滿州에서의 日本의 鐵道戰略
Japan's Railway Strategy in Manchuria
< 목 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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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Ⅱ. 滿州事變 이전의 滿州鐵道戰略 1. 滿州事變 이전의 滿鐵 가. 南滿州鐵道의 획득과 발전 2. 東北交通委員會 가. 奉天軍閥과 鐵道 |
Ⅲ. 滿州事變 이후의 滿州鐵道戰略 1. 滿州鐵道戰略 가. 滿州鐵道의 장악 나. 滿州國과 소련 Ⅳ. 결론 |
ABSTRACT
이 글은 滿州지역에서의 일본의 鐵道戰略에 대해 살펴보며, 철도가 關東軍으로 대표되는 일본군의 滿州侵略에 미친 영향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본다. 이를 위해서 滿州에서 철도가 부설되는 과정과, 러시아와 일본이 滿州에서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철도를 통해 펼쳤던 여러 전략들과 철도의 가치를 선행적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외세의 압력에 중국정부, 특히 동북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인 奉天軍閥이 東北交通委員會를 통해 대항하는 과정을 알아보고, 이어지는 滿州事變과 철도의 영향에 대해 생각해본다. 滿州國의 성립 이후 일본이 철도를 군사적으로 사용한 방향에 대해 분석하고, 關東軍의 對소련 군사작전을 살펴보며 철도와 군사작전의 관련성에 대해 살펴본다.
Key words : 滿州鐵道, 關東軍, 滿鐵, 東北交通委員會, 中東鐵道, 滿州事變
Ⅰ. 서론
만주는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져온 한민족의 활동무대이자,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던 조선의 민중들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동하였던 생존의 터전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던 만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고구려, 발해 등 만주를 기반으로 한 고대국가들에 대한 연구도 동북아역사재단을 비롯한 여러 학술단체들을 통해 활성화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치하의 만주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상황이며, 특히 만주국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던 滿鐵에 대한 논문은 위의 두 주제와 비교하였을 때 현저히 적다. 만철에 대한 논문들도 만철의 운영, 수송력 측면에서 다룰 뿐 국책기관인 만철의 철도전략을 군사적인 측면에서 조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임채성의 <전시하 만철의 수송전>의 경우 중일전쟁 이후의 만철의 통제수송, 계획경제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郭洪茂의 <滿鐵과 滿洲事變 - 9ㆍ18事變>은 만주사변에 만철이 관동군에 어떻게 협력하였는가를 다루면서 만철의 수송능력을 살펴보고 있을 뿐, 전반적인 군사적 측면에서의 철도전략을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만주철도를 둘러싼 일본과 중국의 경쟁은 김지환의 <만철과 동북교통위원회>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이 논문 역시 만철의 철도정책을 군사적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満州経営委員会1) 에서부터 시작한 만철과 만주철도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고, 奉天軍閥의 포위전략과 만철의 대응을 살펴보며 만주의 철도가 일제에 장악되는 과정을 철도전략의 군사적 측면에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關東軍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여 일본군의 만주철도전략의 군사적 의미를 밝혀낼 것이다.
Ⅱ. 滿州事變 이전의 滿州鐵道戰略
1. 滿州事變 이전의 滿鐵
가. 南滿州鐵道의 획득과 발전
南満州鉄道株式会社는 満州経営委員会에서 출발하였는데, 만철의 설립에 있어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인물들로는 兒玉源太郎, 後藤新平, 中村是公 세 인물을 들 수 있다.2) 초기의 만철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러시아가 이양한 東淸鐵道3) 의 寬城子4) 이남의 철도를 관리할 목적으로 탄생하였다. 滿鐵은 일종의 국책기관으로 기능하였으나, 명목상으로는 사기업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정부차원에서 시행하기에 국제사회의 견제가 예상되는 정책들을 만주에서 시행하고, 奉天軍閥과 협상을 담당하기도 하는 등 사실상 만주에서의 일본의 경제적, 문화적 침략을 전담하였다. 일본이 관리하는 철도는 東淸鐵道의 지선으로 大連과 旅順의 러시아 부동항을 시베리아철도와 연결하는 노선이었는데, 만철은 이 구간뿐만 아니라, 러일전쟁 당시 원활한 병력 및 군용품 수송을 위해 부설하였던 군용철도인 安東5) 과 奉天을 연결하는 안봉선도 담당하였다. 만철은 광궤였던 남만주철도의 궤간을 표준궤로 바꾸는 작업을 안봉선의 개축과 연계하여 실시하였다. 남만주철도는 만철의 私鐵이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안봉선과 관련하여서는 중국과의 협상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만철은 안봉선의 개축을 중국과의 협상 없이 진행하고자 하였고, 이에 중국은 新民-法庫門 鐵道와 遼源-齊齊哈爾 鐵道의 건설을 통해 만철을 통한 일제의 만주팽창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安奉鐵路購地章程> 및 <간도협약> 등을 통해 해결되었는데, 중국의 간도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新法鐵道의 폐기, 吉會鐵道의 부설권 및 조차지와 철도에 대한 조차기간을 99년 연장하는 등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6)
안봉선의 협궤(궤간1067mm)를 표준궤(1435mm)로 바꾸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는데, 건설기간과 비용이 적은 협궤를 통해 전쟁기간 동안 병력, 군용품 및 석탄의 수송을 용이하게 하였던 안봉선을 표준궤로 바꾸어 만주에 더 많은 병력과 자본, 상품을 투사하겠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朝鮮鐵道와의 연계가 가능해지고, 불필요한 환적과 환승을 없앨 수 있는 장점을 가졌다. 또한 궤도의 통일뿐만 아니라 복선 부설을 통해 大連港으로의 수송을 원활히 하였다. 한편 중국은 吉林-長春線을 일본의 차관을 받아 부설하는 한편 新民-奉天線의 매입을 추진하여 83만円을 滿鐵에서 대출하여 25년간의 상환기간을 정하였고, 1917년 신차관계약을 통해 吉長線 부설금액이었던 650만원을 차관총액으로 설정하고 차관기간동안 滿鐵에 경영권을 위임하였다. 또한 이 시기 四平街-洮南線이 일본의 자본을 바탕으로 부설되었고, 이러한 노선을 고려하였을 때, 만주에서의 확장은 南滿州철도를 중심으로, 특히 長春을 중심으로 확장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철도부설권을 획득하여 직접적인 관리를 하고, 동시에 차관을 통해 중국이 건설한 철도의 경영권을 차지하는 형태로 滿州철도의 지배를 도모하였다. 東淸鐵道 서쪽으로 四洮線을 부설한 것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滿州에서 세력을 팽창하고자 하는 일본의 의도를 잘 나타내는 사례이다. 이 시기의 일본의 鐵道戰略을 군사적 측면에서 조망하였을 때, 大連을 비롯한 關東州를 거점으로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한반도와 연결되며 만주를 종횡으로 관통하는 노선을 보유함으로써 만주전역에 걸쳐 關東軍, 철도수비대의 긴급한 대응 및 육군의 지원군 투입이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러시아에 대한 만주이권의 견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이는 시베리아 출병 시에 보병 3개 사단과 기타 부대를 포함하여 7만의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통해, 실제적인 병력수송 및 보급의 기능이 입증되었다.7) 또한 吉會線의 부설은 일본 본토와 만주의 최단거리 교통로를 개척하는 것으로, 본토에서의 접근성을 강화하여 경제적 침탈을 가속화하고, 동시에 만주자원의 본토 수급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8)
滿鐵이 설립되었던 초기 일본정부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잦은 고장, 해이한 기강, 일본인 매춘부 문제, 수뢰 문제 등으로 관리에 어려움을 느꼈고, 미국에 만주철도를 넘겨 만주를 중립화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9) 이러한 초기 상황과는 달리 吉長철도에서 滿鐵은 70만원의 수입을 올리는 등 안정권에 들었으며, 철도부속지에 대한 개발을 통해 토목, 건설 산업의 부흥을 이끌었고 撫順탄광의 석탄, 鞍山제철소의 철강 등을 일본 본토 및 만주에 공급하며 1차 세계대전의 전쟁특수를 누렸다. 특히 만주의 주요 수출품이던 대두의 수출이 활발해지면서 滿鐵의 수송능력의 향상도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沙河口의 철도공장의 생산이 증가하여 많은 이익을 거두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의 종전, 인도에서의 값싼 연철의 수입, 러시아 혁명 등의 요인으로 滿鐵과 투자했던 산하의 기업 전반에 걸쳐 적자가 발생하였다. 비단 滿鐵에만 국한되던 것이 아니라, 본토에서도 船成金으로 대표되는, 전쟁특수로 성장하였던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大正 デモクラシ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자리하던 1920년대의 일본은 立憲民政黨의 協調外交을 통해 팽창을 자제하는 분위기였으나, 1927년 일본 내 경제공황의 여파로 立憲政友會 내각이 성립하면서 <對支政策綱領>, <滿蒙非中國論> 등을 통해 만주와 몽골에 대한 침략을 국가정책화 하였다.10)
이러한 분위기에서 1920년대 滿鐵은 소비에트정권이 시베리아에서 안정화되면서 경영을 회복한 中東鐵道에 대한 견제를 위해 만주 북부의 교통로 역할을 할 洮南-昻昻溪線을 1925년 착공하여 1926년 개통하는 한편 간도협약 당시 인정받았던 吉會鐵道의 구축을 위해 吉林-敦化線을 1926년 착공하여 1928년에 준공하여 朝鮮軍과 關東軍의 연계를 꾀하였다. 이는 러시아의 극동지역에서 중요하게 기능하였던 블라디보스토크 및 자바이칼 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전개가 신속해지고, 필요시 도시를 봉쇄하거나 시베리아 지역에서의 군사작전 등 장기간의 보급수송이 필요한 작전들도 수행이 가능해진 것을 의미한다. 또한 중광단, 의군부, 대한국민회, 북로 군정서 등의 독립운동단체들이 會寧 부근 간도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는데, 이들을 만주에서 토벌하고 세력기반을 파괴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2. 東北交通委員會
가. 奉天軍閥과 鐵道
袁世凱와 일본이 일본차관을 바탕으로 滿蒙五路鐵道11) 를 부설하기로 합의하였으나, 帝制運動이 실패로 돌아가고 1920년대 5·4운동을 계기로 반일정서가 팽배하자 중국 내, 특히 滿州지역에서 鐵道自辦運動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12) 奉天軍閥 또한 滿州의 주권을 방어하기 위해 1924년 東三省交通委員會를 瀋陽(奉天)-海龍線, 呼蘭-海倫線, 支林-海龍線, 洮安-索倫線 등의 철도를 1920년대 후반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南滿州鐵道를 남쪽에서 감싸고 洮昻線을 양익을 막는, 滿鐵포위망의 일부로 기능한다.13) 1927년 滿鐵의 사장이었던 山本条太郎는 張作霖과 새로운 滿蒙五路鐵道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敦化-老頭溝-會寧의 吉會線의 일부와 長春-大賚線, 吉林-五常線, 延吉-海林線, 洮南-索倫鎮線 5개 노선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협조하면서도 滿州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던 張作霖과의 협상은 지지부진하였다.14) 奉天軍閥이 滿鐵에 병행하는 철도 건설을 지속하자, 滿蒙지역을 장악하고자 하던 일본은 張作霖에게 항의하였으나 큰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호로도에 항구를 축조하여 대련항에서 출발하여 만주를 관통하는 남만주철도의 교통량을 감소시켜 만주에서의 팽창을 억제하는 병행선의 역할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더하여 東三省의 독판 역시 反日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張作霖의 제거를 통해 滿州를 장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關東軍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1928년 6월 4일, 고급참모였던 河本大作 대좌의 주도로 京奉線으로 철수하던 張作霖을 폭사시키는 皇姑屯 사건이 발생하였다.15) 당초 계획은 대원수의 사망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만주를 신속히 장악하는 것이었으나, 張學良은 신속하게 奉天軍閥을 통제하고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이에 일본은 張學良에게 500만원의 차관을 제시하며 蔣介石의 북벌에 대항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대신, 敦化-圖們線의 부설을 약속하는 비밀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중국 내부에서 이 조약이 폭로되면서 東北지역에서의 반발을 가져왔고, 이는 奉天軍閥이 독자적인 행보를 멈추고 東北易幟를 실시, 中華民國의 동북변방군사령관이 되어 일본인 고문들을 추방하고 미국인 고문들로 대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16) 국민정부는 滿州鐵道를 두고 일본과 대립하였는데, 滿鐵과의 경쟁을 위해 운임을 최대 43%까지 할인하는 등의 유인책을 사용하는 한편 자국민이 중국철도만 이용하도록 제한하는 조치를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철도의 화물수송량은 다음표와 같이 증가하였고, 滿鐵의 경우 300만 톤에 달하는 수송량이 감소하여 적자로 인해 2천명에 달하는 직원을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
연도 |
1930년 |
1931년(~9월 18일) |
수송량 |
143,177 톤 |
695,144 톤 |
수익 |
3,501,061元 |
20,686,439元 |
<표1. 1930년 및 1931년의 중국철도의 수송량 및 수익17) >
Ⅲ. 滿州事變 이후의 滿州鐵道戰略
1. 滿州鐵道戰略
가. 滿州事變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철도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고, 중국의 병행선 부설로 滿鐵의 경제적 손실이 증가하는 등 일본의 滿州에서의 이권이 불안정해지자 關東軍 參謀部의 作戰主任參謀 石原莞爾 中佐, 高級參謀 板垣征四郎 大佐가 司令官 本庄繁 中將과 함께 滿蒙領有計劃을 수립하였다. 국가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만주에 대한 이권을 강화하는 것이었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만주는 소련과 몽골, 중국으로 향하는 길목이자 접경지대로 향후의 군사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점령해야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 關東軍의 병력규모는 駐箚師團 1개와 6개 대대의 철도 수비대로 약 1만에 불과하였고, 만주전역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하였다.18)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關東軍은 東北軍의 병력 공백기를 이용하였고, 柳條湖의 철도를 폭파하여 전쟁명분으로 삼은 뒤 핵심군사지역이었던 北大營과 奉天을 공격, 南滿州鐵道 지역을 장악하고 遼東과 吉林省을 점령하였다. 21일에는 朝鮮軍이 陸軍本部와 내각의 월경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어 남만주 점령을 도왔다. 31년 11월에는 齊齊哈爾을 차지하였고, 32년에는 만주의 전 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關東軍은 초기의 領有 대신 傀儡國 수립을 통한 간접통치를 지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각 省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하고, 건국운동을 통해 滿州國을 수립하였다. 關東軍이 소수의 병력으로 만주에서의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東北軍 주력의 부재, 張學良의 不戰원칙 등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滿鐵의 협조였다. 滿鐵의 사원들을 중심으로 滿州靑年聯盟을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조사과를 통해 침략정책의 기틀을 설정하였다. 滿州事變이 발생한 직후에는 4만에 달하는 사원을 동원하여 지원하는 한편 당일 13량의 군사열차를 편성하여 여러 사령부의 奉天으로의 이동에 협력하였다. 또한 6량의 군사열차를 한반도에 편성하여 혼성제39여단의 월경을 도모하였고, 1931년에만 약 500만 엔에 달하는 지출을 하며 滿州侵略에 큰 기여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철도부속지에서는 在滿 일본인들의 무장 및 반란활동의 근거지 역할을 수행하였고, 정부와 육군 중앙에서 侵略을 지지하도록 공작을 실시하였다.19) 20만에 달하는 일본인 개인들의 무장집단의 조직은 東北軍 에 있어서 큰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 1932년에는 육군본부의 승인 하에 제8혼성여단, 조선 주둔 제20사단 사령부, 제37혼성여단, 중형 폭격기 중대를 증원받을 수 있었다. 本庄繁 中將의 발언20) 을 참고하였을 때 알 수 있듯, 기동작전에 있어서 滿鐵이 기여한 바는 결정적이었으며, 滿州 전역으로 關東軍이 진격하며 19만의 東北軍을 제압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시베리아 출병기와 滿州事變시기의 철도가 수행하였던 역할을 고려하였을 때, 철도가 가졌던 滿州에서의 전략적, 군사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나. 滿州國과 소련
滿州國의 성립 이후의 滿州의 철도는 국유화되었으며, 철도의 경영은 滿鐵이 담당하였으며, 대륙의 효과적인 수송체계를 구축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철로총국과 철도건설국을 설치하였다. 총합 19개 線, 연장 약 3천 km에 이르렀다. 이후 滿州에서의 철도정책은 對소련 견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滿州國이 수립되면서 中東鐵道의 영유권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소련은 滿州 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인정하는 대신 극동에서의 분쟁을 자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당시의 불안정한 치안으로 만연한 비적들의 철도습격으로 인해 中東鐵道의 블라디보스토크와의 연결이 불안정하였고, 경영적자가 누적되어있는 상황이었다.21) 이에 일본이 먼저 철도의 매수를 제안하였고, 협상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1억 4천만엔과 더불어 소련 직원의 퇴직금 지불을 대가로 철도를 인수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의 국민정부 대신 滿州國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의미를 가졌고, 일본 육군 내에서도 반소반공을 추구하는 황도파 대신 통제파의 힘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일본은 즉각 中東鐵道의 궤도를 기존 러시아의 광궤에서 표준궤로 바꾸는 작업을 실시, 수도였던 新京과 하얼빈을 연결하는 구간의 개축을 3시간 만에 이루었다. 그만큼 일본이 중심부를 관통하는 이 철도를 중요시 하였다는 증거로 볼 수 있으며, 이후 북부 지역으로 이어지는 철도를 부설하여 국경지대로의 기동을 강화하였고, 또한 철도를 이용한 이민자들의 북부 이주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군사적 측면에서의 滿州鐵道의 통합은 일본이 滿州를 완전히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며, ノモンハン事件, 張鼓峰事件 등으로 소련과 충돌하였던 일본이 對소련 군사작전을 수행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던 일련의 전투들에서 일본군은 패배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은 직접적인 소련과의 충돌 대신 평화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중국문제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3일 모스크바에서 일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침공이 시작되면 情勢ノ推移ニ伴フ帝国国策要綱에 따라 연습 작전을 목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關東軍에 편성, 연습훈련의 명목으로 동원한 뒤 극동지역에서의 對소련군사작전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이것이 関東軍特種演習으로, 7월 7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동원령을 내려 74만에 이르는 14개 사단을 국경지대에 결집하였다. 이러한 수송이 가능하였던 것은 滿州의 鐵道덕분이었다. 이 시기 노선도를 살펴보면, 완저우리와 헤이허, 후투의 국경지대로 향하는 3개의 노선이 구축되어 있어 자바이칼 지역, 연해주 지역, 아무르주 지역 및 유대인 자치주에 동시적인 타격을 가하여 기동작전을 통해 소련군을 포위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따라 關東軍의 만주작전계획은 두 가지로 형성되었는데 첫 번째 계획은 연해주지역에 대한 포위공격을 통해 동부전선에서 20군과 3군, 5군의 전력을 동원하여 소련군을 섬멸하고, 북부 및 서부전선군은 전선을 돌파하여 기동전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계획은 동부전선 및 북부전선은 적을 고착화 내지 소극적인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완저우리 지역에서의 대규모 공세를 통해 이르쿠르크주까지 진출하여 시베리아의 소련군을 마비시키고, 북부전선군이 아무르주 및 연해주를 장악하는 계획이었다.22)
Ⅳ. 결론
滿州지역의 鐵道는 關東軍의 군사작전에 있어 기동로 및 공격로를 설정하고, 군을 배치하고 공격 및 방어 계획을 수립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였다. 철도의 군사적 이용은 滿州事變 이전 시기의 시베리아 출병, 滿州事變, 그리고 關東軍特種演習을 통해서 사례를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미 극동군의 자료를 통해 살펴본 關東軍의 對소련 침공 계획을 참조하였을 때, 기갑 및 차량화 전력이 부족하였던 일본군이 절대적으로 철도의 수송력에 의존하여 군사계획을 수립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關東軍의 편제를 살펴보았을 때, 기갑 전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소 국경분쟁에서의 일련의 전투들에서 일본의 기갑부대의 전투력은 소련군과 비교될 수 없음이 드러났으며, 기갑부대가 기동하더라도 물자의 수송과 나머지 부대의 이동은 도보 및 말, 소 등의 운송수단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滿州에서의 일본의 鐵道戰略은 滿州事變 이전에는 南滿州鐵道와 大連항을 기준으로 철도수비대를 배치하여 남만주지역의 이권을 강화하고 푸순탄광 등의 자원의 수송 등 경제적 요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安奉線의 연결을 통해서 한반도와 滿州를 연결하여 육상수송루트를 확보, 경제적 이점과 더불어 朝鮮軍의 월경 및 군사작전을 용이하게 하였다. 滿州事變 시기에는 실제로 제39혼성여단의 월경이 이루어졌다. 또한 1만 정도의 關東軍이 신속하게 北大營을 공격하고 남만주를 점령하는 기동작전을 수행하였던 경험을 토대로, 滿州대륙을 전반적으로 연결하는 여러 지선들을 부설함과 동시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북만주 지역으로 이어지는 노선들을 부설 및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關東軍의 규모가 1931년 1만 명에 불과하였던 것이, 점차적으로 증가하면서 1941년에는 70만이 넘는 대군이 되었으며, 북방진출을 위해서는 철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철도는 자바이칼주와 아무르주로 향하는 철도로 연결되었는데, 그중에는 中東鐵道도 포함되어 소련견제에 작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滿鐵이라는 국책기관의 수송계획 및 집행은 滿州에서의 일본군의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초기 滿鐵의 핵심인사들이 군 출신으로 구성되었던 점과, 육군과 연관되어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았던 점, 국책기관으로 滿州에서의 일본의 정책 전반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기관으로 기능했다는 점이 關東軍의 활동과 滿鐵이 궤를 같이하도록 하였다. 부족한 정보수집으로 정확히 滿鐵이 병력수송에서 어떻게 기능하였는지, 수송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논의하지는 못한 점이 아쉬우며, 이러한 점과 더불어 추후 연구시 關東軍의 滿州에서의 구체적인 군사작전에 대해 살펴보며 철도와 연계하여 파악하면 좋을 것이다.
< 참 고 문 헌 >
단행본
김지환, 『철도로 보는 중국역사』, (학고방, 2014),
윤상원 『동아시아의 전쟁과 철도 - 한국철도의 정치사』, (도서출판선인,2017)
小林英夫, 임성모(역), 『滿鐵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산처럼, 2004)
정기 간행물
권익호 (2018), <皇姑屯 사건과 張學良의 東北易幟>, 한국중국학회, 중국학보86호
김지환 (2008), <만철과 동북교통위원회>, 중국근현대사학회, 중국근현대사연구 40호
윤현명 (2019), <근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일고찰 - 중일전쟁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53집
해외 논문
金士宣, 徐文述(1986),『中國鐵路發展史』, 中國鐵道出版社
郭洪茂 (2003), <滿鐵과 滿洲事變 - 9ㆍ18事變>,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아시아문화 19호
Military History Section Headquarters, Army Forces Far East(1955), 『Japanese Preparations for Operations in Manchuria』
그림자료
最新滿蒙鉄道圖, 拓殖大学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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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한자로 滿洲라고 표기하는 것이 올바르나, 일제의 국책기관이었던 滿鐵에 대해 다루고자 하여 일본식 표기인 滿州를 사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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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林英夫, 임성모(역), 『滿鐵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산처럼, 2004), pp. 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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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淸鐵道는 하얼빈을 기점으로 大連, 满洲里, 綏芬河를 연결하는 철도로써, 북만주의 철도는 일본이 아닌 러시아의 관할이었다. 中東鐵道라고도 불리던 이 철도는 포츠머스 조약 협상 당시 군사적 이용에 제한을 두고자 하였으나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방위를 사유로 제한적인 군사적 이용이 허가되었다. 윤상원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철도 - 한국철도의 정치사』, (도서출판선인,2017), pp. 62~6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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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春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남만주지역의 동청철도의 관할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이 되었다. 淸朝시기에는 장춘의 명칭이 寬城子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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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은 현재의 丹東으로, 한반도와 만주를 잇는 간선철도로 기능하는 주요한 노선이었고, 러일전쟁 당시 병력 및 군수품 수송과 더불어 본계호탄광(本溪湖炭鑛)의 석탄을 수송하는 협궤 군용철도였다. 윤상원, op. cit., pp. 70~7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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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환, 『철도로 보는 중국역사』, (학고방, 2014), pp. 118~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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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명 (2019), <근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일고찰 - 중일전쟁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53집, pp. 2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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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환 (2014), op. cit., pp. 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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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林英夫, op. cit., pp. 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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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호 (2018), <皇姑屯 사건과 張學良의 東北易幟>, 한국중국학회, 중국학보86호, pp. 159 ~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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袁世凱와의 협정에서의 5개 철도는 四平-洮南線, 開海鐵道, 長春-洮南線의 부설 및 洮承鐵道, 吉海鐵道의 차입 우선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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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환 (2008), <만철과 동북교통위원회>, 중국근현대사학회, 중국근현대사연구 40호, pp. 10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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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林英夫, op. cit., pp. 8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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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환(2008) op. cit., pp. 1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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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일본의 만주 침략과 태평양전쟁으로 가는 길』, (지식산업사, 2013), pp. 15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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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환(2014), op. cit., pp. 364~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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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士宣, 徐文述(1986),『中國鐵路發展史』, 中國鐵道出版社,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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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일본의 만주 침략과 태평양전쟁으로 가는 길』, (지식산업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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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洪茂 (2003), <滿鐵과 滿洲事變 - 9ㆍ18事變>,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아시아문화 19호, pp. 5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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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謝狀의 『満州事変と 滿鐵』 참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만주사변에서의 역할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원문 서적이다. 신속한 기동전의 수행이 가능했던 요인으로 철도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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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op. cit., pp. 9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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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History Section Headquarters, Army Forces Far East(1955), 『Japanese Preparations for Operations in Manchu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