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제39대 대통령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
James Earl Carter Jr.
출생 1924년 10월 01일(1924-10-01) (99세)
미국 조지아 플레인즈
재임기간 제39대 미합중국 대통령
1977년 1월 20일 - 1981년 1월 20일
제76대 조지아 주지사
1971년 1월 12일 - 1975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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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 제임스 얼 카터 시니어
모 베시 릴리언 카터
배우자 엘레노어 로잘린 카터 (1946년 결혼)
자녀 아들 잭 카터, 제임스 카터 3세
딸 도넬 카터, 에이미 카터
학력 미국 해군사관학교
종교 개신교
정당 민주당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 1924년 10월 1일 ~)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민주당 소속으로 그는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조지아 주 상원의원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의 76대 주지사를 역임했다. 카터는 퇴임 이후 정치적, 사회적 운동에 계속해서 종사하며 인도주의적 행보를 보였다.

조지아 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카터는 194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미 해군에서 복무하다 195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군을 제대해 고향으로 돌아와 땅콩 재배 사업을 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진 빚을 탕감하고 형제와 상속분을 나눠야 했기에 비교적 적은 상속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콩 사업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성공했다. 이 기간동안 카터는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민권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도왔다. 그는 민주당에 가입해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카터는 조지아 주 상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했고, 1970년에는 조지아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그는 1975년까지 주지사직을 수행했다. 그는 조지아 주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1976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지명에서 승리했다. 카터는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청렴한 아웃사이더 이미지로 현직 공화당 대통령 제럴드 포드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취임 후, 카터는 선언문 4483을 발표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에 재개입할 것을 천명했다. 그의 임기 동안 에너지부와 교육부가 설립되었다. 그는 에너지의 보존, 적정 가격의 유지, 신기술의 개발 등을 포함하는 국가 에너지 정책을 창안했다. 카터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 및 제2차 전략적 무기 제한 협정을 추진했다. 경제에 있어서 그는 높은 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 및 저성장의 조합인 스태그플레이션에 직면했다. 그의 대통령직은 1979년의 이란 인질 위기와 오일 쇼크, 쓰리마일 아일랜드 사고, 니카라과 혁명 및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위기를 맞았다. 카터는 소련의 침략에 대응해 곡물 금수조치를 부과하고 카터 독트린을 발표했으며, 1980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해 냉전을 확대했다. 1980년 민주당 프라이머리에서 그는 테드 케네디의 도전을 받았지만, 여유 있는 격차로 재지명되었다. 하지만 임기 내로 끝내겠다던 베트남 전쟁의 장기화[1], 나아지지 않는 경제[2]는 카터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란 폭격[3] 후속조치인 이글 크로우 작전은 카터의 지지율을 끌어올렸지만 역부족이었고, 카터는 결과적으로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했다. 역사가들과 정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카터를 평균 정도의 대통령으로 꼽는다.

정계 입문 초기

조지아 주지사

1976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는 지미 카터, 1974년

카터는 1974년 12월 12일 워싱턴 D.C.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출마 선언문에는 국내의 불평등, 낙관주의와 변화에 대한 열망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라이머리에 진출했을 때 그는 16명의 다른 후보자와 경쟁 중이었고, 조지 왈레스와 같이 전국적으로 더 잘 알려진 정치인이 존재했기 때문에 카터의 지명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의 인지도는 2% 수준에 그쳤고, 그의 경쟁자들은 그를 조롱하듯 "Jimmy who?"라며 불렀다. 이에 대해 카터는 "내 이름은 지미 카터이고 대통령에 출마한다"고 받아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이 발언 이후 카터는 1976년 3월 중순까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다른 경쟁자들보다 훨씬 앞섰을 뿐만아니라 현직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와의 대결에서 몇 퍼센트포인트 앞서는 조사가 쏟아졌다.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유권자들로 하여금 공화당에 굉장한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기 때문에[4] 워싱턴 DC에서 멀리 떨어진 "신선한" 카터의 입장은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카터는 정부의 개편을 주장하고, 일반 대중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위한 자서전을 출판했다.

카터는 일찍이 아이오와 코커스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하여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의 전략은 다른 후보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전에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 지역을 이동하고, 더 많은 연설을 하는 것었다.[5] 남부에서 그는 특정 지역에서 이길 수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빠르게 공략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결국 프라이머리가 진행되며 왈레스가 더 이상 이길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그는 남부에서도 승리를 거머쥐었다. 북부에서 카터는 보수적인 기독교 유권자와 농촌 유권자들에게 호소했고, 결국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런 카터의 돌풍에 로렌스 쇼프는 1980년 그의 저서 『카터 대통령과 그 너머』 에서 미국의 모든 언론이 카터의 행보를 주목하고 홍보했다고 말했다.

카터의 경쟁자들이 가지지 못한 것은 대중 매체의 지원이었습니다. 카터와 그의 캠페인에 대한 언론의 호의적인 보도는 그를 우위에 점하게 했고, 로켓에 탄듯이 여론조사의 정상으로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카터가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9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무명의 공직자에서 대통령 당선자로 부상할 수 있게끔 만들었습니다.

카터는 선거운동 기간동안 의원 선거운동에 대한 정부 보조금 지급, 연방소비자보호국 창설 지지, 장관급 부서인 교육부 창설, 핵무기 제한을 위한 소련과의 조약 체결, 국방 예산의 삭감, 저소득 및 중산층에 대한 세금 감면과 고소득자에 대한 상당한 증세를 포함하는 누진세 제안, 사회보장법에 대한 진보적 개정, 임기 첫 해 말까지 재정균형의 유지를 공약했다. 카터는 1976년 7월 15일, 미네소타 주 상원의원인 월터 먼데일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카터와 포드는 세 번의 텔레비전 토론에서 대결했다. 카터는 두 번째 토론회에서 닉슨 행정부 당시 준비되지 않은 철수로 인도차이나의 자유인 수십만 명이 학살 당했다고 말하며 공화당 정부를 비난했다. 특히 텔레비전 토론 이후 언론에서 킬링필드를 대서특필하며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를 요구하던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부채감을 심어줬다. 이후 카터는 여론조사에서 최소 25%p차이로 리드했으며, 3차 토론회에서 포드의 능숙한 토론 실력으로 반등을 노렸지만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카터는 대중 투표에서 58.7%를 얻으며 39.4%를 확보한 포드를 19%p 이상 앞섰으며, 포드의 37인을 압도하는 503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

대통령 퇴임 이후

정치적 입장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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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1978년 직접적으로 병력을 다시 파병했지만,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1980년 말까지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다. 이 기간 미군은 하노이 점령을 앞두고 있었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이미 정리된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북베트남만이 남은 상황이었던 것. 전쟁에 1년만 더 빨리 개입했어도 임기 내로 끝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2. 카터의 고금리, 긴축정책은 유효했지만 문제는 그 효과가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책을 실현했던 효과는 모두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어찌 보면 남 좋은 일만 한 셈. 물론 선거에서 이겼으면 카터 대에서 빛을 발했을 수도 있다.
  3. 카터는 1979년 발생한 이란 인질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폭격기의 출격을 명령했다. 이란 입장에서 미국이 폭격기를 끌고와 항구를 폭격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인질을 절반 석방했다.
  4. 특히 1972년 대통령 선거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선거로 당선자인 닉슨과 도전자인 무스키의 선거인단 차이는 불과 2명이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대중들은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없었다면 선거 결과가 뒤집혔을 것으로 여겼다.
  5. 5만 마일 이상을 움직였고, 37개 주를 방문했으며, 200번 이상의 연설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