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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포럼-가속주의 없는 가속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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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란

 

가속주의 없는 가속주의

Accelerationism Without Accelerationism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가속주의라는 술어는 2010년에 벤자민 노이스(Benjamin Noys)에 의해 그가 거부한 정치적 입장을 가리키기 위해 고안되었다. 노이스의 설명에 따르면, 가속주의는 상황이 더 개선될 수 있기 전에 먼저 더 악화되어야 한다는 관념이다.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관통하는 길이다. 자본주의가 더 추상적이고,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고, 모순적이며, 파괴적인 것이 될수록 자체 파열에 더 가까이 가게 된다. 궁극적으로 그런 전망은 <<공산당 선언>>에 나타난 자본주의의 고유한 역동성에 대한 유명한 설명에서 비롯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우에, 자본주의는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적 상황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과 격동"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정체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증발해 버리고 신성한 것은 모두 모욕당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발전들을 개탄하기는 커녕 그것들을 자본주의 자체의 전복에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 간주한다.

 

노이스에 따르면, 가속주의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불안과 격동"을 자체적으로 혁명적인 것으로 찬양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파괴를 넘어서는 어떤 미래 전망도 갖지 못한다. 1970년대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물러설 것이 아니라 "시장의 운동,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운동 속에서...여전히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넌지시 주장했다. 동시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자본주의의 "광적인 돌진"과 "돌변하는 강도"에 크게 기뻐했다. 1990년대에 닉 랜드는 금융 자본의 "사이버적으로 확대되는 테크노바이러스"에 의한 "미래로부터의 침공"의 결과로서 인류의 사멸을 열광적으로 예상한다. 오늘날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은 비트코인, 파생 상품, 알고리즘 트레이딩 그리고 인공 지능을 사회적 질서를 전적으로 파괴하고, 국가, 집단 그리고 심지어 도덕과 유한성의 제약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한 도구들로 간주한다. 이것은 "창조적 파괴"―요제프 슘페터가 마르크스를 우파적으로 전유하면서 부르듯이―가 그것 자체로 그리고 그것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2013년에 이런 모든 흐름에 대응하여 닉 스르니체크와 알렉스 윌리엄스는 "가속주의적 정치를 위한 선언"를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그들은 가속주의를 좌파를 위한 진정한 기획―자본주의적 근대성의 도구들을 집어들고, 그것들을 해방의 목적으로 우회시킬 수 있는 기획―으로 개척하고자 한다. 이것은 파괴 자체를 찬양하는 일이 아니다.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는 닉 랜드의 "자본주의적 속도만이 전대미문의 기술적 특이성을 향한 전지구적 전환을 생성할 수 있다는 근시안적이지만 매혹적인 믿음"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 대신에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는 마르크스 자신의 주장으로 돌아간다.

 

어떤 발전 단계에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현존하는 생산 관계 또는 지금까지 그런 생산 관계가 작동한 틀 내에서의 재산 관계와 상충된다. 생산력의 발전 형태들로부터 이런 관계들은 족쇄로 바뀌게 된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신기술들―디지털 및 비디지털―은 현재 애초에 그것들을 만들어낸 바로 그 체계의 "족쇄"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이른바 "지적 재산권" 법률의 결과로서 정보 흐름은 검열되고 마비되는데, 애플과 구글 같은 회사들은 공적 자금으로 수행된 연구에서 비롯되는 수익을 전유한다. 대단히 많은 직업의 자동화와 로봇화는 고역으로부터의 해방과 편안함이 아니라 불안정과 탈취를 낳는다.

 

그들의 선언문에서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는 이런 신기술들에 저항하고 반대하기보다는 해방의 목적을 위해 그것들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추상화, 복잡성, 전지구성 그리고 기술의 근대성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는" 미래지향 좌파 정치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친다. 그들은 "잠재적 생산력"을 제약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시켜"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심지어 그들은 "사회와 그것의 환경에 대한 최대한의 지배의 프로메테우스적 정치"를 요청한다. 초기 소비에트 구성주의가 이탈리아 미래주의와 대비되는 관계와 꼭 마찬가지로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의 가속주의는 닉 랜드의 가속주의와 대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발명하기: 탈자본주의와 노동 없는 세계(Inventing the Future: Postcapitalism and a World Without Work)>>라는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의 중요한 새 책은 그들의 선언에서 처음 개괄된 프로그램의 전면적인 확장판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그 책과 관련하여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책의 어디에서도 "가속주의"라는 실제 낱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말의 주에서 저자들이 설명하듯이,

 

이 책에서 우리는 대체로 '가속주의'라는 술어의 사용을 자제하였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의 가속주의 신조들을 포기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지금까지 그 개념을 둘러싸고 발생한 경쟁하는 오해들이 끼치는 악영향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의 관념들이 그것들이 처음 제기된 선동적인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발명하기>>의 실제 프로그램이 선언의 프로그램과 거의 동일할지라도, 수사법의 변화는 실질적 차이에 기여한다. "가속주의"라는 낱말과 하나의 장르로서의 선언에 기본적인 과정법 둘 다에 의해 내포된 현시적 긴급성이 없다면,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의 제안들은 순전히 온건하고 합당한 듯 보인다.

 

저자들은 "수평주의적" 조직 양식들, 전지구적 관심사들보다 지역적 관심사들을 우선시하는 것, 어떤 명시적인 요구 목록도 회피하는 것 그리고 직접 민주주의와 자발적인 직접 행동을 편애하는 좌파의 최근 경향에 대한 (대체로) 우호적인 비판를 제기함으로써 그 책을 시작한다. 이 모든 것들은 점거하라 운동과 최근의 다른 시위 행동들의 두드러진 특징들이었다. 그런데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는 이런 전술들은 "규모가 확대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특수한 사례들에서는 충분히 잘 작동할지도 모르지만, 규모가 더 크고 더 오래 지속되는 반대 운동, 즉 우리의 기본적인 생의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을 운동을 구성하는 경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게 이런 논증 노선은 반박할 수 없는 듯 보이는데, 이 책의 잠재적 독자의 대부분, 특히 일반적 성향이 마르크스주의적이라기보다는 아니키즘적인 사람들을 짜증나게 할 개연성이 높을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조직화 작업―명백히 내 자신은 결코 수행했던 적이 없는 일―의 문제일 뿐 아니라, 정향과 기본적 전망의 문제이다. 지역적이고 수평주의적인 정치적 전술들은 자체적으로 불완전한데, 그것들은 더 전지구적이거나 보편적인 행동 및 참여 양식들에 의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

 

불행하게도,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가 지역주의적 및 수평주의적 전술들을 "통속 정치(folk politics)"로 규정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 유리하지 않다. 그런 명칭은 대단히 내려다보는 듯한 것이다. 그것은 환원주의적인 마음의 철학자와 인지과학자들이 우리 자신에 관한 상식적 믿음과 직관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조롱조의 술어인 "통속 심리학"에서 비유적으로 파생되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직접적으로 자각할 수 없는 많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인지주의자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이것이, 폴 처치랜드가 악명 높게도 서술하듯이, "심리적 현상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관념은 본원적으로 틀린 이론을 구성하"고, 그래서 믿음과 욕망 같은 것들이 정말로 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수반할 필요는 없다. "통속 심리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통속 정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해 양식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는 것과 그것을 전적으로 틀린 망상적인 것으로 일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는 더 포괄적이고 상상력이 더 풍부한 행동 및 이론화 형식이 필요하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지만, "통속 정치"라는 술어가 함축하는 경멸과 비방 없이 이것을 지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처음 몇 장에서 "현대 좌파의 전략적 한계들을 진단하는 부정적인 과업"을 집중적으로 다룬 후에,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는 대안을 상세히 설명하는 긍정적인 기획에 집중한다. 이것이, 최근에 가속주의라는 술어가 띠게된 불필요하게도 도발적인("유치한 좌파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함축들을 자제하면서 그들이 사실상 가속주의적 제안들을 제시하는 지점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좌파는 이십 세기의 대부분 동안 그것이 견지한 근대주의(태도)와 근대성(과정)의 외피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고 넌지시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신기술들을 수용하고 차용하며, 그래서 모든 다양한 지역적 필요와 투쟁 형식들을 포함함으로써 구체적인 특수자들을 제거하지 않은 채 결합시키는 새로운 종류의 보편주의를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들이 횡단성과 초개체성이라는 질베르 시몽동의 관념들 같은 것을 고찰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좌파 정치적 견지에서 이루어진 그런 관념들에 관한 논의에 대해서는 <<초개체성의 정치학(The Pollitics of Transindividuality)>>이라는 제이슨 리드의 새 책을 보라).

 

이것을 넘어서,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는 신기술들이 자본주의를 변환시키고 있는 방식들을 분석한다. 특히 그들은 컴퓨터화와 로봇화가 더욱 더 많은 직업들을 잉여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방식들―이전의 자동화의 물결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종류들의 대체 직업들을 창출하지 않는다―에 집중한다. 우리는 "탈노동 세계"의 문턱에 서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서 그들은 그것들을 둘러싸고 좌파가 단결할 수 있고 단결해야 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요구 사항을 제시한다.

 

완전한 자동화
노동 시간의 단축
기본 소득의 지급
노동 윤리의 약화

 

이런 요구 사항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을 것인데, 명백히 그것들은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그리고 다른 많은 긴급한 필요를 해결하지 못한다. 내 자신은 그 목록에 다섯 번째 요구 사항, 즉 이주의 권리 및 국경의 철폐를 덧붙이고 싶다. 그런데 이것을 덧붙이지 않고서도, 나는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가 나열한 요구 사항들이 사실상 "최소" 프로그램으로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그것들은 오늘날보다도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가 더 강력하게 다루어지고 반대될 수 있는 물질적 조건―굶주림, 무주택 그리고 다른 심각한 욕구 형태들로부터의 자유―을 확립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요구 사항들이 자체적으로 구체적이고 달성 가능한 것―오늘날 세계는 그것들을 실현하기에 충분할 만큼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선진적이다―일지라도, 그것들의 충족은 대규모의 경제적 전환, 사회적 전환 그리고 정치적 전환―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게 할 전환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요구 사항들을 둘러싸고 좌파가 단결할 수 있더라도, 그것들을 실제로 달성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업일 것이다. 분별력이 있게도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이 인식한다.

 

탈노동 사회가 유의미한 전략적 선택지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좌파의 권력―대체적으로 해석되는―이 재구축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공통 감각을 전복시키고 '근대화', '일' 그리고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을 다시 분명하게 표명하고자 하는 광범위한 반패권적 기획을 포함할 것이다.

 

이런 노선들을 따라 그들은 다양한 구체적인 제안을 제시하는데, 대부분이 훌륭하다. 특히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즉각적인 결과를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승부를 걸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개혁"과 "혁명"―이제는 구식이 되어버린 대안―사이의 오랜 논쟁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대규모의 경제적 및 정치적 전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현장에서 변화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을 예시하기 위해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는 필립 미로우스키를 좇아서 이차 세계대전 직후 주변부 집단에서 1980년 이후 세계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세력으로 이행된 "신자유주의적 사상 집단"의 역사를 추적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례와 관련하여 착잡한 느낌이 든다. 신자유주의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상 인내, 간지, 장기적으로 주시하기 그리고 정치를 바꿀 수 있으려면 더 넓은 사회의 "공통 감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기의 미덕들을 예증한다. 즉각적인 것을 넘어서는 결과에 관심을 기울이는 "좌파의 몽 펠르랭"을 갖는 것은 확실히 해롭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자들의 장기적인 성공은 돈과 여론 기관들에 그들의 접근권과 많이 관련되어 있다. 전후 시기에 자본가 계급이 케인즈주의적 타협책을 수용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항상 그들의 부, 권력 그리고 영향력을 증진시킬 뿐인 새로운 구성체를 기꺼이 추종했다. 이데올로기적 패권은 다른 수단에 의한 계급 투쟁의 일종이다. 좌파의 반패권 기획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주변부 세력에서 정책 입안의 중심으로 이행할 대 가졌던 그런 종류들의 자원을 결코 장악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 프레드릭 제임슨이 서술했듯이, 더 큰 핵심은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주의는 적절한 마르크스주의적 정치 이론을 위한 여지를 거의 남기지 못하는 순전한 경제 이론인 듯 보인다고 지금까지 흔히 아쉬워했다. 나는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이며, 정치 이론과 정치 철학은 항상 부대현상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정치는 어떤 이론이나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방심 않는 기회주의의 문제이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이런 저런 식으로 대중 민주주의를 재규정하려고 하는 현재의 노력도 자본주의 자체의 본성과 구조라는 중심 쟁점으로부터의 일탈이다. 만족스러운 정치적 해결책이나 체계들은 결코 있을 수 없지만, 더 나은 경제적 해결책이나 체계들은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좌파는 그것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정치를 무시할 수 있다고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은 경제적 질서의 구성이라는 과업은 언제나 깊은 정치적 참여를 필요로 할 것이다. "탈노동" 경제를 위한 물질적 조건에 대한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의 분석은 꽤 훌륭하다. 그런데 그들이, 지난 세기에 걸쳐서 거의 모든 "서양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도약할 때 약간 너무 서두른다는 점은 여전히 남는다.

 

그런데 나는 그런 부정적인 진술로 내 논평을 끝내고 싶지 않다. 내가 보기에, <<미래를 발명하기>>의 최대 강점은 그것이 우리의 주의를 과거 대신에 미래를 향해 돌리게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좌파의 큰 문제는 이십 세기 중반 복지 국가의 유산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구출하고자 하는 퇴영적인 방어적 기획에 너무나 오랫동안 묶여 있었다는 점이다. 이십 세기 중반 사회민주주의에 의해 제공된 안전망의 상실을 한탄하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하지만, 그런 복지 수당의 회복은 급진적인 경제적 및 정치적 프로그램에 연료를 공급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실리콘 밸리와 헐리우드로부터 우리의 미래 감각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가 이 의 말미에서 서술하듯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날에 대비하기 위해 좌파는 배터리 수명과 계산 능력의 하찮은 개선책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경제의 탈탄소화, 우주 여행, 로봇 경제의 꿈―과학 소설의 모든 전통적인 초석―들을 동원해야 한다.

 

오늘날 탈자본주의(또는 더 나은 표현으로, 이 책에 부재하는 다른 한 낱말을 사용하면, 코뮤니즘)는 과학 소설적 지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아무튼 끝없는 신자유주의적 현재에 겨우 여전히 떠돌고 있는 숨은 잠재태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지배자들은 이 잠재태를 완전히 퇴치하지는 못했지만, 여태까지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것에 어떤 종류의 실체성이나 지속성을 부여할 수 없었다. <<미래를 발명하기>>는 이런 교착 상태를 벗어나서 (모든 훌륭한 과학 소설이 그렇듯이) 실제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외삽하는 듯 보인다. 이것이 이 책의 미덕이고 중요성이다.

 

 

 

 

 

-. 출처

 

https://blog.daum.net/nanomat/1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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