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st 1968, 2020 - 2021 | CC-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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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폴란드의 법정 수도 | ||
포즈난 | Posen (포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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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per Invicta 절대로 꺾이지 않는다 | ||
국가 | 서폴란드 | |
주 | 비엘코폴스키에 | |
면적 | 505.3km2 | |
하위 행정구역 | 33구 | |
인구 | 938,226명 | |
인구 밀도 | 1,856명/km2 | |
시장 | 무소속 | 로베르트 비에드론 |
시의회 | 사회민주당 | 65석 / 125석 (52.0%) |
시민민주당 | 34석 / 125석 (27.2%) | |
녹색당 | 10석 / 125석 (8.0%) | |
좌파운동 | 8석 / 125석 (6.4%) | |
국민당 | 3석 / 125석 (2.4%) | |
무소속 | 5석 / 125석 (4.0%) | |
시간대 | UTC + 1 | |
광역인구 | 3,294,821명 |
개요
서폴란드의 최대 도시이자 법정 수도이다.
역사
15세기 유럽 교역의 한 중심지였으며, 16세기에는 폴란드 수출의 창구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수시로 침략, 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17세기 스웨덴 전쟁, 18세기 북방전쟁,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의 복속당한 후 나폴레옹에 의해 해방돼 잠시 바르샤바 공국으로 지내다 나폴레옹 몰락 후 프로이센의 재지배를 받는다. 20세기 초 폴란드 제2공화국에 일원이 되지만 제2차 세계대전때 전쟁의 격전지가 된다. 소련군의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독일군의 주요 방어지점으로서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종전 이후에는 냉전의 중심지로 유명했던 곳으로, 전후 폐허가된 바르샤바를 대신하여 서폴란드의 수도가 되었다. 냉전 시기, 모스크바와 함께 냉전의 상징이라고 불렸으며 특히나 포즈난의 방공망은 워싱턴 D.C와 모스크바 다음으로 촘촘하기로 유명했다. 포즈난의 중앙광장은 서폴란드의 군사 행진의 중심지로, 1970년대에는 동서폴란드의 핵위기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독일과 미국의 원조를 받아 급성장한 서폴란드의 경제를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해, 신도심에는 10여개의 마천루가 세워지기도 했다.
냉전이 사실상 종식된 이후 1988년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1990년대에는 동서폴란드의 정상회담을 열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 동유럽에서 가장 경제가 발전된 도시로서 동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꼽히고 있기도 하다.
1988 포즈난 올림픽
Osiągnięcie sportu dla najlepszych, osiągnięcie pokoju przez jedność
최고를 위한 스포츠의 달성, 단결을 통한 평화의 완성— 1988 포즈난 올림픽의 슬로건
1981년 일본의 게이조를 49표대 30표로 꺾고 1988년 올림픽의 개최지로 선정되었으며,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동안 올림픽을 개최했다.
포즈난 올림픽은 1946년 2차대전 이후 최빈국으로 떨어지고 유럽 냉전의 상징이었던 서폴란드의 경제 부흥과 통합을 상징하는 올림픽으로서 국위선양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으며, 세계 최다 국가가 참여하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올림픽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올림픽의 저주로 인해 1990년대 서폴란드가 냉전 종식의 기류속에서 불경기를 맞이하는데 어느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경기로, 현대 서폴란드에서도 꾸준히 기억되고 있는 올림픽이다.
한편으로 포즈난 올림픽에서 동-서 폴란드의 공동 입장은 역사상 최초였으며, 간접적 영향을 받아 1991년 최초로 동폴란드와 서폴란드의 정상이 회담을 가지는 계기를 주기도 했다.
인구
포즈난의 인구는 93만명 가량이며 광역 인구는 300만으로 서폴란드의 명실상부한 최대도시이다. 그러나 지방 인구 분산의 성격이 강한 폴란드의 인구 분포 특성상 지배적인 위치를 가지지는 못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100만 이상을 돌파하기도 했으나 2020년대에 들어서는 도심 공동화로 90만명대로 다시 줄어들었다.
2차대전 직후 30만이었던 것을 보면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1960년대에는 빈부격차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