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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다민족 사회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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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반

  대제국의 해체

 

『 빈 숲의 이야기』(1931)의 저자이자 극작가, 와된 폰 호르바트(Ödön Edmund Josef von Horváth)는 이렇게 말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 내 국적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오. 나는 피우메(크로아티아의 항구 도시)에서 태어나 베오그라드(세르비아의 수도), 부다페스트(헝가리의 수도), 프레스부르크(지금의 브라티슬라바로 슬라베니아의 수도), 빈(오스트리아의 수도), 뮌헨(독일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 등지에서 성장했으며 지금은 헝가리 여권을 가지고 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조국이 없다고 것을, 즉 나는 아주 전형적인 헝가리인이자 크로아티아인이자 독일인이자 체코슬로바키아인으로 살아온 오스트리아-헝가리 사람이었다고 말이오. "

 

실제로 당시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적 변환점을 갖추어 가던 유럽 사회에서는 호르바트와 같은 사람들이 매우 흔했다.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도시였던 체르노비츠(Czernowitz)에서는 적어도 헝가리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폴란드인, 유대인, 독일인 등등 수많은 민족들의 고향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체르노비츠 말고도 오스만 제국의 살로니카(Thessaloniki,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는 평범한 부두 노동자들도 6~7개에 이르는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고 하며 7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은 물론이요, 그리스인을 비롯해 아르메니아인, 튀르크인, 알바니아인, 불가리인이 한 데 어울려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다민족적 분위기는 동유럽을 비롯해 여러 유럽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으며, 이들 도시보다도 작은 마을에서 조차도 다양한 종교와 인종들이 함께 살아가는 중이었다.

 

허나 민족주의라는 사상이 점차 득세하면서, 정치가들과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쟁점으로 문제가 불거지고 있었다. 서유럽을 가로질러서 동유럽을 향해 다가오는 민족주의적 정서를 향해 다민족적-다종교적 제국들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었다.

 

민족주의는 19세기에 이미 수많은 제국들을 향한 백성들의 충성심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왕조와 종교의 정서를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발칸 반도에서는 수많은 민족 봉기들이 일어나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의 독립을 이루어냈고, 1848년 혁명은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민족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850년대 합스부르크 제국(위에서 언급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전 체제)의 신(新) 절대 왕정의 실패는 결코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갈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제 제국의 지배자들은 두가지의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먼저 대두된 것은 새로운 형태의 '제국적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오스만 제국 내에서의 투르크인들을 중심으로 다른 민족들을 통합하는 방식이라는 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런 정책들은 현대적인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제국 내부에 산재한 소수 민족들의 전통 문화를 침범하고 동화시키려고 했었다.

 

허나 하나로 통합된 언어 사용과 세금 부과는 이들 소수민족의 독립의지를 더욱 자극시키는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청년튀르크당(전제군주정을 부정하고 헌법을 부활시켜 근대화를 이룩하자는 정치 목적의 조직, 우리나라의 독립협회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의 튀르크인 동화 정책으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의 민족 운동을 자극해버렸던 것들이 있다.

 

제국적 민족주의 정책이 수지타산이 맞질 않자 제국에게 두번째로 제시된 것은 '분할 통치'였다.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 정교회와 불가리아 정교회를 분리시켜 이들 간의 싸움을 조장했다. 합스부르크 제국도 '오스트리아인'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과 독일인들을 이간질하기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자들은 점차 헌법 개혁과 참정권 획득, 교육에 대한 요구를 원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한 대중적인 민족 정당들은 완전한 민족의 독립이 아닌, 기존 제국의 틀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자는 쪽이 우세한 것이었다.

 

민족주의적 열망들을 충족시키기 위하도록 제국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에 대해서 가장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했던 사람들은 다름아닌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역사적 실험'은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점에서 일어났는데,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헝가리인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체제'를 이룩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약 5천명에 달하는 국민들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라는 두 개의 국가, 30개에 달하는 민족들이 살고있는, 즉 '다민족 국가'의 대표적인 예시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수많은 민족들로 구성된 '미국'의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복잡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정치사상가들은 다음 지금까지 말해온 민족주의에 대해 두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1. 민족주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점.

2. 작은 국가들보다 이들이 모인 큰 국가가 경제 발전 면에서 훨씬 유리하였기에, 민족주의라는 것이 대단히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점.

 

그들의 '제국적 현대 생활'은 자신이 가진 민족 감정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감정에 의해 완전히 함몰되어서는 안된다고 본 것이다. '영연방'(Commonwealth)를 구상하려던 대영제국의 제국주의 이론가들도 이들과 비슷한 논리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각 민족 집단들에게 문화적 자율성과 자치권을 제공하는 것으로 소수민족 문제를 성공리에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이런 관점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면, 다양한 민족들이 하나의 조국이라는 곳에서 다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각은 당대의 글 작가, 이자크 페레츠(Isaac Leib Peretz)의 말 속에서도 나타났다.

 

" 민족의 독립과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총칼로 무장한 국경 수비대가 아닌, 독특한 문화다. "

 

페레츠의 생각처럼, 유대인들도 '유대인들만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시오니즘과 '유대인을 부정하려는' 완전한 동화에 사이에서 '제3의 길'을 택하고자 했었다. 이런 요구들은 비슷한 민족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주창되어 왔던 것이었고,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발현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 칼 레너(Karl Renner)는 "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다민족국가 체제에 모범이 되는 사례가 되어 여러 민족들이 공존하는 국가로서 남아야 한다. "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인도주의적 접근이 결국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실현되지 못했던 이유는 내부에 존재하던 민족주의자들에 압력보다도, 1914년과 1918년에 걸쳐 일어난 1차 세계대전에서 제국들이 적국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자극함으로서 스스로의 붕괴를 야기해버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존 버컨(John Buchan)의 베스트셀러 작품인 『그린멘틀』(Greenmantle)에서도 오스만 제국이 영국령 인도의 이슬람 교도들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철썩같이 믿는 영국인들의 공포를 아주 잘 묘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오스만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만들어낸 아랍 분리주의와 유대 민족주의에 굴복하여 멸망을 재촉하고 말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도 니콜라이 2세 황제는 폴란드인을 향해 '전쟁에서 승리하면 독립시켜 줄 것'임을 약속했고, 2년 뒤에 연합국은 폴란드인들을 향해 독립 약속을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폴란드의 민족운동가들은 현명한 박쥐처럼 이리저리 상황에 따라 후원자들을 바꾸어가며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했다.

 

  분열과 새로운 통합을 향해

 

1차 대전 동안 독일은 우크라니아인과 유대인을 향해 러시아 차르(царь, 황제) 정부에 대항하는 러시아피억압민족동맹(League of Oppressed Nations of Russia)의 결성을 장려하고 이들 다민족 병사들로 구성된 러시아 제국의 군대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고자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일은 핀란드인과 우크라니아인 민족집단을 지원하고 이디시어(ייִדיש, 아슈케나즈 유대인의 언어)를 폴란드 의회의 공식 언어로 채택시키기도 했다. 독일 내에 있던 시오니스트들은 러시아 유대인해방위원회를 설립하고 러시아 제국의 연방화를 적극 추진시키는 일을 했다.

 

만약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더라면 유대인들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 아닌 러시아 혹은 폴란드의 반유대주의와 학살에 대해 공부했을지도 모를 것이다.

 

여튼 연합국 측 국가들도 같은 방법으로 동맹국에 대항했다. 이들은 체코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폴란드인을 규합하여 '피압박 민족들을 위한 반(反)합스부르크 회의'(Anti-Habsburg Congress for Oppressed Nationlities)를 로마에서 결성토록 했다. 런던에 근거지를 둔 잡지사, 「새로운 유럽」(New Europe)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치하에서 억압받는 민족들을 위한 캠페인에 열심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영국 혹은 프랑스 정부가 이들과 모두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국제연맹 창설에 힘을 실어준 사람이자 노벨평화상을 수상받은 영국의 정치인, 로버트 세실(Robert Cecil)은 "민족주의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사람들"을 비판했고 다음 같이 경고 했다.

 

" 나 자신은 유럽의 평화가 전적으로 민족에 기초하고 있다 믿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대비책이 없다면 이러한 활동(민족주의)들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어떤 경우에도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 "

 

연합국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듯, 동맹국의 모든 사람들도 민족자결주의를 진정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독일은 동유럽의 복잡하고 어려운 인종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식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지지를 받던 것은 경제적 통일체로서 '독일이 지배하는 중동부 유럽(Mitteleuropa)'였다. 이 제안에는 독일이 유럽의 중심부를 지배해야한다는 기본적인 사고가 기초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 제안은 오직 독일인들 사이에서만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과 어렵사리 동맹을 유지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자신들을 2등 국민 취급하는 이 제안을 반갑게 여길리는 만무였다.

 

극단적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중동부 유럽안이 오히려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 국가들에게 지나치게 '배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 같은 독일 장군들은 동부 유럽에 대한 정치 및 군사적 지배를 더욱 확고히 가져가고 싶어 했다. 그들은 결국 다른 민족들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권위주의 체제를 염두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1차 대전 막바지에 잠시나마 꿈이 이루어졌다. 1918년 봄, 독일은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정부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 조약에서 소련은 내부에 불안한 국내 정세 때문에 독일이 원하는 내용들을 거의 들어주려고 했었다.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독일은 옛 러시아 제국 치하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발트 해 연안까지 포함해서 꿈에 그리던 드넓은 동부 유럽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급격히 위축되었으며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의 독립에 대한 조건으로 매년 1백만 톤에 달하는 밀을 평화의 대가로 독일에게 제공했어야만 했다. 이후 독일군은 곧장 핀란드로 진격했으며, 수많은 동부 유럽의 땅이 이른바 '범게르만 제국'에 들어갔기 때문에 동부 전선은 사실상 독일의 승리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아주 잠깐의 '거품'이었다고 하는 이 몇 달의 시간 내에서 독일은 당시 전 세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무적이 되었다고 생각해 공포를 느끼던 영국을 향해 엄청난 무력감을 선사해주었다. 영국은 독일과 오스만 제국이 힘을 합쳐 영국령 인도를 위협할 수 있었으며, 유라시아 대륙을 계속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이 전쟁이 수년 간 더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물론 이 전쟁은 결국 연합국이 승리하여 우려로 끝나고 말았지만 말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랜 기간 독일 내 우파들은 늘 이 막간의 시간을 '독일의 황금기'로 회상하곤 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다른 민족들의 열망을 무시하고 잘못을 구하는 독일인들은 극히 드물었다.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여겨지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는 오히려 독일이 폴란드인을 비롯해 다른 민족들을 너무 '보살피려다가' 결국 실패했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2차 대전 당시에 그는 나치 독일의 동부 점령 장관으로 임명되어 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슬라브인들을 가차 없이 억압하고 더 나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었던 협력 방안들을 무조건 거부했다. 이와 반대로 소련은 이후 다른 민족들에게 훨씬 세련된 정책을 실시하여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하나의 의구심이 들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차 대전 종전 이후 결국 수많은 민족국가들로 분리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허나 러시아 제국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믿을 수 있는 소련은 어째서 다시 등장하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대해 말이다. 먼저 이들 사이에는 다양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먼저 인구면에서 본다면 독일인과 헝가리인은 단 한번도, 제국 내에서 절반 이상의 인구를 유지하지 못했으나 러시아인은 늘 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까지 합치면 3분의 2를 넘었다.)

 

허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소련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실패를 보고 교훈을 얻었던 것이 부족한 설명을 대체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히틀러의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를 통해 탄생했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다민족 정서를 그대로 계승한건 바로 소련이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디시어를 사용하던 유대인 노동자 운동, 분트(Bund, 정식 명칭은 리투아니아-폴란드-러시아 유대인 노동자 조합) 덕분에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가 소련과 볼셰비키를 향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 유대인 단체는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이 했던 것처럼, 소련을 민족, 문화, 영토에 구애받지 않는 민족적-문화적 자율성을 보장받는 '연방국가'로 만들고 싶어했고 과거 러시아의 '동화(흡수) 정책'을 맹렬히 반대했다. 특히 1902년에, 그러니까 러시아 제국이 살아 숨쉬던 시절의 한 유대인 지도자는 당시 레닌과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유대인 불관용 정책을 펼치려고 했던 것에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 국제 노동운동이 민족 개념에 의해 눈이 멀게 된다면 다른 민족들의 권리는 당연히 탄압될 것. " 이라고 경고했다.

 

레닌은 애초에 이들 유대인 단체가 주장하는 연방 국가 노선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왜냐면 그들의 연방국가 건설이 결국 러시아의 노동운동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워 민족주의에 반대하며, "특히 러시아와 같은 낙후된 국가들에서 ... (생략) ... 자본주의에 의한 민족 동화 과정은 역사적 과정"이기 때문에 동화(흡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 역사의 시계 방향을 되돌리려 하는 것 " 이라고 주장했다.

 

허나 이 10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1차 세계대전을 맞닥뜨린 레닌은 점차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는 " 유럽에서 민족국가를 완전히 타파해야 한다. "고 종용하는 동료들에 맞서, 민족자결주의를 위한 길로 발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허나 이 전환은 그가 단순히 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지거나 다른 민족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것보다, 프톨레타리아의 이익을 조건으로 한 움직임을 기초로 했다. 레닌에게는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이런 '민족주의자'들과의 일시적인 동거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프롤레타리아-민족주의 동맹이 불필요해진 시점은 언제일까? 1917년 ~ 1920년 사이에 볼셰비키의 민족 정책은 불확실한 상황에 봉착했기에 확고한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1917년 말에는 「공산주의」의 저자이자 러시아 근현대사를 다루던 역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의 표현을 인용한다면 "정치체제로서의 러시아는 이미 끝났다."라고 할 수 있었다. 레닌이 언급했듯 민족주의 물결이 발트 해 연안 지역들과 핀란드까지 휩쓸게 된 것은 러시아 제국의 급격한 쇠락과 독일의 부상을 단적으로 표현하던 것이었다. 러시아 제국 국경 근처 곳곳에는 새로운 공화국들이 탄생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단순히 혁명만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1920년대부터 볼셰비키의 소련은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떠안아야 했던 것처럼, "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야심이 가득한 민족들 "을 관리해야 하는 문제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이 문제를 풀어낼 정교하고 선구적이면서도 놀랄 만큼 영속성 있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것은 연방제를 도입하되, 오스트리아-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가와 중앙집권화된 공산당을 혼합한 '소련만의 체제'였다. 1920년대에 막 만들어진 이 체제는 수많은 모순을 떠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의 물결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제국이 고안해 낸 어떤 민족주의 정책보다도 성공적이었고, 이것을 '소비에트 연방 체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볼셰비키는 비러시아계 소수민족을 정부와 행정에 참여시켜 실제적인 정치권력을 부여시킴으로서 이들을 제압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사회혁명의 이익을 공유하게 함으로서 혜택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도시의 부르주아와 지주 계층 가운데 지배적이었던 민족집단들은 재산을 빼앗기며, 농민들이 도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또한 대중교육과 의무교육 같은 새로운 권리를 연방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향유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우크라이나는 1992년까지 전체 어린이들의 97%가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경우가 있다. 사실 이런 일들은 혁명 이전,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그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볼셰비키의 민족 정책은 놀랄만큼 압제적이지 않고, 독재성을 띄지 않았으며 많은 전간기 시절에 중동부 유럽 민족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얻게 했다. 그 결과 1919년의 베르사유의 민족자결주의로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던 마케도니아인, 벨로루시인, 유대인 같은 소수민족들은 볼셰비키를 적극 지지하기 시작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치하에서 당했던 폭압 정책과 소련 치하에서 경험한 우대 정책에 확실히 차이를 지녔다. 이런 훈훈한 분위기는 적어도 1930년대 초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39년에 폴란드가 독일에 점령되고 소련의 붉은 군대가 (폴란드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 진군했을 때는 유대인들이나 우크라이나인들이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것도 이런 상황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다른 한편, 1920년대 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은 겉으로는 연방제 구조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중앙집권적 면모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공화국은 이른바 자치구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 볼셰비키'의 종속되어야만 했다. 또한 연방에 속한 모든 공화국들 간에 평등한 권리나 각 공화국이 언제든지 연방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헌법적 자유는 그저 '문서'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볼셰비키 지도부가 이런 '연방국가'를 기꺼이 수용하고 추진했던 것은 연방제 하에서 실질적인 권력이 하나의 조직, 즉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레닌이 1922년 스탈린의 " 맹목적 대러시아(Great Russia) 국수주의 "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 " 피압박 소수민족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책 "을 최대한 금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적어도 공산당이 새로운 '제국'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어떠한 이견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공산당은 유럽의 마지막 제국을 성공적으로 냉전의 막바지까지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공산주의는 제국주의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단계에까지 닿을 수 있던 다민족 사회의 정수로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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