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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언론이 두긴에 대해 떠들기 전부터 두긴의 글을 번역하고 그의 주장을 소개해 왔습니다. 한국은 그 전까지는 두긴에 대해 잠잠하다가 전쟁이 터지니까 이제야 주류 언론이고 유튜버고 할 것 없이 두긴을 끌어다 쓰는데, 언제나 그렇듯 그 수준은 서방언론의 주장을 복붙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주장이 두긴을 마치 뿌찐의 대리인처럼 해석하는 주장입니다.
두긴은 원래 소련이 몰락하고 리모노프와 함께 내셔널 볼셰비즘 운동을 전개해 온 사람입니다. 그러다 뿌찐이 집권한 후에 반체제가 우선이냐 반서방이 우선이냐를 두고 리모노프와 대립하여 갈라섰고, 이후에는 뿌찐의 반서방 노선을 지지하며 보다 온건한 개혁파 노선으로 갈아 탔습니다. 때문에, 이 사람의 주장이 뿌찐 정권의 노선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치 라스뿌찐과 같은 존재로 두긴을 평가하는 것은 과대평가이고, 뿌찐의 브레인이라는 것도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뿌찐이 이 사람의 주장을 가져다 쓴다는 주장 중 하나가, 뿌찐의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 전통주의적 성향, 그리고 유라시아주의적 대외정책이 두긴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인데, 러시아는 항국을 포함한 서구사회와는 달리 아직 보수주의적인 세력이 국가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굳이 두긴이 아니어도 서방에 반감을 가진 엘리트세력이 정계에나 학계에나 종교계에서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으며, 국민의 반서방 민족감정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유라시아주의라는 것도 두긴의 전매특허는 아니며, 이미 19세기 말부터 러시아 지식사회에서 논의되던 것들입니다. 때문에, 뿌찐의 사상이나 정책이라는 것이 두긴과 통하는 지점이 있고, 두긴이 뿌찐의 노선에 대해 긍정적인 언급을 한다고 해서, 그를 뿌찐의 브레인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두긴이 영향력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혹자는 두긴을 러시아의 진중견에 비유하던데, 진중견은 그냥 항국에서나 그럭저럭 강연이나 하고 책이나 팔아먹고 사는 평론가이지, 사상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것은 없으며, 대외적인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에 비하면 두긴은 이데올로그이고, 그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정치세력이 시민사회에 상당수 포진해 있으며, 알랭 드 브누아나 클라우디오 무티같이 유럽의 지식사회와 연결된 네트워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영향력이지, 무슨 천공스승처럼 두긴의 말 한마디에 정책이 좌우되고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두긴의 주장을 뿌찐의 그것과 동일시해버리면, 뿌찐을 대단히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정치지도자로 오인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두긴주장의 핵심은 근대의 초극과 전통적 가치에 뿌리를 둔 유라시아제국, 이를 축으로 한 다극적 질서의 확립에 있는데, 뿌찐정권은 사실상 내부의 의회민주주의조차 어떻게 해보지 못하는 뿔죠아 정권에 지나지 않습니다. 뿌찐의 대내적, 대외적 정책의 기조라는 것은, 사실 뿌찐이 급사하고 후계자하나만 바뀌어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20세기 초부터 대중사회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당국체제를 형성한 중궈가 낫다고 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