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총 균 쇠』에서 발췌―농경의 확산과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중심으로

Profile
감동란

간략히 추려 말하면, 필자가 창작하는 세계관에서 선대 문명이 시작될 만한 장소를 물색하던 도중 서적 '총균쇠'를 참조하여 도움될 만한 자료들을 발췌한 것이다.

 

이참에 속독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역사시대 이전 선사 인류가 영위하던 물질적 환경 혹은 대략적인 역사를 파악하는데는 좋으나, 역시 주제가 '(인종주의에 대항하여) 지리-환경이 문명의 발달에 끼친 영향이 무엇인가?'에 있기에 5~8장만 발췌하였음을 알린다. (장의 각각 명칭은, 인류 역사가 갈라놓은 유산자와 무산자/식량 생산민과 수렵 채집민의 경쟁력 차이/야생 먹거리의 작물화/작물화하는 데 적합한 식물의 식별과 성패의 원인)

편의상 몇몇 소량의 단어들을 필자의 입맛에 맞게 바꾸었다. 가령, 'B.C.'를 '기원전'으로, 그리고 역주와 한자병기를 지웠다. 중간에 내용을 누락시킨 것 말고는 사사로운 견해를 넣은 바가 없고, 있다 하여도 오탈자나 실수임을 밝힌다.

 

 

 

 

 

농작물이나 동물의 가축화-작물화 장소를 알아내는 두 번째 방법은 각 지역에서 가축화-작물화된 형태가 처음 나타나는 연대를 지도에 표시해 보는 것이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그 형태가 나타난 곳이 바로 최초의 가축화-작물화 장소일지도 모른다. 특히 그 동식물의 야생 조상도 그곳에 있었다면, 그리고 다른 여러 장소에서 처음 나타난 연대가 각각 최초의 가축화-작물화 장소로 추정되는 곳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차츰 늦어진다면 더욱 확실하다. 예를 들자면 에머밀의 재배 시기 중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앞선 연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기원전 8500년경이다. 그때부터 이 농작물은 차츰 서쪽으로 진행하면서 계속 나타나 기원전 6500년경에는 그리스, 기원전 5000년경에는 독일에 이르렀다. 그 같은 연대들은 에머밀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작물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결론은 에머밀의 야생 조상이 이스라엘에서 이란 서부와 터키까지 이르는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동일한 동식물이 몇 장소에서 독립적으로 가축화-작물화된 경우에는 상황이 복잡해질 때가 많다. 그런 경우에는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농작물이나 가축화된 동물의 표본들에서 독립적인 가축화-작물화로 인하여 생긴 형태학적, 유전적 차이나 염색체의 차이를 분석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축화된 소의 일종인 인도의 흑소에는 혹이 있는데 서유럽의 소에는 없다.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현대의 인도와 서유럽의 소들은 어느 곳에서도, 그 어떤 동물도 가축화되지 않았던 수만 년 전에 이미 분기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소는 지난 10000년 사이에 인도와 서유라시아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가축화되었으며, 이미 수만 년 전에 분기된 소의 아종인 인도의 야생소와 서유라시아의 야생소에서 각각 출발했던 것이다.1)

 

 

 

[전략] 독립적으로 식량 생산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아홉 후보 지역 중에서 서남아시아는 식물의 작물화(기원전 8500년경)와 동물의 가축화(기원전 8000년경)의 확실한 연대가 두 가지 다 제일 오래되었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초기 식량 생산에 대한 정확한 방사성 탄소 연대가 측정된 횟수도 그곳이 제일 많다. 중국의 연대도 서남아시아와 비슷하게 오래되었지만 미국 동부의 연대는 그보다 6000년쯤 뒤처졌음이 분명하다.

 

나머지 여섯 후보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된 연대도 서남아시아의 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지만, 그 여섯 지역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연대가 측정된 유적지 수가 너무 적으므로 정말 서남아시아보다 뒤늦었는지,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늦었는지가 불분명하다.

 

그 다음 지역들은 적어도 한두 종씩의 토종 동식물을 가축화-작물화했지만 식량 생산은 주로 다른 곳에서 가축화-작물화된 동식물에 의존했던 곳들이다. 그러한 수입 가축 작물들은 그 지역의 식량 생산을 창시한 셈이므로 ‘창시’ 농작물 및 가축으로 생각해도 좋겠다. 창시 가축 작물이 들어옴에 따라 각 지역의 사람들은 한곳에 정주하게 되었으며 그 지역의 야생 식물들을 채집하여 집으로 가져왔다. 그러다가 처음에는 우연히,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그 식물들을 땅에 심기 시작하여 결과적으로 토종 농작물이 개발됐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한 서너 지역에 들어온 창시 가축 작물은 서남아시아로부터 도입된 것들이었다. 그중 한 지역이 유럽의 서부와 중부다. 그곳의 식량 생산은 기원전 6000년~3500년에 서남아시아의 농작물과 동물들이 도착하면서 시작되었지만 적어도 한 종의 식물(양귀비와 어쩌면 귀리를 비롯한 몇 종)은 그 후에 지역적으로 작물화되었다. 야생 양귀비는 지중해 서부 연안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동유럽이나 서남아시아에서 가장 앞섰던 농경 사회의 유적지에서도 양귀비 씨앗은 출토되지 않는다. 그것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곳은 서유럽의 초기 농경 유적지들이다.

 

반대로 서남아시아 농작물 및 가축의 야생 조상도 서유럽에 없었다. 그러므로 서유럽에서는 식량 생산이 독립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서남아시아의 가축과 작물이 들어오면서 식량 생산이 촉발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생긴 서유럽의 농경 사회들이 양귀비를 작물화했고 그것은 그 이후에 농작물로서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서남아시아산 창시 작물이 도착한 후 지역적으로 가축화-작물화된 또 한 지역은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이다. 기원전 7000년~6000년에 그곳에서 생겨난 최초의 농경 사회들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먼저 작물화되어 이란을 거쳐 인더스 강 유역으로 전파된 밀과 보리를 비롯하여 여러 농작물들을 활용했다. 인더스 강 유역의 농경 사회에 인도 아대륙의 토착종인 혹 달린 소나 참깨 등의 가축 작물이 나타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이집트에서도 기원전 6000년~5000년에 서남아시아의 농작물이 들어오면서 식량 생산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집트인들은 그 이후에 무화과와 금방동사니라는 토종 채소를 작물화했다.

 

그와 똑같은 형태는 에티오피아에도 적용되어, 거기서도 밀과 보리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산 농작물들이 오랫동안 재배되었다. 에티오피아인들도 자기 지역의 많은 야생종들을 작물화했다. 그 대부분은 지금도 에티오피아에 국한되어 있지만 한 종(커피)만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인들이 그 토종 식물들을 서남아시아의 농작물이 도착하기 이전에 작물화했는지 그 이후에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2)

 

 

그 수렵 채집민들은 밀려드는 유럽의 농경민과 목축민들에 의하여 살해되거나 감염되거나 쫓겨나서 대부분 유럽인으로 교체되고 말았다. 유럽인들은 자기들의 농작물을 가져왔고 그 농작물들이 들어온 후에도(오스트레일리아의 마카다미아콩을 제외하면) 그 지역의 야생종을 작물화하지 않았다. 유럽인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희망봉 일대에 도착하여 만난 사람들에는 코이족 수렵 채집민뿐만 아니라 코이족 목축민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미 가축화된 동물들이 있었지만 농작물은 없었다. 그 결과 그곳의 식물종들을 작물화하지 못하고 역시 다른 곳으로 들어온 농작물에 의존하는 농경이 시작되었으며 근대에 와서 대량으로 인구가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그와 같이 외부의 가축 작물에 의존하는 식량 생산이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갑자기 인구가 대량으로 교체되는 현상은 선사 시대에도 많은 지역에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사 시대의 인구 교체에 대해서는 문자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 증거는 고고학적 기록에서 찾아내거나 언어학적 증거에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가장 확실한 것은 새로 도착한 식량 생산자들과 그들에 의해 교체된 수렵 채집민들의 골격이 서로 현저하게 다르고 그 식량 생산자들이 농작물과 가축뿐만 아니라 토기까지 함께 들여와서 아무런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경우들이다. [후략]3)

 

 

간추려 말하자면 식량 생산이 독립적으로 발전한 곳은 세계의 몇 지역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각각 시기가 크게 달랐다. 일부 이웃 지역의 수렵 채집민들은 그 같은 핵심 지역으로부터 식량 생산을 배웠고 기타 이웃 지역의 사람들은 그 핵심 지역의 식량 생산자들로 교체되었으며, 역시 각각의 시기는 크게 달랐다. 마지막으로,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생태학적으로 식량 생산에 적합한 곳인데도 선사 시대에 농업을 시작하지도 습득하지도 못했다. 근대에 와서도 바깥 세상의 물결에 휩쓸릴 때까지 수렵 채집민의 생활을 고수했다. 그리하여 식량 생산을 일찍 시작한 지역의 민족들은 총기, 병원균, 쇠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도 일찍 출발한 셈이었다. 그 결과는 역사의 유산자와 무산자 사이의 수많은 충돌이었다.4)

 

 

또 하나의 오해는 유랑형의 수렵 채집민과 정주형의 식량 생산자가 명확히 구별된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구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북아메리카 서북부의 태평양 연안과 같은 일부 풍요로운 지역의 수렵 채집민들은 정주는 했어도 식량 생산자가 되지는 않았다. 팔레스타인, 페루 해안, 일본 등지의 수렵 채집민들도 먼저 정주했다가 훨씬 나중에 가서야 식량 생산을 시작했다. 15000년 전의 수렵 채집민들 중에는 아마 정주형 집단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가장 풍요로운 지역들을 포함하여) 수렵 채집민들밖에 없었는데 비하여 오늘날의 얼마 안 되는 수렵 채집민들은 유랑 생활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척박한 지역에서만 겨우 생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동 생활을 하는 식량 생산자 집단도 없지 않다. [중략] 현실에서 잘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분법은, 적극적으로 토지를 관리하는 식량 생산자들과 단순히 토지의 야생 산물을 거두기만 하는 수렵 채집민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부 수렵 채집민은 철저히 토지를 관리하고 있다. [후략]5)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각 대륙에서 최초의 농경민은 근처에서 다른 농경민을 관찰할 수 없었으므로 의식적으로 농경을 선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륙의 어느 한 지역에서 일단 식량 생산이 시작된 후에는 이웃한 수렵 채집민들이 그 결과를 보면서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수렵 채집민들이 이웃의 식량 생산 체계 전부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어떤 경우에는 그중에서 몇 가지 요소만을 골라서 받아들였다. 또 어떤 경우에는 식량 생산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수렵 채집민으로서만 남아 있었다.

 

예를 들자면 기원전 6000년경까지의 유럽 남동부 여러 지역의 수렵 채집민들은 서남아시아의 곡류, 콩류, 가축 등을 동시에 신속하게 받아들였다. 그 세 가지는 기원전 5000년 이전의 몇 세기에 걸쳐 유럽 중부에서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유럽 동남부와 중부에서 식량 생산의 도입이 그렇게 신속하고 일괄적이었던 까닭은 그 지역의 수렵 채집민 생활이 비교적 생산성이 낮아서 경쟁력이 적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와 대조적으로 프랑스 남부, 스페인,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 서남부에서는 식량 생산이 서서히 도입되었다. 양이 먼저 들어오고 곡류는 나중에 들어왔다. 아시아 본토의 집약적인 식량 생산이 일본에 도입된 속도도 역시 매우 느리고 점진적이었다. 아마 일본의 수렵 채집민 생활이 주로 해산물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그곳의 토종 식물들도 생산성이 높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6)

 

 

[전략] 그러나 지난 10000년 동안 나타난 지배적인 결과는 대체로 수렵 채집에서 식량 생산으로의 전환이었다. 따라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수렵 채집보다 식량 생산의 경쟁력이 더 커지게 만든 요인들은 무엇이었을까? [중략]

 

주요 요인은 대략 다섯 가지로 추려낼 수 있는데, 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주로 그것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놓고 벌어진다.

 

한 가지 요인은 야생 먹거리가 감소한 것이다. 지난 13000년 사이에 수렵 채집민의 생활에 대한 보상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들이 생계를 의존하던 자원(특히 동물 자원)들이 적어지거나 아예 사라졌기 때문이다. 제 1장에서 보았듯이 기후 변화 때문이었든 인간 사냥꾼들의 기술과 수효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든 간에 어쨌든 남북아메리카에서는 홍적세 말기에 대형 포유류가 대부분 멸종했고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일부가 멸종했다. [중략]

 

두 번째 요인은, 야생 동물이 감소하면서 수렵 채집 생활의 보상이 줄어들었던 것과는 반대로 작물화할 수 있는 야생 식물이 증가하면서 식물의 작물화에 따르는 보상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는 홍적세 말기의 기후 변화로 야생 곡류의 생식지가 크게 확대되어 짧은 시간 동안 막대한 양의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중략] 기원전 11000년 이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는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필수적인 방법, 도구, 시설 등이 그렇게 신속하게 나타났다. 그 모든 것은 풍부해진 야생 곡류를 취급하게 되면서 새로 발명된 것들이었다. [중략]

 

네 번째 요인은 인구 밀도의 증가와 식량 생산의 발원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적인 관계였다. 충분한 증거를 구할 수 있는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고고학자들은 인구 밀도의 상승이 식량 생산의 등장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원인이었고 어느 것이 결과였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다. [중략]

 

이상의 네 가지 요인을 종합해 보면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식량 생산이 어째서 기원전 18500년이나 기원전 28500년이 아니라 기원전 8500년경에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앞의 두 시기에는 아직 수렵 채집 쪽이 초기 단계의 식량 생산보다 훨씬 더 보상이 컸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야생 포유류는 풍부했던 것에 비해 야생 곡류는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곡류를 채집, 가공, 저장하는 데 필요한 발명품들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단위 면적당 더 많은 열량을 수확하는 일에 중점을 둘 만큼 인구 밀도가 높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식량 생산으로의 전환에 작용했던 마지막 네 번째 요인은 수렵 채집민과 식량 생산자들의 지리적 영역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식량 생산자들은 인구가 훨씬 조밀했기 때문에 굳이 기술, 병원균, 직업 군인 등등 식량 생산과 관련된 그 밖의 이점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순전히 숫자만 가지고도 수렵 채집민들을 몰아내거나 몰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수렵 채집민밖에 없었던 지역에서도 식량 생산을 도입한 수렵 채집민 집단들은 곧 그렇지 못한 집단들보다 인구가 많아졌던 것이다.

 

그 결과 식량 생산에 적합한 각 지역에서 사는 수렵 채집민들의 대부분 두 가지 중 한 가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웃의 식량 생산자들에 의해 쫓겨나든지 스스로 식량 생산을 받아들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후략]7)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한 가지 이점은, 그 지역이 겨울은 온난 다습하며 여름은 길고 덥고 건조한, 이른바 지중해성 기후대에 속한다는 점이다. 그 같은 기후는 긴 건조기에도 살아남았다가 다시 비가 내리면 재빨리 성장을 재개할 수 있는 식물종을 선택한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많은 식물, 특히 곡류와 콩류는 인간에게 유용한 방향으로 적응했다. 한해살이 식물이어서 건조기가 오면 식물 자체는 말라죽어 버리는 것이다. 한해살이 식물은 1년밖에 못 살기 때문에 초본의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다. 그 대신 큰 종자를 만드는 데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이 종자들은 건조기 동안 휴면기에 들어갔다가 비가 내리면 발아한다. 그러므로 한해살이 식물은 나무나 관목처럼 먹을 수도 없는 목질이나 섬유질의 줄기를 만들기 위해 낭비하는 에너지가 거의 없다. 특히 종자가 큰 한해살이 곡류와 콩류의 종자는 인간이 먹을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현대의 주요 12종 작물에 6종이나 포함되어 있다. [중략]

 

비옥한 초승달 지대 식물군의 두 번째 이점은, 그 야생 조상이 이미 풍부하고 생산성이 높았던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또한 큰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 수렵 채집민들도 금방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중략]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곡류는 야생 상태에서도 그렇게 생산성이 높았기 때문에 재배가 시작된 후에도 많은 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앞장에서 이미 논의했듯이 중요한 변화(자연적인 종자 분산 체계와 발아 억제물의 해체)는 인간들이 그 종자를 밭에서 재배하기 시작하자 곧 신속하게, 자동적으로 일어났다. [중략]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다른 지중해성 기후대에 비하여 적어도 다섯 가지 이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첫째, 서유라시아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지중해성 기후대가 있다. 따라서 그보다 작은 오스트레일리아 서남부나 칠레의 지중해성 기후대에 비하여 야생 동식물도 다양하다. 둘째, 지중해성 기후대 중에서도 서유라시아는 계절별 연도별 기후 변화가 가장 큰 지역이다. 그러한 변화 때문에 그곳의 식물군도 진화하여 한해살이 식물의 비율이 유난히 커졌다. 종의 다양성과 한해살이 식물의 높은 비율이라는 이 두 가지 요인이 합쳐져서 결국 서유라시아의 지중해성 기후대에서 가장 다양한 한해살이 식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지중해성 기후대가 가진 세 번째 이점은, 짧은 거리 안에서도 고도 및 지형 변동이 심하다는 점이다. 이곳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점(사해)도 있지만 테헤란 인구에는 해발 5600m에 달하는 산맥도 있다. 그와 같이 고도의 변동이 심하면 환경도 다양해져서 농작물의 잠재적인 조상인 야생 식물도 매우 다양해진다. 산맥 부근의 저지대에는 강과 범람원과 사막이 있어서 관개 농업에 적합하다. 그와 대조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서남부의 지중해성 기후대는 물론이고 그보다는 정도가 덜하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서유럽의 지중해성 기후대도 고도, 생식지, 지형 등의 변화가 적다. [중략]

 

비옥한 초승달 지대가 짧은 거리 안에서도 생태학적으로 다양했던 것은 네 번째 이점과도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소중한 농작물의 야생 조상뿐 아니라 가축화된 대형 포유류의 야생 조상도 풍부했다는 점이다. 캘리포니아, 칠레, 오스트리아 서남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의 지중해성 기후대에는 가축화하기에 적합한 야생 포유류의 수가 적거나 아예 없었다. [중략]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식량 생산이 일찍 시작되게 했던 마지막 이점은, 지중해 서부 연안을 포함하는 다른 지역들과 달리 이 지역에서는 수렵 채집 생활의 경쟁력이 약했으리라는 점이다. 서남아시아에는 큰 강이 별로 없고 해안선도 짧아서 수산 자원(강과 연해의 어패류)이 비교적 빈약했다. 고기를 얻기 위해 많이 사냥했던 중요한 포유류 중의 하나가 가젤이었다. 이들은 원래 큰 무리를 이루고 살았지만 인류가 늘어나면서 남획되어 수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곧 식량 생산용 동식물들이 수렵 채집용 동식물보다 우세해졌다. 또한 식량 생산이 시작되기 전에도 이미 곡류에 기반을 둔 정주형 촌락들이 있었으므로 수렵 채집민들은 쉽게 농업과 목축 쪽으로 기울었다. [후략]8)

 

 

 

 

 

각주

  1. 재레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역, 『총 균 쇠』(문학사상사, 2005), 150-152쪽.

  2. 같은 책, 153-155쪽.

  3. 같은 책, 157쪽.

  4. 같은 책, 158쪽.

  5. 같은 책, 162-163쪽.

  6. 같은 책, 165-166쪽.

  7. 같은 책, 167-171쪽.

  8. 같은 책, 204-213쪽.

 

 

 

-. 참고문헌

 

재레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역, 『총 균 쇠』(문학사상사, 2005).

 

 

 

댓글
1
Profile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공지 정보게시판 이용에 관한 필수 안내 21.01.01 265 3
55 🗽정치 [공유] 가속주의자 정치를 위한 선언 22.04.16 88 0
54 🗽정치 (정떡X) 노무현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이유 (1) 22.04.15 75 4
53 🪙경제 가속주의와 그 한계, 「포스트자본주의 대안의 모색: 새로운 전개와 쟁점」 中 22.04.15 79 1
52 🗽정치 [공유] 중국의 '급속 성장'을 동경하는 <중화미래주의>라는 기괴한 사상 (1) 22.04.10 135 4
51 🗽정치 마린 르펜이 최근 프랑스에서 높은 지지를 받는 이유 설명 22.04.09 80 2
50 🗽정치 2022년 헝가리 총선의 결과, 설명, 분석 22.04.05 77 4
49 📝역사 오항녕, 「동아시아 봉건 담론의 연속과 단절」 中 22.04.03 99 2
48 🪙경제 [공유] 유교의 가르침은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 "자연적 질서로서의 자유시장" (3) 22.03.26 191 5
📝역사 『총 균 쇠』에서 발췌―농경의 확산과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중심으로 (1) 22.03.26 114 3
46 🔮철학 (반)혁명에 관한 율리우스 에볼라의 견해 22.03.12 73 3
45 🔮철학 역사주의에 관한 율리우스 에볼라의 견해 (2) 22.03.11 87 3
44 🗽정치 '페레스트로이카 2.0'을 말하는 까닭?―代 알렉산드르 두긴 인터뷰 (1) 22.03.04 153 3
43 🗽정치 대충 정리해본 현재 영국 정치 상황 & 차기 총선 예상 (1) 22.02.15 120 5
42 📝역사 "나치 때문에 영국, 중공이 욕 안먹었다"라는 주장에 대한 짧은 의견 (1) 22.02.11 169 2
41 🪙경제 자본주의의 위기 (1) 22.02.08 113 4
40 📝역사 오늘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의 즉위 70주년입니다. (1) 22.02.06 100 3
39 ✝️종교 [2편] 종교가 무엇일까? (3) 22.01.29 124 6
38 🗽정치 2017년~2022년 프랑스 정치 상황, 대선 판도에 대하여 (1) 22.01.29 94 5
37 📝역사 독일인들은 나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22.01.24 111 4
36 📝역사 근대 다민족 사회의 해체 (1) 22.01.20 114 7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