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역사는 200년 정도라 짧은 편인데, 그런만큼 이번에는 미국 역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사를 알아보면서 간략하게 미국의 정치 구도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 제1정당제 (1792~1828): 민주공화당(연방제 지지) vs 연방당(중앙집권제 지지)
알렉산더 해밀턴(맨 오른쪽)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포하고 178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자, 미국에서는 새로 세워지는 나라를 어떤 정치 형태로 해야할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조지 워싱턴을 국왕으로 옹립하는 입헌군주제파가 초기에는 다수를 점했지만 워싱턴이 공화제를 선호했던 관계로 미합중국이 건국되었다. 이후 두번째로 촉발된 논쟁은 각 주의 권한을 어느정도로 하느냐에 대한 문제였는데, 이것에 대한 논쟁이 제1정당제라고 불리게 되는 초기 미국의 정치 형태를 결정하였다.
크게 봤을때 이때의 미국의 양당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이끌던 연방당과,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이끌던 민주공화당으로 나뉘어졌다. 알렉산더 해밀턴, 존 애덤스, 존 마셜이 주축이 된 연방당은 연방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중앙 정부의 권력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추종하였고, 당수인 해밀턴이 재무장관이었기 때문에 재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정책적으로는 금융, 경제에 치중된 모습을 보였다.
반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먼로, 제임스 매디슨, 앤드루 잭슨 등이 주축이 된 민주공화당은 이른바 "반연방주의자"들로, 각 주의 권력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지방 분권을 지지하였다. 또 엘리트주의와 의원내각제를 지지했던 연방당과 달리 대통령제와 대중주의를 선호했다. 연방당이 금융과 경제에 치중된 정책을 펼쳤다면, 민주공화당은 외교적인 방향에 더 집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보호 무역을 표방하는 등 좌익 빅텐트적인 성격을 가졌다.
이 두 정당은 극초창기 미국의 정치 세력을 양분하였으나 알렉산더 해밀턴이 결투로 인해 사망하여 구심점을 잃은 연방당은 점차 후퇴하게 된다. 또 연방당은 친영국을 표방했는데, 영국과 미국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친프랑스 정책을 표방한 민주공화당이 더 높은 지지를 얻었다. 결국 1820년대 이후의 정치는 민주공화당의 독주 체제로 개편되어, 제1정당제가 붕괴되었다.
- 제2정당제 (1824~1854): 잭슨 민주주의(대중주의)의 시대
앤드루 잭슨 전 대통령
그러던 1824년 민주공화당이 분열되는 사건이 터졌다. 1824년 대선에서는(미국은 한 정당의 후보 중복 공천이 가능하다) 민주공화당 내에서 앤드루 잭슨이 1위를, 존 퀸시 애덤스가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앤드루 잭슨이 선거인단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해 의회에서 대신 대통령을 결정해야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때 애덤스는 3위를 차지한 헨리 클레이를 포섭해 잭슨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내 다수파를 차지했던 잭슨계파가 이에 불복하자 존 퀸시 애덤스와 헨리 클레이는 손을 잡고 민주공화당을 탈당, 국민공화당을 창당하여 당이 분당되었다. 그리고 잭슨파만이 남은 민주공화당은 당명을 민주당으로 교체한다.
1828년, 앤드루 잭슨은 재선을 노리던 애덤스를 꺾고 역사상 최초의 서민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당선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는데, 첫번째로 근대적인 선거 운동이 이뤄졌다는 점이 있었고 두번째로는 엘리트 과두정에 가까웠던 미국의 정치가 대중 민주주의로 옮겨졌다는 점이 있었다. 앤드루 잭슨은 엘리트만이 장관이 될 수 있었던 당대의 관례를 깨고 자신의 친구들이었던 서민 출신 정치인들을 대거 장관으로 등용시키는 이른바 "엽관제"를 실시, 30년간 이어져오던 미국의 엘리트 정치를 붕괴시키고 대중주의 정치의 시대를 개막하였다.
또한 앤드루 잭슨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선거권을 일부 부유층에서 백인 남성 전체로 확대시키면서 보통선거제도의 초석을 놓았으며, 이전까지 잘 사용되지 않던 법률 거부권도 사용하며 현대적인 형태의 대통령제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잭슨의 이런 거침 없던 개혁 행보는 보수파들의 반발을 낳았다. 183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민주당 소속의 마틴 밴 뷰런이 당선되자, 위기감을 느낀 반 잭슨파 정치인들은 1834년 휘그당을 창당하였다. 휘그당은 영국에서는 현재의 자유민주당이지만 미국에서는 현재의 공화당, 즉 자유주의 정당이 아닌 보수주의 정당이다.
휘그당은 앤드루 잭슨에 반대하던 입장에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엘리트주의와 강경한 보수주의를 추구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패배가 지속되자, 1840년에는 앤드루 잭슨의 대중주의적인 선거 방식을 이어받은 윌리엄 해리슨이 대선에서 승리하여 휘그당의 성격 역시 상대적으로 대중주의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로서 미국의 정치는 제2정당제를 거치며 엘리트 과두정에서 근대적인 민주정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휘그당은 앤드루 잭슨을 반대하던 정치인들의 야합에 가까웠으므로 태생적으로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1850년대 들어 노예제 문제가 대두되자, 휘그당 내에서 노예제의 처신을 두고 찬반 양론이 일어났다. 당 지도부는 문제를 조율하는데 실패해, 결국 1854년 휘그당은 분당되고 제2정당제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 제3정당제 (1854~1896): 남북의 갈등과 공화당의 일당우위정당제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
1850년대, 미국에서는 노예제의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휘그당 내에서는 북부를 중심으로 한 진보파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반면, 남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노예제 유지를 주장했다. 1854년 진보파와 보수파는 분당되었고, 보수당은 민주당으로 입당하였으며 진보파은 공화당을 창당하여 제3정당제가 출범하게 된다.
공화당은 스펙트럼상 좌파의 위치에 있었다. 공화당은 연방 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는 것을 지지하였으며, 궁극적인 목표는 노예제 폐지였다. 이들은 스칸디나비아 출신 루터교도들과 감리회, 장로회의 지지를 받았다. 반대로 우파 성향의 민주당은 가톨릭과 성공회, 그리고 독일 출신 루터교도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노예제의 폐지를 반대하며, 각 주가 노예제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하는 연방 정부의 권력 약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두 당의 차이를 가르는 가장 큰 이슈는 지역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공업 중심이었던 북부는 공화당을, 농업 중심의 남부는 민주당을 지지했다. 북부에는 이민자들이 많았으며 남부에는 농장주들이 많았다. 북부와 남부의 경제적, 민족적, 사회적 차이는 1850년대 이후 돌이킬 수 없게 커져나갔고 결국 지역감정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양당제를 이루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두 당은 특히 북부의 도덕성과, 남부의 경제가 대립하는 문제였던 노예제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던 1860년, 공화당 내에서 극렬하게 노예제 폐지와 흑인 인권 신장을 지지하고 있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민주당은 미합중국 연방을 탈퇴하기로 결정하고 남부맹방을 건국했다. 이후로는 아시다시피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남부가 패배하였다.
남부가 패배하면서 민주당은 그야말로 역적 정당의 신세에 몰렸다. 그렇게 1890년대까지 거의 2~30년간 북부 공화당이 독주해나가는 일당우위정당제가 실현된다. 1870년대 공화당 내에서는 극좌파 성향의 "공화당 급진파"가 정권을 장악, 그 당시로서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흑인 피선거권 부여와 같은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공화당의 일당독주적인 성향은 많은 미국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율리시스 그랜트를 비롯한 공화당 출신 대통령의 부정부패는 장기적으로 공화당의 인기를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1890년대 이후, 미국 내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갈등이 남북간의 갈등이 아닌 고관세와 저관세의 갈등으로 변질되는 등 지역주의적인 정당 구도는 점차 몰락하게 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여성 참정권 운동 등 시민 운동 역시 미국 사회에서 번져나가자, 1896년 대선 이후 남북 갈등을 기반으로 둔 제3정당제는 해체되게 된다.
- 제4정당제 (1894~1930): 혁신 열풍, 민주당과 공화당의 좌우 반전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
이 당시는 제3정당제와 마찬가지로 공화당이 독주하는 양상을 보였다. 남북간의 갈등은 사라졌다고 했지만 민주당 내에서 리더쉽을 보여준 인물이 1896년 퇴임한 클리블랜드 대통령 이후 없었던데다가 공화당 내에서도 파벌이 다양화되었던 점이 컸다. 공화당의 일당우위정당제는 제3정당제가 끝난 1896년 이후로도 지속되어 1932년 대선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화당 내에서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1896년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당선 이후, 미국 내에서는 서프러제트를 비롯한 사회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사회주의 운동도 활발해졌고 대기업들의 병폐 문제도 부각되었다. 매킨리 대통령의 작고로 인해 대통령직을 계승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반독점법과 노동자 권익 보호, 흑인 인권 신장 등의 개혁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 시기의 바람을 이른바 "혁신 열풍"이라고 하는데, 이런 혁신 열풍은 공화당과 민주당을 가리지 않고 모두 일어나 제4정당제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던 1912년 민주당과 공화당의 운명을 가로짓게되는 거대한 사건이 터졌다. 공화당 내에서 보수파였던 태프트 대통령과, 혁신파였던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갈등을 겪은 끝에 공화당의 진보파가 진보당을 창당해 떨어져나가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공화당이 분열되어 자멸한 탓에 민주당에서는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그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남부나 노예제 등과는 상관이 없던 신세대 정치인이었다.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비롯한 여러 혁신적 어젠다를 표방함으로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혁신 열풍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반대급부로 공화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탈당 이후 혁신 진영을 대변하게 된 민주당을 반대하게 되면서 더욱 우경화되었다. 1920년 대선에서 다시 공화당의 워런 G. 하딩이 대통령 당선되었지만, 이때는 루스벨트 때와 달리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하딩의 사망으로 인해 대통령을 계승하게 된 쿨리지와, 쿨리지의 뒤를 이은 하버 대통령 때에는 적극적인 방임주의를 추구하는 등,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보수적인 공화당"의 모습이 제4정당제의 확립을 통해 이뤄지게 되었다.
- 제5정당제 (1930~1994):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층의 이동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
영원할 것 같던 공화당의 독주는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끝장나게 된다. 공화당의 지지율은 땅바닥으로 떨어졌으며, 윌슨 등 신세대 정치인들을 내세워 남부 중심주의와 남북전쟁의 상흔을 완전히 털어낸 민주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조카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미국 내 진보파들을 규합하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2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제 이론을 받아들인 진보적 경제 정책 "뉴딜"을 추진하였다.
뉴딜 정책의 시행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관계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민주당의 지지층은 그대로 북진하여 북부의 지식인과 거주자들에게서도 높은 지지를 받았던 반면 공화당은 전통적인 지지층의 이탈로 인해 상하원과 대통령 자리를 계속 민주당에 내주는 신세가 되었다. 1948년, 공화당은 뉴욕주지사 출신인 토마스 E. 듀이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지만,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고, 이때의 패배는 결국 공화당이 1980년대까지 정체성에 있어서 방황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북진 역시 민주당에게 있어서 큰 부담감으로 작용했는데, 이는 기존의 전통적 지지층이었던 남부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남부 인구의 3~40%를 차지하는 흑인 문제에 있어서 남부 민주당원들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반면, 북부 민주당이 흑백 분리 반대를 내세웠던 점도 남부와 북부 민주당의 분열을 야기했다. 남부 민주당원들은 뉴딜 정책의 시행으로 더욱 좌경화된 민주당의 주류 세력에 반감이 많았다. 그리하여 1948년과 1968년 대선과 같은 몇몇 경우에서 남부 민주당원들이 독자적인 후보를 내, 북부 민주당의 표를 분산시키는 민주당의 분열이 반복되었다. 특히 남부 민주당의 영수였던 조지 월러스 앨러배마 주지사는 지속적으로 민주당의 표를 갉아먹으며 1968년 대선에서 공화당 출신의 닉슨이 당선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남부 민주당의 잦은 탈당과 분열 소동은 오히려 민주당이 더욱 북부에 치중되도록 만들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북부 주인 매사추세츠주의 상원 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가 당선되자 민주당의 북부 집중은 더 심해졌다. 부통령인 린든 B. 존슨은 텍사스 출신이었지만, 그마저도 결국 인종 분리에 반대하는 "위대한 사회" 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부 민주당원들을 실망시켰다.
그러던 와중에 공화당은 계속 방황을 거듭해 1960년 대선에서의 닉슨의 거대한 실책이었던 "50개주 전략"(50개 주에서 전부 이기는 작전)을 세우는 등 일관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공화당 내에서는 북부를 중심으로 두고 있던 닉슨 등의 중도파와, 보다 강경한 보수주의를 지지하던 베리 골드워터 등의 신보수주의(네오콘)파가 갈등하였다.
1972년 대선에서 닉슨이 압도적인 표차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지만, 오히려 이 대선에서 촉발된 워터게이트 사건은 공화당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닉슨이 사임하면서 닉슨의 측근이었던 중도파 대다수가 멸절된 것이다. 그렇게 공화당의 주류를 네오콘과 우파들이 차지하였고,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은 대표적인 보수파이자 신자유주의자였던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북부 민주당에 실망하고 있던 남부 민주당원들이 대거 공화당으로 돌아섰고, 반대로 공화당을 지지했던 대도시 거주민들이 대거 민주당으로 돌아서면서 현재와 같은 지역 구도가 완성되었다.
지금과 같은 민도공촌(좌도우촌)의 구도가 확실하게 자리잡은 것은 1994년의 "깅리치 쿠데타" 사건 이후다. 1994년 이전까지만하더라도 민주당은 남부와 중부의 지역 조직을 상당수 유지해, 상하원의 의석을 꽉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1992년 미국 대선에서 진보적인 성향의 빌 클린턴이 당선되자, 남부와 중부 내 민주당 당원들의 탈당 문제가 극심해졌고, 이를 당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뉴트 깅리치가 공략하여 공화당의 적극적인 우클릭을 통해 남부, 중부의 당원을 포섭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를 통해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민주당이 붙잡고 있던 남부, 중부의 지역구를 몽땅 탈환하며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층 세력을 와해시켰다.
- 제6정당제 (1994~현재): 현재의 미국 정당 구도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현재의 미국 정당 구도는 제6정당제이다. 깅리치 쿠데타 이후, 민주당은 빌 클린턴 행정부 내에서 노선 선명화를 거듭했다. 깅리치가 하원 의장 자리에 오르면서 공화당 우위의 의회는 클린턴 정부를 압박했지만, 역설적으로 의회의 클린턴 압박이 클린턴에 대한 동정론을 불러일으키면서 클린턴이 국정 운영에 탄력을 얻은데다가, 깅리치의 수많은 도덕적 추문들로 인해 공화당 보수파의 인기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빌 클린턴은 사회적으로는 진보,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인 정책을 추구하면서 현대의 민주당이 표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현대적 자유주의" - 즉 페미니즘, 환경주의, 사회자유주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마지막 남부 출신 보수파였던 앨 고어가 간발의 차로 낙선하면서 리버럴의 민주당 장악은 더더욱 빨라졌다. 공화당의 경우, 1996년 대선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밥돌 의원이 낙선하고, 2000년 대선에서 네오콘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W. 부시가 당선되며 우경화가 가속화됐다. 부시 정권 시절 실세였던 딕 체니 부통령의 주도 하에 공화당의 성향은 극우로까지 뻗어나갔고 이는 우리가 W. 부시 시절 하면 생각나는 "조지고 부시는" 제국주의적 공화당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폭주하던 부시 정권은 08년 리먼 사태로 단죄당하며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캘리포니아와 뉴욕 등의 지역은 민주당을, 캔자스와 텍사스 등의 지역은 공화당을 지지하며, 대학생들, 실리콘밸리의 벤처 사업가와 월스트리트의 금융 재벌들은 민주당에, 노인과 교외 지역의 중산층들은 공화당에 투표하는 전형적인 미국식 정당 지지 구도도 완성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2016년 이후 약간의 변화를 겪는데 이 부분은 다음 단락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제7정당제? (2016~현재): 트럼피즘 vs 사회주의
도널드 트럼프의 2016년 대통령 선거 당선은 미국 정치의 구도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 분류는 나 말고 쓰지 않는 것이지만, 제6정당제의 연장선상이라고 보기에는 독특한 면이 있어서 올려본다.
08년 리먼 사태 이후 미국의 사회는 극도로 분열되었고, 가진 자는 더욱 많이 가지면서 가지지 못한 자는 더더욱 가지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 시점에서 수습의 역할을 맡았었어야할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여러가지 실책들은 "앵그리 화이트"라고 불리는 러스트 벨트의 백인 서민층을 분노케하였다. 더군다나 월스트리트의 지지를 받는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의 후보로 선출되면서 앵그리 화이트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그리하여 기존의 민주당 텃밭이라고 여겨지던 러스트 벨트 지역이 몽땅 공화당으로 옮겨갔고 민주당은 충격에 빠졌다.
민주당 내에서도 기존 리버럴에 반기를 드는 극좌파 사회주의자들의 준동이 심해졌다. 20대 당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샌더스 열풍은 민주당의 주류 리버럴 세력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이 당선되며 민주당 내 좌파들의 난동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여전히 AOC, 엘리자베스 워런, 빌 더블라지오, 털시 개버드, 라시다 탈리브 등 언제든지 당권을 꿰찰 수 있는 당내 좌파들은 칼을 가는 중이고 청년 당원들 사이에서 이들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다.
공화당 역시 변하고 있다. 기존의 네오콘들은 몰락했으며, 완전한 비주류 세력이었던 트럼프가 공화당의 당권을 장악하면서 공화당의 극우화는 심해져가고 있다. 이는 2021년 국회 폭동 사건 등으로 정리될 수 있으며 밋 롬니나 폴 라이언 등 기존의 공화당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주류로 밀려나는 모습이다.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만큼은 안된다"라는 심리로 바이든이 당선되며 제6정당제의 시대는 조금 더 길어졌지만, 이는 2024년 대선을 기점으로 청산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 확실히 정리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제7정당제의 시대 - 즉 트럼피즘과 사회주의의 시대가 올 날은 머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일단 좌파 청년 당원들이 미는 사람은 알렉산드리오 오카시오 코르테스 다만 나이가 너무 젊고 비호감도도 높음 반대로 인지도는 높은 편 (딱 미국판 이준석 정도의 이미지라고 보면 됨)
대중적 지지도도 높고 비호감도 낮은 후보군으로 워런이 있는데 이분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힘들것 같음
그 외에 지방 권력에서는 전직 뉴욕시장 빌더블라지오, 필라델피아 시장 짐 케니 등등이 유력한데 대권 욕심은 없고 루디 줄리아니처럼 임명직으로 백악관 입성을 노리는 쪽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