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저라이히 (Seojh0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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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라이히(Kaiserreich) 세계관은 사라예보 사건 직후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세르비아 및 대러시아 선전포고가 지체되지않고 이루어졌으며, 수명이 연장된 독일의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슐리펜 계획의 최우선 목표를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변경함에 따라 러시아가 전쟁 초에 항복, 이어 합류한 동부전선군과 함께 벨기에 우회침공을 강행해 프랑스마저 항복하고 뒤늦게 참전한 대영제국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한 함대 궤멸과 기아로 항복하여 대전쟁(Weltkrieg)이 동맹국의 승리로 끝난 세계이다.

독일 제국은 전후 상수시 조약으로 하여금 협상국들을 굴복시켜 세계의 강대국으로 거듭났으며, 유럽 경제적 협력공동체인 미텔오이로파(Mitteleuropa)와 독일의 세력권인 국가협정(Reichspakt)을 창설하여 제국주의 시대의 제2전성기를 이끌고있다. 하지만, 내부에서의 정치분열과 무리한 식민지 경영, 각지 제국영토에서의 독립운동으로 독일의 모순된 제국은 점차 무너져내리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불어오는 국가대중주의와 공산주의의 물결은 전세계를 또다시 2번째 대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세계관 년도는 1936년이며, 전세계는 독일 제국이 이끄는 국가협정(Reichspakt), 프랑스국이 이끄는 강철조약(Pacte d'acier), 캐나다 왕국이 이끄는 신 협상국(New Entente), 토리노 코뮌이 이끄는 제3인터내셔널(Third Internationale)의 4개 세력에 의해서 갈라져있는 상태이다. 각 세력들은 권위주의 및 반동주의, 국가대중주의,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의 이념을 대표하며, 전세계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있는 상태이다.

세력(Pact)

세력은 4개의 강대세력과 그외의 중소세력, 그리고 중립국으로 나뉜다.

세력명 이념 공용어 중심 국가
경제 이념 정치 이념
국가협정
Reichspakt
자본주의 시장경제 권위민주주의(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 독일어 독일 제국
강철조약
Pacte d'acier
자본주의 계획경제 국가대중주의(로크주의) 프랑스어 프랑스국
신 협상국
New Entente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조지안 데모크라시) 영어
프랑스어
캐나다 왕국
제3인터네셔널
Third Internationale
Terza Internazionale
사회주의 계획경제 공산주의(토리노 생디칼리즘)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토리노 코뮌

분기점

현실의 지구 역사와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이 갈라지는 분기점을 다룬다.

대전쟁(Weltkrieg) 이전까지

자세한 내용은 대전쟁 이전까지의 연표 참고.

실제 역사와는 달리,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러시아를 대놓고 적으로 돌리는 멍청한 짓은 벌이지않았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이 안정적으로 발전해나가기 위해서 최소한 당분간은 러시아와 적대관계로 있지않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했고, 독일과 러시아간 재보장 조약이 연장시켰다. 삼제동맹이 1910년대까지 이어지고 비스마르크가 해임되지않으면서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을 견제하는데 집중할 수 있게된다. 러시아에 투자될 군비가 군사적 개발과 경제개발에 돌아가면서 독일은 현실보다 더 강력한 국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편,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함에 따라 한국은 독립을 유지하였고, 이에 따라 원래는 한반도 합병을 기점으로 대륙진출에 나서야만했던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와 입헌정우회 내각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몇십년 일찍 군사독재를 맞이하게된다. 이어 변법자강운동이 성공함에 따라 위안스카이를 비롯한 북양군벌이 내정에 간섭하는데 실패하였고, 쑨원과 캉유웨이가 10년 일찍 청나라에 민주주의를 뿌리잡게하면서 청나라 역시 수명이 몇년 더 연장되는 결과를 초래하게된다.

대전쟁(Weltkrieg)

자세한 내용은 대전쟁 연표 참고.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은 실제 역사와 달리 건강에 신경쓰면서 1906년 이후에도 참모총장직을 유지했고 슐리펜 계획을 효율적으로 보강하는데 성공한다. 이 계획에서는 본래 계획과 정반대로 프랑스군을 최대한 막고 대신 러시아를 속전속결로 점령하고 그 뒤에 프랑스를 치는 전술을 채택했으며, 이것이 독일이 대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유가 된다.

1914년 6월 28일, 실제 역사와는 달리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피격에서 살아남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페르디난트 대공 피격을 이유로 몬테네그로의 내정에 간섭하며 러시아의 신경을 건들게된다. 결국 이 몬테네그로 위기를 기점으로 6월 30일,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면서 대전쟁은 실제 역사보다 1달 일찍 개전되었고 독일이 곧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지지를 천명하면서 슐리펜 계획이 본격적으로 발동하게된다. 정예 기병대로 구성된 독일의 기동대는 빠르게 치고나가 러시아가 항복하는 1916년 시점에는 이미 바르샤바, 빌뉴스, 민스크등 러시아의 주요한 도시들이 독일에 점령된 상태였고, 안그래도 총동원령과 여러 문제로 인하여 내부불만이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던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전쟁을 끝냈지만 곧바로 혁명이 일어나 제정이 붕괴, 새로히 집권한 케렌스키 정권이 전쟁을 지속하면서 동부전선은 길게 늘어지게된다.

그래도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로 끝난 덕택에 새로운 러시아 공화정부도 1916년 5월에 항복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코르닐로프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을 발생시키면서 동부전선은 종결을 맞게된다. 독일은 동부전선군을 서부전선으로 곧장 옮겨 1916년 10월 즈음에 벨기에 우회를 강행하기 시작했고, 우회기습이 성공적으로 끝남에 따라 독일군은 순식간에 베르됭에 접하는 상황이 일어나게된다. 벨기에 침공과 함께 전쟁에 참전한 영국은 이미 영국 해군을 기습하기 위하여 대기중에 있던 잠수함 함대가 영국 함대 대부분을 궤멸시키고 봉쇄작전을 펼치면서 기아상태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1917년 5월, 베르됭이 돌파되고 6월에 파리에 독일 제국기가 꽂히면서 프랑스는 빠르게 항복, 이어서 독일이 영국에 상륙함에 따라 영국 역시 백기를 들고만다.

남부전선의 상황은 동부, 서부보다 훨씬 좋았는데, 1915년 불가리아가 참전함에 따라 세르비아를 양쪽에서 포위할 수 있게되었고 현실보다 상태가 나아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1915년 안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 이어 그 해에 협상국측으로 참전한 알바니아, 루마니아를 항복시키고 2년 일찍 참전한 그리스마저 테살로니키에서 대부분 군대를 궤멸시키면서 항복시키는데 성공한다. 개전과 함께 참전한 이탈리아 역시 상황은 다르지않아서 제3차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의 주력을 완전히 궤멸시키면서 이탈리아 북부를 순식간에 점령하게되었고, 결국 1917년 2월 로마와 나폴리를 오스트리아에 내주면서 이탈리아도 패배를 맞이하게된다.

협상국군 주력이 모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프랑스 남부의 저항군과 포르투갈, 일본, 그리고 협상국의 식민지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1918년까지 진행되었다. 아프리카 전선은 파울 폰 레토프-포어베크 장군이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식민지군 대부분의 주력을 묶어준 덕분에 독일군이 손쉽게 아프리카에 진입할 수 있었고, 1918년 5월 시점에 카이로와 트리폴리에 입성하고 10월에는 튀니스와 알제를 점령, 11월에는 시가전을 펼치며 버티던 마르세유의 프랑스군이 투항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베를린의 상수시 궁전에서는 전후처리와 패전국 영토 분할을 위한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상수시 조약에 따라 패전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는 수백만 마르크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 대부분을 잃은채 분할당해야만 했다. 한편, 포르투갈이나 일본, 캐나다의 경우 조약 이후에도 독일과의 전쟁 지속을 주장했는데, 이 역시 1921년 코펜하겐에서 맺어진 조약, 일명 '명예로운 평화'에 의해서 대전쟁은 최종적으로 종결된다.

전간기(Zwischenkriegs)

자세한 내용은 전간기 연표 참고.

전후 프랑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국 참고.

전후 프랑스는 독일의 점령과 폭동, 정치분열로 인하여 혼란에 차있었다. 군부는 상수시 조약을 부정하고 지속적인 전쟁 수행을 주장했지만 대중들은 전쟁이 끝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결국 군부의 수장 페르디낭 포슈는 쿠데타를 강행했고, 마르세유를 장악, 국가대중주의자이자 프랑스의 장군 레몽 드 라 로크의 아들인 드 라 로크와 젊은 미래주의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로 하여금 민중을 선동하여 민병대를 소집시킬 것을 명령한다. 약 3만가량으로 구성된 일명 마르세유 자원병들은 포슈의 명령에 따라 파리로의 기나긴 진군을 행하게된다. 상당히 불확실한 도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로의 진격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지휘부를 잃은 프랑스의 독일 점령군들은 프랑스 북부에서 철수해 그들의 영향력이 확고했던 부르고뉴 지역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이 철수하자 프랑스에는 온갖 군벌과 파벌, 국가들이 난립하는 전국시대에 돌입했으나, 포슈가 설립한 파리의 새 프랑스 정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철권을 통한 철저한 치안을 기반으로 빠르게 프랑스 남부와 중부를 장악해나갔고, 마침내 1922년에 이르러서 독일이 점령한 동부의 부르고뉴 지역과 저항이 막강했던 브르타뉴, 노르망디의 반란군을 제외한 프랑스 전역이 군부의 손에 들어왔다. 10월 3일, 군부의 수장 페르디낭 포슈는 파리의 개선문에서 '독일 침략군'과 '조국에 대항한 반동 반란군'을 궤멸시키고 프랑스의 자유주의를 지켜냈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군부의 괴뢰세력이 되어버린 새로운 파리의 의회와 내각은 만장일치로 포슈가 이끄는 군부에 정권을 이양했고, 50년간 이어져온 프랑스의 3번째 공화정은 또다시 군인에 의해 몰락했다.

1922년 12월, 정권을 이양받은 프랑스 군정의회는 새 프랑스 통일국가 프랑스국을 선포하였고, 페르디낭 포슈를 대원수(Grand Maréchal), 앙리 필리프 페탱을 총통(Généralissime)로 추대했다. 새로운 프랑스국의 의회는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배재된 채로 구성되었다. 포슈는 대독 복수주의와 프랑스 제일주의 사상 아래에 국민들을 선동하며 10년간의 세월동안 독재체제 하에 국가를 발전시켜왔다. 대원수 페르디낭 포슈가 죽은 이후, 페탱은 의회로부터 새로운 대원수직에 추대받았고, 공석이 된 총통직은 마르세유 의용병을 최전선에서 이끈 프랑스 파시즘의 지도자 프랑수아 드 라 로크가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