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위키내 vs 놀이를 구경하다가 생각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에 따라 어떠한 인물들을 만들곤 합니다. 그 인물들은 분명히 가상의 존재이고, 실재(공간적 개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설정이 세세하게 부여된만큼 '실존(관념적 개념)'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나타난 AI와 같은 기술은 그들을 실재하는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우리는 해당 인물들에게 이미지를 입혀서, 애니메이션처럼 그들이 우리에게 선재적으로 실존하고 그다음 이미지로 실재하는것처럼 보여지는게 역으로 "실재" 하고 우리에게 실존하는것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AI와는 별개로 설정에서 나타난 것이 실존과 실재의 관계가 뒤집혀서 마치 의지를 가진 존재(being)가 되었다 하겠습니다. 주체가 된 설정에게서 필자는 두가지만을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강함" 입니다. 두번째는 "의지" 입니다. 강함이라고 표현된것은 말 그대로 VS를 붙였을때 누가 이길 수 있을까?를 가리는 문제입니다. 이때 당연히 더 강한쪽이 이길테고, 설정이나 실제로나 상성관계등의 변수가 존재하겠지만 이는 무시하고 수치화 시켜서 차등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A는 1등급, B는 2등급, D는 3등급 이렇게 나눠지게 될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수치화 시켰을때 이들의 강함의 척도를 가리는 것은 주체 내적으로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A가 1등급이라는데, 누가 정했지?" 분명 누가 누군가보단 강할텐데 말이죠. 자 그럼 왜 B보다 A가 더 강해야할까요? A가 더 강한것에 대한 개연성은 어디에 있고 그 권위는 누구에게 있어야 할까요? 정답은 바로 조물주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강함을 주체 내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서열과 강함, 설령 관계까지도 조물주에게 설정됩니다.
이 문제는 의지와도 직관됩니다. 의지를 가진 주체가 조물주에게 설정된다는 점에서, 이것이 주체(subject)인지 아니면 물체(object)인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물체는 의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보면 잠재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체는 온전히 수동적이고 미래가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움직일 능력(굳이 헬라적 관습으론 영혼에 가깝습니다.)이 없습니다. 돌은 외부의 의지가 자신의 의지를 부여하여 실현시킴으로써 움직이게 됩니다.
이 돌은 곧 설정에 존재하는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가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고대의 두가지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점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이며,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동의 원동자(제1원인론)" 입니다. 간단히 필요한 이론만 요약하자면 유출이론에 따르면 최초의 순수한 이데아라 지칭될만한 "일자(一者, The one)" 에게서 그것의 의도건 의도하지 않건 모든 세상이 유출되어 지금의 세상이 생겨났다는 이론입니다. 이에 따르면 최초의 일자에게서 "이데아"가 나타났고, 이후 물질이 나타났습니다. 물질은 이데아의 아류로써, 다소 열등합니다. 플라톤은 세상을 진짜와 가짜로 구분해서, 결국 본질인 이데아와 그 그림자, 거울에 비친것 정도로 이해될만한 다소 열등한 물질세계로 이해했습니다.
다음은 부동의 원인자입니다. 부동의 원인자는 "자신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나, 모든것을 움직이게 하는자", "자기 자신만을 목적으로 갖는자"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이론 아래엔 4원인설이 있는데, 필요한거만 뽑아온다면 모든것의 목적인, 즉 거기있고(형상인), 그게 "무엇"이고(질료인), 무언가를 위해서 변화하는(운동인), 것들이 지향하여 가는것(목적인). 입니다. 예를들어 사과나무가 있습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나무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형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무로써의 물질을 이루고, 우리가 나무로 인식하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질료인입니다. 그리고 그 사과나무는 후손을 만들기 위해서 변화합니다. 다만, 식물은 자발적이진 않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위계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입니다. 따라서, 나무는 변화하기 위해 씨를 가진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가 썩어서 땅에 묻힌다면 이제 그 열매는 다시 나무가 됩니다. 이것이 운동인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는 "후손을 만들기 위해" 이 사이클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형상과 질료를 만듭니다. 이 모든걸 지향하도록 하는게 목적인입니다.
자 이 목적의 목적을 귀추하다보면 결국 목적의 목적, 첫번째 존재가 있다고 보는겁니다. 이게 바로 부동의 원인자입니다. 이 원인자는 스스로 존재합니다, 왜냐면 스스로 목적이거든요. 근데 이 목적은 운동하지 않습니다, 할 필요가 없거든요 왜냐면 자기가 목적인데요? 그러니 형상도, 질료도 가질 필요가 없죠.
하지만 전제할게 더 남았어요. 신플라톤주의가 명료해보이지만 문제가 큰게 있습니다. "그래서 제1자는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있나?" 입니다. 1자에게서 우연히 나타난건지, 아니면 주체적인 목적이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게됩니다. 만약 의지가 없다면요? 그럼 이 모든건 우연이고, 제1자는 그냥 존재만 할 뿐입니다. 가장 순수한 존재이긴 하겠죠. 다만 의지가 있다면 두가지 학설이 생깁니다. "직접 창조"와 "타의적 창조" 입니다.
직접창조, 특히 무에서 유가 나타났다면 이것은 유대교에서 시작해 기독교, 이슬람교의 신이 된 여호와처럼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조물주의 상일테지만, 그렇게 되면 강함과 의지를 설명할때 우리가 모든걸 다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알고 자신이 계획해야합니다. 우리는 영속자가 아니라서, 가능한 모델이 아닙니다. 결국 우린 수명이 다하면 죽는 필멸자거든요. 그럼 타의적 창조설로 가봅시다, 타의적 창조에 있어선 "데미우르고스"설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그냥 장인이란 뜻이긴 한데, 플라톤은 이것을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답게 세상을 만든 초자연적 존재" 정도로 말합니다.
근데, 가능한 한 만든거라서 이게 궁극적으론 이데아의 모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저열합니다. 이후 이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을 최고신으로 여기는 자" 로 이해되어, 책임지지도 못할거면서 세상을 만들어가지고 생명을 태어나게 해 고통을 느끼게 한 나쁜놈으로 생각되게 됩니다. 왜냐면 피조물로썬 이 뭣같은 물질세계를 탈출해야 하거든요. 우리는 이 데미우르고스에 적합하도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귀추하면 우리가 절대자가 아니거든요. 설령 세계관을 주무르는 절대자일수도 있지만 전능할지언정 전지하지 못합니다.
자 이 두 모델을 가지고 봅시다. 지금까지 전개된 논리를 토대로 우리는 두가지를 표로 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주의 | |
강함 |
플라톤주의에 의하면, 강함-즉 조물주의 개입의 정도에 대하여 우리는 유출 이론에 따라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물주로써 세상을 지어냈지만, 완전한 세계를 이루는것에는 실패했습니다. 설령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것을 지어내려 했으나, 궁극적으로 조물주가 원전불멸의 존재가 아니라서, 실패할 것입니다. 설령 세계관 내 몇가지 장치로 완벽하게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강함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설정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서 흘러나와서 존재하게 한것 이상으로 뭔가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처음에 말한것처럼 "실재" 한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들은 사실 조물주조차도 속이거나, 혹은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겁니다. 우리는 그들의 강함을 수치적으로 입력할 순 있지만, 그들의 질서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으려면 완벽한 세계를 지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데미우르고스고 가능한 가장 좋은것으로 지었으나 순수한 이데아에 다달을 수 없었을겁니다.
우리는 그들의 강함을 입력하기만 할뿐, 그들의 질서와 상호작용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
의지 |
우리는 그들에게 의지를 실현시킵니다. 그들은 우리가 유출시킨대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완전한 존재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최초원인인 일자에게서 파생된 무언가일 뿐이고, 그들 또한 마찬가지로 파생의 파생을 거친 무언가입니다. 설령 우리가 일자라 해도 그들은 파생된것으로, 마치 와인의 농도가 옅어지듯 점점 저열한 것이 될겁니다. 애초에 물질이 이데아보다 우월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우리보다 저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강함을 조정할 뿐, 그들의 상호작용에 개입할 수 없는것처럼 우리는 그들에게 "유출자", 그리고 조물주로써 실현만 시킬 수 있지 그들의 실존을 파괴시킬 순 없습니다. 우리는 일자인 나에게서 세계관을 유출시켰습니다. 그런데, 유출시킨 이후에 우리는 그 세계관에 내 의지를 관철시키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 인식속에선 이미 실재합니다. 공간적으로 먼저 실재한 이상 그들의 주체적 실존을 파괴할 수 없게됩니다.
만약 그들의 실존이 자신이 트루먼 쇼의 트루먼처럼 자신이 피조물인걸 깨닫고, 순응하지 않고 반역한다면? 그들이 모니터 밖으로 나올수도 있습니다! (뭐 미소녀가 나온다면 나쁘지 않을 순 있습니다만은, 베르세르크 가츠같은놈이면 큰일난거죠.) 그들은 반역하여, 이데아에 닿아 원인이 되는 나에게 도달하게 되면 이제 나는 그에게 내 의지를 관철할 수 없게됩니다. 설령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들이 의지를 관철시키는 "물체"에서 "주체"가 된다면 일자는 무용합니다. |
조물주 |
이 모델로써 조물주는 유출시켰으나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 이해로는 조물주는 다소 기계적이고, 의지를 가졌기에 관철하려 하지만 이미 실재하기 때문에 실존의 영역에서 통제할 수 없게됩니다. 그들이 뭐 도를 닦던 하는식으로 물체에서 주체가 된다면 그들이 반역할지라도 방어할 수 없을겁니다.
피조물은 조물주를 이길지도 모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 |
강함 |
부동의 원인자는 당신은 그들의 목적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목적으로 하는 위계적 질서의 우주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들의 강함을 입력하고, 꽤 괜찮은 세계관을 탄생시켰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이게 객관적으로 개차반인지 좋은지는 상관없습니다. 그안에 있는 물체는 영원히 물체일 수 밖에 없기에 트루먼은 자신이 세트장에 있는지 모를겁니다.
당신을 원인, 즉 목적인으로 하는 세계를 지었기에 모든 세상은 당신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게 그들이 당신을 막 찬양하고 숭배한다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자석이 이끌리듯이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겁니다. 따라서 그들의 강함, 우열을 당신은 설정할 수 있고 그들은 당신을 향하여 변화하기 때문에 형상과 질료를 가지는 한 목적인을 향해 영원한 달리기를 해야할겁니다.
다만 이것이 플라톤주의랑 뭐가 다르냐 할 순 있습니다. 플라톤주의는 그들을 물체에서 주체가 되는걸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번엔 다릅니다, 당신은 물체를 영원히 물체에 머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설령 자신이 세트장에 있는걸 깨닫는다 해도, 그것을 검증할 수 없을것입니다. 모든 목적은 당신을 향하는 기계적 우주기 때문에 당신을 위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이 아무리 강하건, 막 다중우주를 재패할지라도 당신은 차원적으로도 위가 됩니다. 영원한 목적으로서 당신은 아무리 강하건, 그들에게 구속구를 채울 수 있습니다. |
의지 |
의지문제에서 다소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젠 변화하고, 목적을 가진다는 것이에요. 그들은 영원한 물체지만 목적이 거듭될수록 당신에 단순히 가까워질 순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형상과 질료가 없고 운동만이 남아야만 완전한 목적에 다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하려면 형상과 질료가 있어야하고 형상과 질료는 "목적"을 향하여 "운동" 합니다. 순환논리에 갇혀서, 영원한 물체가 될겁니다.
세계는 당신의 의지를 실현시킴으로써 영원히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주체가 되려면 궁극적으로 "운동"을 멈춤으로써 의지를 관철당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형상과 질료를 벗어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운동해야합니다. 바로 최종목적인 당신에게로 말입니다.
그들에게 형상과 질료라고 할만한것인 설정과 이미지가 벗어내고 운동만 한다 합시다. 그건 더이상 원인자에게 실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게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실재하려면 실존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원인자는 실존을 부여하는데, 스스로 실존이 없어진다면 실재하지도 않게됩니다. 결국 그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의지는 관철되거나, 존재의 자살이라는 두 선택지에 놓이게 됩니다. |
조물주 | 조물주는 결과적으로 모든 반역을 선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습니다. 물체가 물체가 아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체는 주체가 되는 순간 우주적 질서에서 추방됩니다. |
궁극적으로 우리가 모든 조물주로써 취할 수 있는 존재중 존재인 두 모티브에서, 둘다 그 세부내용을 기록할지언정 모두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다만, 플라톤주의에선 물체가 주체가 될 가능성이 존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선 우주적 질서에 의해 물체는 물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데미우르고스, 즉 우리가 써낸 실존이 반역을 저지른다 해도 그 실존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어쩌면 이길 순 있으나 모니터에서 캐릭터가 나오질 못하니 어려울거 같습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