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의 아버지라는 변태 프로이트는 주구장창 무의식을 강조한다. 우리는 의식적인 측면이 분석할 수 없는 무언가라고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호르몬 약물을 통해 우울증을 치료하듯 그것은 과학현상의 일부임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의 영혼이 시키는 일보다도 알 수 없는 심리기재로 인해 발동된 똥같은 부산물이란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나마 인간의 의식을 분석할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의 뇌는 개개인이 우주와도 같아서 무엇하나 제대로 분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우린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제대로 아는 경우가 없고, 대부분 흐르는 물처럼 무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창작은 그런 무의식을 대변하는 가장 궁극적인 배설물의 일환이다. 창작의 분야가 넓으니 우리와 같은 경우 세계관 창작으로 확대할 수 있다. 애초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고싶은대로 볶아먹는다지만, 정말로 세계관이 무엇인지 통일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결국 세계관은 너무나도 추상적인 표현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니 자유롭게 쓰는 것이고. (내가 계속 어떤 의미라고 피력해봐야 그것은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말의 반댓말은 표준이 없어서 이도저도아닌 형태가 나온다는 말과 같다고 본다. 이것은 세계관 망상이 가지는 한계점이 꽤나 많다는 걸 시사한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창작자들은 이것이 그저 "하고싶은대로 하는 일이니 괜찮다"라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 대답은 세계관 창작의 지속성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무의식의 대변일 뿐인 세계관 창작은 흥미가 떨어지면 버릴만큼 그 의의를 피력하기 약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기적인 세계관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악순환의 해답이 소수지만 아웃풋을 가진 세계관들의 사례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를 할 때는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 공부를 하면 성적이, 운동을 하면 언더아머가, 대회에 나가면 입상이 있어야 우리는 약간이라도 만족한다. 반면 세계관은 생산->결과라는 그 당연한 구조가 형성되지 않는다.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착각을 빠지게 하고, 그래서 일회성 소비로 그치게 만든다. 그것이 당연히 "악"은 아니지만, 그대로 끝나버린다.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세계관을 제대로 만들겠다는 마음이 바보가 될만큼 만들다 버리는 노트의 낙서장과 일맥상통하게 된다.
정말로 내 작업(세계관)이 의의를 찾으려면 아웃풋이 필요하고, 그 아웃풋의 선사례들을 보면서 일종의 희망을 느껴야한다. 세계관 창작에서 나오는 지도, 그림, 시스템들은 일회성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저장되어야 한다. 관련된 자료들이 많을수록 무의식 속에 들어오는 정보량도 많아질 것이고, 비록 내가 하지 않더라도 내 다음사람이 그 자료를 보고서 좋은 아이디어를 얻어갈 순 있다. 그러니 나는 누누히 반복하건데 세계관 창작물들이 버려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잘 보존되고 저장되어서, 누군가가 재미를 느끼는데 이용된다면 그 이상이 없지 않을까. 굳이 다 버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최종적으로 결과물이 완결되는 것이 중요하지 미완성 작품이나 폐기되는 작품은, 본인이든 타인이든 다른 작품의 밑거름이 된다고 보는 게 맞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