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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 번의 흥기에 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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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반

external/pds26.e...

▲ 사쓰마 번의 위치 (출처 : http://pds26.egloos.com/pds/201507/20/68/b0061568_55ac83e1a56df.jpg)

 

https://cafe.naver.com/booheong/192312 - 제국의 기원 : 小帝國 사츠마의 흥기 (네이버 부흥 카페)

위 글을 요약하고 추가적인 내용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해 패배한 사쓰마 번은 위기에 봉착해 있었음. 정예 병력들을 크게 손실한 것도 문제였지만, 일본 전역을 장악한 에도 막부가 사쓰마 번에 대해 대대적인 견제를 시도함.

 

1604년, 막부는 사쓰마에 천하보정(天下普請, 막부가 여러 번들에게 내리는 토목공사 명령. 성곽 건축 외에도 도로, 하천 정비까지 포함.)을 내려 에도 성에 대한 증축을 요구했고 이후에도 비슷한 명령을 계속 하달함. 특히 1753년엔 키소 3강(木曽三川) 정비를 골자로 치수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호레키 치수'(宝暦治水)임.

 

ファイル:宝暦治水1.JPG

▲ 호레키 치수 당시 기소 3강의 지형 (출처: 일본어 위키피디아)

 

호레키 치수의 목적은 노비 평야를 비롯한 나고야 인근 농지 침수 및 토사 퇴적을 방지하고 수로 정비를 통해 인근 번들의 수자원 분쟁을 해소하기 위함에 있었음. 과거에도 이러한 정비 사업이 추진되려던 바 있으나 재정난에 시달리던 막부에선 경비 문제로 거부되었는데, 이를 사쓰마 번에게 통째로 넘겨버림.

 

사쓰마인들은 자기들과 연고도 없는 이 사업에 희생할 것을 요구한 것에 분노했고 막부와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강경론까지 대두됨. 허나 번 측에서는 막부의 명령에 응하기로 하고 사쓰마 가신단이 현지로 파견됨. 물론 치수 사업 중에도 여러 번 강이 범람하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번사들이 할복함. 이뿐만 아니라 사쓰마인들과 막부에서 보낸 사람들끼리 다툼이 벌어지는 일도 잦았음. 결과적으로 이 사업에 사쓰마 번이 쓴 비용은 약 40만 냥(오늘날로 300억엔 이상으로 추정)이었고 원래도 거액의 부채로 허덕이고 있던 번 재정은 나락, 만성적인 재정난에 빠지게 됨.

 

이 부분은 일본어 위키백과 '호레키 치수 사건' 이란 이름으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아래 링크로 찾아 보는걸 추천함.

https://ja.wikipedia.org/wiki/%E5%AE%9D%E6%9A%A6%E6%B2%BB%E6%B0%B4%E4%BA%8B%E4%BB%B6

 

사쓰마는 규슈 섬 남부에 분포된 시라스대지(シラス台地)라 불리는 곳에 위치해 있었음. 시라스대지 속에 있는 화산쇄설물은 수분과 산소 투과를 막아서 벼의 생장을 어렵게 함. 이 때문에 쌀 수확이 어려워 대부분의 농민들은 밭농사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음.

 

ファイル:Shirasu Cliff.jpg

▲ 시라스 언덕(シラス崖) 딱 봐도 농사 짓기 좋은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음.(출처: 일본어 위키피디아)

 

당연히 농사로 먹고살기 힘드니 사쓰마인들은 다른 살 길을 찾고자 눈을 돌렸고, 대부분은 상인 또는 왜구가 됨. 사쓰마인들의 이런 생활은 외부와의 활발한 교류를 이어감으로써 보다 개방적인 세계관을 가질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외래 문물 수입에도 선도적인 지역이 될 수 있었음. 또한 인적유입도 활발해지고 명청 교체기때에는 많은 중국 이민자들이 사쓰마에 정착함.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해적, 왕직(王直) 역시 사쓰마 근처의 고토 열도를 근거지로 삼기도 했음.

 

일본 열도를 장악한 에도 막부는 외부 세계와의 상행위를 철저히 통제하려했음. 허나 자기와 가족의 목숨이 달린 사쓰마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막부의 눈을 피하면서(또한 사쓰마 번의 암묵적인 지지 아래에서) 밀무역을 이어감. 또한 1609년에 복속시킨 류큐를 통해서 가져오는 중계 무역도 사쓰마의 큰 이윤을 가져다 줬음.

 

그럼에도 사쓰마 번은 다른 번들처럼 만성적 재정위기에서 벗어나긴 힘들었음. 당대 일본은 소위 '겐로쿠 호황'으로 불리는 풍요의 시대에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막부와 각지의 번들은 재정적으로 궁핍해져감. 이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은 당시 막번의 재정 제도가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임.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말기까지 주요 수입원은 쌀을 기반으로 한 연공이었음 그렇기에 일본의 전통적인 세금기반 조사인 '검지'(檢地) 또한 기본적으로 쌀의 산출량을 위주로 시행됨. 그러나 17세기부터 일본 경제는 쌀을 바탕으로 한 경제에서 여러 상품과 화폐 위주의 상업 경제로 변모하였고 기존의 기축화폐 역할을 담당한 쌀의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함. 이는 반대로 다른 상품들의 쌀에 대한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었고 이는 연공으로 먹고 살던 사무라이들과 이들이 지탱하던 정권의 생활고/재정고를 야기함.

 

겐로쿠 호황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사무라이들의 생활고에 대해서는 아래 블로그 글을 찾아보면 좋다고 생각함

https://blog.naver.com/alsn76/220524744226

 

사쓰마 번은 지리적 요건상 농업 의존도가 낮은 편이었지만 수백년 동안 일본 사회를 지탱한 연공 시스템하에 있던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사쓰마 번의 국고 역시 텅텅 빈 상태였음. 이런 상황에서 사쓰마 번은 위에 언급한 호레키 치수의 비용 부담까지 전부 도맡게 되버린 것임.

 

아까 말했듯 위 치수 사업에 쓴 비용이 40만냥이었고 이는 당시 사쓰마의 연간 재정수입인 12만냥의 3배 이상이나 되는 금액이었음. 이미 재정난을 겪고 있던 사쓰마는 이를 위해 추가적인 채무를 질 수 밖에 없었음.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채무 원금 상환에다가 연이율이 10~12%나 달하는 이자부담이었음. 시간이 지난 뒤 1827년엔 채무 잔고는 무려 500만냥(은 1,180톤)에까지 이르렀음.

 

이에 정상적인 재정체계로는 돌파할 수 없다고 파악한 사쓰마는 재정 개혁에 나서기로 했음. 이를 주도 했던 인물은 사쓰마의 가로인 '즈쇼 히로사토'(調所広郷)였음. 그는 하급 무사 출신으로 챠보즈(茶坊主, 다도와 접객을 맡은 하급 관료)로 출사해 가로까지 오른 입지자전격의 사람이었음.

 

▲ 즈쇼 쇼자에몬 히로사토의 초상화 (출처: 한국어 위키피디아)

 

즈쇼는 먼저 번의 최우선 과제인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채무해소책으로서 '모라토리움'을 선언함. 이에따라 사쓰마는 500만냥에 달하는 채무에 대한 이자지불을 거부하고 원금을 250년에 걸쳐 무이자로 상환할 것임을 공포함.

 

이는 아주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음. 일본의 전통사회에서 상인은 사회적 위치상 말단에 위치해 있었고 종종 정권에서 이들에 대한 재산 몰수 및 무효화 명령을 내리곤 함.  대표적인 예로 가마쿠라 시대에 연원을 둔 덕정령(德政令)이 있었는데 이는 상인들의 고리대에 시달리던 농민과 무사들을 구제하고자 상인이 보유한 채권을 무효화하는 것이었음.

 

허나 사쓰마의 채무해소책은 덕정령과는 차이를 보임. 디폴트(채무 불이행) 성격이 강했던 덕정령과는 달리 사쓰마는 원금에 대한 상인들의 상환 권리를 인정함. 또한 사쓰마는 이자 지불을 거부하는 대신 류큐와의 밀무역에 이들 상인들이 관여할 수 있도록 당근책을 제시했다고도 함.(이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기에 정황상으로만 추측됨.)

 

실제로 채무동결령이 발효된 뒤에도 상인들은 사쓰마 번과 활발히 거래했는데 이는 사쓰마 번이 신용을 잃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음.

 

물론 사쓰마가 채무조정만 한것은 아님. 여러모로 번의 수입을 확대하기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함. 이 중에서 즈쇼를 포함한 번사들이 주목한 것은 오랜 특산품인 '흑설탕'이었음.

 

1609년 사쓰마가 류큐를 정벌한 후 류큐 왕국의 세력권이었던 아마미 제도는 곧장 사쓰마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됨. 17세기 말엽 재정압박에 시달리던 사쓰마 번은 아마미 제도에서의 사탕수수 경작을 독려했고 1745년엔 이 지역에 한해서만 연공납부품목을 쌀에서 설탕으로 변경함. 이 조처로 인해 아마미 제도에는 기존의 쌀농사와 밭농사가 자취를 감추고 사탕수수를 중심으로 한 단일작물 경작, 이른바 '플랜테이션' 경제구조가 형성됨. 즈쇼는 또한 1831년부터 아마미 제도 주민들로 하여금 연공으로 납부하는 설탕 외에도 이 지역에서 재배되는 모든 설탕을 번에 강매토록 조치키도 했음.

 

ファイル:Sugar cane 2.JPG

▲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모습 (출처:일본어 위키피디아)

 

당시 사쓰마가 아마미 제도에 구축한 설탕 수취 시스템은 대충 이랬음. 아마미 제도의 최대 섬인 오시마의 경우, 매년 460만 근(약 2,760톤)에 달하는 설탕을 정기적으로 상납함. 상납 분량 이외의 설탕은 번이 주민들에게 일용품(쌀, 콩, 술 등등)과 교환한다는 명목으로 물물교환식으로 가져감.

 

오시마에서 쌀과 설탕의 교환비는 1승(약1.8kg) 당 5근(약3kg)이었음. 반면 당대 일본의 물류/경제 중심지인 오사카에서는 쌀 1승이 설탕 1근보다 가치가 낮았음. 즉 즈쇼는 설탕 강매책을 통해 아마미 설탕-일용품 무역으로 폭리를 취할 수 있게됨. 물론 이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 아마미 제도 내에서는 폐전 정책, 즉 화폐를 사용할 수 없도록 했고 기존 섬의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금전채무 또한 전액 무효화 되었음. 이에 따라 섬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던 빈곤층들의 채무부담을 소멸시킴으로서 이런 설탕수탈정책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완화시키고자 했음.

 

이는 류큐 왕국에게도 적용시켜 사쓰마에 대한 설탕전매제를 시행했음. 이는 아마미 제도보다 느슨했지만 결과적으로 류큐 왕국에서 징수한 설탕 대부분을 사쓰마가 가져가는데는 성공함. 류큐 왕국 역시 설탕전매제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류큐 정부에서 전매한 설탕을 사쓰마가 다시 전매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이렇게 확보한 설탕들은 오사카 등 일본 국내 시장에 매각하여 자금원이 되어주었음.

 

일본 내 설탕 공급을 장악한 사쓰마는 또한 유통 과정까지 손을 대기로 했음. 일본의 유통 구조는 막강한 자본력 네트워크를 가진 오사카 상인들이 주도하고 있었고 사쓰마의 설탕 역시 예외가 아니었음. 이들은 직접 사쓰마에서 저렴하게 설탕을 구입해 오사카 시장으로, 그리고 오사카에서 각지의 시장으로 수송해 비싸게 팔아 막대한 차익을 챙기고 있었음.

 

사쓰마는 이에 오사카 상인들의 유통 개입을 배제하고 설탕 시장에서의 이윤을 극대화하기로 함. 이에따라 번에서 직접 설탕을 나를 수송선을 건조하고 이를 사쓰마 내 상인들에게 임대하는 형식으로 설탕 산업의 수직적 통합을 시도했고 이는 큰 성공을 거둠. 이러한 즈쇼의 설탕 전매책은 빠른 시일내에 재정을 복구할 수 있었고, 그가 실각할 때 즈음엔 사쓰마는 250만냥이라는 거금을 축적할 수 있었음.

 

1851년, 오유라 소동을 거쳐 번주에 오른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본격적으로 문명개화 정책을 추진하기로 했음. 상대적으로 정치적 입지가 좁았던 나리아키라가 이같은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양 문물에 대해 빠삭했던 개인사적인 부분 외에도 당시 일본인들의 시대 정신이 한몫했음. 당시 청이 영국 함대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일본인들은 서양에 대한 경계심을 갖기에 충분했고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었음.

 

나리아키라는 풍부한 재정을 이용해 저명한 난학자들을 초빙, 서양의 지식을 연구 및 번역하는데 힘썼고 한편으로 슈세이칸(集成舘, 집성관)이라는 이름의 근대적 산업·연구 단지를 조성했음. 당시 슈세이칸에는 다양한 생산 시설이 집적되어 있었는데 조선소, 용광로, 반사로, 유리 제작소, 사진관 등의 시설들이 넓게 포진되어 있었음. 전성기 때는 무려 1,200명에 달하는 공인들이 슈세이칸에서 일했음.

 

集成館事業 - Wikipedia

▲ 1872년 슈세이칸의 모습 (출처: 일본어 위키피디아)

 

1855년엔 슈세이칸에서 일본 최초의 증기선을 건조했음. 운코마루(雲行丸)로 명명된 이 선박은 물론 서구제 증기선에 비해 조악했음. 당시 운코마루의 출력은 3마력이고 여타 서구 증기선들은 12마력을 냈었음. 허나 사쓰마가 자체적으로 근대 군사력을 갖출 역량이 있었던 것은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음.

 

한편 위에서 언급했듯 일본은 화폐 경제가 크게 융성했고 쌀의 징수량 못지않게 화폐의 주조권 역시 정부의 힘의 원천이 됨. 당연히 이 권리는 막부가 가지고 있었고 막부는 전국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각종 화폐들을 주조하는 한편 다른 번들이 화폐를 주조하는 것을 금지함. 지방의 번들은 번 내에서만 통용되는 어음인 번찰의 발행권만을 인정했음.

 

매년 에도 막부는 화폐 발행을 통해 막대한 주조차익을 벌여들었고 이에 대한 재정의존도 역시 높아지면서 19세기에는 막부 전체 재정수입의 약 1/3이 주조차익에서 충당되었음.

 

그러나 페리 원정 이후 막부의 권위가 약화되기 시작하자 막부의 화폐 주조 독점권을 침범하려는 시도가 나타났고, 사쓰마 역시 이를 주도하는 움직임 중 하나였음. 나리아키라는 1853년 에도에서 가보를 주조한다는 명목으로 에도전좌(錢座, 조폐소)의 기술자 니시무라 도우야(西村道弥)에 대한 초빙을 승낙받음.

 

물론 나리아키라의 목적은 다른데 있었음. 나리아키라는 니시무라로 하여금 자신의 가신인 이치키 시로(市来四郎)에게 주전 기술을 전수토록 명함. 이렇게 에도의 주전 기술을 입수한 사쓰마는 1857년부터 슈세이칸에서 비밀리에 화폐를 주조했음.

 

이후 사쓰마는 속국인 류큐 왕국에서 통용될 류큐통보의 주조 허가를 막부에게 요청함. 당시 각지의 번은 번내에서만 통용 가능한 지역 화폐를 한정적으로 주조할 수 있었고, 막부는 위폐주조 가능성을 경계했지만 강성해지던 사쓰마와의 관계를 고려해 이를 허가했음.

 

막부에게 인가를 받은 사쓰마는 곧장 슈세이칸 인근에 주폐소를 건립하고 위폐주조사업에 뛰어듬. 사쓰마는 류큐통보를 텐보통보와 동일하게 디자인한다고 둘러대면서 실제로는 텐보통보를 대거 주조해 일본 시장에 유통시킴. 텐보통보는 일문전(一文錢) 100매 분의 가치가 있는 화페였지만 실제 구리의 함유량은 4매 분밖에 되지 않았음. 그래서 일문전을 대량으로 모아, 이를 용해하여 텐보통보로 재주조함으로써 주조원가의 약 4배에 달하는 주조차익을 거둬 들일 수 있었음.

 

일본 1835년 천보3년 천보통보(天保通寶) 최저가 - 옥션

▲ 텐보통보의 모습 (출처: http://itempage3.auction.co.kr/DetailView.aspx?itemno=B782084228 )

 

이외에도 구리를 확보하기 위해 밀무역을 시도했지만 그 한계가 있었기에 사쓰마는 불교계를 압박하고 불교 사찰이 가지고 있던 여러 공예품들을 화폐 주조를 위해 강탈하기도 했음. 이는 다른 위폐 주조에 가담하던 번들도 똑같이 따라했고 이러한 불교계와의 대립은 메이지 정부 수립까지도 이어짐.

 

사쓰마는 이후에도 막부의 재정건전화 정책에 일환으로 주조한 금화인 만엔이분금도 위조했고 이렇게 위폐사업으로 벌어들인 거금은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으로 사용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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