100만:1로 한다, 이 이후는 구화폐의 교환은 불가하며 구화폐의 사용은 불가하다, 교환은 중화민국 중앙은행 산하의 은행에서만 가능하다.
  • 4:1950년 7월 29일부터 기존의 모든 은행과 이후의 모든 은행은 중앙정부로 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며 허가를 받지 않은 은행에서는 모든 경제활동이 불가하다.

요약하자면 중앙정부에서 허가한 은행만 경제활동이 가능하며, 중앙정부에서 찍어낸 돈만 사용이 가능하다라는 소리였다. 이 소식은 다음날 중국 전역으로 퍼졌고 중국 전역은 발칵 뒤집혔다. 마음대로 돈을 찍어내던 군벌들과 재벌들은 경악했고 당시 난닝에 머무르고 있던 리쭝런은 난징으로 날아와 장제스에게 따졌으나 장제스는 "이는 당연한 조치인데, 뭐가 불만인가?"라고 받아쳤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하루아침만에 4대가족과 군벌들은 권력의 기반을 잃게 되었고 물가가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앙정부가 경제권을 틀어잡아 장제스의 권력또한 강화되었다. 장제스는 그들에게 쉴 틈을 주지않고 맹공을 퍼부었는데 9월 11일에 공식적으로 국영 농업, 공업, 상업은행 (줄여서 국영 3업은행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의 설립과 중앙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권을 무효화 한다는 발표들을 하였다. 이로 인해 군벌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국영 3업은행에서 장기 저리로 돈을 대출해 주기 시작하며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일부 군벌들은 반란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