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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다이쇼 시대, 로망에 숨겨진 억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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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요히토

 

다이쇼 시대, 로망에 숨겨진 억압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이면에 감추어진 탄압과 제국주의의 모습

 

 

일본 문화의 하위 장르에는 “다이쇼 로망(大正ロマン)”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본질적으로는 다이쇼 시대의 자유주의적이고 낙관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정치적/문화적/사회적 풍조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종종 제목 그대로 다이쇼 시대의 사회 분위기와 문화 양상을 낭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대중 문화 속에서 다이쇼 시대가 어떻게 그려지는 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때 이 역시 크게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이쇼 시대의 일본에도 시베리아 출병과 쌀 파동, 관동 대지진과 같은 큰 사회적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 시기가 낭만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있다. 이 시기 전후로는 개발이 막 시작되고 청/러와 전쟁을 치룬 메이지 시대나 대공황 이후 중국과 동남아를 상대로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에 나서기 시작한 쇼와 시대가 있는데 반해, 비교적 전란이 적은 상태에서 서구식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고 생활과 문화의 수준이 향상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연호를 기준으로 시대를 나누는 것은 정확한 구분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다이쇼 시대가 가진 이미지의 대표성 때문에, 위에 언급한 사회 문화적 변화가 영향을 미친 시기, 다시 말해서 러일전쟁(1904-1905) 이후부터 보통선거법(1925)과 치안유지법(1925) 제정 등의 개혁을 전후로 한 시기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기로 부르고는 한다.

 

이 시기가 일본인들로 하여금 향수와 낭만의 감성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이유를 조금 더 분석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이 있을 것이다. 첫째, 정치 부문의 변화이다. 참정권을 갖지 못했던 민중은 히비야 공원 폭동(1905)을 필두로 하여 도쿄에서 수 차례의 폭동과 집회를 일으켰는데, 1925년 보통선거법의 제정으로 만 25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성이 참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건과 이를 전후로 한 일련의 개혁 조치는 호헌 운동과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으로 인한 민중 의식의 고양과 무관하지 않다. 둘째, 사회와 문화의 변화이다. 다이쇼 시대에는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버스와 노면전차 교통이 확대되고, 서양식의 의복이 유행하는 등, 급격한 생활 문화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외형적인 부국강병, 즉 “문명”에 초점을 맞춘 메이지 시대와 대비되는 민중과 개인의 “문화”가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제적 발전이 뒷받침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이쇼 시대의 번영은 이중성 위에서 성립한다. 우선, 내부로는 자유와 민본, 입헌을 외치며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를 옹호했던 다수 민중의 이중성이다. 이들은 폭동과 집회로 전제적이고 과두적인 제국 정부를 상대로 자신들의 의지를 보이고자 했으나, 한편으로는 강경한 대외 정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것은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인들의 동아시아관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동아시아의 구성원이 아니라 서양 열강과 동등한 우월적 지위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동아시아를 자신들의 발전과 번영을 위한 발판으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일본과 일본인이 아닌 것, 그리고 서구 열강과 관련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침략적인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 정책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둘째로는 자유의 기만성을 들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보통선거법으로 성인 남성들에게는 투표권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동년에 제정된 치안유지법은 제국 정부의 전제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처음에는 체제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으로 시작하여, 이후에는 점점 그 범위를 확대하여 정부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들을 징역형에 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그 연장선상에서 예방구금제도가 도입되기도 했다. 또한 “처녀” 관념을 비롯하여,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 역시 여전히 만연했다.

 

게다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를 만한 것은 소수의 지식인 계층과 학생 계층, 넓게 생각해도 도시의 중산층 이상의 주민들만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비판점도 있다. 물론, 농민이나 하층 노동자를 포함한 대중의 참여와 인식 변화가 동반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사회의 변화와 혼란이 너무 크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다수 있다. 하지만 소수만 해당되는 사회문화적 현상이라는 의견이 나오는 것 자체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불리우는 현상과 그 시기에도 일본 제국을 이루었던 모든 대중과 위정자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일본이 뿌리째 바뀌는 일이 일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해서, 일본 제국의 번영에서 조선에 대한 착취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의 번영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에는 근본적으로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 일본이 가장 내면적으로 서구화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20세기에 들어서야 열강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일본이 급격하게 발전해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사회상을 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일본 제국이 항상 중일전쟁 이후의 극도로 탄압적이고 경직된 사회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선입견과 배치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게 일본이 격동적으로 변화해나가는 한 가운데에 있는 시기였던 만큼,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통칭되는 수 년간의 기간에 대한 이해는 일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마쓰오 다카요시, 『다이쇼 데모크라시』, 오석철 역, 2011

미나미 히로시, 『다이쇼 문화 (1905~1927) – 일본 대중문화의 기원 –』, 정대성 역, 2007

   유지아, 「1910-20년대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제국주의의 변용」, 『한일관계사 연구』 57 (2017) pp. 43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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