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코르보날에서 발발한 내전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

전개

배경

코르보날 연합국은 1650년대까지만 해도 민족 자치와 연방제를 통해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한 다민족국가였다. 그러나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때 코르보날 연합국은 그란치프 편으로 참전했다. 코르보날 연합국은 군수물자를 생산해 그란치프에 판매함과 동시에, 국방군 병력을 전선에 배치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그란치프에 협력했다. 하지만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이 키르수스의 승리로 끝남에따라, 그란치프 편에 선 국가들 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코르보날에 대한 키르수스의 보복성 경제제재가 시작되었다.

막대한 전쟁 보상금을 필두로, 코르보날 연합국은 헤스페로스벨트 국가들과의 무역에 대한 관세 부과, 상품 품목 제한, 전략물자 수입 금지 등의 제재를 당하면서 코르보날 경제는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그란치프측에 판매한 물자 대금을 받지 못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린 코르보날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이 외에도 코르보날 연합국에는 주류민족 우월주의가 남아있었다. 코르보날 연합국의 군사력인 국방군 장교단의 핵심인 참모회의는 주류민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고, 대타협 이전부터 쌓아올린 기득권으로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해 형식적으로는 타민족과 동등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타민족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상황 악화는 국내 여론의 극단주의화를 불러일으켰고 반세기 가까이 잠재워졌던 민족갈등이 고조되었다.

한편, 1650년대 후반부터 국가주의와 권위주의 성향의 우파 정당 연합 결의당은 주류민족을 중심으로 세를 불렸다. 본래 코르보날 국가주의와 탈민족주의 이념을 제창한 연합 결의당은 주류민족에 의해 코르보날이라는 단일 국가를 주도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변질되었고, 타민족에 대해서는 종속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갈등을 초래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족별 균형을 맞춘 대의회는 연합 결의당의 권력 기반인 군부를 견제하고자 최고회의의 군부 인사인 당시 국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야니스 오르멘을 통해 문민통제를 시도했다.

그러나 1658년 6월 1일, 국방군 최고사령관 야니스 티오르멘이 암살당하면서 정국은 뒤바뀌고 만다.

1차 코르보날 내전은 물론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도 참전한 노장이자 덕장으로써 민족을 막론하고 코르보날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의 암살은 코르보날의 구심점이 소멸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조사 결과, 대의회 내부의 분리주의자들과 공련의 사주를 받은 좌익 정당에서 암살과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회불안은 가속화되었다. 더군다나 대의회가 수사 결과를 은폐하고, 자료를 파기하는 모습을 보이자, 최고사령관 암살에 대한 진상조사를 촉구하던 군부는 대의회의 소극적 태도를 계기로 쿠데타에 착수했다.

결의정변(1658년 6월 9일)

연합 결의당 당원이자 국방군 참모회의 일원이었던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는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의 죽음에 대한 진상 조사를 군부를 대표하며 여러차례 촉구한 바 있다. 그러나 대의회가 사건은폐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자, 슬로딘은 중앙군 부대들에서 협력자를 모아 대의회와 참모회의를 필두로 정부와 국방군의 중앙기관을 장악하는 것을 계획했다.

1658년 6월 9일, 슬로딘 예하 중앙군 보병 사단 5개, 기갑사단 3개, 기계화보병사단 1개로 구성된 9개 사단 규모 쿠데타군이 새벽 3시에 코르보날 연합국 수도에 진입했다. 위 병력은 전부 중앙군의 수도권 방위군단에서 차출되었으며, 야니스 오르멘의 죽음에 동요하던 방위군단의 다른 사단들도 수도 진입을 묵인함에따라 쿠데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수상한 군 병력 이동을 눈치챈 시 경찰과 대의회 경비대가 시가전으로 저항했으나, 보병사단이 경찰과 경비대와 교전하는 사이, 기갑사단이 중앙 경찰청을 포격하고, 기계화 보병사단이 시가지를 우회 기동해 대의회에 진입하면서 불과 30분만에 수도를 장악했다. 새벽 3시 30분에 대의회를 점거한 쿠데타군은 심야회의중이었던 대의회 의원들을 구금했다.

그로부터 15분 뒤인 3시 45분, 대의회에 출두한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는 대의회 중앙 연단에서 코르보날 내 모든 언론에게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은 분리주의자들에 암살당했으며, 대의회 내부 좌파 의원들과 분리주의에 협조하는 타민족 의원들의 방해로 대의회가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 수사에 소극적이고, 은폐를 주도했음을 밝혔다.

1658년 6월 9일 낮에는 중앙령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 선포와 함께 중앙령 내부의 타민족 인사들과 연합 결의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의 모든 당원과 대의회 의원들이 수도권 방위군단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그들 중 좌파 정당 출신들은 즉결처분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중도와 우파 인사들에게는 연합결의당에 협력할 한번의 기회를 주고, 거부시 그들 역시 처벌되었다.

결의정부(1658년 6월 9일~1658년 7월 4일)

결의정부는 쿠데타 직후, 코르보날 내 자치령에 대해서는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 암살 배후에 관한 소식과 그 주동자들을 처벌했다는 소식만을 전한 채, 그 외의 정보에 대해서는 언론통제로 일관했다.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는 야니스 오르멘 암살과 그 이전부터 악화된 경제, 고조되어가는 분리주의 등 불안한 사회의 기강 유지를 명목으로 그 자신이 국방군 최고사령관과 최고회의 의장직을 겸임했다. 1658년 6월 9일부터 시작된 결의정부는 일단 각 자치령에 대해서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반응으로 일관하되, 행동적으로는 큰 개입은 없었다.

그 대신 중앙정부의 권한을 하나씩 높여가면서 각 자치령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는데 집중했다. 코르보날 내 자치령들 역시 정보가 통제된 상황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자치령의 자체 병력인 자치군을 소집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러나 1658년 6월 중반부터 갑작스러운 계엄령과 비상사태에 대한 반발과 진정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이 슬로딘의 발표대로 사망하고, 진상조사가 방해받은 것이 맞냐는 의문이 고조되면서 혼란은 악화되었다. 특히 연합 결의당이 야니스 오르멘을 암살하고 은폐에 관여했다는 음모론이 퍼지면서 각 자치령 내부에서는 연합 결의당에 대한 반발과 추방이 이어졌다.

1658년 6월 19일 부터 각 자치령의 자치의회에서 연합결의당 의원들이 추방되었고, 자치군이 중앙군의 통제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이자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는 계엄령을 코르보날 전역으로 확대했다.

1658년 7월부터 코르보날의 자치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상황이 안정될 때 까지 자치령의 자치권을 박탈한다는 법안이 연합 결의당에 의해 장악된 대의회에서 통과되면서, 코르보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무력충돌이 발발했다.

초창기 결의정부는 1차 코르보날 내전 때 처럼 각 자치령을 각개격파하는 전략을 사용했으나, 범좌익 세력인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1658년 7월 4일에 봉기해 여러 자치령이 인민공화국으로 규합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부족한 조직력으로 각자도생해 각개격파당할 것을 상정했던 자치군들은 인민공화국으로 통합되어 양적 우세와 조직력의 대등함을 갖췄고, 해군 역시 인민공화국에 응하면서 결의정부의 중앙군은 우위를 상실했다. 그리고 인민공화국이 코르보날 결의정부 타도를 선언하면서, 다른 자치령도 독립하거나 인민공화국에 편입함에따라, 7월 4일을 기점으로 코르보날은 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각축전(1658년 ~ 1662년)

붉은 홍수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준동을 계기로 중앙령을 제외한 코르보날 전역이 결의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났다. 체슈노어 자치령을 거점으로 삼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코르보날 각 자치령 내 사회주의 세력과 공화주의자들을 기반으로 동시다발적인 봉기를 통한 대규모 지역 장악이 가능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선포와 함께 코르보날 국방함대의 수병들도 일제히 봉기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해군 함정과 군항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의해 장악당했다. 그러나 함선 운용과 지휘에 필요한 장교들을 사살 후 함선을 제압하는 방식이었기에,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해군은 그 규모에 비해 유명무실한 수준이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후원국인 공화국 연맹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봉기를 기회삼아 코르보날을 적화시키고자 했다.

공화국 연맹은 결의정변 이전부터 자국에 망명한 코르보날 사회주의자들을 사관학교와 행정, 기술 분야의 교육기관에서 교육시켜 코르보날 사회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기술적 기반을 마련했다. 1658년 8월부터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공련 장교단과 고문단, 기술자와 공련에서 학습한 코르보날 인들이 입국했다. 이들은 숙청당한 옛 장교단과 기술자, 행정가를 대체하며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조기 붕괴를 막았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정치, 경제, 사회, 군사를 공련식에 바탕해 자국의 '특수한 상황'에 맞춰 개편했다.

1658년 11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내부 개편을 진행하며 이미 장악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하도록 집중했다.

주요세력

코르보날 결의정부

코르보날 연합국 문서 참조.

코르보날 결의정부는 코르보날의 정식 정부이자 정부군인 코르보날 국방군을 전력으로 두고있다. 그러나 자치군의 경우 대부분 각 자치령의 봉기에 합세하면서 반군화되었기에, 코르보날 결의정부 산하 국방군은 연합 결의당과 군부 세력이 장악한 중앙군에 기반한다.

코르보날 국방군은 중앙군 위주로 개편되면서 높은 정예도와 숙련도를 바탕으로 다른 세력보다 질적우위를 점유했다. 하지만 해군력인 국방함대 대부분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합세하고, 공군인 국방항공대는 각 자치령에 배치된 비행단이 자치령의 봉기와 함께 소멸되거나 전향하면서 수도권인 중앙령에 배치된 일부 전력만 살아남았다.

현재 코르보날 국방군은 키르수스, 게파르토 등으로부터 무기체계를 재도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장교단의 훈련 역시 키르수스에서 이수중이며, 전차와 항공기 같은 중화기는 키르수스제로 교체중이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자세한 내용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오사넨 연방(Othanen Federation)

오사넨 연방
파일:오사넨 연방.png
국기
지도
수도 리겔
최대도시 토르네
지도자 달리아나 오세다 연방총의장
인문환경 공용어 오사넨어
인종구성 오사넨인
정치 수장 연방총장
수반 행정수상
체제 및 이념 민족주의, 공화주의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통화 오사네딧
군사 군대 오사넨 방위군
외교 대외성향 중립, 고립주의
우방 없음
적대 코르보날 결의정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오사넨 연방은 1658년 7월 4일 봉기 직후 오사넨 자치령에서 분리독립한 국가다. 그러나 오사넨 자치령은 수도가 위치한 비슈네츠 지역과 가장 가까운 지역 중 하나였으며,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을 비롯한 다른 세력과도 분리된 곳이었다.

오사넨 연방은 이념적으로 오사넨 지역의 소수민족들을 규합한 민족주의이자 국가주의인 범 오사넨주의를 채택했다. 범 오사넨주의는 오사넨 지역의 민족들을 오사넨 민족이라는 통용된 개념으로 묶는것으로, 비슈네츠 민족이 주류인 결의정부에 대한 저항을 위해 결성되었다. 범 오사넨주의는 오사넨 민족의 생존과 자결을 중시하며, 타국과 타민족의 침략에 방어적이다.

범 오사넨주의는 대외적으로 고립주의와 반제국주의를 표방한다. 이는 범 오사넨주의는 다른 민족으로부터의 방어에 중점을 두며, 오사넨 민족이 타민족을 공격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오사넨 민족의 수호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 오사넨주의는 제국주의에 부정적이며, 민족자결주의 성향이 강하다 그 결과 오사넨 연방은 결의정부에 의해 포위된 상태다. 범 오사넨주의가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면서, 키르수스와 게파르토 역시 오사넨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이다. 주변과의 고립, 타국의 지원 부재로 인해 오사넨 연방은 가장 약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력 역시 게릴라전과 점령지에서의 항쟁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사넨 연방은 연방제를 채택했으며, 오사넨 각 지역과 소수민족들을 토대로 주가 구성되었다. 각 주는 내정에 대한 자치권을 보유하며, 외교와 국방은 연방정부가 전담하고 있다. 오사넨 연방의 경제는 원자재 채굴/가공이다. 주요 공업 시설도 대부분 원자재 가공에 특화되었으며, 그마저도 결의정부에 점령당한 곳도 많아 공업 면에서는 코르보날 내전의 주요 세력들 중 최하위권에 속한다. 농업 역시 다른 지역보다 부족한 인구와 적은 토지로 인해 그 산출량이 미약하다.

프로슬레우 공화국(Prausleau Republic)

프로슬레우 공화국
파일:프로슬레우 공화국.png
국기
지도
수도 라그(결의정부에 점령됨)

임시수도:아스트라벨

최대도시 오덴그라츠(결의정부에 점령)
지도자 가리크 고트벨 대통령
인문환경 공용어 프로슬레우어
인종구성 프로슬레우인, 비슈네츠인
정치 수장 공화국 대통령
수반 공화국 총리
체제 및 이념 민주주의, 다당제공화정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경공업, 중공업 등 2차산업, 철도산업.
통화 프로슬레우 겔린
군사 군대 프로슬레우 공화국군
외교 대외성향 중립, 고립주의
우방 아키드노스 대공국
적대 코르보날 결의정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프로슬레우 공화국은 봉기를 기점으로 프로슈 자치령이 독립한 국가다. 프로슬레우 공화국은 발전된 산업능력을 활용해 빠른 속도로 자치군을 무장시켰으며, 이를 통해 결의정부의 국방군이 프로슈 이서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차단했다. 공련 지원하에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인민공화국은 프로슬레우에 합류 제의를 전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부정적이었던 프로슬레우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합류에 거절함에따라 프로슬레우는 양면전선에 노출되었다. 그 결과, 프로슬레우 공화국 북부는 각각 인민공화국과 결의정부에 의해 빼앗기면서 남부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1670년대의 프로슬레우 공화국은 매우 절망적이다. 코르보날 결의정부에 의해 수도 라그가 함락당했으며, 그 여파로 라그를 중심으로 연결된 철도망과 라그 시 내외의 공업지대가 결의정부에 넘어갔다. 현재 프로슬레우 공화국은 아키드노스 대공국과 연합전선을 구축한 채 남부에서 최후의 저항을 진행중이다.

프로슬레우 공화국은 대통령중심제에 기반한 민주 공화정을 채택했다. 코르보날 내전에서 몇 안되는 민주주의 국가로써 아키드노스 대공국을 통해 프리슬란드 등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로부터 무기와 물자, 장비를 수입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제조업과 광업을 비롯한 공업이 발전해 이를 토대로 내전에 필요한 무기체계들을 생산/충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필요한 인력과 식량 생산이 소모량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부족한 인력과 식량은 아키드노스 대공국에서 빌려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위할 국민국(National State of Hawihall)

하위할 국민국
파일:하위할.png
국기
지도
수도 미오킨
최대도시 시모
지도자 로넨하이만 대원수
인문환경 공용어 하위할어
인종구성 하위할인, 게파르토인, 비슈네츠인
정치 수장 대원수
수반 최고장관
체제 및 이념 일당제, 공화정, 국가주의, 민족주의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광업 및 임업, 천연자원 가공
통화 시클
군사 군대 하위할 국민군
외교 대외성향 폐쇄적, 반공성향
우방 코르보날 결의정부, 키르수스, 게파르토, 에세르
적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하위할 국민국은 봉기를 기점으로 하위할 자치령에서 수립된 민족주의 성향의 공화국이다. 그러나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형성됨과 동시에, 하위할은 국민국과 인민국으로 나뉘었고, 주요 공업지대와 국경지대를 장악한 인민국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합류함에따라 인민공화국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현재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인민공화국의 포위공세에 저항하고 있으며, 키르수스나 게파르토를 비롯한 타국에도 여러차례 지원요청을 타전했다. 인민공화국에 의해 시달렸던 탓인지, 코르보날 내전의 주요 세력중 유일하게 결의정부에 협조적이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1660년대에 하위할 국민국에 대한 대외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하위할 국민국의 후방 국경지대를 기동타격하는 광범위한 포위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국경도시 텔그라스를 포함한 게파르토와의 국경지대를 상실했다. 1670년대 들어서, 하위할 국민국은 로넨하이만 대원수의 지휘 아래 구축한 로넨하이만 라인을 최종방어선으로 결성, 코르보날 인민공화국과 교전중이다.

결의정부에 협조적인 점과 반공 민족주의 성향이라는 점, 그리고 해외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원한다는 점은 훗날 게파르토와 키르수스가 코르보날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하위할 국민국의 정치체제는 일당제 권위주의 군사정권으로, 하위할계 코르보날 군 지휘관이었던 로넨하이만이 국가원수이자 국민군 최고사령관을 역임하고 있다. 전시상황이라는 명목으로 군부인 국민군이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자원/인력/행정의 효율적 분배라는 명목으로 민간 관료를 대상으로도 군부가 영향력을 발휘한다. 로넨하이만 대원수는 결의정변 이후, 하위할 국경을 요새화해 동시다발적 봉기에 대비한 이래, 여러 겹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위할 국민군은 무기체계 면에서 매우 열세에 놓였다. 사방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포위당한 탓에 노획한 정부군 무기나 인민공화국 무기를 사용하거나, 그들의 무기를 역설계해 자체생산한 것이 대부분이다. 해외로부터도 차단되어 키르수스를 비롯한 타국의 원조도 불가능한 탓에 소모율이 생산율보다 높아 하위할 국민군은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직면했다. 하위할 국민군의 작전교리는 적은 병력/장비로 최대한 많은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게릴라전과 지연전이 주축이다.

요새화와 장애물 설치, 사보타주를 통해 적의 진격로를 제한시켜 병목현상을 일으킨 다음, 해당 구간에 집중된 적을 저격수와 게릴라전, 기후를 활용한 전술로 공격하면서 적의 공세역량을 제거한다.

아키드노스 대공국(Great Principality of Akidnos)

아키드노스 대공국
국기
지도
수도 마슈클리트(인민공화국에 점령됨)

임시수도:아쇼프(임시수도)

최대도시 페슈탄츠
지도자 카르네우스 바슈페롤링거 대공
인문환경 공용어 아키드노스어
인종구성 아키드노스인, 프로슬레우인, 비슈네츠인
정치 수장 대공
수반 수상
체제 및 이념 입헌군주제, 권위주의, 귀족정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농업
통화 레후
군사 군대 아키드노스 대공군
외교 대외성향 중립, 고립주의
우방 프로슬레우 공화국
적대 코르보날 결의정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아키드노스 대공국은 아키드노스 자치령의 세력가였던 바슈페롤링거 대공이 봉기를 기점으로 아키드노스 민족의 독립국 건설을 선언하며 자치령의 방위군과 행정역량을 흡수하며 건국했다.

바슈페롤링거 가문은 아키드노스의 명망있는 세력가로써, 봉기 이전부터 지역 유지였던 귀족들과 방위군 인사들, 아키드노스 현지 자본가와 행정관료를 인맥과 혈연으로 장악한 상태였다. 카르네수으 바슈페롤링거 대공은 가문의 인맥을 활용해 빠른 세력규합과 안정화가 가능했다. 아키드노스 자치령은 코르보날의 다른 지역보다 공업력이 뒤떨어졌다. 그 대신 해안을 통한 대외교역망과 풍부한 인구를 바탕으로 프로슬레우 공화국과 연합전선을 결성했다. 그러나 수도를 비롯한 서부 해안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빼앗기면서, 농촌인 동부 내륙을 중심으로 저항하고 있다. 부족한 공업력은 프로슬레우 공화국으로부터 공급받으며, 아키드노스는 농촌의 식량과 인력을 공급하는 공생관계를 구축했다.

아키드노스 대공국은 프로슬레우 공화국과는 우호관계, 다른 세력들과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으며, 주적으로는 코르보날 결의정부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있다. 코르보날에 복속되기 이전 왕국이었던 아키드노스 대공국은 분리독립 여론이 가장 강한 곳이었고, 바슈페롤링거 가문이 구심점으로써 활동하고 있다.

아키드노스 대공국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카르네우스 바슈페롤링거 대공을 비롯한 바슈페롤링거 대공가는 아키드노스를 단결시키는 구심점으로써의 역할에 충실하며, 주요 국정은 귀족원/서민원 양원제로 구성된 대공국 의회가 주도한다. 대공국 의회는 법안/정책의 발언권은 서민원에 있으나, 최종 결정권은 귀족원에 있기에 실질적으로 귀족정에 가깝다.

아인츠블뤼겐 자유국(Einzblügen Free State)

아인츠블뤼겐 자유국
국기
지도
수도 베인부르크
최대도시 되네비어
지도자 에른스트 레너베허 총의장
인문환경 공용어 키르수스어
인종구성 아인츠블뤼겐인, 키르수스인
정치 수장 자유국 총의장
수반 자유국 수상
체제 및 이념 의원내각제, 공화주의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경공업/중공업, 상업 및 금융업
통화 아인츠블뤼허마르크, 폴리거마르크
군사 군대 아인츠블뤼겐 국방군
외교 대외성향 친 키르수스
우방 키르수스
적대 코르보날 결의정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아인츠블뤼겐 자유국은 봉기 직후 아인츠블뤼겐 자유국이 키르수스의 도움을 받아 독립했다. 내전이 진행되면서, 키르수스가 아인츠블뤼겐의 보호를 명목으로 아인츠블뤼겐 자치주의 일부를 점거, 아인츠블뤼겐 보호국을 수립하고 아인츠블뤼겐에도 키르수스 병력이 주둔중이다.

다른 구성국들과 달리, 아인츠블뤼겐 자유국은 친 키르수스 성향과 키르수스의 적극적 개입으로 인해 내전에는 소극적이다. 비록 아인츠블뤼겐 자치국의 실효지배를 통해 주권을 인정받고 있으나, 키르수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코르보날 결의정부 역시 키르수스의 지원이 필요했던 만큼, 아인츠블뤼겐에 대해서는 유화적이다.

아인츠블뤼겐의 정치체제는 의원내각제로, 수상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아인츠블뤼겐의 여당은 내전이 시작된 이래 국민자유당이며, 국민자유당은 키르수스의 개입을 받아들여 자국에 대한 키르수스의 보호와 키르수스의 원조를 통한 경제력/군사력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 아인츠블뤼겐은 내전에서 '폭풍의 눈'으로 불리며 정치적으로도 안정되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하다.

아인츠블뤼겐 보호령

아인츠블뤼겐 보호령은 봉기가 장기화되면서 1666년에 키르수스가 아인츠블뤼겐의 일부 지역을 점령해 수립한 괴뢰국이다.

엔베르 왕국(Kingdom of Enver)

엔베르 왕국
국기
지도
수도 호르난(인민공화국에 점령)

임시수도:켄네인

최대도시 델로인(인민공화국에 점령)
지도자 국왕 지그 1세
인문환경 공용어 엔베르어
인종구성 엔베르인
정치 수장 국왕
수반 수상
체제 및 이념 전제군주제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농업
통화 라나
군사 군대 왕립 엔베르군
외교 대외성향 중립, 고립주의, 반동주의
우방 키르수스
적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봉기 과정에서 독립한 엔베르 공화국이 지그 1세의 쿠데타로 인해 왕정으로 바뀌면서 왕당파와 공화파로 분열되었다. 주요 공업지대와 항구가 밀집한 남부를 장악한 공화파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합류했으며, 북부 왕당파는 키르수스의 지원 아래 타리나 강을 경계 삼아 저항하고 있다. 민심 대부분이 공화파에 돌아서면서, 지그 1세는 자신을 지지하는 소수의 주민들과 북부 지역 유지들, 그리고 키르수스를 권력기반삼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보다는 인민공화국의 공세 방어와 자기 세력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코르보날 결의정부와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는 만큼 지그 1세의 통치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결의정부와는 지리적으로도 떨어져 있는 탓에 중립적인 관계다.

엔베르 왕국은 전제군주제로, 의회가 존재하지만 국왕의 결정을 집행/이행하거나 국왕에게 주요 안건/의제를 정리해 보고하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다. 형식적으로 국왕의 정책은 의회의 찬반투표로 진행되나, 국왕이 내린 대부분의 결정은 의회에서 찬성투표를 얻고 통과된다. 엔베르 왕국은 상공업면에서 매우 낙후되었다. 그나마 있던 엔베르 자치국의 산업시설과 상업 인프라도 대부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점령했으며, 베른하이어와의 국경을 통해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군사적으로 엔베르 방위군의 군부 대부분이 왕당파를 지지하면서, 자체 군사력은 뛰어나다. 그러나 무기체계 면에서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비해 뒤떨어지며, 베른하이어를 거쳐 공급되는 원조물자에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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