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작년 3월 말 온라인에 게재되었다. 책장 구석에 쌓아두었던 그림공책을 훑어보는 도중 이 세계관을 모티브로 하여 그렸었던 풍경화가 있길래 보정한 후, 원 글에 이어 추가로 첨부했음을 알린다. 해당 그림은 적어도 2015년 4월 이전에 그려졌다.
https://youtu.be/AKHPxw_Rmjc
필자가 과거, 기억하기로서니 대략 3년 전 만들었던 세계관에는 ‘17 – 원초적 고독’이란 게 있다. 앞에 붙은 번호 17은 괜스레 다중우주라는 미명을 붙임에서 비롯된 것으로, 엑셀 파일에 ‘차원’(이를 세계관으로 치환해도 무방하다)을 몇십여 개나 타이핑했었던 분류의 흔적의 일부이다. 뒤의 원초적 고독은 해당 차원에 붙은 고유한 명칭이고. SCP 재단에서 관리하는 개체들의 작명법과 비슷하달까. 당대의 필자가 했던 창작적 행위는 작금의 필자가 보기에는 악랄하게 탐닉적이라기보단, 무엇에 이끌려 혹은 어떠한 동기가 작용했었길래 그러한 일을 했을까 궁금할 뿐이다.
분명한 것은 당시의 변태적인 차원 생성의 이유가 일말의 세계관 신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기억이 흐려진 지금으로써 그 신조를 토치 하나 틀리지 않은 경구로서 재구현하기란 꽤 난해한 일이지만, 분명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다’(이거였었나!?)는 테제에 기반을 두어 그리 변태같이 차원을 찍어내는 일에 몰두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거나 그 수많은 차원 중에는 ‘17 – 원초적 고독’이라는 세계관이 있었다. 나는 그 무수한 차원을 엑셀에 기재하는 것 말고도 차원들의 폴더를 개별로 만들어 이름을 붙였었는데, 역시나 차원의 대량화에 집착하였던 나머지 차원 하나하나의 질은 크게 낮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크게 낮아졌다. 어쩌면 본인 노력이 부재일지도, 또는 본인 역량이 차원의 무수함에 미치지 못하였을지도. 여하튼 그 ‘17 원초적 고독’(폴더명으로는 ‘-’를 사용 못 한다)이란 폴더 내에는 어떠한 파일도 들어있지 않다. 그 차원에 관한 기록은 다른 데에 있었다. 차원이 많아 각각이 어떠한 것이었을지 잊어버릴까 싶어 적은, 앞서 언급한 엑셀 파일의 차원들 옆 셀의 설명 중 하나에 있다. 17호 차원의 설명은 간단하다.
“푸르고 공허스러운 지역”
이 차원은 어떠한 차원이길래?: 원초적 고독은 환경 차원이다. 필자가 창조한 개념에서 환경 차원이란, 특정한 자연적 환경으로만 대표되는 차원이다. 예를 들어, 바다만 끝없이 늘어진 차원이나 온갖 쓰레기만 쌓여있는 차원이 환경 차원으로서 말해질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인문학적 요소나 역사적 흐름은 부재한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특정한 인문학적 시간대 혹은 시대적 분위기 자체가 환경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렇다면 원초적 고독은 어떠한 환경인가? 신비한 별빛이 세계를 뒤덮은 듯한, 푸르스름한 기운이 안개처럼 내려앉은 차원으로 이곳에는 모든 생물이 사라진 듯한 인상을 준다. 인간을 비롯한 현실의 생물들은 부재하고 인공물만이 금이 간 폐허, 가끔은 온전한 형태로 덩그러니 잔존한다. 훼손된 폐허는 자체로서 풍화된 폐허가 아닌 차원의 신비한 기운들에 의해 변형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이는 알 수 없는 종의 덩굴이나 이끼, 꽃, 식목이 물체에 자라난 형태로 표현된다. 어떠한 인공물은 완전히 다른 물체로 완벽하게 대체된 모습일 가능성도 있다. 도시 중심에 세워진 동상이 거대한 나무로 바뀌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시간대는 항상 밤이나 새벽으로서 낮을 생성할 항성이 부재하고, 단색으로만 표현되던 기존의 천공은 지표의 공해와 우주와의 구분이 사라진 것처럼 별과 성운으로 밀집한다. 이 차원의 대표적 생물은 고래인데, 기존 현실의 고래와는 다르며 전체적인 형태만 공유한다. 이곳의 고래는 수중이 아닌 공중에서, 성운에서 헤엄친다.
변화는 환경 뿐에 국한되지 않는다. 필자는 이 차원을 떠올릴 때 수반하는 특정한 심조가 있다. 말로써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대단히 희열에 넘치는 혹은 무언가를 새로이 시도할 수 있는 도전의 느낌이다. 분명한 흥분의 감정으로서 또한, 고독의 감정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현실의 인과관계에서 도피하여 특수한 영역으로 입장하는, 그러한 감정으로도 말할 수 있겠다. 이 차원은 해결 아닌 도피라는 안주의 의미에서 정태적 분위기의 세계이기도,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형성된 동적의 세계이기도 하다.
필자가 현실에서 느끼는 이 차원과 동일한 심조를 두 가지 꼽아볼 수 있겠다. 겨울철 새벽에 방의 창문을 열어놓고 두꺼운 이불로 들어오는 추위를 무마한, 시원한 고독의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으로 일종의 평화적 관조의 심리이다. 혹은 새벽에 텅 빈 길거리를 혼자 산책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심조이다. 둘 상황의 시간적 공통점은 사람이 빠진/사람이 없는 밤이나 새벽이라는 점이다. 시간적 어둠의 의미는 평소 본인만의 공간이 아니었던 곳을 자유로이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또한, 반대로 고독에 빠지어 그것에 대한 상상을 방해받지 않고 전개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위협으로부터의 관조로도 말해질 수 있을 듯하다.
좌우지간, 원초적 고독의 풍경을 내면화하고 그러한 풍경에서 간헐적 흥분의 심조를 느끼었던 최초의 시기는 심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중학생 시절이었다. 나는 이 차원을 형성하였던 유년기 일상의 경험들을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어떠한 경험이 진정 차원을 형성한 기원이었는지는 모른다. 지금에서야 그저 유추해 볼 뿐이다.
‘몰트레이크 저택의 미스터리’(Mystery of Mortlake Mansion)를 플레이했던 경험이 원초적 고독 차원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믿는다. 이 게임을 처음 접했던 장소는 당시 다니던 영어학원이었다. 원어민 선생님이 학습의 일환으로 수업 중 이용한 것이었는데, 방탈출과 숨은그림찾기가 혼합된 아동용 게임이었다. 이 게임에도 현실 이면의 변형된 저편의 세계가 존재한다. 이 반대편의 세계 또한 푸르스름하고 신비로우며, 차갑고 아리송한 심조를 띤다. 이 저편 세계의 분위기는 원초적 고독 차원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이 게임의 OST는 앞서의 브금으로도 사용했었는데, 지금도 간간히 듣고 있는 중독성 있는 음원이다.
나는 새벽에 흥분의 감정을 느낀다. 성적인 감정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무언가를 해내고야 말 것 같은 자유의 심조, 그 심조를 만끽하는 나는 원초적 고독의 세계와 그 세계를 형성한 중학생의 시절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