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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동아시아 봉건 담론의 연속과 단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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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란

원문 내 각주는 누락하였음을 밝힘.

 

볼드체는 본인쟝 강조.

 

 

 

 

 

조선시대를 봉건제로 이해하는 서술과 관점은 한국사의 보편성, 즉 보편사를 전제로 하고 있다. 보편사의 이름아래 세계사를 그 직선적 시간관에 기초하여 재단한 최초의 인물은 잘 알다시피 헤겔이다. 그는 ‘위대한 계몽주의의 시대’에 절대이성의 자기운동으로써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의 진보를 설파했다. 프랑스혁명 이후(헤겔은 프랑스 혁명 소식을 듣고 자유의 나무를 심었다.) 자유의식의 진보라는 주제가 그의 보편사를 구성하는 주제였다. 곧 자유와 평등이라는 진보관념이 서구 시민사회를 장밋빛으로 물들이면서 시작된 것이 최초의 단계발전론적 역사철학이다. 같은 단계발전론의 맥락에서 그 장밋빛 세상을 핏빛 세상이라고 폭로한 것이 바로 마르크스였다.


무계급사회(원시공산제사회) → 계급사회(노예제, 봉건제, 자본제사회) → 무계급사회(공산주의 사회)로의 발전. 마르크스의 말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전이라 할 때 ‘발전’이란 말의 본래적 의미는 오직 생산력에만 적용된다. 그것도 생산력 발전이 초래할 부(否)의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때 적용된다. 그런데 이런 점에서만 보면 마르크스의 5단계발전론도 헤겔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 그가 구상한 사회주의도 자유와 평등의 확대였고, 자본주의가 자연에 대해 자행하던 폭력적 약탈대신에, 인간의 자기실현인 노동의 대상으로만 자연을 이해하면서 그에 대한 폭력적 수탈을 묵인하였다.


우리는 어느덧 고대/중세/근대(현대)와 같은 시기구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직선적 시간관에 입각한 의제적 보편사관의 허구성과 서구중심주의적인 국부성이 숨어 있다. 시간은 하나의 흐름이다. 그 상표를 붙여야만 하는 이유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상표를 붙여야만 하는 어떤 내재적인 구조가 있는 것이다. 그 이해하는 공시적 구조가 설명되어야하는 것이다. 직선적 발전단계론의 역사성에 주목했던 것도 그러한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근대의 진보 개념은 이전 종교적 진보 개념에서 보여준 세상의 종말에 대한 기대를 열린 미래로 바꾸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의 증가와 함께 비로소 역사적 시간이 진보한다는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헤겔이 자유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보편사의 발전단계를 구획하였음은 이미 지적하였다. 마르크스는 인간사회의 변화가 인간생활의 물질적 조건에 규정된다고 판단하여 하부구조의 특성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였다. 그런데 그 하부구조를 통하여 밝힌 역사로 인해 그 풍부한 경험의 지층을 상실했다. 자본주의가 피와 오물로 둘러쓰고 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그의 언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본주의는 ‘중세 봉건사회’에서 ‘발전’한 것으로 인식되는 상반된 관점이 동시에 제기되는 아이러니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가 확대된 대가로 인간의 삶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함께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다. 최소한 조선의 역사는 그러했다.


이런 점에서 식민사관과 근대주의는 상통한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후 이들은 국가제도만을 장악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민족의 얼을 일본의 그것으로 뒤바꾸기 위하여 역사도 그들의 식민통치에 어울리게 만들었다. 이를 학계에서는 식민사관이라고 부른다.


식민사관은 조선 민족의 정체성, 즉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특히 식민지가 될 때까지 아무런 자주적인 통치 능력 없이 정치는 당쟁에 맴돌았고, 조선의 사상과 이념은 탁상공론에만 치우치는 공리공담에 불과했다고 매도하였다.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더욱 심하여 조선 문화를 가능한 폄하하면서 고대(古代)로 갈수록 문화가 발전했다고 주장하고 그 문화를 일본 문화의 영향인 양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식민사학에 대하여 일제시대에는 소박하나마 민족주의사학이 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고 사회주의계열의 사회경제사학은 마르크스의 5단계설을 받아들여 그에 대항하였다.


해방 후 본격적으로 식민사학의 청산이 학계의 관심이 된 것은 내재적 발전론을 통하여 연구업적이 제출되면서였다. 조선후기 농업과 상업부문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발견하고 이러한 흐름의 상부구조적 반영으로 조선후기 실학(實學)이 주목되면서 한국사에서 근대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식민사학을 청산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자본주의 발전과 그 근대성을 역사적으로 확인하려는 연구는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완전히 설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실제 근원적인 문제는 이러한 논의의 문제설정 구도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했다고 주장하든지 발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든지, 중요한 개념은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 발달을 하나의 보편사적 개념으로 당연시하고 사용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존재성은 서양사 생성태의 맥락을 규정하는 시의성(時宜性)과 적법성(適法性)에서 유래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여전히 한국사를 보는 인식이 지극히 외래적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학문의 연구방법은 얼마든지 선진적인 방법을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역사적 상황의 급박성은 인정하지만, 사이비 보편사를 보편사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몰주체성이 문제인 것이다. 역사학은 그런 점에서 무력했다. 그만큼 우리 학문의 축적이 없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무력함의 결과는 특수사를 그 사이비 보편사에 꿰어 맞추는 고통스러운 작업만을 남겼을 뿐이다.


‘실학’ 연구의 궁극적인 동기를 살펴보면 자본주의 내재적 발전론을 토대로 그 상부구조를 역사적으로 구명하기 위한 작업임을 알 수 있다. 실학이 강조됨에 따라 그 부정대상이었던 성리학은 말할 것도 없이 연구대상이 되기도 전에 그 존재가치를 폄하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야말로 선(善)과 악(惡)의 대비였다. 그리고 최소한 중국 19세기말 ‘개혁파’의 모색과 같은 ‘봉건’ 논의조차 차단된 채 ‘계몽주의 진보사관’의 서사에 따라, ‘청산되어야 할 과거’로서의 ‘봉건’만이 남게 되었다.1)

 

 

 

중요한 것은 국가가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행사하게끔 제도화된 한에서는 ‘봉건’은 늘 국가권력의 외부로 나가든지, 그에 대한 저항/견제 논리가 될 개연성이 항상 남아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은 중국 전통적인 봉건론에서 확인한 바이고, 조선의 봉건론에서도 가능태를 확인하였다. 특히 근대 역사학이 ‘근대국가의 역사(서사)’였다는 점이 학계에서 지적되고 있는 시점에서, ‘봉건’은 ‘청산해야할 과거’라기보다는 ‘오래된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조선에 대한 기존의 계몽주의적 서사는 근대에 ‘이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합리화’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 또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근대를 향한 목적론적 탐사 역시 ‘이성’의 활동이기보다 ‘합리화 과정’이었음을 자각할 때, 봉건론은 시대적 제한이나 지역적 국부성을 넘어선 보편사로의 전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나 희망의 가능성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에 기초한 계몽주의의 뒷받침을 받은 진보사관은 미래를 바라보는 이데올로기적 태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근거, 즉 기술의 발달, 인구의 증가, 사회적 인권신장, 그와 연관된 정치체제의 변화 같은 근원에서 샘솟는 새로운 일상 경험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이는 역사 흐름의 일회성과 역사 진보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지나간 사건들이 갖는 범례적 성격을 와해시켰다. 그리고 이 속에서 전통적 경험을 배제하는 데 우리는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의 속도와 진보/이성의 신화에 금이 가고 그 틈새로 새로운 대안이 모색되고 있다. 더 이상 시간과의 경쟁이,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이 우리의 삶을 전혀 윤택하고 평온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아채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일상의 재편성에, 그리고 그 연장에서 기획하지 않는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2)

 

 

 

 

 

각주

  1. 오항녕, 「동아시아 봉건 담론의 연속과 단절」, 『史叢(사총)』72(2011), 18-21쪽.

  2. 같은 책, 23-24쪽.

 

 

 

-. 참고문헌

 

오항녕, 「동아시아 봉건 담론의 연속과 단절」, 『史叢(사총)』7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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