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3 머릿글}} {{코뢴옹스타크 작전 개요 도표}} '''코뢴옹스타크 작전'''({{llang|de|Unternehmen Krönungstag}}, {{llang|en|Operation Coronation}}) 또는, '''지도자 지령 5호'''({{llang|en|Leader's 5st Order}})는 [[비그리드 작전]]의 후속 작전으로 독일의 통합과 유럽에서의 독일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실행된 군사 작전이다. 수도 베를린을 수복함으로써 당당한 독일의 국가로 거듭난다는 뜻에서 대관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배경== ===독일의 비그리드 작전 후 처리=== [[비그리드 작전]] 동안의 대패를 이유로 동독의 최고 군사 사령관인 [[슈나이더 폰 바덴부르크]] 대장은 중장으로 강등당했고, [[소련]] 군부에 의해서 살아남은 고위직의 일부가 해고당했다. [[루트비히 바그너]]를 선두로 일부 장교들은 자신의 군부대를 이끌고, 서독에 항복하기도 했다. 대다수의 투항 장교는 그대로 [[2선급 장교]]로 채용되었다. 꽤 위험했지만, 그 판단은 매우 옳았음이 후에 밝혀졌다. 물론 이는 [[지도자 명령 4호]]로써 다루어졌다. 지도자 명령 4호는 [[지도자 명령 5호]]의 전투 지시 사항과 함께 이루어졌다. 목적은 바로 동독의 뿌리마저 제거하는 것이었다. 적의 중심부이자 독일 문화를 지탱하는 주축인 [[베를린]]을 다시 우리 손아귀로 얻어야했다. [[소련의 서독 침공]] 당시에 힘없이 붕괴된 곳이었다. 이를 제의한 것은 비그리드 안을 작성한 [[하인츠 클라인]]이였다. 사실 이 것은 '''에른스트 1세'''의 생각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애초의 비그리드 작전의 다른 안들도 베를린을 목표로 이루어져 있었다. 결국, 에른스트 1세는 지령을 내려 다시 TS의 참모들을 소집했다. ==작전 준비== ===코뢴옹스타크 작전 수립=== 적들을 보호하는 [[폰 방어선(비그리드)]]이 [[종심 방어]]와 급하게 완공했으나, NIA의 조사로는 꽤 뚫기 어려운 요새라는 것이 드러났다. 하인츠 클라인은 이 것을 어떻게 뚫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야했다. [[벙커버스터]]나 [[미사일]]을 쏟아부으면, 큰 손실없이 돌파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큰 문제가 있었다. [[1988년]] [[2월 28일]], [[제 3차 국제 살상무기 제한 및 군축 조약]]이 맺어졌기 때문인데, 이에는 벙커버스터, 일부 사거리가 긴 미사일, 모든 [[독가스]]류가 대표적으로 포함되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러한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지만 이는 동맹과의 관계가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에른스트 1세'''와 '''토비아스'''가 반대했다. 하인츠도 독일이 아직 [[양면전쟁]]을 벌이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하긴 했다. 어떻든 그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했다. 그 돌파구는 [[2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낫질 작전]]이 열쇠였다. 현대적인 무기가 제한된 상황에서 [[마지노]]와 같은 엄청난 요새를 돌파한다는 점에서 이 두 상황은 매우 비슷했다. 문제가 있다면, [[폴란드]]였다. 폴란드의 소련군 사령부는 그들이 폴란드와 동독 사이를 점거하고 동독을 포위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내세워 그들은 작전의 바탕을 확정하고 '''에른스트 1세'''의 일시적인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낫질 작전의 계획도를 보며 자세한 구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1988년]] [[3월 2일]], 비보가 들려왔다. [[미국]]과 [[영국]]은 독일을 지원하는 항공병력을 대폭 줄이고, [[프랑스]]는 완전히 지원을 없앤다는 것이었다. 이미 많은 피해를 입었음으로 더 이상의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사태로 독일은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하루 아침에 독일 공군을 감추던 베일이 벗겨질 상황에 빠지고, 그들의 물자를 지원할 국가가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작전도 역시 완전 개편되었다. 토비아스는 공군의 노출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공군의 기대 능력을 대폭 하향 측정하여, 공군을 작전에서 거의 배제시켜 내었다. 이는 곧 육군 단독 작전이라는 소리였다. 하인츠는 납득할 수 없었고, 겐트너로서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인츠는 TS의 상급 참모들에게 ‘우리에게는 시간이 남지 않는다. 모든 것은 최대한 빨라야하고 생략해야한다.’라며 작전 개편을 지휘했다. 그는 폴란드의 소련군의 이동을 제한하기 위해서 폴란드 북부의 [[슈체친]]을 완전히 붕괴시켜야 했고, 전 방향에서 내부가 무너지는 순간 동시에 쏟아져 들어가야 했다. 독일은 이 작전을 위해서 남은 동맹국의 항공력을 모두 끌어모아서 슈체친 파괴에 배치했고, 10개의 독일 [[야전군]]과 [[프랑스 파견군(1988)]], 덴마크의 1개의 야전군을 배치했다. 그리고 2선급의 2개의 야전군도 배치되었다. 작전의 간단한 전개는 다음과 같다. 독일의 압도적인 기동집단으로 [[드레스덴]]을 굴복시키고 적의 진지 깊숙이 진격한다. 그 동안 덴마크의 [[공병]]들이 슈체친과 기타 폴란드 도로망을 붕괴시키며, [[에베르스 발데]]를 비집고 들어간다. 덴마크 군과 독일의 기동집단이 에베르스 발데를 포위하고 점령한다. 드레스덴과 에베르스 발데로 추가로 5개의 야전군이 진입하여 폰 방어선의 주요 지점을 후방에서 공격하고, 주요 군이 전방에서도 공격을 감행하여서 붕괴시킨다. 이 때 [[공수부대]]의 지원을 받는다. 폴란드 국경지대의 독일의 병력은 소련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독일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러 서쪽으로 이동한다. 베를린을 점령하여 작전을 종결짓는다. 낫질 작전과 같이 적의 방어망의 비약한 곳을 뚫고 그 곳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게브하르트 겐트너]]와 [[막시밀리안 하인스트 폰 바덴]], [[루트비히 바그너]], [[하이덴베르크 1세]], [[토비아스 슈뢰더]]는 작전을 승인하고 군대의 이동과 전진배치를 허가했다. [[1988년]] [[3월 13일]], 모든 부대가 배치되었고, 최상위 보안 상태를 유지했다. TS는 즉시 작전 개시일을 [[3월 15일]]로 정하고 가장 중요한 기동력을 정비했다. 또한, '''에른스트 1세'''는 이 작전을 ‘프리드리히의 대관식’ 즉, ‘'''대관식Krönungstag; 코뢴옹스타크 작전'''’이라고 정식적으로 명명했다. ===동독의 대비=== 예기치 않은 좋은 일이 들려왔다. 프랑스와 영국 정부가 공군 지원을 허용했고, 미국도 허용했다. 프랑스는 해외파견군에 [[장갑차]]를 대량 배치시켰고, 폴란드의 소련군의 일부가 몽골로 파견되었다. 그러는가 하면, 동독은 즉시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국민이 [[서독]]으로 간 상황이었지만 소련의 지원하에 (극소수만이 기계화 되었지만) 제 1, 2, 3, 4, 5, 6 야전군을 재건했고, [[향토 예비군]]인 제 8군을 배치했다. 역시나 주력은 전쟁동안 피해를 거의 입지않은 제 7군이었고, 유일하게 기계화가 된 야전군이었다. [[슈나이더]]는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언제 다시 공격이 시작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공군은 삭제되었으며, 해군은 기지가 모두 빼앗겨서 오히려 적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나마 온전한 육군마저 전술한 것과 같이 온통 노인과 청소년들이었다. 그 많던 [[전차]]는 거의 없어진 상태였고, [[대포]]도 폰 방어선에 배치될 대포가 부족해질 만큼 적었다. 미사일 기지는 독일 중부로 이전 배치 했었기에 모두 빼앗기거나 파괴되었다. 허물 뿐인 군대였다. 그들을 복구시킬 방법도 마당치 않았다. 국가 공업 전반이 파괴되었고, 도로망조차 복구가 되지 않았다. 소련마저 원조를 할 상황이 아니게 되었고, 14일 오전에 정식적으로 원조가 어렵다는 외교 문서가 도착했다. ==다국적군의 진격== [[파일:1988year operation Kroinungstag operatingmap second shot.JPG|1020px|섬네일|오른쪽|1988년 코뢴옹스타크 작전안 한국어 버전]] ===초기 공세===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1988년]] [[3월 14일]], 작전 시작 예정일 1일 전, [[슈나이더 첩보팀]]이라 불리는 동독 최고 감청 A반이 작전 3시간 전에 독일 군이 전면적인 공세를 재개할 것이라는 문서를 손에 넣었다. 사실, 이는 NIA 산하의 [[안네르부르크 독일 최고 정보부]]가 흘린 거짓 정보였다. 이도 모르고 동독군은 안 그래도 적은 장비를 공격이 없는, 공격 받을 곳으로부터 먼 [[노이루빈]]과 [[라이프치히]]로 이동시켰고,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의 공군을 이 두 곳을 붕괴시키기를 요청했고, 당일 바로 승인되었다. [[1988년]] [[3월 15일]] 오전 2시, 새벽에 덴마크의 잠입 공병대와 미국 폭격대가 슈체친을 완전 폐허로 만든 것을 시작으로 독일의 모든 기동집단이 기습을 감행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이 야간 항공 작전을 시작했다. 그들은 2시를 기점으로 전체적인 공격을 감했다. 드레스덴의 1달간의 훈련만 받은 최소한의 노인들과 청소년들은 새벽부터 악몽을 맞이했다. 이 동독 제 5군은 서독의 제 13, 14, 15, 16, 17, 22, 23 야전군을 투입했다. 56만명의 병력은 순차적으로 드레스덴의 외곽에 도달하여 종심작전을 하던 제 5군의 [[참호]]들을 넘어 종심 방어부까지 단지 3시간만에 도달했다. 그들은 종심 방어부의 정예군들은 제 5군과는 달리 꽤 오랫동안 버텼으나, 독일 군의 [[자주포]], [[박격포]]의 포격으로 무력화되었다. 그와 동시에 북부 에베르스 발데의 동독 제 4군도 서독 최정예 기갑 야전군인 제 12군의 노련한 움직임과 포격으로 압도적으로 단 2시간만에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5시간 만에 폰 방어선은 무력화되었다. 드레스덴, 에베르스 발데에서 15만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노이루핀과 라이프치히의 폭격으로 1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추가로 나왔다. 사망자가 추산되는 동안에도 드레스덴의 56만명은 두 개의 하위 집단으로 나뉘어 이동했다. 제 14, 15군은 북부로 진격하여 베를린 남부로 진격했고, 나머지는 동독의 제 6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붕괴시키고 폭격으로 너덜너덜해진 제 7군마저 압도했다. 제 12군은 [[슈트라우스베르크]]를 점령했다. 이제 막 8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아침 10시에 다다르자, 견제 임무를 받은 독일 제 2군이 독자적으로 폰 방어선을 돌파하고 동독 제 2군의 대다수로 포로로 만들었다.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동독 제 3군은 서독 제 2군의 갑작스러운 돌파로 고립당하게 되었고, 곧바로 투항했다. 남은 동독의 향토예비군과 제 1군은 베를린으로 급히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제 1군은 영국의 제 11 공수군단의 4만명에 가로 막혀서 후퇴가 힘들었다. 향토 예비군마저 독일 기동집단에 의해 교전에 들어가며,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동독 전역에서 총 21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후퇴에 성공했다. 반대로, 총 43만명은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 ===베를린 포위와 소련의 지원=== [[3월 15일]], 작전 1일 경과 후, [[STAVKA]]는 급히 [[폴란드 주둔군(1988)]]을 이동시키려 했으나, 이미 독일로 통하는 주요 도로망이 붕괴된 상황이었다. 소련의 [[세르게이 파블로스]] 장군은 폴란드 전역의 모든 공병을 동원하여서 도로를 복구하라고 했고, 약 5일 정도면 주요 도로가 복구될 것이라고 베를린의 동독 정부에 전했다. 또한, 소련은 [[발틱 함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켜서 영국의 전진 항모전단을 몰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3월 16일]], 작전 2일 경과 후, 베를린을 제외한 모든 동독이 서독의 수중에 떨어졌다. 시민들은 도시로 진주하는 서독군을 환영했고, 그 간의 독재의 압박과 소련 군대에 의한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들은 서독군에게 식량을 주었고, 식수와 기타 생필품을 제공해주었다. 물론 폭격을 받은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싫어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베를린 내부에서는 분란이 지속되었다. 갈등은 극에 치달았고, 고립되어 식량이 떨어져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든 남자를 동원하여서 32만명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군량을 소비했지만, 들어오는 곳은 없었다. 베를린에는 가망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하인츠 장군이 베를린 진입하는 동안에 강렬한 저항으로 전차 12대를 잃으며, 그들의 자멸을 기다리기로 마음을 바꾸며, 생명이 연장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계속해서 압박했고, [[하펠 강]]을 넘는데 성공했고, 그 뒤로 6시간 동안, 거의 계속 정밀 폭격이 이루어졌다. 동독 정부 청사는 폐허가 되었고, 베를린 시청, 군부의 건물들이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지하철 입구마저 붕괴되었다. 오후 8시에는 [[노이쾰른]] 지역을 점령하고, 베를린 공항을 장악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저항은 작전 8일 경과 후인 3월 23일까지 진행되었다. 시가지에는 시체가 가득이 쌓여 4개의 베를린 주둔 야전군은 모두 사단급으로 줄어들어서 총 32만명에서 8만명으로 줄었다. 23일 오전에 베를린 동물원이 서독군에 넘어가는 동안 전황이 뒤바뀌었다. 폴란드 주둔 소련군이 도로 복구를 끝내고 [[슈트라우스베르크]]로 진격한 것이었다. ==슈트라우스베르크 혈전== [[파일:1988year operation Kroinungstag operatingmap third shot.JPG|2610px|섬네일|가운데|'악몽의 전주곡'의 악보라 불리는 슈트라우스부르크의 전황도 한국어 버전]] 세르게이 장군은 도로가 복구되자 마자, 진격을 명령했다. 제 20, 21, 24, 25 야전군을 이 도로로 밀어넣었다. (공격에 취약하게) 일렬로 쭉 늘어서서 그들은 작은 도로로 이동했다. 그럼에도 서독은 [[베를린 시가전(1988)]]에 눈이 팔려있었고, 알아채지 못했다. 제일 처음 그들을 맞이한 군은 덴마크 군과 제 12군이었다. 제 12군은 전술한 듯 독일 최정예 군이었다. 12군의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폰 몰트케]]는 소련이 기동하지 못하게 막을 것을 지휘했고, 성공했다. 일렬로 이동하는 소련군은 앞길이 막히자 모두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그 동안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전투기들이 접근했고, 소련도 일부 [[요격기]]를 출격시켰다. 지상에서도 총 6개의 군을 이동시켰다. 그 중 2개의 군은 베를린을 전력을 다해 점령했다. 그러나, [[베를린 주둔군(1988)]]도 이미 슈트라우스베르크의 격전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결국 그 좁은 지역에 전황이 걸리게 되었다. 포위를 탈출하려는 공산군 40만명과 다국적군 64만명이 이 곳에 뒤섞이기 시작했다. [[하인츠 클라인]], [[프리드리히 폰 몰트케]], [[게브하르트 겐트너]], [[슈테펜 슈미트]]와 같은 독일군 장성들이 모두 이 전투에 뛰어들었던 최초의 전투였다. 양측의 전력이 부딪히는 듯한 전투가 하루를 넘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슈트라우스베르크의 혈전]]’ 또는, ‘악몽의 전주곡’이라고 명명했다. [[시가전]]에는 몰트케의 병력을 압도하는 물량으로 소련군이 비집고 들어오며, 도시가 양분되었다. 후방의 적을 발견한 그는 급히 샌드위치에서 탈출하려했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들은 폭격으로 생긴 천연 참호를 중심으로 [[지뢰]]와 장애물을 두르고 방어전을 시작했다. 외곽에서는 베를린 주둔군이 샌드위치가 되는 상황이었다. 대군이 ‘허약한’ 베를린 주둔군을 양단하고 시가지와 연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베를린 주둔군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최선을 다해 발악했다. 하인츠는 제 14군을 이끌고 소련군 대열의 중간인 [[젤로]]를 공격하여 허리를 끊어내고, 게브하르너는 제 17군을 진두지휘하여 격전지의 남부로 진입했고, 슈미트는 제 9군을 이끌고 북부에서 돌진해왔다. 소련군은 강력한 저항을 하는 몰트케의 부하들을 부술 수도 하인츠가 점령한 젤로를 통해 탈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베를린 주둔군은 오후 늦게 즈음 시가전과 외곽 독일군의 물량에 못이겨 분해되었다. 이로써 몰트케의 군대는 후방으로 이동하여 회복기간을 가질 수 있게되었다. 이와 상반되게 소련은 파견 군인 32만명 중, 20만명이 고립되는 전술적 대재앙이 일어나고 말았다. 급히 포위망 밖의 12만명에게 포위되기 전에 후퇴를 시작하라고 지시했고, 소련군 20만명의 앞날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전 종결== 소련의 포위된 군대는 29일 오전, 차지한 도시의 2/3를 다시 빼앗기고 다수의 중장비를 폭격으로 잃었다. 공중전 동안에도 일부 보급품 공급도 힘들만큼 제공력에서도 밀렸다. 이에 소련의 STAVKA는 [[발틱함대]]를 모항에 정박시키고, 포위된 군대에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1988년]] [[3월 30일]], 포위된 소련군이 모두 군장비를 버리고 투항함으로서 대관식 작전이 끝을 맺었다. ==전후 처리와 여파== ===범유럽 평화 불가침 조약=== [[1988년]] [[4월 5일]], 소련 정부는 정식적으로 패배를 인정했고, 더 이상의 양면전쟁은 힘들다고 판단하여, [[범유럽 평화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 조건으로 서독은 폴란드의 일부 지역을 자신의 땅으로 인정해주고, [[포즈난]]을 소련과 독일의 [[자유도시]]로 할 것을 제의했고, 소련은 급한 마음에 승인했다. 독일은 이 작전으로 독일을 통일하고, 그단스크, 그러니까, [[단치히]]까지의 회랑을 확보했으며, [[바우브지흐]]와 [[자코파네]]를 얻어냈다. ===독일의 영향력 확대=== [[1988년]] [[4월 6일]], 독일 외교부의 [[토비아스 슈뢰더]]는 [[덴마크]],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헝가리 자유 반군(1988)]]의 대표들을 [[안네르부르크]]로 불러서 외교적인 동맹을 제안했다. 덴마크는 독일이 그 간의 전쟁의 피해를 복구한다는 점과 내부 언론의 찬성으로 노르웨이와 오스트리아와 함께 승인했고, 스웨덴은 NIA와 연결된 주요 반군조직의 활동으로 압박하여 승인하게 했다. 헝가리 자유파는 소련의 주요 군대와 연결이 끊기자, '''헝가리 사회주의 공화국'''을 무너뜨릴 기회라는 생각으로 군수물자와 군 지원을 약속받고 승인했다. [[아이슬란드]]에는 내부 언론 조작으로 괴뢰정부가 들어서고, 독일에 합병되었다. [[4월 12일]], '''통일 독일 연방 제국 (제 4제국)'''을 국제 연합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각주== [[분류:제3차 세계 대전의 전투]] [[분류:유럽 전구 (제3차 세계 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