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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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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반

"마치 누군가가 세계를 번쩍 들고 흔들어 버린 것처럼 세계는 혼란에 빠졌다"

계속해서 숄렘 아슈(Sholem Asch, 1880-1957 폴란드 유대계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소설가, 극작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영원한 가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종이인지, 다이아몬드인지, 또는 황금인지, 무엇이 집이며 공장인가? 이런 것들도 다 지나가는 허상이며 흐르는 섬광이며 사라지는 환상일 뿐이다."

 

세계 대전을 치르고 난 직후의 유럽 경제는 대혼란 그 자체였다. 폴란드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화폐가 동시에 사용되었으며, '기아에 허덕이던 빈'은 마치 난쟁이 국가의 거인 도시처럼 되어 버렸고, 거리에는 수많은 피난민과 배고픈 전직 제국 관리로 들끓고 있었다. 1922년 여름까지 오스트리아 크라운 화폐의 환율은 1달러당 8만 3,600크라운에 이르렀다. 물가는 전쟁 이전과 비교해 수백 배 또는 수천 배 뛰었다. 그리스 정부는 새로운 조세법을 시도했는데, 은행권을 모두 거둬들여 반으로 삭각한 다음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었다. 전쟁 직후 잠깐 경기가 반짝했다가 이내 수그러든 서유럽의 상황도 별반 낫지 않았다. 영국에서만 실업자가 2백만 명이 넘게 발생했다. 1923년 바이마르 독일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휘청거렸고, 같은 해에 공산당과 히틀러 모두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재건될 가망은 없는 것 같았다.

 

4년여에 걸친 총력전은 19세기 부르주아의 자신감과 경제적 안정을 지탱했던 통화 기반을 완전히 파괴했다. 전쟁으로 각국은 화폐 태환을 중지했고, '빅토리아 자본주의'(Victorian Capitalism)의 기본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금본위제와 자유무역을 포기했다.각 정부는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엄청난 채무를 지게 되었으며, 주요 채권국이었던 유럽 국가들은 전쟁이 끝나자 미국에 대한 채무국이 되어 있었다. 전쟁은 조직화된 노동 운동의 힘을 강화시켰으며, 이로 말미암아 저임금을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또한 전쟁으로 유럽 대륙의 무역망이 파괴되었고 공업과 농업 생산의 중심이 유럽 밖에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난 뒤, 유럽의 생산자들은 전세계적인 경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동시에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과 소련의 등장은 유럽 자본주의에 대한 전례 없는 도전이었다. 1922년 러시아의 한 예술가는 "러시아는 아프리카나 멕시코, 자바가 아니다. 우리는 서유럽과 동시대를 살고 있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라고 주장했으며, 더 나아가 "전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 이후 소련이야말로 나머지 국가들에 그들의 미래와 "새로운 시작"을 지도할 나라라고 말했다. 특히 이런 전망으로 말미암아 1920년대 초 유럽의 많은 정치가들은 두려움에 떨었으며, 유럽 경제의 재건이라는 과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제에는 역설이 존재했다. 유럽을 1914년 이전의 '정상'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듯이 자유무역, 고정환율제, 그리고 국가 개입의 최소화를 의미했다. 이는 국가가 경제에 간섭하지 않고, 개인 사업자나 개별 주식 소유 집단이 투자를 결정하는, 그런 세계였다. 물론, 전쟁으로 말미암아 국가가 경제를 '조직'하기 위해 과거보다 경제 부문에 더 많이 간섭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재건을 이끌 프랑스나 영국 내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런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평화 시기에도 계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따라서 초기 재건 계획은 주로 사적 부분에 기반을 두고 입안되었으며, 따라서 그 결과는 예상대로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920년대 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와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이라는 각기 영국과 프랑스의 두 적극적인 총리들은, 유럽의 문제는 동유럽과 서유럽에 공통적이므로 총체적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데 합의했다.

 

중유럽과 동유럽의 시장은 전체 유럽 산업 발전에 필수적이다. 만약 이들 시장을 재건하지 못한다면 동유럽과 남유럽에서는 수백 만의 인구를 잃게 되고, 재건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또한 동유럽의 고통과 기아를 초래하는 조건들이 나중에는 서유럽에도 장기 실업을 초래하고, 서로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생산한 물품 이상은 가져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럽의 경제 재건이 불가능할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계속되고 생활비가 상승하며 생활수준이 낮아질 것이다. 그리고 동유럽과 마찬가지로 서유럽 역시 기아와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임금노동자나 전문직 계급 할 것 없이 쇠약해지고 말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제안한 것은 국제 투자 컨소시엄을 만들어 민간 자본을 중동부 유럽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물론 유럽재건개발은행(EBRD)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기구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서유럽 은행들은 동유럽에서 질서가 잡힐 때까지 돈을 빌려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안정이 확보된 후에나 투자하려고 했지, 투자를 위해 안정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로이드 조지-브리앙 구상의 실패는 전후 시장의 허약함과 소극성을 명확히 보여 주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성공적으로 재건되려면 어떤 형태로든지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이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정부 간 기구로서 국제연맹의 창설에 눈을 돌렸으며, 국제연맹은 1920년대 중반의 재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제연맹은 단순한 외교적 포럼을 넘어 가난한 정부들과 서유럽의 채권 보유자들 사이의 금융 거래를 중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제연맹은 오스트리아·에스토니아·헝가리·그리스 등지에서 이들 정부를 위해 자금을 모집했는데, 대신에 예산의 안정적 운영과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창설을 조건으로 달았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한 후 하버드 대학교의 경제학자들이 동유럽으로 몰려갔던 것처럼, 그보다 70년 전에도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가난해진 중동부 유럽 경제를 자유주의 노선에 따라 재건하고자 서유럽의 은행가들과 재정 전문가들이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중앙은행의 감독관이나, 세수 검사관으로 활동했으며, 때로는 수백만 명의 난민을 정착시키는 영향력 있는 위원회를 이끌기도 했다.

 

국제연맹의 핵심인 재정위원회는 여러 국가에서 파견 대표들로 구성되었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역할을 한 것은 영국 대표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논란이 일어났고 영국은 의심을 받았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영국의 지배적 입지를 생각하면,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이 재정위원회를 통해 금융 제국주의 정책을 펴고 있으며, '유럽의 중앙은행들에 일종의 독재'를 행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1922년부터 1937년까지 재정위원회에 참여했으며, 가장 영향력 있고 정력적이었던 영국 대표 오토 니마이어 경(Sir Otto Niemeyer)은 공교롭게도 당시 영란은행의 이사였다. 이렇듯 국제연맹은 무방비 상태에 있는 유럽 대륙의 돈을 긁어모으는 런던 재력가들의 앞잡이로 간주되곤 했다.

 

사실, 영란은행의 총재인 몬터규 노먼(Montagu Norman)은 영국 화폐로 유럽의 중앙은행들이 연결되어 있는 자유무역 체제를 만들겠다는, 다소 막연하고 장기적인 공상을 품고 있었다. 그는 국제 금융의 중심지로서 런던의 위상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했는데, 예컨데 "다뉴브 강과 그 근방 지역 6개국을 묶은 경제 연방 체제"같은 제안들을 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꿈이었고, 영국 정부도 경제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사실, 장기적으로 보면 영국이 니마이어나 노먼의 계획들을 외면하고, 자본주의 부활에 열의가 없었던 것은 자유방임주의 전통이었다. 런던에서 시장은 다른 어떤 곳보다 신성시되었다. 로이드 조지를 예외로 하면, 영국 정부는 중동부 유럽이 자신들에게 중요하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무역이나 투자에서 그 비중이 매우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외무부는 국제연맹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재정위원회의 활동에도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럽에 새로운 경제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영국 정부의 의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재건은 독일에 대한 지원을 둘러싸고 협상국 사이에 긴장이 표면화되면서 또다시 주춤하게 되는데, 초점은 주로 독일의 배상금 문제였다.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반감과 바이마르 공화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하려는 프랑스의 노력에 영국은 별로 동조하지 않았다. 이런 영국의 태도에 프랑스는 크게 실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1923년 초, 독일이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자 이에 반발한 프랑스와 벨기에 정부가 루르 지역에 군대를 투입함으로써 긴장은 절정에 달했다. 사실, 루르 점령은 치욕적인 실수로서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는 오히려 힘의 한계를 드러냈다. 독일은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그해 12월에는 전쟁 전보다 물가가 126조 배나 치솟았다. 프랑스는 자국의 예산 위기와 재정 위기에다가,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압력에 직면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지배력이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루르 침공이 남긴 뼈아픈 교훈은, 베르사유 조약의 승전국들이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에서 자본주의를 재건하는 일이 유럽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유럽의 경제 대국인 영국·프랑스·독일이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어짐에 따라, 전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채권국이 된 미국의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전쟁의 막바지부터 미국의 민간 자본이 서유럽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재난 구호 단체들은 이미 우크라이나의 기아와 발칸 지역 난민의 정착 문제 등과 씨름하고 있었다. 이제 미국 정부만 고립주의를 버리고 나오면 되었다. 루르 위기와 그에 따른 외교적 교착 상태는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되었다. 미국의 중재로 불과 5년 만에 배상금 문제가 평화롭게 해결되었고, 미국 자본이 유럽의 재건에 버팀목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미국이 유럽을 정복할 것이라는 구대륙의 두려움을 강화시켰다. 이는 전쟁이 유럽적 가치의 쇠퇴를 야기했다는 모든 걱정과 공포감을 반영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미국의 경제적 우위가 유럽의 경제적, 문화적 힘에 도전하게 된 것이었다. 존 보인턴 프리스틀리(John Boynton Priestley, 1894-1984 영국의 극작가)의 『영국 여행』(1934)이라는 책을 보면 "미국은 수천 개의 도로망을 소유하고 있는 등, 이제는 몇 가지 사소한 차이를 빼고는 영국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똑같은 치약과 비누, 축음기 음반이 팔리고, 똑같은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앙드레 시그프리드(Andre Siegfried, 1875-1959 프랑스의 사회학자, 지리학자)의 베스트셀러 『오늘날의 미국』(1927)에서는 앞으로 닥칠 미국의 도전을 경고하고 있다.

 

사실, 1924-29년 사이에 미국의 해외 팽창은 1945년 이후의 어떤 시기보다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념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유럽의 정치인, 노동자, 그리고 기업 경영자들은 유럽이 경쟁에서 탈락할 것을 걱정했고, 지금은 익숙해진 교훈(미국이 초강대국이라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국 노동당의 지도자였던 램지 맥도널드(Ramsay MacDonald)는 "미국은 이미 초강대국으로 발전했다. 유럽이 똑같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유럽 경제의 종말은 확실하다. 유럽은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목표는 여전히 매우 요원하다, … 그러나 그 목표를 향한 (유럽의) 움직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신호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20세기의 결정적 과제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1920년대 중반에 경제가 호전되면서 프랑스의 주도로 범 유럽 경제 협력에 대한 열기가 하나로 모였다. 브리앙은 프랑스와 독일 간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열었던 로카르노 조약에 서명하면서, 이 조약이 "국제연맹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한 가족으로서의 유럽인을 위한 헌법의 밑그림이고 … 찬란한 시작이며, 유럽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1927년 프랑스의 주도로 제네바에서 국제경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의장의 말을 빌자면, 이는 "장기적으로는 유럽 합중국의 창설을 향한 경제 동맹"의 움직임이었다. 그는 이 기구가 '아메리카 합중국에 대항해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경제 구상'이라고 보았다. 영국의 주요 기업가들 역시 "조직된 유럽 블록"의 출현이 불가피하다는 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런 기획을 실현할 능력이, 영국은 의지가 부족했다. 영국 정부는 유럽과 제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나중에는 후자를 선택했다. 유럽의 단결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이런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적극적 개입과 서구 지향적인 독일, 그리고 냉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1920년대 중반은 번영과 안정, 그리고 성공의 시기이기도 했다. 각 나라의 통화가 차례차례 질서를 잡아 갔다. 영국·이탈리아·독일·프랑스는 모두 금본위제를 채택했다. 요동치던 환율과 초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으며, 이는 경기를 자극해서 성장을 촉진했다. 새로운 중앙은행들이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투기가 잦아들면서 투자 심리가 살아났고, 주요 금융시장들이 유럽 전역에 대규모 자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이것은 자본주주의 부활이 가져온 유인이자, 이 체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결과 유고슬라비아 같은 나라도 1931년에 금본위제로 복귀했다.

 

그러나 회복의 기미는 여전히 약했으며, 1929년 말 월 스트리트가 붕괴하기 전부터 이미 적신호가 켜져 있었다. 독일과 영국의 무역량도 1913년 수준을 밑돌고 있었다. 1920년대가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리기는 했으나, 관세를 낮추려는 국가는 거의 없었다. 국가들은 대체로 세계시장의 압력으로부터 자국의 생산품을 보호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실제로, 1920년대 중반부터 이미 기본 생필품의 가격은 떨어지고 있었다. 이에 놀란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 독일의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지역 ―극동·인도·남아메리카·남아프리카― 에서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거나 진행될 것이며, 이 지역의 값싼 임금은 우리를 죽음과 같은 경쟁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백인들이 가진 난공불락의 특권은 이미 사리지거나 밟혔으며, 배반당했다. … 착취당했던 세계는 이제 그들의 주인에게 복수를 시작했다."

 

심각한 디플레이션 효과를 갖는 새로운 전지구적 경쟁과 더불어, 1920년대 유럽의 재건은 그 자체의 경제정책 및 이론들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았다. 분명한 것은 기존의 경기 규칙이 생산을 끌어올리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최우선으로 생각함에 따라, 임금과 물가를 내리고 복지 비용을 삭감하는 등의 쓴 약이 우선적으로 필요했다. 이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영국에서 그 정치적 결과가 확실하게 나타났다. 1925년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파운드화를 금본위제로 복귀시키자, 바로 다음해에 총파업이 일어났던 것이다. 1929년-31년 대공황의 위기가 독일보다 영국에 충격을 덜 주었던 것은, 영국의 실업률이 1920년 내내 높았기 때문이었다.

 

유럽 전체의 근본 문제는 전쟁으로 정부가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 더욱 높은 생활 수준을 약속하게 된 반면, 부르주아는 전쟁 이전의 안정 상태로 돌아가려는 욕구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귀환 병사를 위한 주택 제공'(Homes fit for heroes)은 금본위제로의 복귀와 모순적이었으며, 그 결과 민주주의는 혼란을 겪었다. 전쟁 기간 동안 잠시 덮어 두었던 노동과 자본의 투쟁은 날로 격화되었고, 1932년 이후 자유방임주의가 포기된 뒤에야 잠잠해졌다. 일부 기업가들과 노동조합원들은 매우 다른 산업 정책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고임금, 대량 생산, 높은 생산성에 기초한 미국식 정책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당시 인플레이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배제되었으며, 1950년 이후 서유럽에서 미국화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시도되지 않았다.

 

1920년대에 유럽의 재건이 힘들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국제 자본의 흐름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1914년 이전까지 세계의 은행이었던 영국은 전처럼 자본을 제공할 수가 없었다. 독일이 연합국에 지불해야 하는 배상금이나, 전쟁으로 협상국 측이 미국에 진 부채의 상환은 모두 미국이 유럽에 자본을 제공할 의사가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1924년 이후 독일에 제공된 자본은 거의 절반이 단기성 자금이었기 때문에, 국제 금융의 안정은 수천 명의 군소 투자자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1945년 이후 미국은 이런 전례를 교훈으로 삼아, 정부 차관으로 유럽의 재건을 도왔지만, 1920년대에는 국제 금융에서 국가의 역할은 자금을 직접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부채의 상환을 보증하는데 한정되어야 한다는 관점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했다. 1928년에 투자자들은 자본을 다시 미국으로 돌려 당시 한창 붐이 일어나던 주식 거래에 열을 올렸다. 다음 해에는 그 반대 이유로 유럽에 있던 자산을 모두 처분해 버렸다. 결과는 국제 금융의 전례 없는 대재난이었다.

 

1929년 월 스트리트의 붕괴는 은행 폐쇄, 환율 절하, 통화 혼란으로 이어졌다. 이어 금융 위기는 파산과 생산 감소,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실업자를 양산했다. 국제무역이 붕괴되면서 엄청난 규모의 농업 위기가 촉발되어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농민들이 부채를 떠안게 되었으며, 팔리지 않는 물건들이 쌓였다. 또한 공산품에 대한 국내 수요가 줄어들고 농촌의 실업자들이 유럽의 도시로 몰려들었다. 한쪽에서는 농산물이 버려지거나 폐기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굶주림과 가난이 깊어지면서, 시장 자본주의는 점점 비합리적인 제도처럼 보이게 되었다.

 

각국 정부들이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은 줄곧 논란거리였다. 대부분은 통상적인 방법대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공공 지출을 줄여 투자자들의 신뢰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직접적인 정책은 없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불황인 상황에서 정부가 재정을 확대하면, 이것이 부채로 이어져 국가의 경제 운용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의 한 고위 공무원이 맥도널드 수상에게 던진 충고는 이런 영국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해 준다. "우리는 파도에 휩쓸려 육지에 좌초해 버린 대형 선박의 선장과 승무원들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연의 변화에 따라 파도가 몰려와 다시 배를 물 위로 띄울 때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한편, 금본위제는 신성불가침으로 남아 있었다. 한 신문은 "영국의 산업자본은 황금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라고 질문했다. 1929년 2월에 영란은행이 이자율 인상을 발표했을 때, 언론은 이를 "영국 산업이 당장에 필요로 하는 것을 따르기보다는 디플레이션, 고금리 정책, 그리고 파운드화의 액면가 이상으로 지폐 가치를 올리겠다는 최종선고"로 보았다. 하지만 영국의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임금은 더 떨어져야 하고, 실업 수당은 삭감해야 한다는 '재무부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와 유사한 숙명론은 독일에서도 나타났다. 만약 브뤼닝 정부가 1930년-32년에 통화 재팽창 정책을 폈더라면 히틀러가 부상하는 것을 막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킬 수 있었을까? 일부 케인스학파의 경제사가들은 이런 주장을 해 왔다. 그러나 당시의 지적 분위기에서 이런 주장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개입주의자들은 수도 적었고, 그들의 구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말미암아 수세적인 위치에 있었다. 폴란드·오스트리아, 그리고 여타 지역에서 불과 몇 년 전에 겪었던 초인플레이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독일 정부는 통화안정을 위협할 수 있는 시도에 대해서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돌이켜 보면 1929년-31년 당시 국가들 대부분이 추구했던 디플레이션 정책이 공황을 더욱 악화시켰음은 분명했다. 각 정부는 위기로 인해 마지못해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계획에도 없던 돌발적인 대안들 사이에서 휘청거렸다.

 

이런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 때문에 공황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밝히기는 어렵다. 전세계의 상품 가격이 1926년경부터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수출량 역시 이로부터 1년이 지나면서 급갑했지만, 대체로 공황이 시작된 지점은 1929년으로 간주된다. 이때쯤 몇몇 국가가 금본위제를 포기했고, 1930년에는 더 많은 나라들이 뒤를 따랐다. 1932년 여름이 되면, 자국의 통화 가치를 평가절하 하거나 환전을 정지하지 않은 국가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 몇몇 국가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였는데, 프랑스는 금을 계속 비축했으며, 1934년까지도 공황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이때가 되면 다른 국가들은 대부분 회복기에 접어들게 되었지만, 구질서에 대한 프랑스의 필사적인 집착은 나치 독일의 부상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켰다.

 

위기의 증상 역시 나라마다 매우 달랐다. 고정환율제를 포기하는 경향은 어느정도 일반적이었는데, 각국은 환율을 평가 절하하거나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 무역은 큰 폭으로 감소했으며, 관세 인상이나 다양한 형태의 보호주의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독일은 산업총생산이 46%나 하락했고, 실업자가 6백 만 명에 이를 만큼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1920년대 내내 실업률이 높았기 때문에, 1929년 이후의 실업률 증가가 큰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1929년-32년 사이에 산업생산의 감소가 각각 28%, 33%, 36%에 이르렀다. 농업 지대라고 할 수 있는 중동부 유럽에서는 부채가 치솟고 실업 위기도 겪었지만 공업국가들에 비해서는 상황이 다소 나아 보였다. 프랑스는 외국 노동자들을 추방하고, 도시 노동자들을 농촌의 소작지나 고향으로 돌려보내 충격을 완화시켰다.

 

물론 육체적, 심리적 건강의 악화와 같은 보이지 않는 손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1930년대 아테네의 난민 수용소에서 자랐던 디미트리 카자미아스(Dimitri Kazamias)는 "전간기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업은 그들이 영원히 소외당한 주변인으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린 '부랑자'의 공포'와 더불어 법이나 정의에 대한 신념의 상실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불황은 사회적 삶과 가족의 생활 리듬도 바꿔 버렸다. 여성들은 여전히 집에서 할 일이 있었지만, 남성들은 정처없이 거리를 헤메고 다녔다. 다음은 독일 어느 도시의 실업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아무것도 급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서두르는 방법도 잊어버렸다. 남자들에게, 하루를 시간으로 쪼개는 것은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백 명 가운데 88명은 손목시계를 차고 있지 않았으며, 집에 시계가 있는 사람도 31명에 불과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점심 때 끼니를 때우고 저녁 때 잠자리에 드는 것이 그나마 꼽을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 사이에 무얼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머니들과 아이들의 배고픔을 멈추게 하라"는 영국의 전국실업노동자운동이 내건 구호였다. 당시 실업자 가족들이 겪고있는 허기의 고통은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국 정부는 뉴스에서 이 단체의 행진 모습을 삭제하거나, 노동자들의 고통을 그린 《실업수당에 대한 사랑》과 같은 영화의 상영을 유보시켰지만, 대량 실업의 충격은 그리 쉽게 숨길 수 없었다. 실업자들을 강제로 노동대(Labor platoon)에 보내거나 강제 노동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방법으로는 거리의 실업자들을 거의 줄이지 못했다. 조지 오웰은 그의 작품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이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등에서 무료 급식소, 합숙소, 그리고 자본주의의 실패가 만들어 낸 철저한 절망감을 잘 묘사하였다.

 

반면에 정부의 대처는 느린 데다가 제각기였으며, 시장에 의존한 해결책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1932년의 스트레스 회의나 그 다음해에 열린 야심 찬 세계 통화 및 경제회의도 공동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반대로 회의는 점점 갈등만 드러냈고, 참가국 사이에 존재했던 민족주의만 강화되었다. 국제 협력이 실패하면서 금본위제도 종말을 고했으며(이제 엄청난 양의 금을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를 비롯해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에서만 유지되었다), 런던이나 뉴욕도 대출을 중지했다. 사실, 금융시장의 고갈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통해 유럽 경제를 재건하려던 10년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의미했다. 프랑스는 금본위제를 유지했던 반면, 영국은 자신의 제국 내 국가들과의 무역에 눈을 돌렸다. 두 나라 모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대상으로 한 경제적 수탈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1930년대의 재정 상황은 유럽에 새로운 경제 민족주의를 초래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선도해 왔던 자유무역과 국가 간의 자유로운 자본 이동이라는 자유주의적 모델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식의 공산주의나,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곧이어 독일에서 발견된 국가자본주의와는 공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좌파와 우파 모두 영미 '금권정치'(Plutocracy)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셈이었다. 이들은 모두 재정의 건전성보다 경제성장을, 세계경제보다 국가 경제를, 물가 안정이나 소득자의 이익보다는 생산을 우선시했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위기는 강력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그렇다면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를 택하지 않고 1930년대의 경제적 도전을 이겨낼 수 있는 민주적 대안은 없었을까?

 

- 마크 마조워 「암흑의 대륙」 pp15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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