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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안토니오 네그리- 「가속주의자 정치를 위한 선언」에 대한 성찰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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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란

최대한 원문을 존중하여 양식을 그에 맞추었음을 들어가기에 앞서 알린다.

 

 

 

https://jwiki.kr/rhymix/index.php?mid=info&document_srl=26719

선언문은 이곳을 참조할 것.

 

 

 

Antonio Negri (cropped).jpg

 

 

 

「가속주의자 정치를 위한 선언」(이하 MAP 혹은 「선언」)은 현재의 위기의 극단적인 시나리오, 즉 대재앙에 관한 광범한 인식으로 시작한다. 미래에 대한 부정. 임박한 파국.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자! 여기에는 어떠한 정치-신학적인 것도 없다. 그런 것에 끌리는 사람이라면 이 「선언」을 읽어서는 안 된다. 「선언」에는 또한 오늘날의 담론에서 보이는 어떠한 상투어도 없는데,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지구 기후체계의 붕괴가 그것이다. 물론 기후체계 붕괴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산업정책들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어서 산업정책에 대한 비판을 깔고 갈 때에만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선언」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점점 더 늘어나는 생산과정에서의 자동화”이며, 여기에는 자본주의의 세속적 위기를 설명할 수 있는 “지식 노동”(MAP 01.2)의 자동화가 포함된다. 파국주의? 맑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개념에 대한 잘못된 해석?1)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선언」에서 위기의 현실은 19-20세기의 ‘사회적 국가’ 안에서 조직된 계급관계 구조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 확인된다.2) 이 위기의 원인에는 생산적 능력의 발휘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적 명령이 산 노동의 새로운 형상에 맞서 취했던 새로운 형태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3)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의 정치적 잠재력에 반작용하면서 그 힘을 봉쇄해야 했다.

 

이러한 논의는 우파정부와 좌파의 나머지 대부분4)을 혹독하게 비판한 뒤에 나온 것이다. 좌파들은 (기껏해야) 케인즈주의적 저항이라는 새롭지만 실현불가능한 가설에 기만당하곤 했으며, 급진적인 대안을 전혀 상상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정치적 상상력은 완전히 마비되고 미래는 무효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 조건에서 자생적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 노동자들의 새로운 정치적 조직화와 더불어, 계급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경제의 구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할 때에만 헤게모니의 재구성을 가능하게 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가능한 미래가 쥐어질 수 있다.

 

여전히 전복적 지식을 위한 공간은 남아있다!

 

– 이것은 국가-형태를 거꾸로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권력에 맞선 활력, 즉 삶권력에 맞선 삶정치를 지시한다.

 

「선언」의 이러한 도입부는 오늘날의 코뮤니즘적 과업에 부합한다. 그것은 단호하면서도 결정적인 도약을 나타낸다. 우리가 혁명적 성찰의 영역에 들어서길 원한다면 이러한 도약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것은 운동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다. 여기서 새로운 “형태”란 잠재력으로 충만한 구성적 장치를 의미하는데, 이는 국가의 보조를 받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지평을 깨부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것은 국가-형태를 거꾸로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권력에 맞선 활력, 즉 삶권력에 맞선 삶정치를 지시한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해방적인 미래의 가능성이 현재의 자본주의적 지배와 근본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전복적인 실천의 유일하게 합리적인 (결론이라기보다는) 전제를 구성하는 “하나가 둘로 나뉜다”라는 공식을 실험할 수 있다.5)

 

 

 

자본주의의 경향 안에서 그에 맞서기

 

「선언」이 전개되는 방식을 살펴보자. 그들의 가설은 자본주의가 규정한 장애물에 맞서서, 노동이 지닌 잠재력의 해방은 자본주의 자체의 진화 안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계급관계의 완전한 역전을 촉발하기 위해서 경제 성장과 기술 진화(둘 다 사회적 불평등의 증가를 수반한다)를 추구하는 것이다. ‘안에서 그에 맞서’라는 오페라이스모의 전통적 후렴구가 다시 나온 것이다.6) 해방의 과정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속화할 때에만 발생할 수 있는데, 이때 “속도와 가속”(MAP 02.2)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가속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규정한 가능성들의 공간 안에서의 동력장치, 즉 발견 및 창조의 실험과정의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선언」에서 맑스의 “경향” 개념은 발전의 한계들에 대한 공간적 분석과 짝을 이루는데, 이 분석은 “땅”(terra)으로서의 영토, 말하자면 (들뢰즈․가타리의 고유개념인)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모든 과정을 강조한다. 나아가 더 근본적인 요소인 인지적 노동의 힘이 있다. 이 힘은 자본주의에 의해 규정되지만 그에 의해 억압되며, 자본주의에 의해 구성되지만 점점 더 늘어나는 지배의 알고리즘적 자동화로 인해 축소된다. 이 힘은 (인지 노동이 가치생산을 증가시키므로) 존재론적으로는 가치를 증식시키지만 화폐나 훈육의 관점에서는 (위기에서만이 아니라 국가-형식을 발전시키고 관리하는 그 모든 이야기들에서도) 무가치하다. 혁명적 가능성은 20세기의 노동계급의 부활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여전히 희극적으로 믿고 있는 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인지노동의 이러한 힘은 여전히 어떤 계급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그들이 그와는 다른 계급, 더 우월한 힘을 지닌 계급인 인지노동 계급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해방되려는 계급이자,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어야만 하는 계급이다.

 

– 해방의 과정은 자본주의 발전을 가속화할 때에만 발생할 수 있어…

– 핵심적인 문제는 인지노동의 잠재적인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일

 

이런 식으로 맑스와 레닌의 경향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복원된다. 「선언」에는 이른바 모든 “미래주의적” 환상이 제거되는데, 여기서는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운동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그 최고도의 추상을 굳건한 투쟁 기계로 전환시키는 능력도 규정하기 때문이다.

 

「선언」의 담론은 전적으로 이러한 인지노동의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능력에 기반한다. 우리는 포드주의적 노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모든 환상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는 결국 물질적 노동에서 비물질적 노동으로의 헤게모니 이행을 포착해야 한다. 따라서 테크놀로지에 대한 자본의 명령을 고려한다면, “테크놀로지에 대한 점점 더 늘어나는 자본의 퇴행적 접근”(MAP 03.3)을 공격할 필요가 있다. 생산력은 자본의 명령에 의해 제한된다. 그래서 핵심적인 문제는 혁명적 유물론이 늘 그랬듯, 잠재적인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바로 이 “잠재성”이 우리가 거(居)해야만 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선언」이 줄곧 조직화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이 우연이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선언」은 오늘날의 운동들에서 발전시킨 “수평적”이고 “자생적”인 조직화 개념과 그 운동들이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절차적 민주주의”(MAP 03.13)로 이해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선언에 따르면, 이러한 것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물신화된 규정들에 불과하며, 이것으로는 자본주의가 통제하는 제도들에 관한 어떠한 유효한 결과(해체나 구성)도 만들어낼 수 없다. 이런 비판은 금융자본과 그것의 제도적 물질화에 (비록 대안이나 적절한 도구는 없지만) 대항하는 현재의 운동들을 고려한다면 과도한 것일 수 있다. 혁명적 변혁의 때가 왔을 때, 우리는 분명 강력한 제도적 이행을 회피할 수 없으며, 이 이행은 민주적 수평주의가 지금까지 제안했던 것보다는 더 강력할 것이다. 경향에 대한 우리의 추상적 지식을 탈자본주의의 구성적 힘으로, 도래할 코뮤니즘적 제도들로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혁명적 도약의 전후로 계획은 필수적이다. 「선언」에 따르면, 이러한 “계획”은 더 이상 노동계급 사회에 대한 국가의 수직적 명령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계획”은 어떤 방향을 가진 생산적 능력들을 네트워크로 수렴시키는 형태를 취해야만 하며, 이후 “계획”을 더 정교화시키는 과업이 뒤따라야 한다. 즉 투쟁을 계획하는 것이 생산을 계획하는 것 이전에 온다. 우리는 이 점을 뒤에서 논할 것이다.

 

 

 

고정자본의 재전유


다시 돌아와 보자. 먼저 「선언」은 인지노동의 힘을 그 잠재력에서 떼어내 펼치고자 한다. “우리는 근대의 기술사회적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직 알지 못한다”(!)(MAP 03.6) 여기에서 「선언」은 두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는 우리가 “고정자본의 재전유”나, 그에 뒤이은 노동하는 주체의 ‘인류학적 변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7) 둘째는 사회정치적인 것으로, 우리 신체들의 그러한 새로운 잠재력은 그 본질상 집단적이고 정치적이다. 다시 말해, 생산에서 [그리고 고정자본의 재전유에 의한 잠재력의 경향적 발전에서]8) 추가된 잉여는 그 본질상 사회적인 생산적 협력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선언」의 가장 결정적인 측면일 것이다. 「선언」은 철학적 비판이 지닌 인간주의를 약화시키고 불필요하게 만들면서 고정자본의 육체적 재전유가 띠는 물질적·기술적 특성들을 주장한다. 노동자 주체들은 교육과 과학을 통해 생산의 수량화, 경제적 모델링, 빅데이터 분석, 그리고 가장 추상적인 인지 모델 등을 모두 전유한다. 자본이 수학적 모델과 알고리즘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자본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것인가는 수학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선언」에는 어떤 낙관주의가 존재한다. 기술사회적 신체에 대한 이러한 낙관적 관점은 인간과 기계가 맺는 복잡한 관계를 비판할 때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마키아벨리적 낙관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가장 절박한 문제인 조직화에 관한 논의에 뛰어들 수 있게 해준다. 일단 논의가 의 문제로 돌려진다면, 그것은 곧바로 조직화의 문제로 나아가게 된다. 「선언」에 따르면, 좌파는 사회기술적 헤게모니를 발전시켜야 한다. “생산, 금융, 로지스틱스[물류], 그리고 소비 등의 물질적 플랫폼들은 탈자본주의적 목표를 향해 재프로그래밍되고, 재설정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될 것이다.”(MAP 03.11) 의심의 여지없이, 여기에는 객관성과 물질성에 대한, 일종의 발전의 현존재(Dasein)에 대한 강력한 의존이 있으며, 그 결과 앞서 제시한 기초적 명제인 “하나가 둘로 나뉜다”에 동의하는 한 전제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정치적․협동적 요소들에 대한 과소평가가 있다. 그러한 과소평가가 자본주의적 명령이나 노동의 추상화에 의해 사용된 최고도의 기술들을 우리가 획득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 기술들을 “물자체에 의해” 수행되는 코뮤니즘적 경영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들의 기술사회적 헤게모니에 대한 구절들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새로운 헤게모니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인지노동의 모든 생산적 잠재력들의 복합체를 성숙시켜야 한다고.

 

 

 

새로운 제도들의 생태학

 

이 지점에서 조직화의 문제가 적절하게 제기된다. 앞서 말했듯이, 네트워크와 계획의 새로운 관계설정이 극단적인 수평주의에 반대하여 제기된다. 이들은 일체의 평화로운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관에 맞서, 수단(투표, 민주적 대의, 입헌국가 등)에서 목적(집단적 탈거(脫去/emancipation)와 자치(self-goverment))으로의 이행에 새로이 주목한다. 저자들이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새로운 환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공허한 재해석을 반복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선언」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는데, 그들이 일종의 “조직화의 생태학”(MAP 03.15)을 제안하고, 또한 다양한 세력들이 서로 공명하고 따라서 일체의 분파주의를 넘어서 집단적 의사결정의 동력을 생산하고자 하는 틀을 주장한 것이 그렇다. 누군가는 이러한 제안을 두고 [행복한 선택지가 아니라 더 큰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 아닌가하는]9) 의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이다. 이것은 2011년에 시작된 투쟁의 순환이 막바지에 이른 오늘날 훨씬 더 분명하다. 이 투쟁의 순환 모두는 그들이 보여준 강력함과 새롭고도 천재적인 혁명적 내용들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충돌하는 내내 조직화 형태와 관련해 극복하기 힘든 한계들을 드러낸 바 있기 때문이다.

 

「선언」은 일단 적절하면서도 현실적인 세 개의 긴급한 목표를 제안한다.10) 첫째, 새로운 종류의 지식 기반을 건설해 새로운 이상적 기획과 새로운 경제모델의 연구를 지원하자는 것이다. 둘째, 주류 언론 영역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조직하자는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는 의심의 여지없이 전지구적 투쟁에서 매우 유용했고 또 소통을 민주화시켰지만, 소통은 그 가장 전통적인 형태들에 여전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절한 소통수단을 우리 손에 쥐기 위해서 거대한 자원들과 모든 가능한 에너지들을 집중시키는 일과 관련이 있다.]11) 셋째, 계급권력의 모든 가능한 제도적 형태들(일시적 형태, 영구적 형태, 정치적 형태, 조합주의적 형태, 전지구적 형태, 지역적 형태 등)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때 계급권력의 통합적 구성은 오로지 지금까지 발전시킨 모든 경험들 그리고 앞으로 발명되어야 할 경험들의 배치(assemblage) 및 잡종화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미래는 구축될 필요가 있다”(MAP 03.24)는 계몽주의적 열망이 「선언」 전체를 관통한다. 프로메테우스적이고 인간주의적인 정치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이때의 인간주의는 자본주의 사회가 부여한 한계를 뛰어넘어 포스트휴먼과 과학적 유토피아를 향해 열려 있는데, 이는 20세기 우주탐험의 꿈을 부활시키고, 죽음 그리고 삶의 모든 우발적 사고들이 침투할 수 없는 철통같은 새로운 장벽을 구상해낸다. 합리적 상상력이 노동과 사회의 강력한 자기-가치화를 조직하면서 새로운 세상이라는 집단적 판타지와 결합되어야 한다. 우리가 경험했던 것 중에서 최고의 근대기인 오늘날의 시대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전지구화 내부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더 이상 외부는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미래를 재구성하는 문제를 다시금 정식화하면서, 내부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외부를 내부로 끌고 올 필연성(necessity)(및 가능성)을 가진다.

 

– 합리적 상상력이 노동과 사회의 강력한 자기-가치화를 조직하면서

새로운 세상이라는 집단적 판타지와 결합되어야 한다

 

이 글에 대해 무엇이 얘기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이것을 포스트오페라이스모 관점에 대한 앵글로색슨적 보완으로 보았다. 즉 사회주의적 인간주의를 부활시키는 쪽보다는 새로운 긍정적 인간주의를 발전시키는 쪽으로 말이다. “가속주의”는 분명 불행한 이름인데, 그것이 “미래주의”의 의미를 전혀 미래주의적이지 않은 어떤 것에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2011년 이후의 사회운동들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시의적절하다. 이것은 지극히 강력하게 자본주의의 발전 경향 및 그것을 재전유하고 파괴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선언」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코뮤니즘적 프로그램의 구축으로 나아간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인한 다리(leg)들이다.

 

 

 

기술정치학의 문턱


이 지점에서 몇 가지 비판은 논의를 재개시키면서, 우리가 그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 지점까지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첫째, 이들의 기획에는 너무 과도한 정치적․기술적 결정론이 존재한다. 역사성과의 관계(또는 다른 식으로는 역사와의 관계, 우리 시대와의 관계, 실천과의 관계 등)는 목적론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어떤 것에 의해 왜곡될 위험이 있다. 내 생각에 그들은 특이성들과의 관계, 따라서 경향을 (특이성들을 포함해) 가상실효적인(virtual) 것으로 이해하는 능력, 그리고 물질적 규정을 (경향을 앞으로 밀어붙이는) 주체화(subjectivization)의 힘으로 이해하는 능력 등을 과소평가했다. 경향은 오로지 열린 관계로서, 그리고 계급 주체들에 의해 생명력이 불어넣어지는 구성적 관계로서만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개방성에의 주장이 그릇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가령 그들이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혼돈에 빠질 것이고 따라서 해결이 안 되는 상태에 이를 것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즉 다양성이 확대되고 너무나 거대해져서 악무한에 빠질 것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악무한”이 포스트오페라이스모나 심지어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조차 고민에 빠지게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어려우면서도 결정적인 문제이다. 자, 더 깊이 파보자.

 

이 문제에 대해 「선언」은 괜찮은 해법을 내놓았는데, 노동자의 신체들에 대한 변형적 인류학을 바로 주체와 대상의 관계의 중심에 위치시킨 것이 그것이다. (다른 용어법에 관습적으로 익숙해있던 나는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기술적 구성정치적 구성이라고 불렀다.)12) 이런 식으로 다원주의가 “악무한”에 휩쓸리는 것이 피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이러한 기반 위에 있길 원한다면(나는 이것이 유용하고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선언」이 의존하는 ‘누그러지지 않는 생산적 긴장의 진보’(the relentless progression of productive tension)와 단절해야 한다. 우리는 발전의 문턱과 이러한 문턱의 강화/공고화(consolidation), 즉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의] 집합적 배치(agencements collectifs)라고 불렀던 것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강화에는 고정자본의 재전유와 노동력의 변형이 있으며, 이것이 인류학들, 언어들, 활동들을 구성한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구성된 문턱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기술적 구성과 정치적 구성의 관계 안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강화가 없다면 정치적 프로그램은 (그것이 너무나도 일시적인 만큼) 불가능하다. 한때 우리가 방법론적으로 무력하고 정치적으로 무력했던 것은 바로 기술적 구성과 정치적 구성의 이러한 관계를 규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역사적 문턱을 규정하고 기술정치적 관계들의 특정한 양상을 인식하는 것은 조직화 과정과 적절한 행동강령 모두를 정식화하게 한다.

 

명심할 것은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생산적 경향의 진보적 성격을 인식하면서) 특이성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가 자라나고 강화/공고화되는 과정을 어떻게 더 잘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를 암묵적으로 제기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생산의 인류학이라는 특수한 연구를 발전시키는 가운데 모든 기술적 배치 안에서 공통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특정할 필요가 있다.

 

 

 

협력의 헤게모니


고정자본의 재전유 문제로 되돌아가자. 앞서 지적했듯이, 「선언」에서 생산의 협력적 차원 (그 중에서도 특히 주체성들의 생산)은 기술적 기준과 관련해서 보면 과소평가되어 있다. 생산성의 기술적 한계는 차치하고서라도, 생산의 물질적 측면들은 사실 노동력의 인류학적 변형 또한 형성한다. 내 논점은 여기에 있다. 협동적 요소는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일련의 언어, 알고리즘, 기능 및 기술적 노하우에서 중심적이 되고 있으며, 그래서 가능한 헤게모니를 드러낸다. 이러한 진술은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 자체가 이제는 바뀌었다는 데에 주목하면서 나온 것이다. 자본은 계속해서 착취하지만, 사회 전체에서 잉여 노동을 추출하는 힘과 견줘보면 역설적이게도 착취는 그 형태가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규정을 알게 되면 우리는 고정자본(즉 잉여가치 생산에 직접적으로 포함된 자본부분)이 본질상 협력에 의해 규정된 잉여 안에 자신을 설립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협력은 측정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맑스에 따르면, 협력은 두 명 이상의 노동자들의 잉여 노동의 총합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일한다는 사실에 의해 생산된 잉여의 힘이다. 간단히 말해 이 잉여는 총합 그 이상이다.13)

 

우리가 착취 자본에 대한 추출 자본의 우위(전자가 후자로 되는 것을 포함해서)를 가정한다면,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간단히 한 가지만 언급해보자.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의 이행은 한 때는 공장에는 “자동화”를 적용하고, 사회에는 “정보화”를 적용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후자[사회의 정보화]는 사회가 자본에게 완전히 포섭(‘실재적 포섭’)되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실제로 정보화가 이러한 경향을 번역하면서 이끌고 있다. 더욱이 정보화는 자동화보다 더 중요한데, 자동화는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그 자신에 의해 그저 부분적이고 불안정한 방식으로 새로운 사회형태를 특징지었을 뿐이다. 「선언」이 명확히 밝히고 또 경험이 확인시켜주듯이, 오늘날 우리는 이 지점을 완전히 넘어서 있다. 생산적 사회는 전지구적으로 정보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컴퓨터화된 사회 세계가 노동시장 관리에서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그리고 사회 관리에서는 새로운 위계적 척도에 따라 스스로를 재조직화하고 자동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생산이 인지노동과 사회적 지식을 통해 사회적으로 일반화될 때, 정보화는 가장 가치있는 고정자본의 형태가 된다. 그에 반해 자동화([우리는 자동화를, 더 이상 공장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들의 사회적 활동에 개입하는 ‘직접적 생산과정의 기술적 구조화’로 이해한다])는 자본주의적 조직화를 단단하게 만들면서 정보과학([자동화는 정보과학을 자신의 도구로 만든다]14))과 정보사회 모두를 자기 쪽으로 구부러지게끔 만든다. 그런 식으로 정보기술은 자동화에 종속된다.

 

자본주의적 알고리즘의 통제는 이처럼 생산을 통제하는 방식의 변형을 특징짓는다. 그렇게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의 실재적 포섭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로지스틱스가 맡은 역할이 커지고 자동화되게 되면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명령의 일체의 모든 영토적 차원을 배열하고, 전지구적 공간의 내적․외적 위계들을 확립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알고리즘적 기계가 빈도 및 변수를, 추상의 정도와 지식의 분야에 따라 통제하고 또 중앙집중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맑스 이래로 우리는 이러한 복잡한 지식체계를 ‘일반지성’으로 부르는 데 익숙해있다. 그런데 만일 추출 자본주의가 자신의 착취의 힘을 확장하면, 즉 외연적으로는 사회의 모든 하부구조에 대해, 내포적으로는 생산적 기계의 모든 추상화 정도(가령 전지구적 금융의 모든 수준)에 대해 확장하면, 그러한 실천적·이론적 공간 내에서는 반드시 고정자본의 재전유를 둘러싼 논쟁이 재개될 것이다. 새로운 투쟁들의 구축은 그러한 공간을 따라 가늠되어야 한다. 고정자본은 잠재적으로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재전유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해방되어야만 할 잠재력인 것이다.

 

 

 

공통적인 것의 화폐와 노동 거부


「선언」이 누락시켰지만, 그들의 이론적 주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마지막 한 가지 주제는 “공통적인 것의 화폐”이다. 「선언」의 저자들은 오늘날 화폐가 하나의 추상기계로서 특수한 기능을 갖고 있음을, 즉 화폐는 자본이 현재 사회의 실재적 포섭을 통해 추출한 가치를 측정하는 가장 최상위의 척도 형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노동력의 추출/착취를 기술하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화폐가 척도-화폐, 위계-화폐, 계획-화폐임을 인식하게 해준다. 이러한 화폐의 추상은 금융 자본이 그 자체로 헤게모니적이 되고 있는 경향만큼이나 또한 마찬가지로 잠재적인 저항 및 전복의 형태들이 최고의 수준에 있음을 시사한다. 탈자본주의적 미래를 위한 코뮤니즘적 프로그램이 실행되어야 하는 곳은 바로 이 영역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부의 재전유를 진전시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헤게모니적 힘을 쌓아올리는 것을 통해, 따라서 가장 고도로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추출/추상하는 토대이자 그것의 화폐로 보편적으로 번역하는 토대인 “공통적인 것” 위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공통적인 것의 화폐”가 의미하는 바이다. 여기에 유토피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투쟁 안에서 자본이 부과한 노동 척도와 사장이 직접 부과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간의 위계,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가 부과한 사회적 총소득분배 등에 대한 공격을 예상하는 방법인 계획적(programmatic)이고 패러다임적인 지표가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여전히 많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자본주의의 경향을 그 끝까지 밀어붙여보고,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자체를 패배시킨다

 

결론지어 보자. (아직 논의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지만!) 자본주의의 경향을 그 끝까지 밀어붙여보고,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자체를 패배시킨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그것은 “노동거부”의 구호를 재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알고리즘적 자동화에 맞서는 투쟁은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생산성의 증가를 긍정적으로 포착해야 하고, 이어서 기계에 의해 훈육 및 통제되는 노동시간이 극적으로 줄어들도록 밀어붙이야 하며, 또한 동시에 임금을 지속적이면서도 점점 더 실질적으로 증가하게 만들어야 한다. 한편으로 자동기계를 사용하는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조정되어야 한다.15)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모든 형상을, 집단적 부를 구성하는 데 있어 모두 동등하게 참여한 것으로 인정하도록 번역하기 위해서 ‘기본소득’이 반드시 도입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이들은 (맑스의 푸리에 평가를 반복하면) 그들 자신의 ‘삶의 기쁨’(joie de vivre)을 최고로 누릴 능력을 자유롭게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직접적으로 투쟁을 통해 요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주제를 열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그것은 주체성 생산, 열정의 전투적(agonistic) 사용, 그리고 자본주의적 명령과 주권적 명령에 맞서는 가운데 개시되는 역사변증법(historical dialectic/dialettica storica) 등이 그것이다.

 

 

 

 

 

원문 각주

  1. “이윤율 저하 경향”은 정치경제학의 고전적인 문제이다. 맑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장기간에 걸친 이윤의 하락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잠재적 내파를 묘사한다. 이에 대해서는 맑스의 자본론 3권, 13장을 보라.

  2. [옮긴이주] 영어번역에서는 18-20세기로 되어 있지만, 이는 이탈리아 원문의 ‘19(XIX)세기’의 오기이다. 또한 영역은 원문의 ‘사회적 국가’(Stato sociale)를 ‘복지국가’(welfare state)로 번역했는데, 네그리는 근대적인 국가형태가 18-19C의 자유주의 국가에서 19-20C에는 국가가 직접적으로 사회적 통제를 주도하는 ‘사회적 (계획)국가’로 이행되었다고 보면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그러한 형태를 띤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사회적 국가’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에 대해서는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디오니소스의 노동 1󰡕, 이원영 옮김, 갈무리, 1996, 특히 2-3장을 참고하라. 나아가 네그리의 국가형태 비판을 개괄적으로 정리하는 것으로, 마이클 하트, 󰡔네그리 사상의 진화󰡕, 박서현․정남영 옮김, 갈무리, 2008을 보라.

  3. [옮긴이주] 가령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대량해고와 ‘외주화’, 생산의 자동화 등을 통해 노동자들 간의 사회적 협동능력을 그 근본에서 파괴하고, 이후에는 노동자들을 빈곤과 불안정노동 속에서 서로 극한적으로 경쟁하게 만드는 전략을 사회 전체에 관철시켰는데, MAP의 저자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북반구의 중산계급조차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위기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4. [옮긴이주] MAP의 저자들은 “오늘날 좌파의 분열”이 “전통적 좌파와 가속주의 정치”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보면서, 전통적 좌파들에 ‘각국의 좌파정당’, ‘남미 사회주의 정부’, ‘신사회운동 세력’ 등을 거론한다.

  5. “하나가 둘로 나뉜다(一分爲二)”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비가역적인 계급 분화를 지시한다. 특히 이 용어는 1960년대 중국의 마오주의에서 자본주의의 정치적 재구성(“둘이 하나로 합쳐진다(合二而一)”)을 비판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Mladen Dolar, “One Divides into Two”, e-flux journal 33(March 2012) www.e-flux.com/journal/one-divides-into-two/를 보라.

  6. ‘사회적 공장’에 대한 마리오 뜨론띠(Mario Tronti)의 글(“La fabbrica e la società”, Quaderni Rossi, no. 2, 1962) 이래로, 그리고 이탈리아 오뻬라이스모의 전통을 관통하는 “자본 안에서 그에 맞서기”는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적 발전이 발생시킨 모순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계급은 “자본 바깥에” 있지 않다.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밀어붙이는 엔진이기 때문이다.

  7. 맑스(그리고 전통적으로는 정치경제학)에게 “고정자본”은 건물, 기계 및 기반시설 같은 고정된 자산에 투자된 돈을 지칭하며, 원료나 노동자의 임금을 포함한 “유동자본”과 대립된다. 포스트포드주의에서는 고정자본에, 정보 기술, 1인 미디어, 그리고 소프트웨어․특허 및 집단지식 형태 같은 무형의 자산이 포함된다. 그래서 “고정자본의 재전유”는 노동자들의 집단성에 의한 생산능력의 (가치형태나 복지형태를 포함한) 재전유를 지시한다.

  8. [옮긴이주] 이 구절(nel tendenziale sviluppo delle potenzialità costituite dall’appropriazione di capitale fisso)이 영어 번역에는 누락되어 있다.

  9. [옮긴이주] 영어 번역에는 누락되어 있다.

  10. [옮긴이주] 「선언」의 3가지 목표는 이렇다. 첫째, “우리는 지식기반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둘째, “우리는 대규모의 미디어개혁을 단행할 필요가 있다.” 셋째,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계급권력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MAP 03.16-18)

  11. [옮긴이주] 영어 번역에는 이 문장(Si tratta di concentrare ingenti mezzi e tutte le energie possibili allo scopo di mettere le mani su mezzi di comunicazioni adeguati)이 누락되어 있다.

  12. ‘계급구성’은 1960년대에 전형적이었던 “계급의식”에 관한 진부한 논쟁을 극복하려고 이탈리아 오뻬라이스모가 도입한 개념이다. ‘기술적 구성’은 특정한 경제 체제 내에서의 노동의 모든 물질적․문화적 형태를 지시한다. ‘정치적 구성’은 이러한 형태들과의 충돌 및 그 형태들을 정치적 기획으로 변형하는 것을 지시한다. 주어진 기술적 구성이 자동적으로 탁월한(virtuous) 정치적 재구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13. 표준적인 말을 인용하면, “개별 노동자들의 기계적인 힘의 총계는 많은 사람이 동시에 동일한 불가분적인 작업에 참가할 때 발휘되는 사회적 역량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Ⅰ(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95, 13장 「협업」, 416쪽.

  14. [옮긴이주] 영어번역에서는 한 문장(chiamiamo così la strutturazione tecnologica del comando produttivo diretto che interviene non più semplicemente all’interno della fabbrica, ma nell’attività sociale dei produttori)과 한 구절(facendone un utensile)이 각각 누락되어 있다.

  15. [옮긴이주] 영어번역에서는 이것을 설명하는 한 문장이 누락되어 있다. (탈자본주의 시대의 사안, 하지만 이것은 그런 점에서 투쟁의 당면목표를 형성한다.) (nell’epoca post-capitalista – ma questo significa da subito formulare in questo senso gli obiettivi di lotta)

 

 

 

-. 출처

 

https://ecosophialab.com/%EC%95%88%ED%86%A0%EB%8B%88%EC%98%A4-%EB%84%A4%EA%B7%B8%EB%A6%AC-%EF%BD%A2%EA%B0%80%EC%86%8D%EC%A3%BC%EC%9D%98%EC%9E%90-%EC%A0%95%EC%B9%98%EB%A5%BC-%EC%9C%84%ED%95%9C-%EC%84%A0%EC%96%B8%EF%BD%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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