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드릴라 헌정위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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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drila constitutional crisis  
Chandrila constitutional crisis


'''출범하기도 전에 찬드릴라 공화국을 파멸시킬 뻔 한 최악의 헌정위기'''
'''출범하기도 전에 [[찬드릴라 공화국]]을 파멸시킬 뻔 한 최악의 헌정위기'''


'''인민전선과 공화국 정부와 관계가 악화되는 결정적 계기'''
'''[[인민전선]]과 공화국 정부와 관계가 악화되는 결정적 계기'''


찬드릴라 헌정위기(Chandrila constitional crisis)는 [[ABY]] 8년 4월 13일 부터 [[ABY]] 8년 4월 20일 까지 신 공화국 정부와 "[[인민국가]]"간 무력충돌 사건이다. 신 헌법에 반발한 인민전선 과격파가 [[소라 파티산]] 지휘하에 봉기하여 인민국가를 선포하고 신 공화국 정부를 전복을 시도한 사건이다. 다행히도 찬드릴라 공화국 회원국 정부들 중 아무도 가담하지 않아 찬드릴라와 기타 일부 행성들에서 발생한 봉기가 빠르게 진압되는 것으로 끝났다.
찬드릴라 헌정위기(Chandrila constitional crisis)는 [[ABY]] 9년 4월 13일 부터 [[ABY]] 9년 4월 20일 까지 신 공화국 정부와 "[[인민국가]]"간 무력충돌 사건이다. 신 헌법에 반발한 인민전선 과격파가 [[소라 파티산]] 지휘하에 봉기하여 인민국가를 선포하고 신 공화국 정부를 전복을 시도한 사건이다. 다행히도 찬드릴라 공화국 회원국 정부들 중 아무도 가담하지 않아 찬드릴라와 기타 일부 행성들에서 발생한 봉기가 빠르게 진압되는 것으로 끝났다.
==1. 배경==
==1. 배경==
ABY 8년 [[GTC]]는 제헌회의를 총선을 계속해서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이라도 총선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 선거에서 [[몬 모스마]]의 [[은하 공화당]]이 제1당이 되었으나 [[인민전선]]은 [[법치연합]]에 밀려 제 3당이 되었다. 인민전선은 이러한 선거 결과에 큰 불만을 가졌다. 법치연합은 "전향"한 구 제국관료들이 많이 참여한 정당으로 은하 내전기간에 거의 기여가 없었다. 하지만 인민전선은 내전기 가장 피해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선거 결과가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
ABY 8년 [[GTC]]는 제헌회의를 총선을 계속해서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이라도 총선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 선거에서 [[몬 모스마]]의 [[은하 공화당]]이 제1당이 되었으나 [[인민전선]]은 [[법치연합]]에 밀려 제 3당이 되었다. 인민전선은 이러한 선거 결과에 큰 불만을 가졌다. 법치연합은 "전향"한 구 제국관료들이 많이 참여한 정당으로 은하 내전기간에 거의 기여가 없었다. 하지만 인민전선은 내전기 가장 피해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선거 결과가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 그리고 인민전선 GTC내에서 [[법치연합]]의 세력이 커지면 구 제국 인사들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우려했다.  


또한 이 헌법 제정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몬 모스마를 중심으로 한 "시민주의자들"(Populist)은 은하 제국 성립 이전의 은하 공화국의 은하 헌장(Galactic Charter)를 바탕으로 헌법 제정을 원했다. 자유시장경제, 강력한 지방 분권, 작은 중앙정부, 비무장화로 대표되는 구 은하 공화국체제를 원했다. 즉, 구 공화국의 부활을 시도하였다. 이 것은 많은 시민주의자들은 제국의 초기 부터 정치적으로 "위대한 공화국"으로 복귀를 시도한 구 은하의회 의원들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는 "중앙주의자"(Centrist)와 "인민전선"(Popular Front)의 반발을 샀다.법치연합으로 대표되는 중앙주의자들은 클론전쟁의 원인을 약한 중앙정부가 지방 토호들의 준동을 막지 못해 분리주의자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중앙정부와 비무장화에 반대하였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역할 확대와 치안 유지를 위한 강력한 함대 유지를 요구하였다.하지만 그들은 제국의 국유화 정책 폐기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많은 중앙주의자들이 강력한 중앙정부의 유용성과 계획 경제의 실패를 목격한 구 제국의 문민관료들인 것에서 비롯되었다.인민전선은 구공화국으로의 귀환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인민 국가”(Popular State)를 원했다. 인민국가는 행성 정부 해체, 중앙집권화, 국유화, 계획경제를 통해 전통적인 코어 월드(Core World)의 엘리트와 지방 토호들을 타도하여 평등을 달성하려는 국가체제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제국의 국유화나 중앙집권화 정책, 제다이 숙청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이 제국에 항거한 이유는 제국 정부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고 인간우월주의 사상에 찌들어 외계인들을 노예화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헌법 제정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몬 모스마를 중심으로 한 "시민주의자들"(Populist)은 은하 제국 성립 이전의 은하 공화국의 은하 헌장(Galactic Charter)를 바탕으로 헌법 제정을 원했다. 자유시장경제, 강력한 지방 분권, 작은 중앙정부, 비무장화로 대표되는 구 은하 공화국체제를 원했다. 즉, 구 공화국의 부활을 시도하였다. 이 것은 많은 시민주의자들은 제국의 초기 부터 정치적으로 "위대한 공화국"으로 복귀를 시도한 구 은하의회 의원들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는 "중앙주의자"(Centrist)와 "인민전선"(Popular Front)의 반발을 샀다.법치연합으로 대표되는 중앙주의자들은 클론전쟁의 원인을 약한 중앙정부가 지방 토호들의 준동을 막지 못해 분리주의자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중앙정부와 비무장화에 반대하였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역할 확대와 치안 유지를 위한 강력한 함대 유지를 요구하였다.하지만 그들은 제국의 국유화 정책 폐기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많은 중앙주의자들이 강력한 중앙정부의 유용성과 계획 경제의 실패를 목격한 구 제국의 문민관료들인 것에서 비롯되었다.인민전선은 구공화국으로의 귀환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인민 국가”(Popular State)를 원했다. 인민국가는 행성 정부 해체, 중앙집권화, 국유화, 계획경제를 통해 전통적인 코어 월드(Core World)의 엘리트와 지방 토호들을 타도하여 평등을 달성하려는 국가체제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제국의 국유화나 중앙집권화 정책, 제다이 숙청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이 제국에 항거한 이유는 제국 정부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고 인간우월주의 사상에 찌들어 외계인들을 노예화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혼란은 신구 한비(Singu Hanbi)이끄는 법치연합과 몬 모스마의 은하 공화당이 군사적 목적의 함대 유지와 ILE 상설화에 합의하고 제국에 의해 국유화된 산업체들의 민간으로 이양하기 실시하자 인민전선의 더욱 반발하기 시작했다. 구 공화국 헌법에 의회의 권력 제한, 사법부 권한 확대, 이익단체의 의회 대표자 파견 금지 정도만 추가한 신 헌법이 제헌의회의 80%의 동의를 얻어 통과하자 인민전선 의원들이 모두 사퇴하고 신 헌법을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몬 모스마 내각은 GTC 헌장에 헌법 제정에 제헌의회 2/3 동의만 있으면 된다는 규정을 들어 헌법 공포를 강행하였다.
이런 혼란은 [[신구 한비]](Singu Hanbi)이끄는 법치연합과 몬 모스마의 은하 공화당이 군사적 목적의 함대 유지와 ILE 상설화에 합의하고 제국에 의해 국유화된 산업체들의 민간으로 이양하기 실시하자 인민전선의 더욱 반발하기 시작했다. 구 공화국 헌법에 의회의 권력 제한, 사법부 권한 확대, 이익단체의 의회 대표자 파견 금지 정도만 추가한 신 헌법이 제헌의회의 80%의 동의를 얻어 통과하자 인민전선 의원들이 모두 사퇴하고 신 헌법을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몬 모스마 내각은 GTC 헌장에 헌법 제정에 제헌의회 2/3 동의만 있으면 된다는 규정을 들어 헌법 공포를 강행하였다.


==2. 발단==
==2.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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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개==
==3. 전개==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인민전선 과격파 지도자 소라 파티산은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무력으로 GTC를 제압하여 자신들의 "혁명"을 완수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찬드릴라에는 2개 정규군단과 찬드릴라 향토방위함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찬드릴라 행성계 외곽에는 구 제국 제33함대인 [[자유군단]] 제1함대가 자쿠 공세를 마치고 보급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콤그라드등 여러 노동자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친 인민전선 성향인 준군사조직들이 있었다.또한 찬드릴라 주둔하고 있던 2개 정규군단도 제 4 포병 군단과 제 13 보병군단으로 친 인민전선 성향이 강했다. 이에 서라 파티산은 찬드릴라 향토바위함대는 쉽게 제압되고 자유군단은 투입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봉기를 계획하였다. 인민전선은 정규군단들의 지휘관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고 친 인민전선 준군사조직들도 포섭하였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인민전선 과격파 지도자 소라 파티산은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무력으로 GTC를 제압하여 자신들의 "혁명"을 완수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찬드릴라에는 2개 정규군단과 찬드릴라 향토방위함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찬드릴라 행성계 외곽에는 구 제국 제33함대인 [[자유군단]] 제1함대가 자쿠 공세를 마치고 보급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콤그라드등 여러 노동자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친 인민전선 성향인 준군사조직들이 있었다.또한 [[찬드릴라]]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정규군단도 제 4 포병 군단과 제 13 보병군단으로 친 인민전선 성향이 강했다. 이에 소라 파티산은 찬드릴라 향토방위군은 쉽게 제압되고 자유군단은 투입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봉기를 계획하였다. 인민전선은 정규군단들의 지휘관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고 친 인민전선 준군사조직들도 포섭하였다.  
그리고 ABY 4월 13일, 소라 파티산(Sorra Partisan)등 인민전선 과격파들이 봉기하여 “인민국가”를 선포하고 신 공화국 헌법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에 호응하여 콤그라드 인민방위대등이 찬드릴라의 일부 공업도시들에서 봉기하였다. 이에 찬드릴라 경찰과 준군사조직들이 충돌하여 찬드릴라 주요 도시들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이러한 혼란을 진압하기 위해 GTC는 찬드릴라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 투입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ABY 4월 13일, 소라 파티산(Sorra Partisan)등 인민전선 과격파들이 봉기하여 “인민국가”를 선포하고 신 공화국 헌법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에 호응하여 콤그라드 인민방위대등이 찬드릴라의 일부 공업도시들에 있는 무장 단체들도 봉기하였다. 이에 찬드릴라 경찰과 준군사조직들이 충돌하여 찬드릴라 주요 도시들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또한 [[코시]]같은 인민전선의 세력이 강한 일부 다른 회원국 행성들에서도 폭동이 발생하는 등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이에 혼란을 진압하기 위해 GTC는 찬드릴라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 투입을 결정하였다.
[[파일:헌정위기4.jpg|400픽셀|섬네일|가운데|혼란에 빠진 찬드릴라]]
[[파일:헌정위기4.jpg|400픽셀|섬네일|가운데|혼란에 빠진 찬드릴라]]


==4. 절정==
==4. 절정==
[[파일:헌정위기2.jpg|200픽셀|섬네일|왼쪽|불타는 의회의사당]]
[[파일:헌정위기1.jpg|200픽셀|섬네일|가운데|하나 시티 공항을 장악한 [[인민국가]]의 제4 포병군단병사들]]
[[파일:헌정위기3.jpg|200픽셀|섬네일|왼쪽|포격을 맞은 하나시티]]
하지만 찬드릴라에 주둔하던 제 4 포병 군단과 제 13 보병군단은 친 인민전선이 강했다. 그래서 일부 병력이 이탈하여 [[인민국가]]에 가담하였다. 특히 제 4포병군단은 완전히 인민전선에게 장악당해있었다. 이에 찬드릴라 행성상에는 공화국 정부측에는 찬드릴라 향토방위함대와 13보병군단 병력 일부 밖에 없었다. 찬드릴라 경찰은 폭동 진압을 위해 찬드릴라 전역에 흩어져 있어기 때문에 이러한 군사 행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찬드릴라 경찰이 적절한 친 인민전선 성향의 폭력 조직들을 제압하여 대부분의 도시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했다. 그래서 찬드릴라 향토방위군은 제헌의회가 위치해 있는 하나시티의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인민전선은 공화국 정부 제압에 실패하고 하나시티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하나시티에서 겨우 40km밖에 안 떨어진 콤그라드가 인민국가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하나시티 외곽에 있는 하나시티 공항 또한 [[인민국가]]측이 장악했다.
[[파일:헌정위기1.jpg|200픽셀|섬네일|왼쪽|하나 시티 공항을 장악한 [[인민국가]]의 제4 포병군단병사들]]
[[파일:헌정위기2.jpg|200픽셀|섬네일|가운데|불타는 의회의사당]]
[[파일:콤그라드.jpg|200픽셀|섬네일|왼쪽|콤그라드에 진입하는 [[자유군단]]]]
두 세력이 대립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인민국가측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화국 정부를 빨리 제압하지 못하였다. 찬드릴라 시민들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에 인민국가측은 공화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하나시티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화국 정부가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원하지 않으며 협상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러한 공격이 공화국 정부로 하여금 협상에 나오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포격에서 1562명이 사망하고 2231명이 부상당했다.
[[파일:헌정위기6.jpg|300픽셀|섬네일|가운데|포격을 맞은 하나시티]]
하지만 포격은 오히려 공화국 정부를 자극했다. 이 때문에 제헌의회 고등위원회에서 유혈사태를 피하려는 온건파들의 목소리는 약해지고 경제적 안정을 위해 빠른 해결을 촉구한 [[신구 한비]] 경제부장의 목소리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신구 한비]]는 이사태가 오래갈 경우 정치적 불안정이 전 은하에 퍼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마침 항성계 외곽에서 보급을 받고 있는 [[자유군단]]을 투입시키자고 주장했다. 구 제국군 병력을 투입시켜 반란연합 동지들을 진압하다는 것에 때문에 고등위원회 일부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고등위원회는 [[자유군단]]을 투입시키기로 결정했다.
[[파일:콤그라드.jpg|200픽셀|섬네일|가운데|콤그라드에 진입하는 [[자유군단]]제 2 스톰트루퍼 군단]]
[[파일:궤도폭격.jpg|200픽셀|섬네일|가운데|[[인민국가]]측 병력을 폭격하는 [[자유군단]] 제 1함대]]
이에 ABY 9년 4월 15일 항성계 외곽에 대기 중이던 [[자유군단]] 제1함대와 제2 스톰트루퍼 군단이 인민국가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 [[자유군단]] 빠르게 인민국가군을 제압하고 콤그라드로 진입했다.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제한적 궤도 폭격이 사용되었다. 결국 [[소라 파티산]]은 4윌 20일 사살당하고 다른 반란군들도 사살되거나 체포되었다. 이로서 인민전선의 무장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파일:헌정위기5.jpg|300픽셀|섬네일|가운데|[[자유군단에게 체포된 인민국가 병사들]]]]
 
==5. 결말==
==5. 결말==
===5.1. 찬드릴라 헌법의 안정화===
무력충돌의 주무대였던 찬드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행성 수도이자 공화국 정부가 있던 [[하나시티]]는 포격으로 인해 다수의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인민국가]]의 해방구였던 [[콤그라드]]는 폐허가 되었다. 특히 스톰트루퍼들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콤그라드에서 즉결처형이 많이 발생하여 많은 민간인들도 살해 당했다. 인민전선의 군사적 역량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정치 조직도 큰 타격을 입었다. 다른 행성들에서 발생한 봉기도 각 회원국 정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
===5.2. 인민전선의 분열 및 해산===
[[몬 모스마]] 정부는 군에서 봉기에 가담하거나 지지한 자들을 몰아내고 극단주의자들을 제거하는 [[숙군]]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반란연합군을 이어받아 여러 군사 조직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했던 신 공화국 함대의 군조직 통합 및 일원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인민전선]]이라는 정당 자체는 탄압하지 않았다.
==6. 실패 원인==
 
==7. 여파==
==6. 여파==
==8. 평가==
===6.1 찬드릴라 헌법의 안정화===
전 은하는 찬드릴라 헌정위기를 통해 헌법 거부가 가져올 혼란과 [[몬 모스마]] 정부의 강력한 제헌 의지를 목격하였다. 이에 공화국의 모든 회원국들은 찬드릴라 헌법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몬 모스마]] 정부는 이를 빌미로 하여 [[숙군]] 작업을 실시해 군부내 극단주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로서 찬드릴라 공화국체제는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6.2 인민전선의 분열 및 해산===
[[인민전선]]은 이 사태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봉기 시기가 전선에서는 제국 잔당과의 교전이 계속되고 있던 시점이었고 인민전선이 민주정부인 [[GTC]]와 제헌의회를 무력으로 전복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지탄을 받았다. 또한 [[몬 모스마]]의 [[숙군]] 작업을 실시해  [[인민전선]]의 군사적 역량은 제거되었다. 다행히도 [[몬 모스마]] 정부가 인민전선이라는 정당 자체는 탄압을 하지 않아 정치조직이 어느 정도 보존되었으나 강경파와 온건파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온건파는 강경파가 무장 봉기로 당을 망쳤다고 비판했고 강경파는 온건파를 수정주의자들이라 비난했다. 결국 [[인민전선]]은 분열하여 해산되었다. 강경파는 [[인민지하동맹]]을 결성해 지하로 숨어들어 테러등으로 무장 투쟁을 계속했고 온건파는 [[민중회의]]를 창당하여  찬드릴라 공화국 정계에 진출했다.
 
===6. 3 찬드릴라 내에서의 정치갈등 격화===
무력 충돌이 발생한 찬드릴라 행성도 충격에 빠졌다. 인민전선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자 인민전선이 아닌 사람들은 그들을 증오하기 시작했다.[[콤그라드]] 주민들과 인민전선 당원들은 스톰트루퍼들와 스타 디스트로이어까지 동원한 과잉진압에 불만을 품고 은하 공하당이 이끄는 찬드릴라 행성 정부를 증오했다. 그래서 [[하나시티]]와 [[콤그라드]]의 지역갈등이 격화되었다.

2019년 3월 15일 (금) 10:38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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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드릴라 헌정위기

교전 중인 찬드릴라 향토방위군
날짜 ABY 9년 4월 13일-ABY 9년 4월 20일
위치 찬드릴라 행성 전지역과 일부 기타 행성들
원인 몬 모스마 정부의 찬드릴라 헌법 선포 강행
결과 인민전선 분열, 인민전선과 공화국 정부 관계 악화
피해
사망자 12312 명
부상자 23241 명

Chandrila constitutional crisis

출범하기도 전에 찬드릴라 공화국을 파멸시킬 뻔 한 최악의 헌정위기

인민전선과 공화국 정부와 관계가 악화되는 결정적 계기

찬드릴라 헌정위기(Chandrila constitional crisis)는 ABY 9년 4월 13일 부터 ABY 9년 4월 20일 까지 신 공화국 정부와 "인민국가"간 무력충돌 사건이다. 신 헌법에 반발한 인민전선 과격파가 소라 파티산 지휘하에 봉기하여 인민국가를 선포하고 신 공화국 정부를 전복을 시도한 사건이다. 다행히도 찬드릴라 공화국 회원국 정부들 중 아무도 가담하지 않아 찬드릴라와 기타 일부 행성들에서 발생한 봉기가 빠르게 진압되는 것으로 끝났다.

1. 배경

ABY 8년 GTC는 제헌회의를 총선을 계속해서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이라도 총선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 선거에서 몬 모스마은하 공화당이 제1당이 되었으나 인민전선법치연합에 밀려 제 3당이 되었다. 인민전선은 이러한 선거 결과에 큰 불만을 가졌다. 법치연합은 "전향"한 구 제국관료들이 많이 참여한 정당으로 은하 내전기간에 거의 기여가 없었다. 하지만 인민전선은 내전기 가장 피해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선거 결과가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 그리고 인민전선 GTC내에서 법치연합의 세력이 커지면 구 제국 인사들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우려했다.

또한 이 헌법 제정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몬 모스마를 중심으로 한 "시민주의자들"(Populist)은 은하 제국 성립 이전의 은하 공화국의 은하 헌장(Galactic Charter)를 바탕으로 헌법 제정을 원했다. 자유시장경제, 강력한 지방 분권, 작은 중앙정부, 비무장화로 대표되는 구 은하 공화국체제를 원했다. 즉, 구 공화국의 부활을 시도하였다. 이 것은 많은 시민주의자들은 제국의 초기 부터 정치적으로 "위대한 공화국"으로 복귀를 시도한 구 은하의회 의원들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는 "중앙주의자"(Centrist)와 "인민전선"(Popular Front)의 반발을 샀다.법치연합으로 대표되는 중앙주의자들은 클론전쟁의 원인을 약한 중앙정부가 지방 토호들의 준동을 막지 못해 분리주의자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중앙정부와 비무장화에 반대하였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역할 확대와 치안 유지를 위한 강력한 함대 유지를 요구하였다.하지만 그들은 제국의 국유화 정책 폐기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많은 중앙주의자들이 강력한 중앙정부의 유용성과 계획 경제의 실패를 목격한 구 제국의 문민관료들인 것에서 비롯되었다.인민전선은 구공화국으로의 귀환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인민 국가”(Popular State)를 원했다. 인민국가는 행성 정부 해체, 중앙집권화, 국유화, 계획경제를 통해 전통적인 코어 월드(Core World)의 엘리트와 지방 토호들을 타도하여 평등을 달성하려는 국가체제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제국의 국유화나 중앙집권화 정책, 제다이 숙청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이 제국에 항거한 이유는 제국 정부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고 인간우월주의 사상에 찌들어 외계인들을 노예화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혼란은 신구 한비(Singu Hanbi)가 이끄는 법치연합과 몬 모스마의 은하 공화당이 군사적 목적의 함대 유지와 ILE 상설화에 합의하고 제국에 의해 국유화된 산업체들의 민간으로 이양하기 실시하자 인민전선의 더욱 반발하기 시작했다. 구 공화국 헌법에 의회의 권력 제한, 사법부 권한 확대, 이익단체의 의회 대표자 파견 금지 정도만 추가한 신 헌법이 제헌의회의 80%의 동의를 얻어 통과하자 인민전선 의원들이 모두 사퇴하고 신 헌법을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몬 모스마 내각은 GTC 헌장에 헌법 제정에 제헌의회 2/3 동의만 있으면 된다는 규정을 들어 헌법 공포를 강행하였다.

2. 발단

몬 모스마 최고의장이 신 공화국 헌법 공포를 강행하고 선거일을 공고하자 인민전선 지도부는 혼란에 빠졌다. 당시 지도부는 온건파인 라노 스텔리(Lano Stenli)가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몬 모스마가 나약한 지도자로 생각하고 헌법 공포를 강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몬 모스마 최고의장은 강행을 했고 이에 인민전선의 온건파 지도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이에 인민전선에서 불온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에 온건파 지도부는 비상 총회를 열어 분위기를 추스리고 향후 투쟁방향을 결정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막상 총회가 소집되자 혼란 상황이 수습되기는 커녕 더 심해졌다. 강경파들은 총회에서 지도부 사퇴를 촉구하였고 무장투쟁 시작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지도부는 사퇴를 거부했다. 이에 인민전선 과격파들은 자신들만의 지도부를 구성하였고 소라 파티산을 당 대표로 선출하였다. 이러한 당내 이중권력사태가 발생하자 온건파 지도부는 GTC에 중재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과격파들을 더 분개하게 만들었다. 이에 코라 스톤(Corry Stone)이란 과격파 열성당원이 찬드릴라 하나 시티에 있는 당사에 들어가 총기난사를 하여 라노 스텔리를 비롯한 온건파 지도부를 사살하였다. 이에 GTC는 과격파 지도부를 폭력단체로 규정하고 체포에 나섰다.

3. 전개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인민전선 과격파 지도자 소라 파티산은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무력으로 GTC를 제압하여 자신들의 "혁명"을 완수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찬드릴라에는 2개 정규군단과 찬드릴라 향토방위함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찬드릴라 행성계 외곽에는 구 제국 제33함대인 자유군단 제1함대가 자쿠 공세를 마치고 보급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콤그라드등 여러 노동자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친 인민전선 성향인 준군사조직들이 있었다.또한 찬드릴라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정규군단도 제 4 포병 군단과 제 13 보병군단으로 친 인민전선 성향이 강했다. 이에 소라 파티산은 찬드릴라 향토방위군은 쉽게 제압되고 자유군단은 투입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봉기를 계획하였다. 인민전선은 정규군단들의 지휘관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고 친 인민전선 준군사조직들도 포섭하였다. 그리고 ABY 4월 13일, 소라 파티산(Sorra Partisan)등 인민전선 과격파들이 봉기하여 “인민국가”를 선포하고 신 공화국 헌법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에 호응하여 콤그라드 인민방위대등이 찬드릴라의 일부 공업도시들에 있는 무장 단체들도 봉기하였다. 이에 찬드릴라 경찰과 준군사조직들이 충돌하여 찬드릴라 주요 도시들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또한 코시같은 인민전선의 세력이 강한 일부 다른 회원국 행성들에서도 폭동이 발생하는 등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이에 혼란을 진압하기 위해 GTC는 찬드릴라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 투입을 결정하였다.

혼란에 빠진 찬드릴라

4. 절정

하나 시티 공항을 장악한 인민국가의 제4 포병군단병사들

하지만 찬드릴라에 주둔하던 제 4 포병 군단과 제 13 보병군단은 친 인민전선이 강했다. 그래서 일부 병력이 이탈하여 인민국가에 가담하였다. 특히 제 4포병군단은 완전히 인민전선에게 장악당해있었다. 이에 찬드릴라 행성상에는 공화국 정부측에는 찬드릴라 향토방위함대와 13보병군단 병력 일부 밖에 없었다. 찬드릴라 경찰은 폭동 진압을 위해 찬드릴라 전역에 흩어져 있어기 때문에 이러한 군사 행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찬드릴라 경찰이 적절한 친 인민전선 성향의 폭력 조직들을 제압하여 대부분의 도시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했다. 그래서 찬드릴라 향토방위군은 제헌의회가 위치해 있는 하나시티의 방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인민전선은 공화국 정부 제압에 실패하고 하나시티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하나시티에서 겨우 40km밖에 안 떨어진 콤그라드가 인민국가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하나시티 외곽에 있는 하나시티 공항 또한 인민국가측이 장악했다.

불타는 의회의사당

두 세력이 대립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인민국가측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화국 정부를 빨리 제압하지 못하였다. 찬드릴라 시민들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에 인민국가측은 공화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하나시티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화국 정부가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원하지 않으며 협상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러한 공격이 공화국 정부로 하여금 협상에 나오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포격에서 1562명이 사망하고 2231명이 부상당했다.

포격을 맞은 하나시티

하지만 포격은 오히려 공화국 정부를 자극했다. 이 때문에 제헌의회 고등위원회에서 유혈사태를 피하려는 온건파들의 목소리는 약해지고 경제적 안정을 위해 빠른 해결을 촉구한 신구 한비 경제부장의 목소리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신구 한비는 이사태가 오래갈 경우 정치적 불안정이 전 은하에 퍼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마침 항성계 외곽에서 보급을 받고 있는 자유군단을 투입시키자고 주장했다. 구 제국군 병력을 투입시켜 반란연합 동지들을 진압하다는 것에 때문에 고등위원회 일부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고등위원회는 자유군단을 투입시키기로 결정했다.

콤그라드에 진입하는 자유군단제 2 스톰트루퍼 군단
인민국가측 병력을 폭격하는 자유군단 제 1함대

이에 ABY 9년 4월 15일 항성계 외곽에 대기 중이던 자유군단 제1함대와 제2 스톰트루퍼 군단이 인민국가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 자유군단 빠르게 인민국가군을 제압하고 콤그라드로 진입했다.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제한적 궤도 폭격이 사용되었다. 결국 소라 파티산은 4윌 20일 사살당하고 다른 반란군들도 사살되거나 체포되었다. 이로서 인민전선의 무장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자유군단에게 체포된 인민국가 병사들

5. 결말

무력충돌의 주무대였던 찬드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행성 수도이자 공화국 정부가 있던 하나시티는 포격으로 인해 다수의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인민국가의 해방구였던 콤그라드는 폐허가 되었다. 특히 스톰트루퍼들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콤그라드에서 즉결처형이 많이 발생하여 많은 민간인들도 살해 당했다. 인민전선의 군사적 역량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정치 조직도 큰 타격을 입었다. 다른 행성들에서 발생한 봉기도 각 회원국 정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 몬 모스마 정부는 군에서 봉기에 가담하거나 지지한 자들을 몰아내고 극단주의자들을 제거하는 숙군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반란연합군을 이어받아 여러 군사 조직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했던 신 공화국 함대의 군조직 통합 및 일원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인민전선이라는 정당 자체는 탄압하지 않았다.

6. 여파

6.1 찬드릴라 헌법의 안정화

전 은하는 찬드릴라 헌정위기를 통해 헌법 거부가 가져올 혼란과 몬 모스마 정부의 강력한 제헌 의지를 목격하였다. 이에 공화국의 모든 회원국들은 찬드릴라 헌법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몬 모스마 정부는 이를 빌미로 하여 숙군 작업을 실시해 군부내 극단주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로서 찬드릴라 공화국체제는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6.2 인민전선의 분열 및 해산

인민전선은 이 사태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봉기 시기가 전선에서는 제국 잔당과의 교전이 계속되고 있던 시점이었고 인민전선이 민주정부인 GTC와 제헌의회를 무력으로 전복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지탄을 받았다. 또한 몬 모스마숙군 작업을 실시해 인민전선의 군사적 역량은 제거되었다. 다행히도 몬 모스마 정부가 인민전선이라는 정당 자체는 탄압을 하지 않아 정치조직이 어느 정도 보존되었으나 강경파와 온건파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온건파는 강경파가 무장 봉기로 당을 망쳤다고 비판했고 강경파는 온건파를 수정주의자들이라 비난했다. 결국 인민전선은 분열하여 해산되었다. 강경파는 인민지하동맹을 결성해 지하로 숨어들어 테러등으로 무장 투쟁을 계속했고 온건파는 민중회의를 창당하여 찬드릴라 공화국 정계에 진출했다.

6. 3 찬드릴라 내에서의 정치갈등 격화

무력 충돌이 발생한 찬드릴라 행성도 충격에 빠졌다. 인민전선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자 인민전선이 아닌 사람들은 그들을 증오하기 시작했다.콤그라드 주민들과 인민전선 당원들은 스톰트루퍼들와 스타 디스트로이어까지 동원한 과잉진압에 불만을 품고 은하 공하당이 이끄는 찬드릴라 행성 정부를 증오했다. 그래서 하나시티콤그라드의 지역갈등이 격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