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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베사리온'''({{llang|el|Κωνσταντίνος Βησσαρίων, 1832년 5월 21일 ~ 1901년 7월 19일}})은 [[동칼디아 제국]](Ανατολική Χαλδία)의 군인이자 [[페라테이아 제국]](Φελαθεια)의 정치인이었다. [[신정혁명]](Θεοκρατία Επανάσταση) 이후 혼란한 상황을 틈타 [[카라비시아니 반동]](Καραβισιάνοι αντίδραση)을 일으켜 제정복고에 성공한 뒤 [[입헌군주정]]을 적극 도입하여 초대 총리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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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베사리온'''({{llang|el|Κωνσταντίνος Βησσαρίων, 1832년 5월 21일 ~ 1901년 7월 19일}})은 [[동칼디아 제국]](Ανατολική Χαλδία)의 군인이자 [[페라테이아 제국]](Φελαθεια)의 정치인이었다. [[신정혁명]](Θεοκρατία Επανάσταση) 이후 혼란한 상황을 틈타 [[카라비시아니 반동]](Καραβισιάνοι αντίδραση)을 일으켜 제정복고에 성공한 뒤 [[입헌군주정]]을 적극 도입하여 초대 [[히파토스]](Ύπατος)<ref>'집정관'이라는 의미로서 [[로마 공화정]]에서는 정무관 중 최고 지위였으며, [[동로마 제국]]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폐지한 이후 제한적인 명예직으로 이용되었다. [[페라테이아 제국]]에서는 [[게루시아]](Γερουσία, 의회)와 행정부의 각료 수석을 의미한다.</ref>에 오르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아르타니나 조약]](Συνθήκη της Αρτάνινα)을 체결하여 [[마우리 강]](Μαύρη Ποταμός) 이남의 영토를 보전하는 대신, 러시아에게 수십년에 달하는 부동항 이용 권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에 [[페라테이네스|페라테이아 민족주의자]](Φελαθεινες, <small>페라테이네스</small>)들의 거센 반발을 받기도 했으나, 강력한 군사 실권과 개혁 정책을 통해 위 같은 오점을 무마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제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아르타니나 조약]](Συνθήκη της Αρτάνινα)을 체결하여 [[마우리 강]](Μαύρη Ποταμός) 이남의 영토를 보전하는 대신, 러시아에게 수십년에 달하는 부동항 이용 권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에 [[페라테이네스|페라테이아 민족주의자]](Φελαθεινες, <small>페라테이네스</small>)들의 거센 반발을 받기도 했으나, 강력한 군사 실권과 개혁 정책을 통해 위 같은 오점을 무마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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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에는 [[코미스 아르타도스]](Κόμης Αρτάδος)를 비롯한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페라테이아노스 대전]](Φελαθειανός Κώδικας)을 편찬하여 법률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후 입헌 체제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설파한 뒤 [[군사 회의]]를 거쳐 1873년에 총리직을 사임하고 [[상무원]](商貿院, Υπουργείο Ταμείο, <small>이푸르기오 타메이오</small>) 총재를 역임하였다. 사임 이후에도 여전히 군사 내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영국을 방문했을 때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 총리를 만나 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1877년에 [[콤니니 아카데미아]](Κομνηνή Ακαδημία)를 설립하기도 했다.
 
1871년에는 [[코미스 아르타도스]](Κόμης Αρτάδος)를 비롯한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페라테이아노스 대전]](Φελαθειανός Κώδικας)을 편찬하여 법률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후 입헌 체제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설파한 뒤 [[군사 회의]]를 거쳐 1873년에 총리직을 사임하고 [[상무원]](商貿院, Υπουργείο Ταμείο, <small>이푸르기오 타메이오</small>) 총재를 역임하였다. 사임 이후에도 여전히 군사 내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영국을 방문했을 때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 총리를 만나 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1877년에 [[콤니니 아카데미아]](Κομνηνή Ακαδημία)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군대의 신식화를 위해 러시아를 비롯하여 [[프랑스 제3공화국]](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과 [[프로이센 왕국]](Königreich Preußen) 등의 유럽 열강들의 군사 모델을 벤치마킹하였다. 그는 여전히 친위대 성격이 강했던 페라테이아의 군사 체계를 정비하고서 국민군과 강제 징집 제도를 도입하였다.<ref>국민군 체제를 위해 징집된 주 계층인 농민과 노동자들은 갖가지 편법을 이용해서 회피하였기에 기존 친위대 병력과 러시아에서 모집한 해외 병력으로 구성하였다.</ref><ref>베사리온의 뒤를 이어 자발적인 애국심 고취와 시민군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군인 장교, [[미하일 케카메노스]](Μιχαήλ Κεκαμένος)의 개혁 아래 향토방위를 위한 예비군 법안이 신설되면서 국민들에게 병역 의무를 본격적으로 부과할 수 있게 되었다.</ref> 또한 사치적이고 귀족적 면모를 보이던 군대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능력중심주의적 계급 사회를 조성 및 이행토록하여 군 내 계층간의 이질감을 극복하는데 힘을 썼다.<ref>군대를 신분 상승의 기회로서 새롭게 정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으나, 폐쇄적인 사회 형성에 일조하고 군 내 병영부조리가 생기는 등 부정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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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군대의 신식화를 위해 러시아를 비롯하여 [[프랑스 제3공화국]](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과 [[프로이센 왕국]](Königreich Preußen) 등의 유럽 열강들의 군사 모델을 벤치마킹하였다. 그는 여전히 친위대 성격이 강했던 페라테이아의 군사 체계를 정비하고서 국민군과 강제 징집 제도를 도입하였다.<ref>국민군 체제를 위해 징집된 주 계층인 농민과 노동자들은 갖가지 편법을 이용해서 회피하였기에 초기에는 기존 친위대 병력과 [[러시아 제국]] 및 [[아이누인]]으로 구성된 용병 집단을 이용했다.</ref><ref>베사리온의 뒤를 이어 자발적인 애국심 고취와 시민군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군인 장교, [[미하일 케카메노스]](Μιχαήλ Κεκαμένος)의 개혁 아래 향토방위를 위한 예비군 법안이 신설되면서 국민들에게 병역 의무를 본격적으로 부과할 수 있게 되었다.</ref> 또한 사치적이고 귀족적 면모를 보이던 군대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능력중심주의적 계급 사회를 조성 및 이행토록하여 군 내 계층간의 이질감을 극복하는데 힘을 썼다.<ref>군대를 신분 상승의 기회로서 새롭게 정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으나, 폐쇄적인 사회 형성에 일조하고 군 내 병영부조리가 생기는 등 부정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ref>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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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5일 (토) 02:42 판

콘스탄티노스 베사리온(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ίνος Βησσαρίων, 1832년 5월 21일 ~ 1901년 7월 19일)은 동칼디아 제국(Ανατολική Χαλδία)의 군인이자 페라테이아 제국(Φελαθεια)의 정치인이었다. 신정혁명(Θεοκρατία Επανάσταση) 이후 혼란한 상황을 틈타 카라비시아니 반동(Καραβισιάνοι αντίδραση)을 일으켜 제정복고에 성공한 뒤 입헌군주정을 적극 도입하여 초대 히파토스(Ύπατος)[1]에 오르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아르타니나 조약(Συνθήκη της Αρτάνινα)을 체결하여 마우리 강(Μαύρη Ποταμός) 이남의 영토를 보전하는 대신, 러시아에게 수십년에 달하는 부동항 이용 권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에 페라테이아 민족주의자(Φελαθεινες, 페라테이네스)들의 거센 반발을 받기도 했으나, 강력한 군사 실권과 개혁 정책을 통해 위 같은 오점을 무마할 수 있었다.

1871년에는 코미스 아르타도스(Κόμης Αρτάδος)를 비롯한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페라테이아노스 대전(Φελαθειανός Κώδικας)을 편찬하여 법률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후 입헌 체제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설파한 뒤 군사 회의를 거쳐 1873년에 총리직을 사임하고 상무원(商貿院, Υπουργείο Ταμείο, 이푸르기오 타메이오) 총재를 역임하였다. 사임 이후에도 여전히 군사 내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영국을 방문했을 때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 총리를 만나 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1877년에 콤니니 아카데미아(Κομνηνή Ακαδημία)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군대의 신식화를 위해 러시아를 비롯하여 프랑스 제3공화국(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과 프로이센 왕국(Königreich Preußen) 등의 유럽 열강들의 군사 모델을 벤치마킹하였다. 그는 여전히 친위대 성격이 강했던 페라테이아의 군사 체계를 정비하고서 국민군과 강제 징집 제도를 도입하였다.[2][3] 또한 사치적이고 귀족적 면모를 보이던 군대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능력중심주의적 계급 사회를 조성 및 이행토록하여 군 내 계층간의 이질감을 극복하는데 힘을 썼다.[4]

각주

  1. '집정관'이라는 의미로서 로마 공화정에서는 정무관 중 최고 지위였으며, 동로마 제국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폐지한 이후 제한적인 명예직으로 이용되었다. 페라테이아 제국에서는 게루시아(Γερουσία, 의회)와 행정부의 각료 수석을 의미한다.
  2. 국민군 체제를 위해 징집된 주 계층인 농민과 노동자들은 갖가지 편법을 이용해서 회피하였기에 초기에는 기존 친위대 병력과 러시아 제국아이누인으로 구성된 용병 집단을 이용했다.
  3. 베사리온의 뒤를 이어 자발적인 애국심 고취와 시민군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군인 장교, 미하일 케카메노스(Μιχαήλ Κεκαμένος)의 개혁 아래 향토방위를 위한 예비군 법안이 신설되면서 국민들에게 병역 의무를 본격적으로 부과할 수 있게 되었다.
  4. 군대를 신분 상승의 기회로서 새롭게 정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으나, 폐쇄적인 사회 형성에 일조하고 군 내 병영부조리가 생기는 등 부정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