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산당

Anonymous (토론)님의 2021년 5월 14일 (금) 17:2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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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회의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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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블루아 내각
(2018 - )
여당

프랑스 사회당
42석 · 158석

프랑스 공산당
23석 · 50석
신임과 보완

생태민주당
3석 · 23석

기독교민주당
11석 · 19석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5석 · 11석
야당

갈리아 민족당
42석 · 153석

보수인민당
13석 · 60석

프랑스 자유민주당
3석 · 14석

프랑스 전선
0석 · 9석
무소속 3석 · 3석
상원 145석 · 하원 500석

프랑스령 알제리 자치 의회의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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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산당
Parti Communiste Français
약칭
PCF
표어
Travailleurs de toutes les nations, unissez-vous!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창당일
1850년 (프랑스 노동자동맹)
당명 변경
1870년 12월 11일 (프랑스 공산당)
통합한 정당
알제리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
중앙 당사
프랑스 일드 프랑스 파리 제15구역 아르에 메티르 12
이념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반자본주의
국제사회주의
스펙트럼
좌익 - 극좌
서기장
루앙 리모주 / 9선 (33-41대)
부서기
파비엥 리말 / 초선 (41대)
상원 원내대표
페트 메레르 / 재선 (40대)
하원 원내대표
마리에 탕게르 / 3선 (39-41대)
프랑스 상원
23석 / 145석 (15.8%)
프랑스 하원
50석 / 500석 (10.0%)
레지옹 주지사
2석 / 21석 (9.5%)
데파르트망 단체장
14석 / 159석 (8.9%)
알제리 자치의회
127석 / 300석 (42.3%)
유럽의회 의원
16석 / 121석 (13.2%)
당색
빨강 (#DB001C)
당가
인터내셔널가
국제 조직
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
자매 정당
세네갈 혁명공산당
유럽 정당
유럽 좌파당
EU 교섭단체
북유럽 녹색좌파-유럽연합 좌파
선거 연합
좌파연합 (프랑스 사회당, 프랑스 공산당)
당원 수
증가 1,256,063명 (1위)
학생 조직
공산주의자 학생들
청년 조직
공산주의자 청년들
성소수자 조직
전진하는 소수자
여성 조직
공산주의자 여성 전국 연합회
당보
뤼마니테

개요

프랑스의 정당이자, 현 연립여당이다. 동시에 제1세계 최고(最古)/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별칭은 이른바 크렘린의 장녀.

상세

전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역사가 170년이 넘어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중 하나이며, 동시에 세계 최초의 좌파/사회주의 계열 정당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구체적인 뿌리는 1870년 창당된 1차 프랑스 공산당인데, 1871년 파리 코뮌 혁명을 주도하였다가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던 프로이센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이후 1876년 재창당된 2차 공산당 체제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비록 현재에는 의회 투쟁 노선을 받아들이면서 온건해졌지만 1920년대에는 테러와 파업을 일으키며 사회적인 혼란 분위기를 조성한적도 있었고, 1940년대에는 독일군에 맞선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인기를 얻었다. 1980년대 동구권 몰락으로 20년간의 침체기를 겪긴 했지만, 리먼 사태로 인한 미국의 몰락과 신자유주의 체제의 붕괴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르며 20대들을 중심으로 크게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정당이다.

19세기 초반에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색체를 띄었고, 20세기 초반에는 시대 기류에 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구했으며, 이 기조가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던 1968년 68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폐기하고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내용을 일부 받아들여 의회투쟁과 온건한 대 왕실 투쟁을 주장하는 정당이 되었고, 이후로는 프랑스 사회당의 연정 파트너가 되어 연립여당에 무려 8번이나 참가했다. 이로 인해 정통파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욕먹긴 하고 실제로 1990년대 당의 쇠퇴기 당시 틈을 비집고 쳐들어온 트로츠키주의 계파와 룩셈부르크주의 계파로 인해 2000년대 초중반까지 당 전체가 거의 분당 상태나 다름 없었긴 했다. 그래도 2000년대 중후반기 이후로는 지도부 나눠먹기를 통해 어떻게든 봉합하고 있는 중이긴 하고 또 서로 통하는 바도 있으니 갈리아 민족당 수준의 계파 갈등은 없는 편이다.

어쨌거나 유럽 공산주의 정당중에서도 가장 사회에 유화적이고 온건한 태도를 띄었기 때문에 동구권 공산주의의 몰락과 상관 없이 현재까지 주류 정당으로 존속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주류 정당중 가장 20대들의 목소리를 활발히 대변하는 정당으로 세대 교체도 빨리 이뤄지는 편이며, 프랑스령 베트남이나 프랑스령 알제리 같이 식민지 지역의 지역 기반은 매우 견고하다. 따라서 왠만한 변수가 없다면 앞으로도 미래가 밝을 정당이다.

역사

19세기 중후반기

프랑스 공산당의 역사는 1842년 파리의 의류 노동자들이 만든 "파리-프랑스 의류노동자 동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조직은 20여명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작은 조직이었지만, 1847년경에는 전체 4,700여명의 거대한 노동조합으로 발전했다. 파리의 여러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이 노동자들이 합쳐서 "프랑스 노동자동맹당"을 결성했는데, 이 당이 프랑스 공산당의 실질적인 전신이 되었다.

1848년,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가운데, 공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에 경도된 당원들이 크게 늘었는데, 당의 주류는 국가 사회주의 노선이었기 때문에 갈등이 있었다. 1863년 계속되는 갈등에 3,400여명의 당원들이 노동자동맹을 탈당했고 7년 뒤인 1870년 파리에서 역사적인 제1차 프랑스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이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공산주의 정당이었다.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그 틈을 타서 파리 시민들을 선동, 파리 코뮌이라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하는데 크게 일조하였지만, 혁명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프랑스를 점령한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프로이센군이 해산하자 1877년 마르세유에서 다시 지하조직으로 프랑스 공산당이 창당되었는데 이때를 제2차 프랑스 공산당이라고 한다.

프랑스 공산당은 공단 지역이 밀집해있던 플랑드르 지역, 특히 브뤼셀을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1870년대 후반에는 프랑스 일부 지역에만 조직이 미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공산당보다 프랑스 사회주의노동자당(사회당의 전신)을 더욱 지지하는 입장이었던데다가, 공산당은 당대까지만해도 지하조직이나 불법 단체로 간주되어 당 간부에 대한 체포가 빈번하였다.

20세기 초반 : 국회 정당

그러나 20세기 초반, 프랑스 공산당은 급격하게 당세를 확장했는데, 이는 파리를 중심으로 벌어진 잇다른 공단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이었다. 또한 라인 루르 지역의 공단 노동자들도 공산당을 지지하면서 파업을 벌였는데 대표적으로 뒤셀도르에서 2만명의 노동자들이 운집해 임금 상승과 노동자 인권을 요구했고, 여기에 프랑스 군대가 폭력 진압을 지시하면서 공산당에 대한 동정적 여론이 확산되었다. 1900년대 초반 프랑스 공산당의 합법화에 대한 꾸준한 논의가 있었던 가운데 프랑스 의회는 재적 300인중 182인의 찬성, 63인의 반대로 프랑스 공산당을 합법화시켰다.

제12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에서 처음 참여한 프랑스 공산당은 총 300석중 10석을 얻으면서 선전하였다. 1910년에는 제14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에서 무려 23석을 가져가면서 제5당의 지위에 올랐고, 해당 선거에서 사회주의자 진영은 300석중 123석을 얻으면서 사실상 승리한다. 한편, 1914년 독일과의 1차대전이 터지자, 프랑스 공산당은 카를 카우츠키와 마찬가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제정을 무너트릴 기회라고 생각하여 당론으로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을 냈지만, 동시에 프랑스 역시 제정이기에 독일과 다를바 없다는 당내 좌파들의 반발로 당이 분열되었다. 당내 좌파들은 반전 공산당(1914 ~ 1917)을 창당해 탈당했고, 이는 프랑스 공산당의 심각한 분열을 일으켰다. 결국 전후 최초로 치뤄진 1919년 총선에서 프랑스 공산당은 예상에 한참 못미치는 10석을 받는데 그쳤고, 3년 뒤 총선에서는 4석을 얻으면서 몰락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소련이 건국되자, 이에 경계심을 가진 몇몇 우파들에 의해 프로파간다의 대상이 되면서 1920년대 초반에는 잠깐 당 전체가 주춤하기도 했다. 옆나라의 독일 공산당의 사정과는 별개로, 프랑스는 1929년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블록 경제로 비교적 경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했기 때문에, 1930년 총선에서의 대약진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이 당시에는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사회당 정부가 노동자들의 압도적 지지로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장기간 집권했다.

그 외에도 로자 룩셈부르크의 등장으로 인해 촉발된 "베른슈타인 비판론"과, 레닌의 수정 경제에 대한 입장 차이 등으로 인해 당내 갈등이 워낙 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전까지의 전간기에는 1900년대 초반에 비해 크게 당세가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20세기 중반 : 불안한 첫 집권

그러던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즉각 나치독일에 대한 비판 성명을 발표했고, 국제 평화주의적인 강령과 무관하게 당원들로 하여금 군에 입대하여 파시즘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몇몇 당원들은 반발했으나 이는 소수에 불과했고 따라서 1차 대전 시기와 달리 큰 논란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산당원들은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나치에 의해 점령된 루르 지역과 브뤼셀 지역의 해방을 위해 레지스탕스로 활동하여 프랑스 내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는데, 이것은 프랑스 공산당이 전후에 전국 정당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전후 치뤄진 첫 총선에서 프랑스 공산당은 21석을 차지했다. 한편 이 당시에는 프랑스령 베트남프랑스령 알제리의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때였는데, 이 독립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던 1950년대 초중반 공산당은 적극적으로 이 식민지들의 독립을 지지하여 사회적으로 논란을 빚었다. 그러나 오히려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시민들에 의해 공산당이 각광을 받았고, 베트남-알제리-프랑스 독립 전쟁에서 자치의회 설립을 주도하여 프랑스 내에서도 지지의 목소리가 늘어갔다. 그렇게 1956년 총선에서 프랑스 공산당은 25석을 얻는 대승을 거두고,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당의 연정 파트너로 집권여당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1958년 최초의 베트남 자치 의회 선거에서 전체 200석중 87석을 얻고, 알제리에서는 총 140석중 35석을 얻는 등, 식민지 지역에서도 대선전하여 지지 기반을 넓혔다.

하지만 프랑스 공산당은 무려 100여년동안 집권 경험이 없던 정당이다보니 연정 파트너였던 사회당과 점점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소련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가장 크게 충돌하였는데, 프랑스 공산당은 친소 정책을 주장했던 반면, 반공주의 성향이 강했던 사회당은 소련을 사회주의 국가라고 부르는것조차 거부하며 소련과의 단교를 주장하던 상황이었다. 1960년 총선에서는 가까스로 연정을 이어나가는데 성공했지만, 이런 불협화음이 지속되자 사회당-공산당 연립 정권의 인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져, 결국 1963년 연정이 파토나서 치룬 조기 총선에서 단 한석 차이로 정권을 우파에게 다시 넘겨주는 원인을 제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63년 조기 총선에서 공산당은 핵심 지지층을 붙잡아두는데 성공한데에 이어 사회당을 이탈한 유권자들의 표까지 합쳐서 의석을 늘렸다고 한다.

68혁명 이후 : 유럽 공산주의로의 체제 전환

1968년 히피들이 주도하는 68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파리가 중심이 되어 유럽과 미국 곳곳으로 퍼져나갔으며 심지어 동구권에도 영향을 준 사건이었는데 프랑스 공산당도 68 혁명의 화마를 피해갈 수 없었다. 68혁명으로 인해 공산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 여러 대학생들이 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당의 당원은 종전의 2배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기존의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던 공산당원과, 권위주의적인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대학생들이 충돌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당 내에서 대중정당으로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스탈린주의를 폐기함을 선언했고 대신 유럽공산주의를 따를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의회민주주의를 수용하고 온건한 국왕 영향력 축소를 주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조치에 수많은 당원들이 실망하여 탈당하였지만, 오히려 대중들에게 공산당의 변화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1968년 총선에서 의석을 기존의 2배로 늘리는 성과를 거두었고, 2차로 사회당과 연합하여 연정에 참여했다. 이때는 프랑스 공산당의 영향을 받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도 연정 파트너로 참여하였다.

당 내부에서 탈마르크스주의 운동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소련과의 관계는 거의 파탄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1974년 프랑스 공산당 전당대회 난투 사건으로 친소-탈레닌주의자들이 당권을 잡아 당의 리버럴화와는 상관 없이 친소정책을 표방함을 선언했고, 그 기조는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20세기 말 : 동유럽 공산권 붕괴와 당내 내부 분란 가속화

1983년 총선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해 보수 정당들의 지지율이 최악에 달한 가운데 공산당은 73석을 쓸어가며 역대 최다 의석을 얻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공산당과 사회당 연계에 대한 기존 공산당 지지자들의 피로감이 쌓여 공산당의 내부 결속력은 떨어지고 있었고 1985년 지방선거에서 지방의회 의원의 1/3이 낙선하는 대참사가 일어나며 공산당 몰락의 전조를 알렸다. 1992년, 동유럽 전역에서 공산주의를 타도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며, 프랑스 공산당은 이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 애매한 입장을 내놓았다가 지지율이 수직하락했다.

급기야 1995년 총선에서는 단 5석만을 건지는 대참패를 당함에 따라 당이 완전히 몰락했다. 이는 지난 총선에 대비해 34석의 의석이 줄어든 것이었기 때문에 당직자들중 대다수가 낙선하였고, 거의 당이 리셋되는 상황이었다. 이 틈을 타서 트로츠키주의룩셈부르크주의를 주장하는 과격 분파들이 당 내에 난입하였다. 1997년 전당대회에서는 신트로츠키주의의 열풍이 불었는데, 이 때문에 소련 타도와 기성 공산당의 관료적 체제를 타파해야한다는 매우 이례적인 의견이 당 내에서 많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룩셈부르크주의를 주창하는 과격 혁명 분자들이 프랑스 전역에서 각종 난동을 벌여 이미지가 굉장히 나빠졌고 2000년대 후반까지 선거에서 지속적으로 패하는 20년간의 암흑기를 겪었다.

그래도 이때는 사회당이나 소련 공산당과의 관계도 비교적 잘 유지한 편이었고, 2003년에는 다시 연립여당으로 집권하긴 했다. 물론 이때 의석수는 15석으로 매우 적었기에 연정 내에서의 파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정도로 당 규모가 줄었었다.

21세기 초 : 리먼 사태를 통한 제2의 전성기

하지만 2007년 리먼 사태가 터지면서 프랑스 내 실업률이 급등하고 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위기감이 찾아오면서 공산당의 지지율은 급등했다. 2008년 라오스 자치의회 선거에서 총 230석중 147석을 쓸어담는 압승을 시작으로, 2008년 6월 여론조사에서는 총 16%의 지지율로 15%의 갈리아 민족당과 13%의 프랑스 사회당, 10%의 보수인민당을 앞지르고 1위를 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거품이 조금 꺼지긴 했지만, 2011년 총선에서 공산당은 55석을 획득해 약 40석 가량의 의석을 늘렸다. 이는 공산당 역사를 보더라도 역사상 3번째로 많은 의석을 얻은 결과였다.

2011년 이후에는 2021년까지 10년 가량 사회당과의 연정을 통해 장기 집권을 하면서 꾸준히 50석대의 의석을 유지하고 있고 특히나 식민지 지역에서의 지지가 매우 압도적인 상황이다. 더군다나, 2000년대 이후 당의 규모가 축소화되면서 대학생 중심의 당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게 제2의 전성기를 맞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서 기성 정당 치고는 20대들의 당 활동 참여가 무척이나 활발한 정당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가 자주 일어나 20대들과 30대들의 목소리를 잘 대변하는 정당이 되어, 지지율이 아직까지도 높게 유지되고있다. 특히나 20대에서의 지지율이 매우 높은데, 2019년 총선에서 20대들의 공산당 득표율은 36.15%로 전체 1위를 차지했다.

한편, 2014년 이후로는 안티파에서 유입된 아나코 공산주의자들도 합류해 점차 공산당의 분파가 다양해지고 있다. 지도부는 마르크스주의 원류 성향이 강하지만, 여전히 룩셈부르크주의 분파와 네오트로츠키주의자 분파의 힘이 강력하며, 특히나 네오트로츠키주의자들은 룩셈부르크주의 분파는 물론 아나코 공산주의 분파와 생디칼리스트까지 흡수하면서 장차 더욱 파워가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도 체제

프랑스 공산당은 1960년대부터 스탈린주의-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사상 논쟁을 많이 겪은 편이었고 이에따라 점차적으로 서기장의 권한은 줄어들고 도리어 당원들의 권한이 높아져, 역설적으로 친소 성향의 기성 공산주의 정당이면서 프랑스의 정당중 가장 지도 체제가 민주적이고 평등한 정당이 되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명목상 당수는 서기장이나, 이는 사실상 명예직 겸 부총리/총리 후보 자리에 가깝다. 실질적인 권한은 25명으로 구성된 공산당 평의회가 가지고 있다. 평의회는 일반 당원부터 고위 당원까지 다양한 사람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2/3의 동의를 받은 안건이 당의 공식 안건으로 채택되어 발표되거나 입법된다. 물론 서기장은 여기에 특별한 사유를 들어 거부할 수 있으나 없는 권한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수많은 정치학자들은 프랑스 공산당을 대표 체제가 아닌, 집단지도 체제로 보고 있다.

또한 각종 사안들은 당원들의 온라인 투표와 충분한 토론을 통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으며, 평의회 의원들도 당원들에 의해 대표자로 선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4년동안 연임하면 퇴임해야한다는 규정을 빼놓고는 정해진 임기가 없어 마음대로 당원 주도로 불신임을 이끌 수 있다. 다만 부작용 역시 큰데, 룩셈부르크주의자 분파가 이 점을 악용해 2명의 타 계파 인사들을 골로 보내버린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당 내에서는 불신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의견들이 많다.

트로츠키주의자부터 스탈린주의자까지 워낙 다양한 성향의 공산주의자들이 소속된 정당인만큼, 모두를 충족시켜야하는 의사 결정 수단이 필요했고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지도 체제가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반대로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체제를 운영하는 것으로 꽤나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역대 서기장

역대 선거 결과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연도 선거 의석수 득석률 증감 비고
1870 - 1903 : 지하 정당
1903 제12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10 / 300 3.33% 증가 10 야당 (제8당)
1907 제13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13 / 300 4.33% 증가 3 야당 (제7당)
1910 제14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23 / 300 7.67% 증가 10 야당 (제5당)
1913 제14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22 / 300 7.33% 감소 1 야당 (제4당)
1919 제15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10 / 300 3.33% 감소 12 야당 (제5당)
1922 제16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4 / 300 1.33% 감소 6 야당 (제9당)
1926 제17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5 / 300 1.67% 증가 1 야당 (제7당)
1930 제18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29 / 300 9.67% 증가 24 야당 (제3당)
1934 제19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9 / 300 3% 감소 20 야당 (제5당)
1938 제20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12 / 300 4% 증가 3 야당 (제4당)
1945 제21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17 / 300 5.67% 증가 5 야당 (제5당)
1948 제22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21 / 300 7% 증가 14 야당 (제4당)
1952 제23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19 / 300 6.33% 감소 2 야당 (제5당)
1956 제24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23 / 300 7.67% 증가 4 연립 여당 (제3당)
1960 제25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31 / 300 10.33% 증가 8 연립 여당 (제3당)
1963 제26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40 / 300 13.33% 증가 9 야당 (제3당)
1967 제27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24 / 300 8% 감소 16 야당 (제4당)
1968 제28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43 / 450 9.56% 증가 19 연립 여당 (제4당)
1972 제29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56 / 450 12.44% 증가 13 야당 (제4당)
1976 제30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64 / 450 14.22% 증가 8 야당 (제4당)
1980 제31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59 / 450 13.11% 감소 5 야당 (제4당)
1983 제32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74 / 450 16.44% 증가 25 연립 여당 (제3당)
1987 제33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55 / 450 12.22% 감소 19 연립 여당 (제4당)
1991 제34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39 / 450 8.67% 감소 16 연립 여당 (제4당)
1995 제35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5 / 450 1.11% 감소 34 야당 (제8당)
1999 제36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16 / 450 3.56% 증가 11 야당 (제7당)
2003 제37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15 / 450 3.33% 감소 1 연립 여당 (제7당)
2007 제38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12 / 450 2.67% 감소 3 야당 (제7당)
2011 제39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56 / 450 12.44% 증가 44 연립 여당 (제4당)
2015 제40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48 / 450 10.67% 감소 6 연립 여당 (제4당)
2019 제41대 프랑스 하원 의원 선거 50 / 450 11.11% 증가 2 연립 여당 (제4당)

유명 당원

논란과 비판

소련과의 관계

소련과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당 내에서도 말이 많은 편이다. 특히나 신트로츠키주의자들은 소련이나 나치나 거기서 거기라며 관계 단절을 주장하고, 당 내에서도 소련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어야한다는 여론이 35%는 된다. 60%는 아직 소련 공산당과 연을 끊기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소련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은 자세히 파해쳐보면 성향도 다르고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도 판이한데, 왜 아직까지 소련 공산당과 연계하냐는 비판이 많다.

또한 당 외부로는 독재 정당을 지지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루마니아 민주화 운동 당시 프랑스 공산당이 민주화 세력을 지지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한 점이나, 보리스 옐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독재에 대해서도 침묵하는 등 자칭 "식민지 인권 정당"이면서 정작 공산권 국가 인민들의 인권에는 침묵한다는 내로남불 비판이 많다. 2008년 이후 당이 급속히 커지면서 앞으로도 이런 논란은 식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어느때보다도 커진 현재에 들어서는 소련 공산당과의 관계 청산 얘기가 꽤나 자주 나오고 있다.

타 정당과의 관계

프랑스 사회당

갈리아 민족당, 보수인민당

기타 프랑스 정당

소련 공산당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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