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2번째 줄: 22번째 줄:
|기도 =
|기도 =
}}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llang|la|Sanctus Franciscus Xaverius|프란치스코 사베리오}}, {{llang|es|Francisco Javier|프란시스코 하비에르}}, {{llang|eu|Frantzisko Xabier|프란치스코 샤비에르}}, [[1506년]] [[4월 7일]] ~ [[1552년]] [[11월 2일]])는 [[스페인]] [[바스크]] [[하비에르]] 출신의 [[가톨릭]] [[선교사]]이자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인 [[예수회]]의 공동 창설자이다. 선교사와 [[야마토니아]]의 수호 성인이며 축일은 [[12월 3일]]이다.
==생애==
==젊은 시절==
하비에르는 1506년 4월 7일 [[나바라 왕국]]의 하비에르 성 집사이자 볼로냐 대학교 법학 박사인 후안 데 야추 아톤도(Joanes Jatsu)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후안은 후에 나바라 왕국의 국왕 호아네스 3세(Jean II d'Albret, 장 2세 달브레)의 자문원이자 재무관이 되었다. 하비에르의 어머니인 도냐 마리아 데 아스필리쿠에타 이 아스나레스(Doña María de Azpilcueta y Aznárez)는 나바라의 두 귀족 가문의 단독 상속자였다. 덕분에 하비에르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마틴 데 아스필리쿠에타(Martín de Azpilcueta)와도 친척 관계였다.
1512년, 아라곤 왕국의 국왕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섭정인 [[페르난도 2세]]가 나바라 정복 전쟁을 일으키면서 나바라 왕국과 그의 가문도 기울기 시작했다. 3년 후 하비에르가 고작 9세일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1516년에는 하비에르의 형제들이 나바라 왕국에서 카스티야-아라곤(스페인)의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나바라와 프랑스 동맹에 참가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스페인에서 온 총독인 시스네로스 추기경에 의해 가문 영지를 몰수당했고 거주지만 남겨둔 채 가문 성도 모두 철거당했다.
1525년, 하비에르는 학업을 위해 파리 대학교와 성 바르브 학교에 갔다. 하비에르는 그 곳에서 11년 간 공부했으며, 초반에는 육상 선수와 높이 뛰기 선수로 명성을 얻었다. 1529년에는 그의 친구인 [[피에르 파버]](Pierre Favre)와 기숙사 방을 같이 썼는데 이때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도 같은 방에서 생활했다. 하비에르는 당시 신학과 선교사의 삶보다는 기울어진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데 관심이 컸다. 그러나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게 크게 감명받은 하비에르는 1534년 8월 15일, 성 피에르 드 몽마르뜨 성당의 지하에서 [[이냐시오 데 로욜라]], [[피에르 파버]]를 비롯한 7명의 학생들과 함께 교황에게 개인적으로 [[복음삼덕|청빈, 정결, 순종]]을 맹세했으며 또한 선교를 위해 성지를 방문할 것을 맹세했다. 하비에르는 이후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537년 6월 24일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오랜 논의를 거쳐 1539년 [[이냐시오 데 로욜라|이냐시오]]는 공식 수도회인 [[예수회]]를 만들었고 예수회는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선교 활동==

2019년 2월 1일 (금) 21:32 판

틀:성인 정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라틴어: Sanctus Franciscus Xaverius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스페인어: Francisco Javier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바스크어: Frantzisko Xabier 프란치스코 샤비에르, 1506년 4월 7일 ~ 1552년 11월 2일)는 스페인 바스크 하비에르 출신의 가톨릭 선교사이자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인 예수회의 공동 창설자이다. 선교사와 야마토니아의 수호 성인이며 축일은 12월 3일이다.

생애

젊은 시절

하비에르는 1506년 4월 7일 나바라 왕국의 하비에르 성 집사이자 볼로냐 대학교 법학 박사인 후안 데 야추 아톤도(Joanes Jatsu)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후안은 후에 나바라 왕국의 국왕 호아네스 3세(Jean II d'Albret, 장 2세 달브레)의 자문원이자 재무관이 되었다. 하비에르의 어머니인 도냐 마리아 데 아스필리쿠에타 이 아스나레스(Doña María de Azpilcueta y Aznárez)는 나바라의 두 귀족 가문의 단독 상속자였다. 덕분에 하비에르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마틴 데 아스필리쿠에타(Martín de Azpilcueta)와도 친척 관계였다.

1512년, 아라곤 왕국의 국왕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섭정인 페르난도 2세가 나바라 정복 전쟁을 일으키면서 나바라 왕국과 그의 가문도 기울기 시작했다. 3년 후 하비에르가 고작 9세일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1516년에는 하비에르의 형제들이 나바라 왕국에서 카스티야-아라곤(스페인)의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나바라와 프랑스 동맹에 참가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스페인에서 온 총독인 시스네로스 추기경에 의해 가문 영지를 몰수당했고 거주지만 남겨둔 채 가문 성도 모두 철거당했다.

1525년, 하비에르는 학업을 위해 파리 대학교와 성 바르브 학교에 갔다. 하비에르는 그 곳에서 11년 간 공부했으며, 초반에는 육상 선수와 높이 뛰기 선수로 명성을 얻었다. 1529년에는 그의 친구인 피에르 파버(Pierre Favre)와 기숙사 방을 같이 썼는데 이때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도 같은 방에서 생활했다. 하비에르는 당시 신학과 선교사의 삶보다는 기울어진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데 관심이 컸다. 그러나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게 크게 감명받은 하비에르는 1534년 8월 15일, 성 피에르 드 몽마르뜨 성당의 지하에서 이냐시오 데 로욜라, 피에르 파버를 비롯한 7명의 학생들과 함께 교황에게 개인적으로 청빈, 정결, 순종을 맹세했으며 또한 선교를 위해 성지를 방문할 것을 맹세했다. 하비에르는 이후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537년 6월 24일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오랜 논의를 거쳐 1539년 이냐시오는 공식 수도회인 예수회를 만들었고 예수회는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선교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