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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카토는 유튜브와 NHK에서 신년사를 낭독하였다. 또한 2020년 그 후를 바라보겠다며, 20년 이후에도 장기집권의 의사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5월의 일한중 정상회담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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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백색국가 해제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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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일 (목) 19:03 판

일본 > 일본의 인물 > 일본의 정치인 > 카토 메구미

헤이세이 시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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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 토요가사키 학원
아키 토모야 카토 메구미 카스미가오카 우타하
사와무라 스펜서 에리리 하시마 이즈미 하시마 이즈미
현립 츠바키 고등학교
효도 미치루 히메카와 토키노 미즈하라 에치카
모리오카 란코
카토 메구미
加藤 (かと) (めぐみ)
인물 정보
생년 월일 1995년 09월 23일(1995-09-23) (28세)
출생지 일본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거주지 일본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학력 일본과학대학 전기통신학 박사
소속 정당 성장당 (카토파)
일본의 73대 내각총리대신
내각 제1차 카토 메구미 내각
제1차 카토 메구미 개조 내각
제2차 카토 메구미 내각
제3차 카토 메구미 내각
제3차 카토 메구미 제1차 개조 내각
제3차 카토 메구미 제2차 개조 내각
제4차 카토 메구미 내각
제4차 카토 메구미 개조 내각
재임기간 2015년 8월 27일 ~ 2022년 11월 19일
일본의 중의원 의원
선거구 도쿄도 1구
선수 45, 46, 47, 48, 49, 50, 51
재임기간 2012년 ~

카토 메구미(일본어: 加藤 恵 (かとう めぐみ), 1995년 9월 23일 ~ )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성장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이자 제73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제21대 자유민주당, 초대 성장당 총재이다.

개요

1995년 9월 23일, 당시 마이니치 신문의 정치국 편집장였던 카토 모토히로(加藤 元浩)와 그 아내 나나에(奈々絵)의 장녀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카토 모토히로가 입학하도록 주장한 토요가사키 계열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과학대학 공과대학 정보통신공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아버지인 카토 모토히로를 비롯해 어머니인 카토 나나에, 고조부인 카토 에이사쿠(加藤 栄作), 전 일본 외무대신이자 조부 카토 케이요시(加藤 圭佳), 가정교사였던 오오가미 레이(大神 零), 친척들까지 도쿄 대학 출신이 많았지만 카토 메구미는 무난하게 에스컬레이터식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으며, 친인척들의 극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과학대학에 차석 입학하였다.

경력

카토의 집안에는 정치가를 지낸 이들이 있으며, 고조부도 수상을 지낸 정치가 가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조부는 52대 총리대신을 지낸 카토 에이사쿠(加藤 栄作)이다.

대학 졸업 후 자유민주당 도쿄도 신주쿠구 지방당 위원장(2009~2011)으로 일했고, 자유민주당 도쿄도 도의회 의원(2011~2013)을 지냈다. 자유민주당 도쿄도 선거대책위원장(2012)을 지냈으며, 자유민주당 중의원 의원(2014~현재)를 지내고 있고, 자유민주당 간사장(2014)를 지냈다. 2015년 총리직에 올랐다.

정계 입문

졸업 이후 2005년에서 2007년 까지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정치부 기자를 보냈다. 1년 뒤인 2008년에는 조부이자 외무대신이던 카토 케이요시의 비서로 취임하고, 각국의 수뇌와의 회담에 동석하는 등 후계자 수업을 진행해갔다. 하지만 이후 자유민주당 도쿄도 신주쿠구 지방당 위원장에 발탁되면서 외무성의 일을 내려놓았으며, 이후 도쿄도 도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1년에 총리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조부 카토 케이요시가 급사하면서, 2012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사망한 조부의 지역구였던 신주쿠 1구(당시)에서 출마해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총리가 되기까지

2013년 4월 당선부터 현재까지도 카토 의료재단이라는 민영의료보험을 만들어 독거노인을 위한 노인요양센터에 지원금을 주는 사업으로 카토 메구미가 매년 9000만 엔을 기부해 오고 있다. 또한 인구의 6000만 가까이 차지하는 노인을 위한 일자리가 필요하다면서 기계기술의 확대를 법의 강행돌파로 이루어 내 중견기업과 기술혁신산업체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면서 복지예산의 200%증액을 주장한 네오 아베노믹스를 배격하고 자유민주당 본래의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카츠키 가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총리 후보로는 거론도 되지 않던 2선 의원인 아카츠키 소야민을 아베 신조를 누르고 71대 내각총리대신에 당선시키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중의원의 아카츠키 파벌에게 큰 빚을 안겼고, 카토 파벌이 중의원에서 사실상 아카츠키 파벌을 흡수하게된다.

한편 2014년 말의 자유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아카츠키 소야민이 재기하지 못하자, 자연스럽게 아카츠키 파벌을 완전히 흡수하였으며 이후 1월 13일 쿠라하시 리코 전 일등육좌를 총리로 올린다. 교육정책의 변화, 중국과의 외교 마찰 등 정치적 리스크가 큰 일들을 모두 쿠라하시 내각에서 이행하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쿠라하시 리코는 카토의 이러한 간섭에 실증을 내고 있었으며, 비카토파벌 강경정치인들과 극우의원들을 동원하여 8월 23일 국민개병제를 바탕으로하는 병역법을 개정한다. 결국 내각 지지율을 바닥에 내리꽂혔으며, 27일 사임하고 긴급의결을 통해 카토가 새 총리로 얼떨결에 오르게된다.

취임 후

1차 집권기(15년 8월 ~ 16년 10월)

2015년

쿠라하시 내각의 붕괴가 천명하는 바는 자명했다. 100여년이 넘는 자민당의 공중분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8월 29일, S&P는 일본의 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강등하였다.

국내적으로는 자민당의 지지율이 20%를 밑도는 수준이었고, 내각 지지율 역시 30%를 넘기지 못하고 작은 반등과 하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카토는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쿠라하시계의 의원들을 최대한 단죄하고, 자민당 주류 파벌인 굉지회를 끌어안아야한다고 판단했다. 미사카의 당내 영향력 확장이 약간의 문제는 되었지만 결국 16년 1월 굉지회의 영수 자리를 차지했다.

2016년

2016년 1월 굉지회의 영수자리를 차지한 카토는 쿠라하시계 의원들을 곧바로 출당조치하였다. 또한 징병제 법안의 시행을 2016년 1월에서 12개월 유예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내각 지지율은 3월 말 38%까지 회복되었으나, 자유민주당의 지지율은 20% 초반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민진당과 공산당 등 야당의 내각을 해산하라는 거센 반발이 빗발치고 있었다. 결국 3월 28일 NHK의 내각불신임 또는 자진해소가 필요하느냐는 설문조사에서 응답대상자의 55%가 자민당 내각이 국민의 재신임을 물어야한다고 답하면서 정권기반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미사카 미코토의 분당선언으로 민진·공명 등 여야를 가릴 것 없는 전례없는 대규모 이합집산이 일어나자 카토는 최대한 구 자민당의 영향력을 유지하기위해 해산을 늦췄다.

결국 2016년 4월의 정계개편 이후 약 4개월 간의 조정기간을 거치다가 결국 내각이 자진해소,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열리게 된다.

2차 집권기(16년 10월 ~ 17년 10월)

2016년

47회 총선거의 결과는 카토의 성장당과 미사카의 과학당이 거의 비슷한 의석을 확보하면서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되었다. 카토는 물밑 접촉을 통해 개표 당일 당선이 확정된 쇼쿠호 과학당 간사장과 협의하여 성장-과학에 이르는 대연정을 얻어낸다.

게다가 의석 수는 과학이 몇 석 더 많음에도 총리를 성장에서 배출할 수 있는 동의까지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물론 국민적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과학당의 적극적 지지천명으로 내각지지율은 처음으로 40%를 넘어서게 되었다.

또한 과학당의 무리한 연정가담으로 오히려 과학당 내의 계파들이 당을 나가는 일이 빈번해지며 2차 정개계편까지 이뤄내는 쾌거를 이뤘다.

한편 11월 미합중국 대통령에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고 아메리카 퍼스트를 동맹국에게까지 외치면서 외교정책의 노선이 바뀌게된다.

2017년

일미 무역전쟁

먼저 카토 내각은 아세안 국가들과 밀접해지기 위해 적으면 1천억 엔 규모로 국채를 매입하였다. 또한 G7에 카토노믹스를 실행하겠다는 경제정책 예고도 모두 마쳤다.

2017년 2분기부터 중국이 미국의 관세철퇴를 맞고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었다. 미 상무부는 5월 25일 일본 역시 미국에게서 막대학 이익을 갈취하고있다고 발언하였다.

이에 외무성은 즉각 반발하며 미국의 도가 넘는 발언은 신뢰관계를 무너트리는 요소로 작용하고있다고 맞불을 놨다. 7월 10일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도요타를 언급하며 미국시장에서 근로자들의 돈을 뽑아내고있다고 게시하며 일본의 주요 기계부품에 5천억 달러 대의 징벌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일미갈등을 촉발시켰다.

일본수출입관리국과 경제산업성은 즉각 기자회견을 소집하며 미국의 이같은 태도는 일본의 인내심을 시험하게한다고 발표하였다. 일본은행도 미국과 일본이 인구에서는 1억 5천여명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GDP상으로는 거의 동등한 상황이라면서 비경제활동인구가 압도적으로 적은 일본과 무역전쟁을 벌이는 것은 미국의 자충수라고 경고하는 서한도 국무부로 전달하였다.

9월 11일 미국은 일본을 환율조작국으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무역제제에 들어갔다. 기계부품을 포함한 1,433개 품목에 3천 억 달러의 관세추징금을 물었다. 이에 외무성은 즉각 중국과 접촉하여 대미희토류수출 중지를 제안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 사안에 긍정적인 의사를 타진하자 카토 수상은 바로 미국의 농축산품을 포함한 1,313개 품목에 1천억 달러의 관세추징금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중국은 대미희토류수출을 사전 공지없이 완전 중단하였다.

미국은 예상치 못한 일본과 중국의 공동대응에 잠깐 당황하는 듯 보였으나 곧바로 일본에는 무비자협정의 취소통보를, 중국에는 적색국가로 지정하여 중국과 거래하는 모든 국가들에 그에 상응하는 보복성 대응을 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와같은 국외적 상황이 지속되자 내각 지지율이 처음으로 60%를 돌파하였고, 대미관계에 대한 대응책으로 야당이 분열되었다. 이에 카토 총리는 전격적으로 의회를 해산, 대내외적 혼란을 이유로 총선승리를 확신했다.

3차 집권기(17년 10월 ~ 20년 9월)

2017년

카토의 의기양양한 해산으로 거행된 47회 총선거는 보수역사에 길이남을 대참패로 마무리되었다. 먼저 1년만에 국회를 해산하는 것에대한 국민의 거부감이 상당했으며, 해산 이유도 명분이 부족한데다가 오히려 야당 분열을 노리고 꼼수를 써 해산했자는 의견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지지율의 1, 2위와는 별개로 46회와는 다르게 성장당이나 과학당을 대신할 지역정당들이 곳곳에 생겨났으며 예상보다 높은 지지를 받았던 것도 패배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토는 대연정을 통해 총리에 재 취임하였으며, 미국의 경제제재에도 일본의 정권이 흔들림이 없음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선임보좌관을 일본에 급파하여 일미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물밑 접촉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카토 총리는 11월 3일 방문한 이방카를 11월 6일까지 접견을 허가하지 않았으며, 11월 7일에 미국 외무부의 무비자협정 파기를 번복하는 성명이후에야 호시노야 도쿄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후 11월 8일 주일중국대사 청융화와 접견을 통해 중국의 대미 희토류수출 중지조치를 해제하였으며 11월 11일 일미가 상호간의 관세추징금을 거두어들이는 합의를 거친 후에야 미일관계는 다시 원상복귀될 수 있었다.

2018년

1월 1일 카토는 유튜브와 NHK에서 신년사를 낭독하였다. 또한 2020년 그 후를 바라보겠다며, 20년 이후에도 장기집권의 의사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5월의 일한중 정상회담에서는

2019년

대한민국 백색국가 해제 결정

2020년

미사카 미코토 문부과학상 경질 사태

4차 집권기(20년 9월 ~ 22년 11월)

소드 아트 온라인 사태

퇴임 후

선거 이력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45회(2012) 45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자민당 266,751
 52.1%
1 당선 초선
46회(2014) 46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자민당 251,051
 45.3%
1 당선 2선
47회(2016) 47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성장당 236,553
 40.1%
1 당선 3선
48회(2017) 48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성장당 221,373
 38.7%
1 당선 4선
49회(2020) 49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성장당 257,894
 46.9%
1 당선 5선
50회(2022) 50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성장당 202,325
 33.8%
1 당선 6선
51회(2025) 51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성장당
 1%
당선 7선

메이슌 자이언츠 팬

야구의 팬이며, 특히나 메이슌 자이언츠의 팬이다. 본인이 이끌고 있는 성장당이 메이슌 자이언츠를 후원하고 있기도 하고, 어릴때부터 메이슌 자이언츠를 응원했기에 더 그런 면이 있다.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메이슌이 크게 진 날에 모든 국정 업무를 중단하고 방에 들어가 대성통곡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 정치학자는 "카토 메구미는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상당히 강한 인물인데, 메이슌 자이언츠도 명문 구단이라는 타이틀이 있다. 그런 비슷한 처지인 구단을 응원하며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충족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가끔싹 메이슌이 대패하는 날 국회로 감독이나 선스들을 불러 와서 청문회를 열기도 한다. 감독이나 선수들도 이에 대한 반응이 천차만별인데, 죄송하다고만 반복하는 감독부터 당당하게 나오는 선수, 게다가 아예 안나온 선수도 있었다.. 메이슌이 13연패에 빠지자 아예 직접 메이슌 자이언츠에 찾아가 즉석 청문회를 열고 끝난 뒤에도 "13패?! 너희들이 명문구단이냐?!"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1인 시위를 감행하였다. 그 뒤 기여코 14연패를 해버리자 아예 구단 버스 앞에 드러누우려 하다가 결국 수행원의 만류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겨우겨우 연패에서 탈출한 날 총리관저에서는 그저 웃음과 울음이 같이 들렸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