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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근대로서 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中, 슈펭글러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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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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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인 자유주의에서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야경국가로 축소된다. 그런데 슈펭글러는 이러한 국가론이 다분히 영국적이라고 본다. 이와 관련해 그는 영국의 섬나라 특성(Insellage)을 지적한다. 즉, 바다가 국경의 효과적인 방어벽 역할을 하는 섬나라와 사방으로 적에게 노출된 국경을 가진 나라의 국가관은 애당초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잉글랜드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17세기에 브리튼 섬에서 지배권을 확립했다고 본다. 영국에서는 섬과 바다라는 자연조건이 강력하고 권위적인 국가를 대신했으며, 그 결과 치안만을 담당하는 소극적인 국가관이 등장했다는 말이다. 물론 1588년 에스파냐의 아르마다와 영국의 해전으로 엄마 뱃속에서부터 공포를 느낀 홉스(Thomas Hobbes)는 무적의 리바이어던처럼 강력한 왕정 국가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17세기 이후 영국에서는 작고 약한 국가를 원한 자유 방임이 대세였다.


슈펭글러는 개인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것 역시 영국적 현상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자유로운 사인(私人, Privatmann)이 국가를 대신했다. 그가 말하는 사인이란 공적인 존재인 공인(公人)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무자비한 투쟁을 생존의 필수조건으로 보며 국가나 질서를 억압으로 간주한다. 영국 정치는 이들 사인과 그들 집단이 주도하며, 영국식 의회주의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9세기 영국 제국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인 로즈(Cecil Rhodes)와 미국의 ‘왕들’[석유왕, 자동차왕, 철도왕, 철강왕 등] 역시 사인으로, 그들은 직업정치가를 전면에 내세워 나라를 지배했다. 따라서 슈펭글러는 영국식 자유주의를 ‘사유재산의 비윤리적인 경제적 독재’로 규정했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가 절대시하는 개인의 자유란 궁극적으로 사인의 사유재산을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자유주의 이론은 사유재산이란 자유의 일부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유주의의 역사는 자유주의가 자유보다 사유재산을 더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슈펭글러는 영국 자유주의를 프로이센의 정치이념과 대비시킨다. 개인보다 전체를 우선하는 프로이센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자유(Einzelwille)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전체 의지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는 독일 역사 역시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온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1870년 보불전쟁에서,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독일 민족은 개별을 넘어서 하나가 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것은 군중심리와 다르며, 거기에는 속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강인함과 자유로움이 내재한다. 프로이센 정신은 특별하다(exklusiv). 그것은 다른 나라 노동자의 이기주의적 사이비 사회주의를 거부한다. … 진정한 프로이센 정신은 어느 누구도 경멸하지 않는다.” 19~20세기 유럽에서 전쟁을 앞두고 하나가 되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예시가 적절하지는 않지만, 슈펭글러의 눈에는 영국과 프로이센은 분명하게 다르다. “각자 따로(jeder fürsich)가 영국적이라면, 모두 함께(alle für alle)는 프로이센적이다.”


그렇다면 슈펭글러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프로이센은 어떤 국가였을까. 프로이센에서 권력이란 전체의 것이다. 주권 역시 전체한테 있으며, 군주를 포함한 개인은 이러한 전체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나는 내 국가의 제일 공복이다.” 계몽 절대군주의 상징인 프리드리히 2세가 했던 말로, 그가 통치한 18세기 프로이센이 슈펭글러에게는 이상적인 국가였다. 그 나라에서는 모두에게 자기 자리가 있으며, 명령을 받고 명령에 복종한다. 영국에서는 사회가 빈부 차이로 나뉜다면, 프로이센에서는 명령과 복종으로 나뉜다. 영국에서 민주주의란 부자가 될 가능성을 의미하지만, 프로이센에서는 모든 신분에 도달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슈펭글러가 말하는 위계질서란 흔히 ‘갑질’을 연상시키는 그것과 사뭇 다르다. “윤리란 성공이 아니라 임무(Aufgabe)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소속감은 재산이 아니라 신분에 근거해야 한다. 왕자나 백만장자일지도 모를 중위보다 대위가 높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위계란 억압이나 지배가 아니라 질서라는 것이다. 물론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질서와 억압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지만, 18세기 프로이센이라는 경험에 근거한 슈펭글러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슈펭글러에 따르면,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에서 일어난 세 혁명은 개인 의지와 전체 의지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개인이 권력을 갖는 영국에서는 진정한 국가가 존재하지 않으며, 승리하는 소수의 강자와 패배하는 다수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한다. 물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 의지와 전체 의지가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스미스(Adam Smith)는 개인 이익과 전체 이익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해결한다. “… 그[모든 개인]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리고 다른 여러 경우처럼 여기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결국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것을 촉진한다. … 그는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려 의도할 때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한다.” 물론 스미스는 폭력적인 19세기 자본주의를 알 수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은 자본주의의 역동성에 대한 설명으로는 적절할지 몰라도 자유주의의 난제인 불평등 앞에서는 설득력을 전혀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개인의 이익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영국 자유주의에 대한 슈펭글러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영국이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면, 프랑스의 경우는 절대적 평등이 부각된다. 슈펭글러는 프랑스에서는 누구도 권력을 가질 수 없으며, 그래서 복종, 질서, 국가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무정부주의와 다를 바 없는 ‘만인의 평등’이 실제로는 나폴레옹의 집권(1799) 이래로 강력한 권한을 가진 장군이나 대통령의 압제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라고 비아냥거린다. 물론 프랑스 혁명이 ‘만인의 평등’을 추구했다는 슈펭글러의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1789년 인권선언문에는 평등이 언급되지만, 혁명의 발전과정을 보면 자코뱅 집권 시기를 제외하고 평등이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슈펭글러 역시 봉건적 특권이 귀족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부르주아에게 넘어갔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혁명이 1~2신분의 평등 과세를 내세우면서 적어도 초기에 절대적 평등을 기대한 하층민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이 평등을 내세웠다는 그의 주장이 오류는 아니다. 게다가 질서를 중시한 슈펭글러는 신분제의 타파 자체를 절대적 평등과 동일시했을 것이다.


슈펭글러는 모든 정치제도란 개별적이고 특수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군주정과 공화정을 두고 어느 것이 더 나은 제도인가를 다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제도에 대한 거부감을 분명하게 드러냈으며, 프로이센과 사회주의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프로이센과 사회주의는 우리 삶에 파고들어 그것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앗아간 세계관인 우리 내부의 영국에 함께 맞서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가 20세기의 정치 원리임을 인정했으나, 진정한 민주주의란 사회주의를 통해 실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사뭇 달랐다. “사회주의란 빈부의 대립이 아니라 업적과 능력이 부여하는 서열이 삶을 지배하는 것이다. … 내가 바라는 바는 명령할 능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무언가를 해야 하며, 재능 없는 사람은 명령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란 의지(Wollen)가 아니라 능력(Können)이다.”


이처럼 슈펭글러는 사회주의 역시 평등이 아닌 서열이 존재하는 질서의 관점에서 보았다. 이 점에서 그가 거부한 근대는 자유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까지 포함했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계급 간의 투쟁을 주장한다는 면에서 지극히 영국적이었으며, 마르크스주의는 ‘영국화한 개념 체계’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사적 이해를 노동자의 사적 이해로 대체하려 했다. 여기서는 투쟁과 약탈만이 존재하며, 그 점에서 진정한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슈펭글러가 보기에, 그의 사상에는 국가는 없고 사회만이 존재한다. 영국 의회주의처럼 경제에서는 오직 두 개의 정치 세력에게만 주권이 있으며, 이들 두 세력 위에는 아무것도 군림할 수 없다. 투쟁만이 존재하며, 판결하는 법정은 없고, 승리 아니면 패배만이 있을 뿐이다. 두 세력 중 하나의 독재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사회주의 국가는 이들 두 세력 너머에 존재한다. 국가는 민족 전체이며, 주권은 국가만이 가지며, 두 세력은 전체를 위해 봉사하는 소수일 뿐이다. 사회주의란 일종의 관리(官吏)주의(Beamtenprinzip)이다. 모든 노동자는 궁극적으로 상인이 아닌 관리이며, 기업가도 마찬가지이다. 산업 관리, 상업 관리, 군사 관리, 교통 관리가 있다. 슈펭글러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그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의 인식 지평은 사적인 상인 사회를 사적인 노동자 사회로 전환하는 정도만큼만 넓었다.


슈펭글러가 말하는 상인이란 자신의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투쟁이란 사적 이익 간의 충돌일 뿐이다. 슈펭글러에게는 사적 이익에서 질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사적이라는 점만이 의미가 있다. 자본의 잉여가치 착취를 타파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사적 이해를 추구하는 행위일 뿐이다. 노동과 자본은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선과 악이 아니라 대등하다. 또한 슈펭글러가 말한 관리란 직업으로서 관리가 아니라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앞서 언급한 사인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주의란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되지 않고 사회화한 상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가 사적이 아니라 국가로 표현되는 전체를 위해 공적으로 기능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과 자본은 대립하는 대신 유기체적인 국가 안에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하며 조화롭게 공존해야 할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슈펭글러가 말하는 조화로운 전체란 무엇일까. 그가 이상적으로 본 프로이센은 어떠한 국가였을까. 독일 근대사는 자유주의와 부르주아의 발전에서 영국 및 프랑스와 다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독일사의 특수성을 지적한 ‘독일의 특수한 길(Deutscher Sonderweg, 이하 특수한 길)’ 테제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그러한 차이를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를 ‘정상’으로, 독일 역사를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인식론 때문이었다. 프랑스보다 무려 반세기 이상 늦게 이루어진 독일 부르주아의 정치 데뷔는 참담하게 끝났으며, 1848년 혁명의 실패는 훗날 독일 부르주아의 정치적 위상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특수한 길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사의 발전은 부르주아 혁명의 실패 이후 나치즘이라는 파국으로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자유주의와 부르주아만이 긍정적인 역사를 만든다는 역사 결정론에 가깝다. 바꿔 말해, 부르주아 혁명의 실패와 나치즘의 등장 사이에는 다른 가능성도 존재할 수 있다.

 

 

 

 

 

-. 출처

 

윤용선, 「정치적 근대로서 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 1920년대 독일 보수혁명을 중심으로 -」, 『역사와현실』115(한국역사연구회, 2020), 94-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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