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소설/예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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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버튼|{{ff|Noto Serif KR|{{++1|{{bold|{{ruby|당신과 새해를 맞이하는 여우|The Fox Awaits New Year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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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이고 싶기도 했고 혼자여야만 했기에 혼자였다. 일상이라곤 병실 침대에 누워 환자복을 입고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병실의 풍경과 시야보다 높이 있는 탓에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창문, 그리고 유일하게 바깥 세상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구식 텔레비전을 번갈아 보는 게 전부였다. 그것들만이 나의 상황을 만드는 요인들이었다. 그 상황을 함께 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립다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인연을 만들어 무엇하나, 아마 그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대나무 숲으로 갔던 거겠지.
: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이고 싶기도 했고 혼자여야만 했기에 혼자였다. 일상이라곤 병실 침대에 누워 환자복을 입고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병실의 풍경과 시야보다 높이 있는 탓에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창문, 그리고 유일하게 바깥 세상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구식 텔레비전을 번갈아 보는 게 전부였다. 그것들만이 나의 상황을 만드는 요인들이었다. 그 상황을 함께 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립다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인연을 만들어 무엇하나, 아마 그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대나무 숲으로 갔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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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식이 제공되는 편안하고 아늑한 고급 저택에 머물더라도 기억을 잃은 채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감금된 상태라면 누구나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반면 나처럼 일평생을 앓으며 병실에 누워 있더라도 가족이나 연인, 친구처럼 소중한 사람들이 곁을 함께 해 주었다면 그다지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황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상황을 구성하고 있는 주변 환경이 아니라 그 상황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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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나의 새해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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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margin: 60px 0; text-align: center;"><div style="display: inline-block;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ffcc66, #ffcc99); padding: 6px; border-radius: 4px; text-align: center; color: #663333; font-family: Noto Serif KR;">{{bold|{{++3|당신과 새해를 맞이하는 여우}}}}<br>The Fox Awaits New Year With Me</div><br><span style="color: gray;">{{--2|글 Sinokio / 그림 백팔사미}}</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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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 벌써 새해가 다가오네요? 곧 2020년이라구요~}} 듣고 보니 그렇다. 지금은 2019년을 장식하는 12월 31일의 어느 깊은 밤. 정확하진 않지만 시각은 대략 오후 11시 몇 분 쯤일 것이다. 사실 새해가 다가오리란 것은 몇 주 전부터 의식하고 있었다. 미미르가 달력을 걸어 준 뒤로 잠에서 깨서 수아와 노는 일상만이 전부였던 내게 달력을 읽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은 없었으니까. 2020년이라, 의식은 하고 있지만 막상 다가온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무엇이든 그렇다. 새해가 아니더라도 다른 명절, 특히 추석이 더욱 그렇다. 심지어는 크리스마스까지도. 크리스마스는 별 것 없었다. 수아를 비롯해 모두가 한 데 모여 거대한 트리를 장식하고, 눈싸움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이 올 날씨는 아니었지만 수아가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모처럼인데 분위기라도 내 봐야죠}}라며 여우 저택 담벼락 안으로만 흰 눈을 소복이 쌓아 놓았던 게 기억이 난다. 아직은 그로부터 6일밖에 지나지 않은, 몹시도 추운 한겨울이지만 그때의 눈은 이미 다 녹고 없다. 다만 저택 마당 이곳저곳에 눈이 녹고 얼기를 반복하며 생긴 빙판이 눈에 들어올 정도이다. 생각 없이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겠네. ……물론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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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두꺼운 기모로 된 티를 입고 수아와 함께 대청마루에 앉아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영하를 웃돌 만큼 엄청난 강추위가 찾아 왔지만, 적어도 여우 저택에서는 수아 덕분에 그렇게 추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름에도 그렇다. 남들은 부채나 선풍기를 들고 장착한 채 덥다고 헥헥거리며 바람을 쐬기 바쁘다. 하지만 나는 여름에 긴 팔을 입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지낼 수 있다. 이게 다 수아 덕분이지. 새삼스레 수아에게 감사를 넘어 경외심마저 들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수아도 복장이 크게 다를 것 없다. 오른쪽 옷깃을 어깨 아래로 흘려내린 편안한 분홍빛의 개량 한복. 더없이 어두컴컴한 밤하늘 아래 저택의 조명만이 은은하게 비추고, 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은 염두에도 둘 필요 없이, 애시당초 계절이라는 개념을 망각해 버린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그 무엇보다도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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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그러게, 벌써 또 1년이 지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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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새해와 크리스마스는 이렇다 할 것 없이 지나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다가왔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달력도 없었던 때고, 아무도 말해 주거나 챙기려 하지 않았으니까. 나에게는 그저 여름과 겨울의 반복이었다. 그마저도 수아의 온도 조절 덕분에 별 감흥 없이 지나갔다. 이제는 여유를 좀 부려도 되겠지. 아마 수아도 그렇게 생각했을 터다. 올해부터는 암묵적으로 다함께 기념일이나 명절을 챙기는 일이 더러 많아졌다. 그 시작은 나의 생일 ─ 이라고 정했던 그 날 ─ 을 지나, 9월의 추석. 수아와 유화 두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는 서로 만날 가족도 없고 더욱이 제사 지낼 조상님도 없었기 때문에 추석이라고 별 다를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낯선 기분도 들었다. 뭘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6명을 앞에 두고 임금님 수라상에나 나올 법한 진수성찬들이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수아가 솜씨 발휘 좀 했다고 했었지. ……요리는 연습할 필요도 없으면서 왜 연습해 뒀던 거야? 설마 그 날을 위해?
:
:그리고 두 번째는 10월 31일, 할로윈. 고풍스러운 한옥 저택에서 한복을 입은 여우가 왜 서양의 명절을 챙기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할로윈도 크게 한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추석보다는 나름 할로윈 느낌이 났던 것 같다. 10월 31일 아침부터 생일 때처럼 서프라이즈랍시고 다들 집 구석구석에 미리 숨어 있다가 놀래키려 튀어나오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이긴 했다. 놀란 척도 그럴싸 해야 나오는 거지……. 아, 한 사람만 빼고. 유일하게 선배에게만큼은 소스라치도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프랑켄슈타인 분장이었거든. 선배에겐 죄송하지만 생각보다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아마 누구라도 놀랐으리라 생각했다. 선배의 분장을 맡았었다던 미미르를 제외한 나머지도 그 분장을 처음 보고 놀랐다고 했으니까. 아린이는 기절까지 했다나…….
:
:세 번째는 위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 불과 6일 전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몹시 추웠지만, 적어도 눈이 내릴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우 저택에는 하얀 이불을 곱게 깔아놓은 듯 눈이 쌓여 있었다. 수아가 내리게 한 것이었지. 그래도 나름 아름다운 장관이었는데 곧 미미르와 아린이의 눈싸움과 눈사람 만들기로 망가지고 말았다. 구경만 하던 수아와 나도 아린이의 고급 에임(?)에 눈덩이를 맞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세했다. 썩 즐거웠던 기억이다. 아린이가 대나무 숲에 자랑스럽게 준비한 거대한 트리를 각자의 소중한 물건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의외로 미미르의 아이디어였다. 아린이는 사슴벌레 칩, 선배는 탈, 미미르는 석류알, 수아와 나는 여우 방울. 그리고 유화는… 자신의 머리핀. 어떻게 보면 기괴한 조합이었지만 그렇게 장식하고 반짝이는 트리를 보고 있자니 뭉클한 기분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6일 전 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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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 무슨 사색에 그렇게 빠져 있으세요? 올해도 얼마 안 남았는데, 지금은 좀 더 소녀에게 집중해 주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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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은 생각들을 하며 저택 정원을 포함해 저 너머를 그저 멍 때리며 바라만 보고 있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수아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수아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어깨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고개를 들어 나를 지긋이 바라 보고 있다. 어쩐지 그 눈빛이 아련해 보인다. 수아의 맑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 보인다. 비친 내 모습도 아련해 보인다. 그래, 서로 말을 하고 있진 않지만 알고 있다. 이렇게 태평하고 느긋하게 앉아서 서로를 마주 보고 풍채를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된 일을 겪어 왔는가. 그 때의 일들을 열거하자면 차마 입에도 담아내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일들을 겪어 왔기에 지금의 우리로써 함께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따금 이렇게 추억에 잠기곤 한다. 끔찍했지만 필연적이었던 우리들의 운명을 회상하며.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미안해, 수아야. 잠깐 다른 생각하느라 멍 때리고 있었네.}}
:
:수아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 내린다. 마치 고급 실크, 아니 그로도 형용이 되지 않을 만큼의 부드러움 탓에 손이 무언가를 만지고 있다는 감촉조차 희미해질 것 같다. 눈앞에 수아가 있는 것. 눈앞에 네가 있는 것. 너를 두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고, 닿을 수 있다는 것. {{소설/클립보드|작은따옴표|새벽 감성}}이라고 하던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 어쩌면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걸지도 모르는 ─ 지금의 이 감정은 나를 더 아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 왜일까. 왜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질문은 상황에 대한 회피나 부정인가. 눈에 고이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수아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홱 돌렸다.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 왜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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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지 않게 손과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대충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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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아무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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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가 그 아련한 눈빛으로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급하게 숨긴 눈물을 눈치챘는지 아닌지는 나로써는 알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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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아, 도련님.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요.}}
:
:그러고 보니, 이제는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지만 병원에 누워 살던 때만 해도 새해 맞이는 항상 병실에 딸린 텔레비전과 함께 했다. 그마저도 병약한 몸 탓에 끝까지 맞지 못하고 픽 쓰러지던 게 전부다. 텔레비전 속에서는 MC를 맡은 연예인이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이 몰린 인파 사이에서 상황을 중계하다가, 자정이 몇 초도 채 남지 않으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십, 구, 팔, 칠…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마침내 일이 지나가고,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새해 인사를 건넨다. 사실 그렇게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자정을 맞이하는 것이 겨우 새해라는 이유만으로 카운트다운까지 해 가며 그 추운 데에 모여 있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지는 모르겠다. 뭐랄까, 실감이 나지 않는달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자정이 카운트다운을 세는 것만으로 새해 맞이라는 특별한 행사로 바뀐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텔레비전 너머로만 보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현장에 있었어도 변함은 없었을 거다.
: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새해 맞이가 이제는 더 이상 의미 없고 실감나지 않는 일에만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새해를 함께 맞이할 사람 ─ 이라기보단 여우나, 저승사자나, 산신령이나… ─ 도 있고, 병약한 몸을 탓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행사가 이렇게 즐겁고 설레는 일이었던가. 반드시 {{소설/클립보드|작은따옴표|누군가}}가 아니라 수아라서 그럴 뿐인 걸까. 어느 쪽이든 아무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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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령! 여우야!}}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세, 세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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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하지만 수상한 목소리가 저택 정문에서 희미하게 들려온다. 미미르와 아린이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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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령!! 여~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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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그 목소리는 점차 커져 갔다. 귀에 내리 박힐 정도가 되니 미미르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들려 왔다. 헐레벌떡 뛰어 오고 있는 듯 말소리 중간중간마다 거친 숨소리가 섞여 있다. 산신령도 숨이 차나…? 미미르와 아린이는 처음 목소리가 들린 순간으로부터 생각보다 빠르게 눈에 보이는 곳까지 도착해서 잔뜩 분위기를 잡은 수아와 내가 어색해질 틈도 없었다. 오히려 저택 정문 벌컥도 아니고 쾅! 하고 열릴 땐 둘 다 움찔하며 놀라기도 했다.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아, 아린아? 미미르?!}}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야! 할로윈부터 크리스마스까지 그렇-게 굴려 먹어놓고, 새해는 둘이서만 오붓-하게 시간 보내려고?}}
:
:미미르가 수아에게 따지듯이 말하고 있다. 수아는 여전히 얼 빠진 듯한 표정이고, 아린이는 미미르의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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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뭐, 뭐야. 어떻게 알고 온 거야?!}}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어떻게 알긴! 곧 온 숲에 불꽃을 팡팡 쏴 댈 것처럼 힘을 모으는데 강 깊숙한 곳까지 안 느껴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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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수아앗! 미미르! 그걸 미리 말해 버리면 어떡!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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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가 한 번 크게 움찔하더니,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귀도 축 처져 있다. 새해가 되면 서프라이즈로 불꽃놀이라도 해 줄 심산이었나? 그런데 미미르 탓에 이른바 {{소설/클립보드|작은따옴표|스포일러}}를 당해 버려서 상심한 듯하다.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아아! 말하는 사이에 새해가 지나 버렸어요!!}}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뭐어?!}}
:
:모두가 같은 반응이었다. 언제부턴가 차고 있던 아린이 손목에 있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애석하게도 정말로 시계의 분침은 1을 가리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모두가 자신의 손목시계로 달려들자 아린이는 패닉에 빠졌고, 미미르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토했다. 수아는… 우는 건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푹 떨군 채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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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저기, 수아야? 혹시 미미르랑 아린이가 온 것 때문에 그래? 내가 돌려 보내 볼까? 그런다고 갈 것 같지는 않…}}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께… 도련님과 함께 새해를 맞지 못했어요! 소녀가 오래도록 준비하고 고대해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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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억울함은 곧 분노로 바뀌어서, 가만 놔두다간 저택이 불과 얼음과 물바다에 휩쓸릴 것 같아 우선은 수아를 진정시키고 위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새해는 1년에 한 번씩 돌아 오는 거라고, 올해에 망쳤으면 내년이 있는 거라고, 또 다함께 우당탕탕 맞는 새해도 좋지 않냐고 온갖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 놓았다. 수아는 여전히 뾰루퉁한 표정으로 못마땅한 듯했지만 그래도 저택이 무너지는 꼴은 일어나지 않았다.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그래서, 이유는 단순히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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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라고 되묻는 미미르에게 나는 할로윈과 크리스마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냐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 미미르와 아린이가 흥분해서는 뭐라고 막 말을 늘어 놓았었는데, 사실 기억은 잘 안 난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내뱉었을지도 모르겠지만.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그보다 얘는 불렀는데 왜 이렇게 안 와?}}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네? 누, 누가 또 와요?}}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네 선배.}}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아, 그, 선배는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못 오신다고….}}
:
:미미르는 황당해 하는 표정을 짓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진 조금은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수아였다.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다같이 새해 첫 날을 맞이해 볼까요?}}
:
:수아의 눈치를 살폈지만 위험하진 않아 보였다.
:
:그렇게 나와 수아 단둘이 오붓하게(?) 새해를 맞이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고, 그 대신 미미르와 아린이를 비롯해 조금은 시끌벅적한 새해 맞이가 되었다. 미미르가 선배도 부른 것 같았지만 아린이가 말했듯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고 했다. 수아에게 유화에 대해 물어 보니 여우 가문은 신정이 아니라 대개 구정을 챙긴다고 했다. 아니면… 벌써 자고 있다던가. 후자의 확률이 더 클 거란다.
:
:…이미 자정은 넘었다. 2020년의 첫 해가 뜨기까지도 시간은 많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대로 잠을 잘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어차피 모두 잠을 잘 필요도 없는 몸이거니와 자정이 넘은 지금 잠을 자면 동이 틀 때에 맞추어 일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에도 그랬듯이 새해답게 새해에 걸맞은 이벤트를 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여기 모두 하루종일 각자 집에만 있는 것을 빼면 평소에 할 것도 없으니까. …미미르나 아린이는 산신령이나 저승사자로서 일을 한다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
:그래서 우리가 첫 번째로 정한 것은 쥐불놀이다. 아무래도 어두운 밤인 지금 밝은 불꽃을 휘두르는 놀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원래 쥐불놀이는 정월대보름에 하는 놀이라지만 뭐 어때. 여우 저택에는 생각 이상으로 온갖 도구나 잡동사니가 많아서 쥐불놀이에 필요한 재료들도 금방 모였다. 그러고 보니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 때도 분장과 복장에 쓰인 모든 재료는 여우 저택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무튼 적당한 크기의 깡통을 끈의 한쪽에 묶고, 다른 한쪽은 잡기 편하도록 매듭을 지었다. 불을 붙이는 데에는 수아가 도움을 주어서,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끈을 잡고 불이 붙은 깡통을 크게 원을 그리며 휘두르는데, 수아가 벌떡 나섰다.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생각보다 훨씬 시시하네요. 이 정도는 돼야 불꽃이라고 할 수 있죠!}}
:
:…라며, 열심히 깡통을 돌리는 내 옆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더니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꽃이 빠르게 쏘아져 올라갔다. 불꽃은 피유웅, 하는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하늘을 돌다가 어느새 펑 하고 터져 버렸다. 마치 불꽃놀이처럼 불꽃의 잔재는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았다. 자정에 보여 주지 못한 불꽃놀이의 한을 지금 푸는 건가…, 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바라 보고 있던 미미르가 옆에서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그건 쥐불놀이가 아니라 여우불놀이잖아}}라고 거들었다. 가만히 있던 나와 아린이는 웃음이 터졌고, 수아는 뒤늦게 민망한지 다시 대청마루에 가 앉았다.
:
:어느새 나뿐만 아니라 미미르와 아린이, 그리고 수아마저도 손에 하나씩 깡통이 달린 끈을 잡고 열심히 돌리고 있었다. 미미르는 그 깡통을 아린이에게 갖다 대며 장난을 치고, 아린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똑같이 깡통을 내세우며 나름대로 방어하고 있었다. 수아는 방금의 불꽃이 불만족스러운지 여전히 지루하다는 표정이다. …어쩔 수 없지.
:
:쥐불놀이는 미미르의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다들 슬슬 쥐불놀이에 지쳐 갈 때 쯤 내가 내세운 아이디어, 그것은 바로 윷놀이였다. 불꽃이 펑 하고 터질 염려도 없고 지루하게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순전히 운에만 모든 것을 맡기는 게임. 게다가 여기에는 최대 인원인 네 명이 딱 모여 있다. 여우 저택에 윷놀이 세트도 있을까?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염두에 두지 못했나 보다. 그래서 급하게나마 우리끼리 윷놀이 세트를 만들어 냈다. 판은 두꺼운 한지를 정사각형으로 잘라 윷놀이 판처럼 구역을 표시했고, 말은 마당에 굴러다니는 조약돌 네 개를 주워 와서 나름대로 각자 표시를 해 구분했다. 가장 중요한 윷은 저택 너머 활엽수림에서 나뭇가지를 몇 개 잘라와 수아가 만들었다. 손으로 대충 자른 것 같은데 나름 정확하다. 다시금 수아에게 경외심을….
:
:팀은 나와 수아, 미미르와 아린이로 나뉘었다. 우리팀이 처음부터 모와 윷을 내며 선전하는 듯했지만, 바로 다음 턴에 백도가 나와 버리고 미미르팀에서 윷을 두 번이나 내는 바람에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한 말이 개와 걸을 선전하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결국 가장 먼저 들어오게 되었다. 원래 윷놀이의 규칙대로라면 두 개의 말 모두가 전부 들어와야 승리로 인정되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규칙을 바꾸어 둘 중 하나라도 먼저 들어오면 승리로 인정하기로 했었다. 덕분에 승리는 나와 수아의 것.
:
:윷놀이도 끝이 났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쥐불놀이나 윷놀이 외에도 떠오르는 여러 가지 전통놀이들은 있었다. 널뛰기, 연날리기, 그네, 줄다리기, 투호… 등등. 널뛰기나 그네는 장비가 없을 뿐더러 이걸 얘네랑 하게 되면 분명 누구 하나는 숲까지 날아가 버릴 것이다. 줄다리기는 줄이 끊어져 버릴 테고, 투호는 벽이 무너져 버리겠지. 연날리기를 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둡다.
:
:그래서 겨우 새로 생각해 낸 것이 제기차기. 무지막지하게 힘을 쓰거나 극한의 피지컬(?)을 요구하지 않고 발의 기술로만 승부를 보는 놀이다. 다행히도 여우 저택에 제기도 몇 개 있었다. 이 정도면 여우 저택에 없는 것은 무엇일지 찾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아, 하나 있다면 윷놀이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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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수아야, 너는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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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네? 도련님, 치마 때문이라면 소녀는 상관 없사온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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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아니, 내가 상관 있어. 자칫하다간 이 팬픽이 못 올라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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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사오나, 도련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소녀는 따를 수밖에 없지요. 흑,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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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를 입은 수아는 참여하지 않았다. 수아 본인은 상관 없다고 했는데 내가 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왜, 좀 그렇잖아. 열심히 만 몇 천 자를 써 놓고 검열당해 올리지 못한다면 정말 슬플 것 같다. …아무튼, 나와 미미르와 아린이가 각자 제기를 하나씩 잡았다. 산신령인 미미르와 저승사자인 아린이는 당연히 제기차기가 처음이었다. 물론 평생을 병실에만 누워 있던 나도 처음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셋 다 적어도 제기차기가 어떻게 하는 놀이인지는 알고 있었다는 것(…).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나였다. 제기를 던지고 발로 받, …받. ……받, 아야 하는데… 이게 은근히 쉽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어렵다. TV에선 한번에 몇 십 개씩 하던데, 대체 무슨 사람들이야? 최고 기록은 두 개였고, 미미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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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오, 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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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린이는 달랐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반전이었고, 나와 미미르는 제기까지 떨어뜨려 가며 아린이의 제기차기를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지켜 보기만 했다. 수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청마루에 앉아 정지한 채였다. 아린이의 표정은 굉장히 고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충분히 그럴 만했다. 제기차기가 처음인 게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본인도 놀란 듯한 반응이었지. 아린이는 제기를 손에서 놓고 몇 분 동안이나 땅에 떨어뜨리질 않았다. 손에서 놓은 제기를 발로 차 올리고, 떨어질 때면 다시 차 올리고. 감탄에 절어 개수를 세진 못했지만 적어도 세 자릿수는 넘지 않았을까, 우리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까지도 아린이는 제기를 땅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없었다. 마무리랍시고 제기를 높이 차 올렸다가 손으로 냉큼잡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린이의 얼굴에는 흡사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봤냐 봤냐}}하는 것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 있었다. 나와 수아와 미미르의 손과 입에서 박수와 감탄이 터져 나온 것은 그로부터 약 2초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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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의외의 재능을 찾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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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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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로 미미르가 칭찬을 다하는지도 그 순간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제기차기를 과연 어디서 써 먹을 수 있을지가 문제겠지만. 저승도 현실 세계 직장처럼 친목 도모 체육대회 같은 게 있을까. 있다면 적어도 제기차기는 아린이가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나중에 아린이한테 제기차기나 배워 둘까. …그러는 나는 써 먹을 데가 있나?
:
:아린이의 제기차기 쇼도 끝이 났다. 미미르가 옆에서 조금 배워 보려는 듯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제기를 땅바닥에 내팽겨치며 포기했다.
:
:우리는 그 이후로도 해가 뜰 때까지 심심함과 지루함을 날려 버리려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민속놀이는 고사하고, 수아의 분신들이 시기도 맞지 않게 강강술래를 추는 것을 구경하거나 또 어디서 나타난 축구공으로 공을 주고 받(다가 수아와 미미르의 슛에 죽을 뻔하)기도 했다. 저택에만 있다가는 도저히 시간을 때울 게 없어 숲으로 나가보니 뒤늦게 오고 있던 선배도 만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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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여~! 모두 안녕! 내가 좀 늦었지?}}{{brbr|18}}<!--


숙식이 제공되는 편안하고 아늑한 고급 저택에 머물더라도 기억을 잃은 채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감금된 상태라면 누구나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반면 나처럼 일평생을 앓으며 병실에 누워 있더라도 가족이나 연인, 친구처럼 소중한 사람들이 곁을 함께 해 주었다면 그다지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황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상황을 구성하고 있는 주변 환경이 아니라 그 상황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힘차고 신나게 찾아온 선배에게는 죄송했지만 선배는 이미 할 게 없어서 숲으로 나왔다는 말을 듣고 아쉬워 하면서도 시간을 확인하며 그러려니 했다. 역시나 숲에서도, 아니 숲에서는 저택에서보다 더 할 게 없어서 다같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저택을 돌아가는 길에는 또 다른 불청객… 아니, 초대하지 않은 손님으로 유화를 만났다.
 
:
그리고, 이제 나의 새해도 그렇다.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뭐야, 다들 나만 빼놓고 즐거웠던 건가요?}}
 
:
 
:얘기를 들어 보니 유화 본인도 자정에 맞추어 새해를 맞이하려 했지만, 11시 즈음에 잠들어 버려서 실패했다는 모양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자다가 새벽에 깼고, 다시 잠에 들긴 애매한 시간이라 이곳으로 왔단다. 우리가 어떻게 깨어 있을 줄 알고 왔냐니까 그 정도는 기본이라는데. 자매의 텔레파시 어쩌고 하다가 스스로 민망했는지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정작 수아는 내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멋쩍게 웃고 있었지만.
 
:
 
:나갔을 때보다 두 명이 더 많아진, 나를 포함해 총 여섯 명이 다함께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어느덧 4시. 숲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선배와 유화, 겨우 두 명이 더 온 것뿐인데 4명뿐이던 저택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덕분에 일출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2020년 1월 1일의 일출 시간은 7시 45분이라고 한다. 시간은 어느새 7시로 다가왔고, 미미르는 도중에 곯아떨어진 아린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선배는 아침 출근 때문에 먼저 가셨고, ─ 신정에마저 근무를 시키다니… 난 나중에라도 저승에서는 일하지 말아야겠다. ─ 유화도 빗으로 꼬리를 빗어주다 보니 어느샌가 잠들어 있어서 수아가 방에 눕혀 주고 왔다. 다시 몇 시간 전처럼 수아와 나만 남았다. 잠시였지만 시끌벅적하던 저택이 순간에 둘만 남아 조용해지니 조금은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div style="text-align: center;"><div style="display: inline-block; border-top: 1px solid black; border-bottom: 1px solid black; padding: 12px;"><span style="color: black;"><span style="font-size: 14pt; font-weight: bold;">당신과 새해를 맞이하는 여우</span><br><span style="color: #999; font-size: 9pt;">글 Sinokio / 그림 백팔사미</span></span></div></div>
: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저, 도련님. 소녀, 사실 새해 일출이 되면 도련님과 꼭 함께 해를 보고 싶었던 장소가 있어요. 오늘 함께 2020년의 순간을 맞이하자 부탁 드린 것도 다 지금을 위해서랍니다. 같이… 가 주시겠어요?}}
 
:
 
:수아의 말이 애절하게 들려왔다. 나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그러겠다고 답했다.
 
:
"도련님, 벌써 새해가 다가오네요? 곧 2020년이라구요~" 듣고 보니 그렇다. 지금은 2019년을 장식하는 12월 31일의 어느 깊은 밤. 정확하진 않지만 시각은 대략 오후 11시 몇 분 쯤일 것이다. 사실 새해가 다가오리란 것은 몇 주 전부터 의식하고 있었다. 미미르가 달력을 걸어 준 뒤로 잠에서 깨서 수아와 노는 일상만이 전부였던 내게 달력을 읽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은 없었으니까. 2020년이라, 의식은 하고 있지만 막상 다가온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무엇이든 그렇다. 새해가 아니더라도 다른 명절, 특히 추석이 더욱 그렇다. 심지어는 크리스마스까지도. 크리스마스는 별 것 없었다. 수아를 비롯해 모두가 데 모여 거대한 트리를 장식하고, 눈싸움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이 올 날씨는 아니었지만 수아가 "모처럼인데 분위기라도 내 봐야죠"라며 여우 저택 담벼락 안으로만 흰 눈을 소복이 쌓아 놓았던 게 기억이 난다. 아직은 그로부터 6일밖에 지나지 않은, 몹시도 추운 한겨울이지만 그때의 눈은 이미 다 녹고 없다. 다만 저택 마당 이곳저곳에 눈이 녹고 얼기를 반복하며 생긴 빙판이 눈에 들어올 정도이다. 생각 없이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겠네. ……물론 나만.
:─ 수아는 앞장 서서 굳이 내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걷기 시작했다. 대문을 나서고, 활엽수림이 아닌 대나무 숲을 걷고, 도착한 곳은, …그 고목나무. 수아는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곳을 왔을 땐 이 길을 혼자 걸었다. 두 번째 걸었을 땐 이 자리에서 한 번 죽었고, 세 번째 걸었을 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였지. 이 길은 몇 번을 걸어도 매번 받는 느낌이 다른 것 같다. 처음엔 절망, 그 다음은 두려움, 마지막은 어리둥절함….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지금 걸으며 느낀 기분은 지금까지 중에선 가장 괜찮은 같다. 아니, 오히려 좋은 것 같다. 맞잡은 수아의 손은 뺨을 때리는 겨울의 칼바람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했다. 고목나무까지 가는 내내 앞장 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단순히 부끄러워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수아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 마음이 편해진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것이 내 몸의 대부분이 수아의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냐 묻는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사실 유무에 관계 없이 나는 수아가 좋다고 대답할 것이다.
 
:
적당히 두꺼운 기모로 된 티를 입고 수아와 함께 대청마루에 앉아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영하를 웃돌 만큼 엄청난 강추위가 찾아 왔지만, 적어도 여우 저택에서는 수아 덕분에 그렇게 추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름에도 그렇다. 남들은 부채나 선풍기를 들고 장착한 덥다고 헥헥거리며 바람을 쐬기 바쁘다. 하지만 나는 여름에 긴 팔을 입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지낼 수 있다. 이게 다 수아 덕분이지. 새삼스레 수아에게 감사를 넘어 경외심마저 들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수아도 복장이 크게 다를 것 없다. 오른쪽 옷깃을 어깨 아래로 흘려내린 편안한 분홍빛의 개량 한복. 더없이 어두컴컴한 밤하늘 아래 저택의 조명만이 은은하게 비추고, 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은 염두에도 둘 필요 없이, 애시당초 계절이라는 개념을 망각해 버린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무엇보다도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 보고 있었다.
:우리는 고목나무 위에 올라 앉았다. 여기는… 내가 화수분의 주마등에 갇혀 있었을 때, 화수분이 만든 가짜 수아와 함께 왔었던 곳이다.
 
:
"그러게, 벌써 또 1년이 지나는구나."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
작년 새해와 크리스마스는 이렇다 할 없이 지나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다가왔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달력도 없었던 때고, 아무도 말해 주거나 챙기려 하지 않았으니까. 나에게는 그저 여름과 겨울의 반복이었다. 그마저도 수아의 온도 조절 덕분에 별 감흥 없이 지나갔다. 이제는 여유를 좀 부려도 되겠지. 아마 수아도 그렇게 생각했을 터다. 올해부터는 암묵적으로 다함께 기념일이나 명절을 챙기는 일이 더러 많아졌다. 그 시작은 나의 생일 ─ 이라고 정했던 그 날 ─ 을 지나, 9월의 추석. 수아와 유화 두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는 서로 만날 가족도 없고 더욱이 제사 지낼 조상님도 없었기 때문에 추석이라고 별 다를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낯선 기분도 들었다. 뭘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6명을 앞에 두고 임금님 수라상에나 나올 법한 진수성찬들이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수아가 솜씨 발휘 좀 했다고 했었지. ……요리는 연습할 필요도 없으면서 왜 연습해 뒀던 거야? 설마 그 날을 위해?
:다시 듣는 수아의 목소리가 더 애절해졌다. 내 옷깃을 꽉 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옷깃을 잡은 수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던 것 같다.
 
:
그리고 두 번째는 10월 31일, 할로윈. 고풍스러운 한옥 저택에서 한복을 입은 여우가 왜 서양의 명절을 챙기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할로윈도 크게 한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추석보다는 나름 할로윈 느낌이 났던 것 같다. 10월 31일 아침부터 생일 때처럼 서프라이즈랍시고 다들 집 구석구석에 미리 숨어 있다가 놀래키려 튀어나오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이긴 했다. 놀란 척도 그럴싸 해야 나오는 거지……. 아, 한 사람만 빼고. 유일하게 선배에게만큼은 소스라치도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프랑켄슈타인 분장이었거든. 선배에겐 죄송하지만 생각보다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아마 누구라도 놀랐으리라 생각했다. 선배의 분장을 맡았었다던 미미르를 제외한 나머지도 그 분장을 처음 보고 놀랐다고 했으니까. 아린이는 기절까지 했다나…….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수아야, 걱정하지마. 이제 우린, 헤어지지 않아.}}
 
:
세 번째는 위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 불과 6일 전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몹시 추웠지만, 적어도 눈이 내릴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우 저택에는 하얀 이불을 곱게 깔아놓은 듯 눈이 쌓여 있었다. 수아가 내리게 것이었지. 그래도 나름 아름다운 장관이었는데 곧 미미르와 아린이의 눈싸움과 눈사람 만들기로 망가지고 말았다. 구경만 하던 수아와 나도 아린이의 고급 에임(?)에 눈덩이를 맞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세했다. 썩 즐거웠던 기억이다. 아린이가 대나무 숲에 자랑스럽게 준비한 거대한 트리를 각자의 소중한 물건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의외로 미미르의 아이디어였다. 아린이는 사슴벌레 칩, 선배는 탈, 미미르는 석류알, 수아와 나는 여우 방울. 그리고 유화는… 자신의 머리핀. 어떻게 보면 기괴한 조합이었지만 그렇게 장식하고 반짝이는 트리를 보고 있자니 뭉클한 기분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6일 전 일이라니.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 그런 게 아니오라, , 그저 기뻐서… 도련님과, 으흑, 이렇게 다정하게… 함께 마주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
"도련님? 무슨 사색에 그렇게 빠져 있으세요? 올해도 얼마 안 남았는데, 지금은 좀 더 소녀에게 집중해 주세요~ 네?"
:수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닭똥 같은 눈물이 한 방울 방울 내 옷으로 떨어져 스며든다. 수아는 불안했던 것이다. 줄 정은 줄 대로 다 줘 버리고 죽어서 떠나 버린, 그러면서도 간을 먹으라고 했던 나, 그래서 겨우 고생하며 살려 놓으니 기억을 잃고, 되찾는 과정에서 다시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고, 주마등에 스스로 몸을 던지고, 갇혀 버리고. 그런 나에게 불안을 느끼고 있던 거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이제 해소됐다. 몇 번의 시련을 겪었지만 모두 함께 함으로써 이겨 낸 믿음, 비로소 찾아온 평화와 되찾은 일상, 긴장이 풀리면서 북받쳐 오는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을 수아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아마 수아라면 내가 기억할 것보다도 훨씬 오래 간직할 것이다. 간직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지금 여기서,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터져 올랐다. 수아의 눈물로 팔이 젖어 간다. 평소의 수아라면 절대, 결코 용납할 없었겠지만 지금의 수아는 그마저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감정에 젖어 있다. 내 팔이 젖어 갈수록, 수아의 감정도 젖어 간다. 나는 잡혀 있는 팔이 아닌 다른 팔로 내 어깨에 기댄 수아의 머리를 감싸 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 않았다. 수아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인가. 웬일인지 나도 울음이 터질 뻔했지만 겨우 꾹 참아냈다. 수아와 나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그렇게 몇 분이나 서로의 감정을 나누었다.
 
:
…와 같은 생각들을 하며 저택 정원을 포함해 저 너머를 그저 멍 때리며 바라만 보고 있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수아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수아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어깨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고개를 들어 나를 지긋이 바라 보고 있다. 어쩐지 그 눈빛이 아련해 보인다. 수아의 맑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 보인다. 비친 내 모습도 아련해 보인다. 그래, 서로 말을 하고 있진 않지만 알고 있다. 이렇게 태평하고 느긋하게 앉아서 서로를 마주 보고 풍채를 즐길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된 일을 겪어 왔는가. 그 때의 일들을 열거하자면 차마 입에도 담아내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일들을 겪어 왔기에 지금의 우리로써 함께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따금 이렇게 추억에 잠기곤 한다. 끔찍했지만 필연적이었던 우리들의 운명을 회상하며.
:얼마나 지났을까. 수아의 통곡 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히 들리지 않도록 멈추었다. 수아가 천천히 어깨에서부터 고개를 떼었다.
 
:
"…미안해, 수아야. 잠깐 다른 생각하느라 멍 때리고 있었네."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아, ! 도련님! 지금 소녀, 매우 부끄러운 몰골이온데…! 하지만 소녀 때문에 도련님의 팔이…!!}}
 
:
수아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 내린다. 마치 고급 실크, 아니 그로도 형용이 되지 않을 만큼의 부드러움 탓에 손이 무언가를 만지고 있다는 감촉조차 희미해질 것 같다. 눈앞에 수아가 있는 것. 눈앞에 네가 있는 것. 너를 두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고, 닿을 수 있다는 것. '새벽 감성'이라고 하던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 어쩌면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걸지도 모르는 ─ 지금의 이 감정은 나를 더 아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 왜일까. 왜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질문은 상황에 대한 회피나 부정인가. 눈에 고이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수아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홱 돌렸다.
:흘긋 보이는 퉁퉁 부은 눈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머리를 정돈하고 젖은 내 팔을 어르기를 왔다갔다 했다. 오랜만에 보는 수아의 진짜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버렸다. 결국 수아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로 얼마 동안이나 머리칼과 얼굴을 정리했고, 그렇게 다시 내게 얼굴을 보인 수아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끔하고 단정한 평소의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눈물로 젖었던 팔도 어느새 말라 있다. 수아가 말렸다는 건 알겠지만… 대체 언제 말린 거야? 그 와중에서도 젖은 팔을 말리다니, 역시 여우는 여우다. 무서운 존재야, 음.
 
:
"도련님…? 왜 그러세요?"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 곧 해가… 뜨겠네요.}}
 
:
티나지 않게 손과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대충 닦았다.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응. 2020년의 첫 해네.}}
 
:
"아무것도 아니야."
:조금씩 밝아지고 그림자가 지기 시작하면서 해가 뜰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우리는 몇 시간 전 어두운 저택의 대청마루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있다. 고마워, 미안해, 힘들었지, 즐거웠고 즐거워, 행복했고 행복해, 좋아해, 사랑해.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마주보는 서로에 대해 서로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떤 말이 오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깨어났을 때의 나를 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너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어떤 기분이었을까. 애써 숨기고 환한 웃음과 장난끼 많은 태도를 일관하며 너는 어땠을까.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 기억하지 못해 미안해. 죽어서, 미안해. 어렸던 네게 간을 먹으라고 해서…, 미안해. 생각해 보면 몹쓸 나의 잘못이야. 내가 그 날 죽기로 마음 먹고 이 대나무 숲에 오지만 않았다면,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너에게 간을 주지 않았다면, 정을 주지 않았다면…. 너는 나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모른 채로 이 저택에서 굳건하게 살아 갔을 텐데. 내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나를 그리워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불안에 마음을 졸이며 살 필요도 없었을 거야. 나를 위해 애써 주마등에 몸을 던지거나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겠지. 너의 인생은, 내가 망쳐 놓은 거나 다름 없는 거네. 미안해, 수아야. 정말… 미안해.
 
:
수아가 그 아련한 눈빛으로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급하게 숨긴 눈물을 눈치챘는지 아닌지는 나로써는 알 도리가 없었다.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
"아, 도련님.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요."
:…?!
 
:
그러고 보니, 이제는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지만 병원에 누워 살던 때만 해도 새해 맞이는 항상 병실에 딸린 텔레비전과 함께 했다. 그마저도 병약한 몸 탓에 끝까지 맞지 못하고 픽 쓰러지던 게 전부다. 텔레비전 속에서는 MC를 맡은 연예인이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이 몰린 인파 사이에서 상황을 중계하다가, 자정이 몇 초도 채 남지 않으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 구, 팔, 칠…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마침내 일이 지나가고,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새해 인사를 건넨다. 사실 그렇게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자정을 맞이하는 것이 겨우 새해라는 이유만으로 카운트다운까지 해 가며 그 추운 데에 모여 있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지는 모르겠다. 뭐랄까, 실감이 나지 않는달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자정이 카운트다운을 세는 것만으로 새해 맞이라는 특별한 행사로 바뀐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텔레비전 너머로만 보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현장에 있었어도 변함은 없었을 거다.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우후훗, 도련님의 생각은 다~ 파악하고 있답니다~ 우후후훗.}}
 
: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새해 맞이가 이제는 더 이상 의미 없고 실감나지 않는 일에만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새해를 함께 맞이할 사람 ─ 이라기보단 여우나, 저승사자나, 산신령이나… ─ 도 있고, 병약한 몸을 탓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행사가 이렇게 즐겁고 설레는 일이었던가. 반드시 '누군가'가 아니라 수아라서 그럴 뿐인 걸까. 어느 쪽이든 아무렴 좋다.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 소녀는… 이렇게 생각해요. 소녀가 처음 여우 가문에서 버려졌을 때, 당시에만 해도 불이나 얼음은커녕 여우 구슬도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소녀는 눈이 소복이 쌓인 저택의 앞에서 쓰러진 채로 추위를 견뎠어야 했죠. 힘든 나날이었어요. 저택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애초에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요. 그래서 배가 잔뜩 고픈 채로 얼마 동안이나 이 대나무 숲만을 배회하다가 도련님을 만난 거예요. …다짜고짜 도련님께 간을 달라 했었던 어린 소녀는 아직도 죄송하다고 느끼고 있사옵니다만…. 아무튼, 도련님께서는 제게 이름도 붙여 주시고, 아는 척을 하며 앞장 섰던 제게 인간 세상의 문화도 알려 주셨죠. 비록 어린 시절이었지만 소녀는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요. 즐거웠고, 시간이 그대로 멈췄으면 했어요. 도련님은 제게 삶의 선물을 주신 존재랍니다. 도련님께서 죽으셨던 순간에도, 소녀에게 간을 먹으라 하시던 때에도 소녀는 도련님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증거로 소녀의 머리카락으로 도련님을 살려 냈고, 보살펴 드린 거니까요. 도련님께서 저승과 한판 전쟁을 벌이시던 때에도 소녀는 도련님이 우선이었답니다. 그 증거로는 도련님을 대신해 주마등에 몸을 던진 것이죠. 소녀는 언제나 소녀보다 도련님이 우선이에요. 소녀에게 도련님보다 소중한 것은 없사옵니다. 왜냐 물으신다면, 그야… 도련님을 사랑하니까. …좋아하니까요. 이 마음은, 이 사랑만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더라도 변치 않을 거예요. 소녀가 가장 잘하는 건, 기다리는 일이니까.}}
 
:
"도령! 여우야!"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수아야.}}
 
:
"세, 세은아!"
:어? 수아의 이름을 한 번 불렀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도 못한 눈물이 한꺼번에 북받쳐 쏟아지는 바람에 급하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끊임 없이 흘러 나오는 눈물은 가린 손 사이로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른 잎에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최대한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큽, 큭, 하는 소리마저 모두 감출 수는 없었다. 앞에서는 수아가 한 순간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고개 숙인 나를 제 품에 감싸 안은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다시 몇 분이 흘렀다. 갑자기 말썽이 되어 버린 눈물샘과 감정은 그제야 진정됐다. 내가 숙였던 고개를 들자 수아도 자연스레 감싸 안은 팔을 거두었다. 눈물샘과 함께 터진 콧물샘 탓에 몇 번 훌쩍이는데, 앞에서 수아가 손수건을 건넸다.
 
:
…? 익숙하지만 수상한 목소리가 저택 정문에서 희미하게 들려온다. 미미르와 아린이의 목소리다.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 이제 좀 괜찮으세요?}}수아는 안심한 듯이 옅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받아 들고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눈을 닦고 부은 눈가를 뭉갰다.
 
:
"도령!! 여~우~야~!!!!!"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응, 이제 괜찮아.}}
 
: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그 목소리는 점차 커져 갔다. 귀에 내리 박힐 정도가 되니 미미르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들려 왔다. 헐레벌떡 뛰어 오고 있는 듯 말소리 중간중간마다 거친 숨소리가 섞여 있다. 산신령도 숨이 차나…? 미미르와 아린이는 처음 목소리가 들린 순간으로부터 생각보다 빠르게 눈에 보이는 곳까지 도착해서 잔뜩 분위기를 잡은 수아와 내가 어색해질 틈도 없었다. 오히려 저택 정문 벌컥도 아니고 쾅! 하고 열릴 땐 둘 다 움찔하며 놀라기도 했다.
:어느새 수아의 모습과 마른 나뭇잎들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밝아졌다. 이제 정말 몇 분 후면 해가 뜬다. 눈이 부은 내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워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얼른 어떻게든 붓기를 가라 앉히기 위해 수아가 준 손수건으로 눈을 열심히 마사지했다. 그러다가 언듯 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각자의 자세 그대로 1초 동안 정지했다가 웃음 터뜨렸다. 마주보는 기쁨, 평화와 일상의 달콤함, 너의 사랑스러움. 그 모든 것들이 분위기에 맞지 않게 터져 버린 웃음을 대변한다고 할 있다.
 
:
"아, 아린아? 미미르?!"
:앉은 방향에서 눈을 찌르는 섬광이 비춰 온다. 2020년 첫 해가 다가왔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하지만 언제나보다 확실하게.
 
:
"야! 할로윈부터 크리스마스까지 그렇-게 굴려 먹어놓고, 새해는 둘이서만 오붓-하게 시간 보내려고?"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 사랑해요.}}<br>{{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나도 사랑해, 수아야.}}
 
:
미미르가 수아에게 따지듯이 말하고 있다. 수아는 여전히 얼 빠진 듯한 표정이고, 아린이는 미미르의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div style="margin: 0 -5px; margin-left: -12px;">[[파일:당기여 모작.png|1000px|link=]]</div>
 
:
"뭐, 뭐야. 어떻게 알고 온 거야?!"
:<div style="text-align: center; position: relative; bottom: -12px; color: black; font-size: 1.3em;"><div style="font-weight: bold;"><span style="color: transparent; user-select: none;">이제 </span>도련님을<span style="color: transparent; user-select: none;"> 두고 떠나지</span> 않을게요.</div></div><!--
 
--><div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1.3em;"><strong>이제 <span style="color: transparent; user-select: none;">도련님을</span> 두고 떠나지 <span style="color: transparent; user-select: none;">않을게요.</span></strong></span></div><!--
"어떻게 알긴! 곧 온 숲에 불꽃을 팡팡 쏴 댈 것처럼 힘을 모으는데 강 깊숙한 곳까지 안 느껴지겠어?"
--><div style="text-align: center; position: relative; top: -12px; color: black; font-size: 1.3em;"><div style="font-weight: bold;"><span style="color: transparent; user-select: none;">이제 </span>너를<span style="color: transparent; user-select: none;"> 두두고 떠나지 </span>않을게.</div></div>
 
:
"수아앗! 미미르! 그걸 미리 말해 버리면 어떡! …해요."
:<div style="margin: 60px 0; text-align: center;">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그렇게 약속했었다.</div>
 
:
수아가 한 번 크게 움찔하더니,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귀도 축 처져 있다. 새해가 되면 서프라이즈로 불꽃놀이라도 해 줄 심산이었나? 그런데 미미르 탓에 이른바 '스포일러'를 당해 버려서 상심한 듯하다.
:<div style="margin-bottom: 600px; text-align: center;">{{bold|당신과 새해를 맞이하는 여우 完}}<br><small>side story까지 즐겨 주세요!<br>(아직 스크롤이 남았어요!)</small></div>
 
:
"아아! 말하는 사이에 새해가 지나 버렸어요!!"
:<div style="margin: 60px 0; 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black;">side story #1<span style="font-size: 14pt; font-weight: bold;"><br>수아의 플랜 A</span></span></div>
 
:
"뭐어?!"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아, 도련님.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요.}}
 
:
모두가 같은 반응이었다. 언제부턴가 차고 있던 아린이 손목에 있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애석하게도 정말로 시계의 분침은 1을 가리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모두가 자신의 손목시계로 달려들자 아린이는 패닉에 빠졌고, 미미르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토했다. 수아는… 우는 건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푹 떨군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지만 병원에 누워 살던 때만 해도 새해 맞이는 항상 병실에 딸린 텔레비전과 함께 했다. 그마저도 병약한 몸 탓에 끝까지 맞지 못하고 픽 쓰러지던 전부다. 텔레비전 속에서는 MC를 맡은 연예인이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이 몰린 인파 사이에서 상황을 중계하다가, 자정이 몇 초도 채 남지 않으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 구, 팔, 칠…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마침내 일이 지나가고,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새해 인사를 건넨다. 사실 그렇게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자정을 맞이하는 것이 겨우 새해라는 이유만으로 카운트다운까지 해 가며 그 추운 데에 모여 있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지는 모르겠다. 뭐랄까, 실감이 나지 않는달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자정이 카운트다운을 세는 것만으로 새해 맞이라는 특별한 행사로 바뀐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텔레비전 너머로만 보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현장에 있었어도 변함은 없었을 거다.
 
:
"저기, 수아야? 혹시 미미르랑 아린이가 온 것 때문에 그래? 내가 돌려 보내 볼까? 그런다고 갈 것 같지는 않…"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새해 맞이가 이제는 더 이상 의미 없고 실감나지 않는 일에만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새해를 함께 맞이할 사람 ─ 이라기보단 여우나, 저승사자나, 산신령이나… ─ 도 있고, 병약한 몸을 탓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행사가 이렇게 즐겁고 설레는 일이었던가. 반드시 {{소설/클립보드|작은따옴표|누군가}}가 아니라 수아라서 그럴 뿐인 걸까. 어느 쪽이든 아무렴 좋다.
 
:
"도련님께… 도련님과 함께 새해를 맞지 못했어요! 소녀가 오래도록 준비하고 고대해 왔는데!!"
:두 시곗바늘이 12에서 겹치는 순간, 하루가 끝나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지금으로썬 한 해가 끝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순간. 은은한 방 안의 조명만이 비추던 여우 저택의 저 너머에서 피유웅, 하는 특이하고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작은 섬광이 솟아오른다. 불꽃은 빠르게 하늘 위로 날아가 텅 빈 밤하늘을 가득 채우며 펑 소리와 함께 터졌고, 이어서 올라오는 다른 불꽃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각기 다른 높이, 다른 색, 다른 모양과 소리로 아무것도 없어 허전했던 밤하늘을 마치 도화지 삼아 각자 아름다운 폭의 그림을 그려 놓는 듯했다.
 
:
…?!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억울함은 곧 분노로 바뀌어서, 가만 놔두다간 저택이 불과 얼음과 물바다에 휩쓸릴 것 같아 우선은 수아를 진정시키고 위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새해는 1년에 한 번씩 돌아 오는 거라고, 올해에 망쳤으면 내년이 있는 거라고, 또 다함께 우당탕탕 맞는 새해도 좋지 않냐고 온갖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 놓았다. 수아는 여전히 뾰루퉁한 표정으로 못마땅한 듯했지만 그래도 저택이 무너지는 꼴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그래서, 이유는 단순히 그거야?"
:…라는 게 원래 계획이었단다. 근데 이 계획이 갑작스레 찾아온 미미르와 아린이 때문에 무산되었다고. 미미르가 그 자리에서 스포일러를 해 버리는 바람에 2021년에는 써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동안 꽤 삐진 채로 미미르와 대화 자체를 일절 안 했다. 미미르가 겨우 불꽃놀이 갖고 뭘 그리 쪼잔하냐 말하면 겨우 불꽃놀이가 도련님께 보여 드릴 불꽃놀이였으니까 그렇다고 반박했다. 이것 참…. 그러고 보면 자정이 지난 후 새벽에는 미미르와 아린이가 있어 준 덕에 여러 놀이도 하며 심심하지 않게 새벽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럼 수아는 그 둘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새벽을 어떻게 보낼 생각이었을까? 그 부분은 2021년에 듣도록 할까.
 
:
뭐가? 라고 되묻는 미미르에게 나는 할로윈과 크리스마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냐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 미미르와 아린이가 흥분해서는 뭐라고 막 말을 늘어 놓았었는데, 사실 기억은 잘 안 난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내뱉었을지도 모르겠지만.
:<div style="margin: 600px 0 60px; 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black;">side story #2<span style="font-size: 14pt; font-weight: bold;"><br>기절잠 유화</span></span></div>
 
:
"그보다 얘는 불렀는데 왜 이렇게 안 와?"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흐흐, 히히. 올해는 꼭 12시 종이 땡 치자마자 새해를 맞이할 거예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실패했으니까, 올해는 꼭!}}
 
:
"네? 누, 누가 또 와요?"
:유화는 날 해가 쨍쨍한 낮에 낮잠도 무려 6시간이나 자면서 각오를 다졌다. 평소 자던 시간인 밤 10시가 되었을 때는 혹시나 몰려올 피로에 대비해 일부러 게임도 찾아서 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단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유화는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잠에 들어 버렸다. 그리고 일어난 시간은 새벽 3시 즈음.
 
:
"네 선배."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아, 어, 아…. …올해는 꼭 성공할 줄 알았는데!! 왜 실패했던 거죠? 뭐가 잘못이었던 거야? 나는… 제야의 종을 들을 수 없는 운명인 건가요? 대체 왜!!}}
 
:
"아, 그, 선배는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못 오신다고…."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안 되겠어요. 지금 다시 자기에도 애매하니까, 수아 언니랑 인간을 만나러 가야겠어요.}}
 
:
미미르는 황당해 하는 표정을 짓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진 조금은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수아였다.
:결국 목표는 제야의 종소리였단다. 그 종소리가 그렇게나 중요한가….
 
: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다같이 새해 첫 날을 맞이해 볼까요?"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저, 절대 새벽이 심심하다거나 그래서 찾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
 
:
수아의 눈치를 살폈지만 위험하진 않아 보였다.
:심심했구나.
 
:
그렇게 나와 수아 단둘이 오붓하게(?) 새해를 맞이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고, 그 대신 미미르와 아린이를 비롯해 조금은 시끌벅적한 새해 맞이가 되었다. 미미르가 선배도 부른 것 같았지만 아린이가 말했듯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고 했다. 수아에게 유화에 대해 물어 보니 여우 가문은 신정이 아니라 대개 구정을 챙긴다고 했다. 아니면… 벌써 자고 있다던가. 후자의 확률이 더 클 거란다.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아니야!!!}}
 
:
…이미 자정은 넘었다. 2020년의 첫 해가 뜨기까지도 시간은 많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대로 잠을 잘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어차피 모두 잠을 잘 필요도 없는 몸이거니와 자정이 넘은 지금 잠을 자면 동이 틀 때에 맞추어 일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에도 그랬듯이 새해답게 새해에 걸맞은 이벤트를 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여기 모두 하루종일 각자 집에만 있는 것을 빼면 평소에 할 것도 없으니까. …미미르나 아린이는 산신령이나 저승사자로서 일을 한다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div style="margin: 600px 0 60px; 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black;">side story #3<span style="font-size: 14pt; font-weight: bold;"><br>수아의 제기차기</span></span></div>
 
:
그래서 우리가 첫 번째로 정한 것은 쥐불놀이다. 아무래도 어두운 밤인 지금 밝은 불꽃을 휘두르는 놀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원래 쥐불놀이는 정월대보름에 하는 놀이라지만 뭐 어때. 여우 저택에는 생각 이상으로 온갖 도구나 잡동사니가 많아서 쥐불놀이에 필요한 재료들도 금방 모였다. 그러고 보니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 때도 분장과 복장에 쓰인 모든 재료는 여우 저택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무튼 적당한 크기의 깡통을 끈의 한쪽에 묶고, 다른 한쪽은 잡기 편하도록 매듭을 지었다. 불을 붙이는 데에는 수아가 도움을 주어서,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끈을 잡고 불이 붙은 깡통을 크게 원을 그리며 휘두르는데, 수아가 벌떡 나섰다.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
 
:
"생각보다 훨씬 시시하네요. 이 정도는 돼야 불꽃이라고 할 수 있죠!"
:아무도 없는 저택의 앞마당에서 수아가 제기를 들고 빤히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다.
 
:
…라며, 열심히 깡통을 돌리는 내 옆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더니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꽃이 빠르게 쏘아져 올라갔다. 불꽃은 피유웅, 하는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하늘을 돌다가 어느새 펑 하고 터져 버렸다. 마치 불꽃놀이처럼 불꽃의 잔재는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았다. 자정에 보여 주지 못한 불꽃놀이의 한을 지금 푸는 건가…, 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바라 보고 있던 미미르가 옆에서 "그건 쥐불놀이가 아니라 여우불놀이잖아"라고 거들었다. 가만히 있던 나와 아린이는 웃음이 터졌고, 수아는 뒤늦게 민망한지 다시 대청마루에 가 앉았다.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도련님께서 하지 말라셨지만, 소녀도 이런 것쯤은 잘한다구요!}}
 
:
어느새 나뿐만 아니라 미미르와 아린이, 그리고 수아마저도 손에 하나씩 깡통이 달린 끈을 잡고 열심히 돌리고 있었다. 미미르는 그 깡통을 아린이에게 갖다 대며 장난을 치고, 아린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똑같이 깡통을 내세우며 나름대로 방어하고 있었다. 수아는 방금의 불꽃이 불만족스러운지 여전히 지루하다는 표정이다. …어쩔 없지.
:그리고 수아는 제기를 높이 던져 발로 받을 준, 응? 아니, 그 이유가 아닌….
 
:
쥐불놀이는 미미르의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다들 슬슬 쥐불놀이에 지쳐 갈 때 쯤 내가 내세운 아이디어, 그것은 바로 윷놀이였다. 불꽃이 펑 하고 터질 염려도 없고 지루하게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순전히 운에만 모든 것을 맡기는 게임. 게다가 여기에는 최대 인원인 네 명이 딱 모여 있다. 여우 저택에 윷놀이 세트도 있을까?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염두에 두지 못했나 보다. 그래서 급하게나마 우리끼리 윷놀이 세트를 만들어 냈다. 판은 두꺼운 한지를 정사각형으로 잘라 윷놀이 판처럼 구역을 표시했고, 말은 마당에 굴러다니는 조약돌 네 개를 주워 와서 나름대로 각자 표시를 해 구분했다. 가장 중요한 윷은 저택 너머 활엽수림에서 나뭇가지를 몇 개 잘라와 수아가 만들었다. 손으로 대충 자른 것 같은데 나름 정확하다. 다시금 수아에게 경외심을….
:{{소설/클립보드|큰따옴표|에잇!}}
 
:
팀은 나와 수아, 미미르와 아린이로 나뉘었다. 우리팀이 처음부터 모와 윷을 내며 선전하는 듯했지만, 바로 다음 턴에 백도가 나와 버리고 미미르팀에서 윷을 두 번이나 내는 바람에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한 말이 개와 걸을 선전하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결국 가장 먼저 들어오게 되었다. 원래 윷놀이의 규칙대로라면 두 개의 말 모두가 전부 들어와야 승리로 인정되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규칙을 바꾸어 둘 중 하나라도 먼저 들어오면 승리로 인정하기로 했었다. 덕분에 승리는 나와 수아의 것.
:수아가 제기를 다시 높이 올리기 위해 발을 들어올려 제기를 걷어 찼다. 제기는 성공적으로 하늘로 올라갔지만, 올라간 것은 제기뿐만이 아니었다.
 
:
윷놀이도 끝이 났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쥐불놀이나 윷놀이 외에도 떠오르는 여러 가지 전통놀이들은 있었다. 널뛰기, 연날리기, 그네, 줄다리기, 투호… 등등. 널뛰기나 그네는 장비가 없을 뿐더러 이걸 얘네랑 하게 되면 분명 누구 하나는 숲까지 날아가 버릴 것이다. 줄다리기는 줄이 끊어져 버릴 테고, 투호는 벽이 무너져 버리겠지. 연날리기를 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둡다.
:펄럭.
 
:
그래서 겨우 새로 생각해 낸 것이 제기차기. 무지막지하게 힘을 쓰거나 극한의 피지컬(?)을 요구하지 않고 발의 기술로만 승부를 보는 놀이다. 다행히도 여우 저택에 제기도 몇 개 있었다. 이 정도면 여우 저택에 없는 것은 무엇일지 찾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아, 하나 있다면 윷놀이 세트.
:수아의 치마가 그런 소리를 내며 휘날렸다. 안 그래도 치마가 짧은데, 조금만 올라가도 하반신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수아의, 치마 안쪽은…. 나는 그걸…….
 
:
"수아야, 너는 하지 마."
:…더 이상 썼다간 정말 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날 미미르에게 맞은 공격으로 하루종일을 누워 있어야 했다.
 
:
"네? 도련님, 치마 때문이라면 소녀는 상관 없사온데요?"
:<div style="margin: 600px 0 18px; 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black;"><span style="font-size: 14pt; font-weight: bold;">진짜 完.</span></span></div>{{소설/끝}}
 
"아니, 내가 상관 있어. 자칫하다간 이 팬픽이 못 올라갈지도 몰라…."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사오나, 도련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소녀는 따를 수밖에 없지요. 흑, 흑."
 
치마를 입은 수아는 참여하지 않았다. 수아 본인은 상관 없다고 했는데 내가 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왜, 좀 그렇잖아. 열심히 만 몇 천 자를 써 놓고 검열당해 올리지 못한다면 정말 슬플 것 같다. …아무튼, 나와 미미르와 아린이가 각자 제기를 하나씩 잡았다. 산신령인 미미르와 저승사자인 아린이는 당연히 제기차기가 처음이었다. 물론 평생을 병실에만 누워 있던 나도 처음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셋 다 적어도 제기차기가 어떻게 하는 놀이인지는 알고 있었다는 것(…).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나였다. 제기를 던지고 발로 받, …받. ……받, 아야 하는데… 이게 은근히 쉽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어렵다. TV에선 한번에 몇 십 개씩 하던데, 대체 무슨 사람들이야? 최고 기록은 두 개였고, 미미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 오오오!"
 
그러나 아린이는 달랐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반전이었고, 나와 미미르는 제기까지 떨어뜨려 가며 아린이의 제기차기를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지켜 보기만 했다. 수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청마루에 앉아 정지한 채였다. 아린이의 표정은 굉장히 고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충분히 그럴 만했다. 제기차기가 처음인 게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본인도 놀란 듯한 반응이었지. 아린이는 제기를 손에서 놓고 몇 분 동안이나 땅에 떨어뜨리질 않았다. 손에서 놓은 제기를 발로 차 올리고, 떨어질 때면 다시 차 올리고. 감탄에 절어 개수를 세진 못했지만 적어도 세 자릿수는 넘지 않았을까, 우리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까지도 아린이는 제기를 땅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없었다. 마무리랍시고 제기를 높이 차 올렸다가 손으로 냉큼잡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린이의 얼굴에는 흡사 "봤냐 봤냐"하는 것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 있었다. 나와 수아와 미미르의 손과 입에서 박수와 감탄이 터져 나온 것은 그로부터 약 2초 뒤였다.
 
"의외의 재능을 찾았네?"
 
"헤헤……."
 
웬일로 미미르가 칭찬을 다하는지도 그 순간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제기차기를 과연 어디서 써 먹을 수 있을지가 문제겠지만. 저승도 현실 세계 직장처럼 친목 도모 체육대회 같은 게 있을까. 있다면 적어도 제기차기는 아린이가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나중에 아린이한테 제기차기나 배워 둘까. …그러는 나는 써 먹을 데가 있나?
 
아린이의 제기차기 쇼도 끝이 났다. 미미르가 옆에서 조금 배워 보려는 듯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제기를 땅바닥에 내팽겨치며 포기했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해가 뜰 때까지 심심함과 지루함을 날려 버리려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민속놀이는 고사하고, 수아의 분신들이 시기도 맞지 않게 강강술래를 추는 것을 구경하거나 또 어디서 나타난 축구공으로 공을 주고 받(다가 수아와 미미르의 슛에 죽을 뻔하)기도 했다. 저택에만 있다가는 도저히 시간을 때울 게 없어 숲으로 나가보니 뒤늦게 오고 있던 선배도 만났었다.
 
"여~! 모두 안녕! 내가 좀 늦었지?"
 
힘차고 신나게 찾아온 선배에게는 죄송했지만 선배는 이미 할 게 없어서 숲으로 나왔다는 말을 듣고 아쉬워 하면서도 시간을 확인하며 그러려니 했다. 역시나 숲에서도, 아니 숲에서는 저택에서보다 더 할 없어서 다같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저택을 돌아가는 길에는 또 다른 불청객… 아니, 초대하지 않은 손님으로 유화를 만났다.
 
"뭐야, 다들 나만 빼놓고 즐거웠던 건가요?"
 
얘기를 들어 보니 유화 본인도 자정에 맞추어 새해를 맞이하려 했지만, 11시 즈음에 잠들어 버려서 실패했다는 모양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자다가 새벽에 깼고, 다시 잠에 들긴 애매한 시간이라 이곳으로 왔단다. 우리가 어떻게 깨어 있을 줄 알고 왔냐니까 그 정도는 기본이라는데. 자매의 텔레파시 어쩌고 하다가 스스로 민망했는지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정작 수아는 내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멋쩍게 웃고 있었지만.
 
나갔을 때보다 두 명이 더 많아진, 나를 포함해 총 여섯 명이 다함께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어느덧 4시. 숲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선배와 유화, 겨우 두 명이 더 온 것뿐인데 4명뿐이던 저택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덕분에 일출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2020년 1월 1일의 일출 시간은 7시 45분이라고 한다. 시간은 어느새 7시로 다가왔고, 미미르는 도중에 곯아떨어진 아린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선배는 아침 출근 때문에 먼저 가셨고, ─ 신정에마저 근무를 시키다니… 난 나중에라도 저승에서는 일하지 말아야겠다. ─ 유화도 빗으로 꼬리를 빗어주다 보니 어느샌가 잠들어 있어서 수아가 방에 눕혀 주고 왔다. 다시 몇 시간 전처럼 수아와 나만 남았다. 잠시였지만 시끌벅적하던 저택이 순간에 둘만 남아 조용해지니 조금은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저, 도련님. 소녀, 사실 새해 일출이 되면 도련님과 꼭 함께 해를 보고 싶었던 장소가 있어요. 오늘 함께 2020년의 순간을 맞이하자 부탁 드린 것도 다 지금을 위해서랍니다. 같이… 가 주시겠어요?"
 
수아의 말이 애절하게 들려왔다. 나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그러겠다고 답했다.
 
─ 수아는 앞장 서서 굳이 내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대문을 나서고, 활엽수림이 아닌 대나무 숲을 걷고, 도착한 곳은, …그 고목나무. 수아는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곳을 왔을 땐 이 길을 혼자 걸었다. 두 번째 걸었을 땐 이 자리에서 한 번 죽었고, 세 번째 걸었을 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였지. 이 길은 몇 번을 걸어도 매번 받는 느낌이 다른 것 같다. 처음엔 절망, 그 다음은 두려움, 마지막은 어리둥절함….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지금 걸으며 느낀 기분은 지금까지 중에선 가장 괜찮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좋은 것 같다. 맞잡은 수아의 손은 뺨을 때리는 겨울의 칼바람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했다. 고목나무까지 가는 내내 앞장 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단순히 부끄러워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수아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 마음이 편해진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것이 내 몸의 대부분이 수아의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냐 묻는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사실 유무에 관계 없이 나는 수아가 좋다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고목나무 위에 올라 앉았다. 여기는… 내가 화수분의 주마등에 갇혀 있었을 때, 화수분이 만든 가짜 수아와 함께 왔었던 곳이다.
 
"도련님,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다시 듣는 수아의 목소리가 더 애절해졌다. 내 옷깃을 꽉 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옷깃을 잡은 수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던 것 같다.
 
"…수아야, 걱정하지마. 이제 우린, 헤어지지 않아."
 
"도련님, 그런 게 아니오라, 흡, 그저 기뻐서… 도련님과, 으흑, 이렇게 다정하게… 함께 마주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수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닭똥 같은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내 옷으로 떨어져 스며든다. 수아는 불안했던 것이다. 줄 정은 줄 대로 다 줘 버리고 죽어서 떠나 버린, 그러면서도 간을 먹으라고 했던 나, 그래서 겨우 고생하며 살려 놓으니 기억을 잃고, 되찾는 과정에서 다시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고, 주마등에 스스로 몸을 던지고, 갇혀 버리고. 그런 나에게 불안을 느끼고 있던 거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이제 해소됐다. 몇 번의 시련을 겪었지만 모두 함께 함으로써 이겨 낸 믿음, 비로소 찾아온 평화와 되찾은 일상, 긴장이 풀리면서 북받쳐 오는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을 수아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아마 수아라면 내가 기억할 것보다도 훨씬 오래 간직할 것이다. 간직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지금 여기서,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터져 올랐다. 수아의 눈물로 팔이 젖어 간다. 평소의 수아라면 절대, 결코 용납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수아는 그마저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감정에 젖어 있다. 내 팔이 젖어 갈수록, 수아의 감정도 젖어 간다. 나는 잡혀 있는 팔이 아닌 다른 팔로 내 어깨에 기댄 수아의 머리를 감싸 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 않았다. 수아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인가. 웬일인지 나도 울음이 터질 뻔했지만 겨우 꾹 참아냈다. 수아와 나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그렇게 몇 분이나 서로의 감정을 나누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아의 통곡 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히 들리지 않도록 멈추었다. 수아가 천천히 어깨에서부터 고개를 떼었다.
 
"…아, 아! 도련님! 지금 소녀, 매우 부끄러운 몰골이온데…! 하지만 소녀 때문에 도련님의 팔이…!!"
 
흘긋 보이는 퉁퉁 부은 눈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머리를 정돈하고 젖은 내 팔을 어르기를 왔다갔다 했다. 오랜만에 보는 수아의 진짜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버렸다. 결국 수아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로 얼마 동안이나 머리칼과 얼굴을 정리했고, 그렇게 다시 내게 얼굴을 보인 수아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끔하고 단정한 평소의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눈물로 젖었던 팔도 어느새 말라 있다. 수아가 말렸다는 건 알겠지만… 대체 언제 말린 거야? 그 와중에서도 젖은 팔을 말리다니, 역시 여우는 여우다. 무서운 존재야, 음.
 
"도련님, 곧 해가… 뜨겠네요."
 
"응. 2020년의 첫 해네."
 
조금씩 밝아지고 그림자가 지기 시작하면서 해가 뜰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우리는 몇 시간 전 어두운 저택의 대청마루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있다. 고마워, 미안해, 힘들었지, 즐거웠고 즐거워, 행복했고 행복해, 좋아해, 사랑해.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마주보는 서로에 대해 서로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떤 말이 오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깨어났을 때의 나를 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너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어떤 기분이었을까. 애써 숨기고 환한 웃음과 장난끼 많은 태도를 일관하며 너는 어땠을까.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 기억하지 못해 미안해. 죽어서, 미안해. 어렸던 네게 간을 먹으라고 해서…, 미안해. 생각해 보면 몹쓸 나의 잘못이야. 내가 그 날 죽기로 마음 먹고 이 대나무 숲에 오지만 않았다면,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너에게 간을 주지 않았다면, 정을 주지 않았다면…. 너는 나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모른 채로 이 저택에서 굳건하게 살아 갔을 텐데. 내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나를 그리워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불안에 마음을 졸이며 살 필요도 없었을 거야. 나를 위해 애써 주마등에 몸을 던지거나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겠지. 너의 인생은, 내가 망쳐 놓은 거나 다름 없는 거네. 미안해, 수아야. 정말… 미안해.
 
"…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
 
"우후훗, 도련님의 생각은 다~ 파악하고 있답니다~ 우후후훗."
 
"도련님, 소녀는… 이렇게 생각해요. 소녀가 처음 여우 가문에서 버려졌을 때, 당시에만 해도 불이나 얼음은커녕 여우 구슬도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소녀는 눈이 소복이 쌓인 저택의 앞에서 쓰러진 채로 추위를 견뎠어야 했죠. 힘든 나날이었어요. 저택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애초에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요. 그래서 배가 잔뜩 고픈 채로 얼마 동안이나 이 대나무 숲만을 배회하다가 도련님을 만난 거예요. …다짜고짜 도련님께 간을 달라 했었던 어린 소녀는 아직도 죄송하다고 느끼고 있사옵니다만…. 아무튼, 도련님께서는 제게 이름도 붙여 주시고, 아는 척을 하며 앞장 섰던 제게 인간 세상의 문화도 알려 주셨죠. 비록 어린 시절이었지만 소녀는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요. 즐거웠고, 시간이 그대로 멈췄으면 했어요. 도련님은 제게 삶의 선물을 주신 존재랍니다. 도련님께서 죽으셨던 순간에도, 소녀에게 간을 먹으라 하시던 때에도 소녀는 도련님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그 증거로 소녀의 머리카락으로 도련님을 살려 냈고, 보살펴 드린 거니까요. 도련님께서 저승과 한판 전쟁을 벌이시던 때에도 소녀는 도련님이 우선이었답니다. 그 증거로는 도련님을 대신해 주마등에 몸을 던진 것이죠. 소녀는 언제나 소녀보다 도련님이 우선이에요. 소녀에게 도련님보다 소중한 것은 없사옵니다. 왜냐 물으신다면, 그야… 도련님을 사랑하니까. …좋아하니까요. 이 마음은, 이 사랑만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더라도 변치 않을 거예요. 소녀가 가장 잘하는 건, 기다리는 일이니까."
 
"…수아야."
 
어? 수아의 이름을 한 번 불렀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도 못한 눈물이 한꺼번에 북받쳐 쏟아지는 바람에 급하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끊임 없이 흘러 나오는 눈물은 가린 손 사이로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른 잎에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최대한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큽, 큭, 하는 소리마저 모두 감출 수는 없었다. 앞에서는 수아가 한 순간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고개 숙인 나를 제 품에 감싸 안은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다시 몇 분이 흘렀다. 갑자기 말썽이 되어 버린 눈물샘과 감정은 그제야 진정됐다. 내가 숙였던 고개를 들자 수아도 자연스레 감싸 안은 팔을 거두었다. 눈물샘과 함께 터진 콧물샘 탓에 몇 번 훌쩍이는데, 앞에서 수아가 손수건을 건넸다.
 
"도련님, 이제 좀 괜찮으세요?"
 
수아는 안심한 듯이 옅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받아 들고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눈을 닦고 부은 눈가를 뭉갰다.
 
"…응, 이제 괜찮아."
 
어느새 수아의 모습과 마른 나뭇잎들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밝아졌다. 이제 정말 몇 분 후면 해가 뜬다. 눈이 부은 내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워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얼른 어떻게든 붓기를 가라 앉히기 위해 수아가 준 손수건으로 눈을 열심히 마사지했다. 그러다가 언듯 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각자의 자세 그대로 1초 동안 정지했다가 웃음 터뜨렸다. 마주보는 기쁨, 평화와 일상의 달콤함, 너의 사랑스러움. 그 모든 것들이 분위기에 맞지 않게 터져 버린 웃음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앉은 방향에서 눈을 찌르는 섬광이 비춰 온다. 2020년 첫 해가 다가왔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하지만 언제나보다 확실하게.
 
"도련님, 사랑해요."<br>
"나도 사랑해, 수아야."
 
<div style="margin: 0 -5px;">[[파일:당기여 모작.png|1000px|link=]]</div>
<div style="text-align: center; position: relative; bottom: -12px; color: black; font-size: 12pt;"><div style="font-weight: bold;"><span style="color: transparent;">이제 </span>도련님을<span style="color: transparent;"> 두고 떠나지</span> 않을게요.</div></div>
<div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12pt;"><strong>이제 <span style="color: transparent;">도련님을</span> 두고 떠나지 <span style="color: transparent;">않을게요.</span></strong></span></div>
<div style="text-align: center; position: relative; top: -12px; color: black; font-size: 12pt;"><div style="font-weight: bold;"><span style="color: transparent;">이제 </span>너를<span style="color: transparent;"> 두두고 떠나지 </span>않을게.</div></div>
 
 
<div style="text-align: center;">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그렇게 약속했었다.
 
 
 
 
<span style="font-weight: bold;">당신과 새해를 맞이하는 여우 完</span>
{{소설/끝}}

2024년 3월 29일 (금) 22:57 판

당신과 새해를 맞이하는 여우 인용
어차피 제가 쓴 글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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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새해를 맞이하는 여우(The Fox Awaits New Year With You)

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이고 싶기도 했고 혼자여야만 했기에 혼자였다. 일상이라곤 병실 침대에 누워 환자복을 입고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병실의 풍경과 시야보다 높이 있는 탓에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창문, 그리고 유일하게 바깥 세상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구식 텔레비전을 번갈아 보는 게 전부였다. 그것들만이 나의 상황을 만드는 요인들이었다. 그 상황을 함께 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립다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인연을 만들어 무엇하나, 아마 그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대나무 숲으로 갔던 거겠지.
숙식이 제공되는 편안하고 아늑한 고급 저택에 머물더라도 기억을 잃은 채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감금된 상태라면 누구나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반면 나처럼 일평생을 앓으며 병실에 누워 있더라도 가족이나 연인, 친구처럼 소중한 사람들이 곁을 함께 해 주었다면 그다지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황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상황을 구성하고 있는 주변 환경이 아니라 그 상황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의 새해도 그렇다.
당신과 새해를 맞이하는 여우
The Fox Awaits New Year With Me

글 Sinokio / 그림 백팔사미
“도련님, 벌써 새해가 다가오네요? 곧 2020년이라구요~” 듣고 보니 그렇다. 지금은 2019년을 장식하는 12월 31일의 어느 깊은 밤. 정확하진 않지만 시각은 대략 오후 11시 몇 분 쯤일 것이다. 사실 새해가 다가오리란 것은 몇 주 전부터 의식하고 있었다. 미미르가 달력을 걸어 준 뒤로 잠에서 깨서 수아와 노는 일상만이 전부였던 내게 달력을 읽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은 없었으니까. 2020년이라, 의식은 하고 있지만 막상 다가온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무엇이든 그렇다. 새해가 아니더라도 다른 명절, 특히 추석이 더욱 그렇다. 심지어는 크리스마스까지도. 크리스마스는 별 것 없었다. 수아를 비롯해 모두가 한 데 모여 거대한 트리를 장식하고, 눈싸움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이 올 날씨는 아니었지만 수아가 “모처럼인데 분위기라도 내 봐야죠”라며 여우 저택 담벼락 안으로만 흰 눈을 소복이 쌓아 놓았던 게 기억이 난다. 아직은 그로부터 6일밖에 지나지 않은, 몹시도 추운 한겨울이지만 그때의 눈은 이미 다 녹고 없다. 다만 저택 마당 이곳저곳에 눈이 녹고 얼기를 반복하며 생긴 빙판이 눈에 들어올 정도이다. 생각 없이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겠네. ……물론 나만.
적당히 두꺼운 기모로 된 티를 입고 수아와 함께 대청마루에 앉아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영하를 웃돌 만큼 엄청난 강추위가 찾아 왔지만, 적어도 여우 저택에서는 수아 덕분에 그렇게 추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름에도 그렇다. 남들은 부채나 선풍기를 들고 장착한 채 덥다고 헥헥거리며 바람을 쐬기 바쁘다. 하지만 나는 여름에 긴 팔을 입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지낼 수 있다. 이게 다 수아 덕분이지. 새삼스레 수아에게 감사를 넘어 경외심마저 들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수아도 복장이 크게 다를 것 없다. 오른쪽 옷깃을 어깨 아래로 흘려내린 편안한 분홍빛의 개량 한복. 더없이 어두컴컴한 밤하늘 아래 저택의 조명만이 은은하게 비추고, 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은 염두에도 둘 필요 없이, 애시당초 계절이라는 개념을 망각해 버린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그 무엇보다도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게, 벌써 또 1년이 지나는구나.”
작년 새해와 크리스마스는 이렇다 할 것 없이 지나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다가왔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달력도 없었던 때고, 아무도 말해 주거나 챙기려 하지 않았으니까. 나에게는 그저 여름과 겨울의 반복이었다. 그마저도 수아의 온도 조절 덕분에 별 감흥 없이 지나갔다. 이제는 여유를 좀 부려도 되겠지. 아마 수아도 그렇게 생각했을 터다. 올해부터는 암묵적으로 다함께 기념일이나 명절을 챙기는 일이 더러 많아졌다. 그 시작은 나의 생일 ─ 이라고 정했던 그 날 ─ 을 지나, 9월의 추석. 수아와 유화 두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는 서로 만날 가족도 없고 더욱이 제사 지낼 조상님도 없었기 때문에 추석이라고 별 다를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낯선 기분도 들었다. 뭘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6명을 앞에 두고 임금님 수라상에나 나올 법한 진수성찬들이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수아가 솜씨 발휘 좀 했다고 했었지. ……요리는 연습할 필요도 없으면서 왜 연습해 뒀던 거야? 설마 그 날을 위해?
그리고 두 번째는 10월 31일, 할로윈. 고풍스러운 한옥 저택에서 한복을 입은 여우가 왜 서양의 명절을 챙기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할로윈도 크게 한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추석보다는 나름 할로윈 느낌이 났던 것 같다. 10월 31일 아침부터 생일 때처럼 서프라이즈랍시고 다들 집 구석구석에 미리 숨어 있다가 놀래키려 튀어나오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이긴 했다. 놀란 척도 그럴싸 해야 나오는 거지……. 아, 한 사람만 빼고. 유일하게 선배에게만큼은 소스라치도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프랑켄슈타인 분장이었거든. 선배에겐 죄송하지만 생각보다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아마 누구라도 놀랐으리라 생각했다. 선배의 분장을 맡았었다던 미미르를 제외한 나머지도 그 분장을 처음 보고 놀랐다고 했으니까. 아린이는 기절까지 했다나…….
세 번째는 위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 불과 6일 전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몹시 추웠지만, 적어도 눈이 내릴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우 저택에는 하얀 이불을 곱게 깔아놓은 듯 눈이 쌓여 있었다. 수아가 내리게 한 것이었지. 그래도 나름 아름다운 장관이었는데 곧 미미르와 아린이의 눈싸움과 눈사람 만들기로 망가지고 말았다. 구경만 하던 수아와 나도 아린이의 고급 에임(?)에 눈덩이를 맞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세했다. 썩 즐거웠던 기억이다. 아린이가 대나무 숲에 자랑스럽게 준비한 거대한 트리를 각자의 소중한 물건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의외로 미미르의 아이디어였다. 아린이는 사슴벌레 칩, 선배는 탈, 미미르는 석류알, 수아와 나는 여우 방울. 그리고 유화는… 자신의 머리핀. 어떻게 보면 기괴한 조합이었지만 그렇게 장식하고 반짝이는 트리를 보고 있자니 뭉클한 기분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6일 전 일이라니.
“도련님? 무슨 사색에 그렇게 빠져 있으세요? 올해도 얼마 안 남았는데, 지금은 좀 더 소녀에게 집중해 주세요~ 네?”
…와 같은 생각들을 하며 저택 정원을 포함해 저 너머를 그저 멍 때리며 바라만 보고 있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수아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수아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어깨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고개를 들어 나를 지긋이 바라 보고 있다. 어쩐지 그 눈빛이 아련해 보인다. 수아의 맑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 보인다. 비친 내 모습도 아련해 보인다. 그래, 서로 말을 하고 있진 않지만 알고 있다. 이렇게 태평하고 느긋하게 앉아서 서로를 마주 보고 풍채를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된 일을 겪어 왔는가. 그 때의 일들을 열거하자면 차마 입에도 담아내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일들을 겪어 왔기에 지금의 우리로써 함께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따금 이렇게 추억에 잠기곤 한다. 끔찍했지만 필연적이었던 우리들의 운명을 회상하며.
“…미안해, 수아야. 잠깐 다른 생각하느라 멍 때리고 있었네.”
수아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 내린다. 마치 고급 실크, 아니 그로도 형용이 되지 않을 만큼의 부드러움 탓에 손이 무언가를 만지고 있다는 감촉조차 희미해질 것 같다. 눈앞에 수아가 있는 것. 눈앞에 네가 있는 것. 너를 두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고, 닿을 수 있다는 것. ‘새벽 감성’이라고 하던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 어쩌면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걸지도 모르는 ─ 지금의 이 감정은 나를 더 아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 왜일까. 왜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질문은 상황에 대한 회피나 부정인가. 눈에 고이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수아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홱 돌렸다.
“도련님…? 왜 그러세요?”
티나지 않게 손과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대충 닦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수아가 그 아련한 눈빛으로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급하게 숨긴 눈물을 눈치챘는지 아닌지는 나로써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아, 도련님.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이제는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지만 병원에 누워 살던 때만 해도 새해 맞이는 항상 병실에 딸린 텔레비전과 함께 했다. 그마저도 병약한 몸 탓에 끝까지 맞지 못하고 픽 쓰러지던 게 전부다. 텔레비전 속에서는 MC를 맡은 연예인이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이 몰린 인파 사이에서 상황을 중계하다가, 자정이 몇 초도 채 남지 않으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십, 구, 팔, 칠…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마침내 일이 지나가고,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새해 인사를 건넨다. 사실 그렇게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자정을 맞이하는 것이 겨우 새해라는 이유만으로 카운트다운까지 해 가며 그 추운 데에 모여 있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지는 모르겠다. 뭐랄까, 실감이 나지 않는달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자정이 카운트다운을 세는 것만으로 새해 맞이라는 특별한 행사로 바뀐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텔레비전 너머로만 보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현장에 있었어도 변함은 없었을 거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새해 맞이가 이제는 더 이상 의미 없고 실감나지 않는 일에만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새해를 함께 맞이할 사람 ─ 이라기보단 여우나, 저승사자나, 산신령이나… ─ 도 있고, 병약한 몸을 탓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행사가 이렇게 즐겁고 설레는 일이었던가. 반드시 ‘누군가’가 아니라 수아라서 그럴 뿐인 걸까. 어느 쪽이든 아무렴 좋다.
“도령! 여우야!”
“세, 세은아!”
…? 익숙하지만 수상한 목소리가 저택 정문에서 희미하게 들려온다. 미미르와 아린이의 목소리다.
“도령!! 여~우~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그 목소리는 점차 커져 갔다. 귀에 내리 박힐 정도가 되니 미미르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들려 왔다. 헐레벌떡 뛰어 오고 있는 듯 말소리 중간중간마다 거친 숨소리가 섞여 있다. 산신령도 숨이 차나…? 미미르와 아린이는 처음 목소리가 들린 순간으로부터 생각보다 빠르게 눈에 보이는 곳까지 도착해서 잔뜩 분위기를 잡은 수아와 내가 어색해질 틈도 없었다. 오히려 저택 정문 벌컥도 아니고 쾅! 하고 열릴 땐 둘 다 움찔하며 놀라기도 했다.
“아, 아린아? 미미르?!”
“야! 할로윈부터 크리스마스까지 그렇-게 굴려 먹어놓고, 새해는 둘이서만 오붓-하게 시간 보내려고?”
미미르가 수아에게 따지듯이 말하고 있다. 수아는 여전히 얼 빠진 듯한 표정이고, 아린이는 미미르의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뭐, 뭐야.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어떻게 알긴! 곧 온 숲에 불꽃을 팡팡 쏴 댈 것처럼 힘을 모으는데 강 깊숙한 곳까지 안 느껴지겠어?”
“수아앗! 미미르! 그걸 미리 말해 버리면 어떡! …해요.”
수아가 한 번 크게 움찔하더니,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귀도 축 처져 있다. 새해가 되면 서프라이즈로 불꽃놀이라도 해 줄 심산이었나? 그런데 미미르 탓에 이른바 ‘스포일러’를 당해 버려서 상심한 듯하다.
“아아! 말하는 사이에 새해가 지나 버렸어요!!”
“뭐어?!”
모두가 같은 반응이었다. 언제부턴가 차고 있던 아린이 손목에 있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애석하게도 정말로 시계의 분침은 1을 가리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모두가 자신의 손목시계로 달려들자 아린이는 패닉에 빠졌고, 미미르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토했다. 수아는… 우는 건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푹 떨군 채 가만히 있었다.
“저기, 수아야? 혹시 미미르랑 아린이가 온 것 때문에 그래? 내가 돌려 보내 볼까? 그런다고 갈 것 같지는 않…”
“도련님께… 도련님과 함께 새해를 맞지 못했어요! 소녀가 오래도록 준비하고 고대해 왔는데!!”
…?!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억울함은 곧 분노로 바뀌어서, 가만 놔두다간 저택이 불과 얼음과 물바다에 휩쓸릴 것 같아 우선은 수아를 진정시키고 위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새해는 1년에 한 번씩 돌아 오는 거라고, 올해에 망쳤으면 내년이 있는 거라고, 또 다함께 우당탕탕 맞는 새해도 좋지 않냐고 온갖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 놓았다. 수아는 여전히 뾰루퉁한 표정으로 못마땅한 듯했지만 그래도 저택이 무너지는 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유는 단순히 그거야?”
뭐가? 라고 되묻는 미미르에게 나는 할로윈과 크리스마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냐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 미미르와 아린이가 흥분해서는 뭐라고 막 말을 늘어 놓았었는데, 사실 기억은 잘 안 난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내뱉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얘는 불렀는데 왜 이렇게 안 와?”
“네? 누, 누가 또 와요?”
“네 선배.”
“아, 그, 선배는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못 오신다고….”
미미르는 황당해 하는 표정을 짓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진 조금은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수아였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다같이 새해 첫 날을 맞이해 볼까요?”
수아의 눈치를 살폈지만 위험하진 않아 보였다.
그렇게 나와 수아 단둘이 오붓하게(?) 새해를 맞이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고, 그 대신 미미르와 아린이를 비롯해 조금은 시끌벅적한 새해 맞이가 되었다. 미미르가 선배도 부른 것 같았지만 아린이가 말했듯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고 했다. 수아에게 유화에 대해 물어 보니 여우 가문은 신정이 아니라 대개 구정을 챙긴다고 했다. 아니면… 벌써 자고 있다던가. 후자의 확률이 더 클 거란다.
…이미 자정은 넘었다. 2020년의 첫 해가 뜨기까지도 시간은 많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대로 잠을 잘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어차피 모두 잠을 잘 필요도 없는 몸이거니와 자정이 넘은 지금 잠을 자면 동이 틀 때에 맞추어 일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에도 그랬듯이 새해답게 새해에 걸맞은 이벤트를 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여기 모두 하루종일 각자 집에만 있는 것을 빼면 평소에 할 것도 없으니까. …미미르나 아린이는 산신령이나 저승사자로서 일을 한다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첫 번째로 정한 것은 쥐불놀이다. 아무래도 어두운 밤인 지금 밝은 불꽃을 휘두르는 놀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원래 쥐불놀이는 정월대보름에 하는 놀이라지만 뭐 어때. 여우 저택에는 생각 이상으로 온갖 도구나 잡동사니가 많아서 쥐불놀이에 필요한 재료들도 금방 모였다. 그러고 보니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 때도 분장과 복장에 쓰인 모든 재료는 여우 저택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무튼 적당한 크기의 깡통을 끈의 한쪽에 묶고, 다른 한쪽은 잡기 편하도록 매듭을 지었다. 불을 붙이는 데에는 수아가 도움을 주어서,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끈을 잡고 불이 붙은 깡통을 크게 원을 그리며 휘두르는데, 수아가 벌떡 나섰다.
“생각보다 훨씬 시시하네요. 이 정도는 돼야 불꽃이라고 할 수 있죠!”
…라며, 열심히 깡통을 돌리는 내 옆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더니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꽃이 빠르게 쏘아져 올라갔다. 불꽃은 피유웅, 하는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하늘을 돌다가 어느새 펑 하고 터져 버렸다. 마치 불꽃놀이처럼 불꽃의 잔재는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았다. 자정에 보여 주지 못한 불꽃놀이의 한을 지금 푸는 건가…, 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바라 보고 있던 미미르가 옆에서 “그건 쥐불놀이가 아니라 여우불놀이잖아”라고 거들었다. 가만히 있던 나와 아린이는 웃음이 터졌고, 수아는 뒤늦게 민망한지 다시 대청마루에 가 앉았다.
어느새 나뿐만 아니라 미미르와 아린이, 그리고 수아마저도 손에 하나씩 깡통이 달린 끈을 잡고 열심히 돌리고 있었다. 미미르는 그 깡통을 아린이에게 갖다 대며 장난을 치고, 아린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똑같이 깡통을 내세우며 나름대로 방어하고 있었다. 수아는 방금의 불꽃이 불만족스러운지 여전히 지루하다는 표정이다. …어쩔 수 없지.
쥐불놀이는 미미르의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다들 슬슬 쥐불놀이에 지쳐 갈 때 쯤 내가 내세운 아이디어, 그것은 바로 윷놀이였다. 불꽃이 펑 하고 터질 염려도 없고 지루하게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순전히 운에만 모든 것을 맡기는 게임. 게다가 여기에는 최대 인원인 네 명이 딱 모여 있다. 여우 저택에 윷놀이 세트도 있을까?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염두에 두지 못했나 보다. 그래서 급하게나마 우리끼리 윷놀이 세트를 만들어 냈다. 판은 두꺼운 한지를 정사각형으로 잘라 윷놀이 판처럼 구역을 표시했고, 말은 마당에 굴러다니는 조약돌 네 개를 주워 와서 나름대로 각자 표시를 해 구분했다. 가장 중요한 윷은 저택 너머 활엽수림에서 나뭇가지를 몇 개 잘라와 수아가 만들었다. 손으로 대충 자른 것 같은데 나름 정확하다. 다시금 수아에게 경외심을….
팀은 나와 수아, 미미르와 아린이로 나뉘었다. 우리팀이 처음부터 모와 윷을 내며 선전하는 듯했지만, 바로 다음 턴에 백도가 나와 버리고 미미르팀에서 윷을 두 번이나 내는 바람에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한 말이 개와 걸을 선전하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결국 가장 먼저 들어오게 되었다. 원래 윷놀이의 규칙대로라면 두 개의 말 모두가 전부 들어와야 승리로 인정되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규칙을 바꾸어 둘 중 하나라도 먼저 들어오면 승리로 인정하기로 했었다. 덕분에 승리는 나와 수아의 것.
윷놀이도 끝이 났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쥐불놀이나 윷놀이 외에도 떠오르는 여러 가지 전통놀이들은 있었다. 널뛰기, 연날리기, 그네, 줄다리기, 투호… 등등. 널뛰기나 그네는 장비가 없을 뿐더러 이걸 얘네랑 하게 되면 분명 누구 하나는 숲까지 날아가 버릴 것이다. 줄다리기는 줄이 끊어져 버릴 테고, 투호는 벽이 무너져 버리겠지. 연날리기를 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둡다.
그래서 겨우 새로 생각해 낸 것이 제기차기. 무지막지하게 힘을 쓰거나 극한의 피지컬(?)을 요구하지 않고 발의 기술로만 승부를 보는 놀이다. 다행히도 여우 저택에 제기도 몇 개 있었다. 이 정도면 여우 저택에 없는 것은 무엇일지 찾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아, 하나 있다면 윷놀이 세트.
“수아야, 너는 하지 마.”
“네? 도련님, 치마 때문이라면 소녀는 상관 없사온데요?”
“아니, 내가 상관 있어. 자칫하다간 이 팬픽이 못 올라갈지도 몰라….”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사오나, 도련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소녀는 따를 수밖에 없지요. 흑, 흑.”
치마를 입은 수아는 참여하지 않았다. 수아 본인은 상관 없다고 했는데 내가 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왜, 좀 그렇잖아. 열심히 만 몇 천 자를 써 놓고 검열당해 올리지 못한다면 정말 슬플 것 같다. …아무튼, 나와 미미르와 아린이가 각자 제기를 하나씩 잡았다. 산신령인 미미르와 저승사자인 아린이는 당연히 제기차기가 처음이었다. 물론 평생을 병실에만 누워 있던 나도 처음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셋 다 적어도 제기차기가 어떻게 하는 놀이인지는 알고 있었다는 것(…).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나였다. 제기를 던지고 발로 받, …받. ……받, 아야 하는데… 이게 은근히 쉽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어렵다. TV에선 한번에 몇 십 개씩 하던데, 대체 무슨 사람들이야? 최고 기록은 두 개였고, 미미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 오오오!”
그러나 아린이는 달랐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반전이었고, 나와 미미르는 제기까지 떨어뜨려 가며 아린이의 제기차기를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지켜 보기만 했다. 수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청마루에 앉아 정지한 채였다. 아린이의 표정은 굉장히 고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충분히 그럴 만했다. 제기차기가 처음인 게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본인도 놀란 듯한 반응이었지. 아린이는 제기를 손에서 놓고 몇 분 동안이나 땅에 떨어뜨리질 않았다. 손에서 놓은 제기를 발로 차 올리고, 떨어질 때면 다시 차 올리고. 감탄에 절어 개수를 세진 못했지만 적어도 세 자릿수는 넘지 않았을까, 우리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까지도 아린이는 제기를 땅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없었다. 마무리랍시고 제기를 높이 차 올렸다가 손으로 냉큼잡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린이의 얼굴에는 흡사 “봤냐 봤냐”하는 것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 있었다. 나와 수아와 미미르의 손과 입에서 박수와 감탄이 터져 나온 것은 그로부터 약 2초 뒤였다.
“의외의 재능을 찾았네?”
“헤헤…….”
웬일로 미미르가 칭찬을 다하는지도 그 순간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제기차기를 과연 어디서 써 먹을 수 있을지가 문제겠지만. 저승도 현실 세계 직장처럼 친목 도모 체육대회 같은 게 있을까. 있다면 적어도 제기차기는 아린이가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나중에 아린이한테 제기차기나 배워 둘까. …그러는 나는 써 먹을 데가 있나?
아린이의 제기차기 쇼도 끝이 났다. 미미르가 옆에서 조금 배워 보려는 듯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제기를 땅바닥에 내팽겨치며 포기했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해가 뜰 때까지 심심함과 지루함을 날려 버리려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민속놀이는 고사하고, 수아의 분신들이 시기도 맞지 않게 강강술래를 추는 것을 구경하거나 또 어디서 나타난 축구공으로 공을 주고 받(다가 수아와 미미르의 슛에 죽을 뻔하)기도 했다. 저택에만 있다가는 도저히 시간을 때울 게 없어 숲으로 나가보니 뒤늦게 오고 있던 선배도 만났었다.
“여~! 모두 안녕! 내가 좀 늦었지?”힘차고 신나게 찾아온 선배에게는 죄송했지만 선배는 이미 할 게 없어서 숲으로 나왔다는 말을 듣고 아쉬워 하면서도 시간을 확인하며 그러려니 했다. 역시나 숲에서도, 아니 숲에서는 저택에서보다 더 할 게 없어서 다같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저택을 돌아가는 길에는 또 다른 불청객… 아니, 초대하지 않은 손님으로 유화를 만났다.
“뭐야, 다들 나만 빼놓고 즐거웠던 건가요?”
얘기를 들어 보니 유화 본인도 자정에 맞추어 새해를 맞이하려 했지만, 11시 즈음에 잠들어 버려서 실패했다는 모양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자다가 새벽에 깼고, 다시 잠에 들긴 애매한 시간이라 이곳으로 왔단다. 우리가 어떻게 깨어 있을 줄 알고 왔냐니까 그 정도는 기본이라는데. 자매의 텔레파시 어쩌고 하다가 스스로 민망했는지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정작 수아는 내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멋쩍게 웃고 있었지만.
나갔을 때보다 두 명이 더 많아진, 나를 포함해 총 여섯 명이 다함께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어느덧 4시. 숲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선배와 유화, 겨우 두 명이 더 온 것뿐인데 4명뿐이던 저택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덕분에 일출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2020년 1월 1일의 일출 시간은 7시 45분이라고 한다. 시간은 어느새 7시로 다가왔고, 미미르는 도중에 곯아떨어진 아린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선배는 아침 출근 때문에 먼저 가셨고, ─ 신정에마저 근무를 시키다니… 난 나중에라도 저승에서는 일하지 말아야겠다. ─ 유화도 빗으로 꼬리를 빗어주다 보니 어느샌가 잠들어 있어서 수아가 방에 눕혀 주고 왔다. 다시 몇 시간 전처럼 수아와 나만 남았다. 잠시였지만 시끌벅적하던 저택이 한 순간에 둘만 남아 조용해지니 조금은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저, 도련님. 소녀, 사실 새해 일출이 되면 도련님과 꼭 함께 해를 보고 싶었던 장소가 있어요. 오늘 함께 2020년의 순간을 맞이하자 부탁 드린 것도 다 지금을 위해서랍니다. 같이… 가 주시겠어요?”
수아의 말이 애절하게 들려왔다. 나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그러겠다고 답했다.
─ 수아는 앞장 서서 굳이 내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대문을 나서고, 활엽수림이 아닌 대나무 숲을 걷고, 도착한 곳은, …그 고목나무. 수아는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곳을 왔을 땐 이 길을 혼자 걸었다. 두 번째 걸었을 땐 이 자리에서 한 번 죽었고, 세 번째 걸었을 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였지. 이 길은 몇 번을 걸어도 매번 받는 느낌이 다른 것 같다. 처음엔 절망, 그 다음은 두려움, 마지막은 어리둥절함….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지금 걸으며 느낀 기분은 지금까지 중에선 가장 괜찮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좋은 것 같다. 맞잡은 수아의 손은 뺨을 때리는 겨울의 칼바람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했다. 고목나무까지 가는 내내 앞장 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단순히 부끄러워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수아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 마음이 편해진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것이 내 몸의 대부분이 수아의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냐 묻는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사실 유무에 관계 없이 나는 수아가 좋다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고목나무 위에 올라 앉았다. 여기는… 내가 화수분의 주마등에 갇혀 있었을 때, 화수분이 만든 가짜 수아와 함께 왔었던 곳이다.
“도련님,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다시 듣는 수아의 목소리가 더 애절해졌다. 내 옷깃을 꽉 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옷깃을 잡은 수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던 것 같다.
“…수아야, 걱정하지마. 이제 우린, 헤어지지 않아.”
“도련님, 그런 게 아니오라, 흡, 그저 기뻐서… 도련님과, 으흑, 이렇게 다정하게… 함께 마주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수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닭똥 같은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내 옷으로 떨어져 스며든다. 수아는 불안했던 것이다. 줄 정은 줄 대로 다 줘 버리고 죽어서 떠나 버린, 그러면서도 간을 먹으라고 했던 나, 그래서 겨우 고생하며 살려 놓으니 기억을 잃고, 되찾는 과정에서 다시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고, 주마등에 스스로 몸을 던지고, 갇혀 버리고. 그런 나에게 불안을 느끼고 있던 거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이제 해소됐다. 몇 번의 시련을 겪었지만 모두 함께 함으로써 이겨 낸 믿음, 비로소 찾아온 평화와 되찾은 일상, 긴장이 풀리면서 북받쳐 오는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을 수아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아마 수아라면 내가 기억할 것보다도 훨씬 오래 간직할 것이다. 간직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지금 여기서,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터져 올랐다. 수아의 눈물로 팔이 젖어 간다. 평소의 수아라면 절대, 결코 용납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수아는 그마저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감정에 젖어 있다. 내 팔이 젖어 갈수록, 수아의 감정도 젖어 간다. 나는 잡혀 있는 팔이 아닌 다른 팔로 내 어깨에 기댄 수아의 머리를 감싸 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 않았다. 수아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인가. 웬일인지 나도 울음이 터질 뻔했지만 겨우 꾹 참아냈다. 수아와 나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그렇게 몇 분이나 서로의 감정을 나누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아의 통곡 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히 들리지 않도록 멈추었다. 수아가 천천히 어깨에서부터 고개를 떼었다.
“…아, 아! 도련님! 지금 소녀, 매우 부끄러운 몰골이온데…! 하지만 소녀 때문에 도련님의 팔이…!!”
흘긋 보이는 퉁퉁 부은 눈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머리를 정돈하고 젖은 내 팔을 어르기를 왔다갔다 했다. 오랜만에 보는 수아의 진짜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버렸다. 결국 수아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로 얼마 동안이나 머리칼과 얼굴을 정리했고, 그렇게 다시 내게 얼굴을 보인 수아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끔하고 단정한 평소의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눈물로 젖었던 팔도 어느새 말라 있다. 수아가 말렸다는 건 알겠지만… 대체 언제 말린 거야? 그 와중에서도 젖은 팔을 말리다니, 역시 여우는 여우다. 무서운 존재야, 음.
“도련님, 곧 해가… 뜨겠네요.”
“응. 2020년의 첫 해네.”
조금씩 밝아지고 그림자가 지기 시작하면서 해가 뜰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우리는 몇 시간 전 어두운 저택의 대청마루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있다. 고마워, 미안해, 힘들었지, 즐거웠고 즐거워, 행복했고 행복해, 좋아해, 사랑해.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마주보는 서로에 대해 서로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떤 말이 오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깨어났을 때의 나를 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너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어떤 기분이었을까. 애써 숨기고 환한 웃음과 장난끼 많은 태도를 일관하며 너는 어땠을까.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 기억하지 못해 미안해. 죽어서, 미안해. 어렸던 네게 간을 먹으라고 해서…, 미안해. 생각해 보면 몹쓸 나의 잘못이야. 내가 그 날 죽기로 마음 먹고 이 대나무 숲에 오지만 않았다면,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너에게 간을 주지 않았다면, 정을 주지 않았다면…. 너는 나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모른 채로 이 저택에서 굳건하게 살아 갔을 텐데. 내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나를 그리워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불안에 마음을 졸이며 살 필요도 없었을 거야. 나를 위해 애써 주마등에 몸을 던지거나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겠지. 너의 인생은, 내가 망쳐 놓은 거나 다름 없는 거네. 미안해, 수아야. 정말… 미안해.
“…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
“우후훗, 도련님의 생각은 다~ 파악하고 있답니다~ 우후후훗.”
“도련님, 소녀는… 이렇게 생각해요. 소녀가 처음 여우 가문에서 버려졌을 때, 당시에만 해도 불이나 얼음은커녕 여우 구슬도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소녀는 눈이 소복이 쌓인 저택의 앞에서 쓰러진 채로 추위를 견뎠어야 했죠. 힘든 나날이었어요. 저택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애초에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요. 그래서 배가 잔뜩 고픈 채로 얼마 동안이나 이 대나무 숲만을 배회하다가 도련님을 만난 거예요. …다짜고짜 도련님께 간을 달라 했었던 어린 소녀는 아직도 죄송하다고 느끼고 있사옵니다만…. 아무튼, 도련님께서는 제게 이름도 붙여 주시고, 아는 척을 하며 앞장 섰던 제게 인간 세상의 문화도 알려 주셨죠. 비록 어린 시절이었지만 소녀는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요. 즐거웠고, 시간이 그대로 멈췄으면 했어요. 도련님은 제게 삶의 선물을 주신 존재랍니다. 도련님께서 죽으셨던 순간에도, 소녀에게 간을 먹으라 하시던 때에도 소녀는 도련님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그 증거로 소녀의 머리카락으로 도련님을 살려 냈고, 보살펴 드린 거니까요. 도련님께서 저승과 한판 전쟁을 벌이시던 때에도 소녀는 도련님이 우선이었답니다. 그 증거로는 도련님을 대신해 주마등에 몸을 던진 것이죠. 소녀는 언제나 소녀보다 도련님이 우선이에요. 소녀에게 도련님보다 소중한 것은 없사옵니다. 왜냐 물으신다면, 그야… 도련님을 사랑하니까. …좋아하니까요. 이 마음은, 이 사랑만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더라도 변치 않을 거예요. 소녀가 가장 잘하는 건, 기다리는 일이니까.”
“…수아야.”
어? 수아의 이름을 한 번 불렀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도 못한 눈물이 한꺼번에 북받쳐 쏟아지는 바람에 급하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끊임 없이 흘러 나오는 눈물은 가린 손 사이로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른 잎에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최대한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큽, 큭, 하는 소리마저 모두 감출 수는 없었다. 앞에서는 수아가 한 순간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고개 숙인 나를 제 품에 감싸 안은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다시 몇 분이 흘렀다. 갑자기 말썽이 되어 버린 눈물샘과 감정은 그제야 진정됐다. 내가 숙였던 고개를 들자 수아도 자연스레 감싸 안은 팔을 거두었다. 눈물샘과 함께 터진 콧물샘 탓에 몇 번 훌쩍이는데, 앞에서 수아가 손수건을 건넸다.
“도련님, 이제 좀 괜찮으세요?”수아는 안심한 듯이 옅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받아 들고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눈을 닦고 부은 눈가를 뭉갰다.
“…응, 이제 괜찮아.”
어느새 수아의 모습과 마른 나뭇잎들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밝아졌다. 이제 정말 몇 분 후면 해가 뜬다. 눈이 부은 내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워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얼른 어떻게든 붓기를 가라 앉히기 위해 수아가 준 손수건으로 눈을 열심히 마사지했다. 그러다가 언듯 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각자의 자세 그대로 1초 동안 정지했다가 웃음 터뜨렸다. 마주보는 기쁨, 평화와 일상의 달콤함, 너의 사랑스러움. 그 모든 것들이 분위기에 맞지 않게 터져 버린 웃음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앉은 방향에서 눈을 찌르는 섬광이 비춰 온다. 2020년 첫 해가 다가왔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하지만 언제나보다 확실하게.
“도련님,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수아야.”
이제 도련님을 두고 떠나지 않을게요.
이제 도련님을 두고 떠나지 않을게요.
이제 너를 두두고 떠나지 않을게.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그렇게 약속했었다.
당신과 새해를 맞이하는 여우 完
side story까지 즐겨 주세요!
(아직 스크롤이 남았어요!)
side story #1
수아의 플랜 A
“아, 도련님.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이제는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지만 병원에 누워 살던 때만 해도 새해 맞이는 항상 병실에 딸린 텔레비전과 함께 했다. 그마저도 병약한 몸 탓에 끝까지 맞지 못하고 픽 쓰러지던 게 전부다. 텔레비전 속에서는 MC를 맡은 연예인이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이 몰린 인파 사이에서 상황을 중계하다가, 자정이 몇 초도 채 남지 않으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십, 구, 팔, 칠…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마침내 일이 지나가고,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새해 인사를 건넨다. 사실 그렇게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자정을 맞이하는 것이 겨우 새해라는 이유만으로 카운트다운까지 해 가며 그 추운 데에 모여 있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지는 모르겠다. 뭐랄까, 실감이 나지 않는달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자정이 카운트다운을 세는 것만으로 새해 맞이라는 특별한 행사로 바뀐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텔레비전 너머로만 보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현장에 있었어도 변함은 없었을 거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새해 맞이가 이제는 더 이상 의미 없고 실감나지 않는 일에만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새해를 함께 맞이할 사람 ─ 이라기보단 여우나, 저승사자나, 산신령이나… ─ 도 있고, 병약한 몸을 탓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행사가 이렇게 즐겁고 설레는 일이었던가. 반드시 ‘누군가’가 아니라 수아라서 그럴 뿐인 걸까. 어느 쪽이든 아무렴 좋다.
두 시곗바늘이 12에서 겹치는 순간, 하루가 끝나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지금으로썬 한 해가 끝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순간. 은은한 방 안의 조명만이 비추던 여우 저택의 저 너머에서 피유웅, 하는 특이하고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작은 섬광이 솟아오른다. 불꽃은 빠르게 하늘 위로 날아가 텅 빈 밤하늘을 가득 채우며 펑 소리와 함께 터졌고, 이어서 올라오는 다른 불꽃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각기 다른 높이, 다른 색, 다른 모양과 소리로 아무것도 없어 허전했던 밤하늘을 마치 도화지 삼아 각자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놓는 듯했다.
“도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게 원래 계획이었단다. 근데 이 계획이 갑작스레 찾아온 미미르와 아린이 때문에 무산되었다고. 미미르가 그 자리에서 스포일러를 해 버리는 바람에 2021년에는 써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동안 꽤 삐진 채로 미미르와 대화 자체를 일절 안 했다. 미미르가 겨우 불꽃놀이 갖고 뭘 그리 쪼잔하냐 말하면 겨우 불꽃놀이가 도련님께 보여 드릴 불꽃놀이였으니까 그렇다고 반박했다. 이것 참…. 그러고 보면 자정이 지난 후 새벽에는 미미르와 아린이가 있어 준 덕에 여러 놀이도 하며 심심하지 않게 새벽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럼 수아는 그 둘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새벽을 어떻게 보낼 생각이었을까? 그 부분은 2021년에 듣도록 할까.
side story #2
기절잠 유화
“흐흐, 히히. 올해는 꼭 12시 종이 땡 치자마자 새해를 맞이할 거예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실패했으니까, 올해는 꼭!”
유화는 그 날 해가 쨍쨍한 낮에 낮잠도 무려 6시간이나 자면서 각오를 다졌다. 평소 자던 시간인 밤 10시가 되었을 때는 혹시나 몰려올 피로에 대비해 일부러 게임도 찾아서 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단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유화는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잠에 들어 버렸다. 그리고 일어난 시간은 새벽 3시 즈음.
“…아, 어, 아…. …올해는 꼭 성공할 줄 알았는데!! 왜 실패했던 거죠? 뭐가 잘못이었던 거야? 나는… 제야의 종을 들을 수 없는 운명인 건가요? 대체 왜!!”
“…안 되겠어요. 지금 다시 자기에도 애매하니까, 수아 언니랑 인간을 만나러 가야겠어요.”
결국 목표는 제야의 종소리였단다. 그 종소리가 그렇게나 중요한가….
“저, 절대 새벽이 심심하다거나 그래서 찾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응.”
심심했구나.
“아니야!!!”
side story #3
수아의 제기차기
“…….”
아무도 없는 저택의 앞마당에서 수아가 제기를 들고 빤히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다.
“…도련님께서 하지 말라셨지만, 소녀도 이런 것쯤은 잘한다구요!”
그리고 수아는 제기를 높이 던져 발로 받을 준, 응? 아니, 그 이유가 아닌….
“에잇!”
수아가 제기를 다시 높이 올리기 위해 발을 들어올려 제기를 걷어 찼다. 제기는 성공적으로 하늘로 올라갔지만, 올라간 것은 제기뿐만이 아니었다.
펄럭.
수아의 치마가 그런 소리를 내며 휘날렸다. 안 그래도 치마가 짧은데, 조금만 올라가도 하반신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수아의, 치마 안쪽은…. 나는 그걸…….
…더 이상 썼다간 정말 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날 미미르에게 맞은 공격으로 하루종일을 누워 있어야 했다.
진짜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