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볼라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출현은 서구 ‘전통’의 유례없는 쇠퇴를 알리는 서막과 같은 것이었다. 로마시대에 이르러 전통세계와는 상이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개입함으로써 그 모습을 변형시키기는 했지만 그 영향은 아직 미미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유대적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써 서구의 전통을 아예 ‘실신(sincope)’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에볼라에 따르면, 이는 특히 그리스도교의 사해평등주의에서 잘 나타난다. 그것은 형제애, 사랑, 공동체 관념에 기초한 신비적 경향의 교의로서, 전통주의적 의미에서의 순수한 로마적 관념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 이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적 전통세계에 ‘보편성(universalità)’이 있다면,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집합성(collettività)’이 존재한다. 전자가 인간들 사이의 ‘차이’를 없애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전제(前提)·규정하는 계서적 기능에 충실한 반면, “그리스도의 신비적 육체라는 상징 속에서 재확인되는” 후자의 이상은 모든 인간 사이의 차별적 가치를 폐지함으로써 장차 “가톨릭이 결코 극복할 수 없을 퇴보적이고 퇴행적인” 영향의 단초가 된다. 그리스도교는 창조자나 원죄와 같은 유대적 관념에 따라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거리를 서로 접근 불가능할 정도로 소원하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신성과 인간성을 공유했던 신적·영웅적 초인간이라는 전통세계의 세계관을 전복해 버렸다. 이제 인간은 단지 창조주의 은총이나 구원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열등하고 비천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말로 암흑시대인 칼리 유가의 특징적인 징후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전통세계를 ‘실신’ 상태로 빠뜨렸다는 것. 우리는 여기서 에볼라가 왜 끝까지 그리스도교를 거부했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에볼라에 의하면 전통세계의 가치는 다시 한번 회생의 기회를 가진다. 쇠퇴해가는 로마세계에 아직도 전통주의적 가치를 잃지 않은 북방의 ‘젊은 인종’ 게르만 족이 유입된 것이다 (전통세계가 북방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에볼라의 주장을 상기하자). 게르만적 요소는 그야말로 “최후의 위대한 두 출현물”이었던 신성로마제국과 봉건 문명을 통해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제국의 이념을 방어하고 고대로마의 형성력을 회생케 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에볼라는 중세의 서구가 기사도를 산출해 냄으로써 다시 한번 전통주의적 원리의 우월성을 입증했다고 주장한다. 기사도와 제국적 이념 사이의 관계는 성직자와 가톨릭교회 간의 관계와 같다. 기사도는 또한 피의 순수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신의 인종(razza dello spirito)’과 같다(‘정신의 인종,’ 즉 정신적으로 우월한 인종에 대한 개념은 나치즘의 생물적 인종 개념을 비판하기 위한 에볼라 특유의 관념론적 인종관으로서, 통상적인 인종주의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외형상 그리스교적 세계를 유지하면서도 아리아적 윤리를 구현하고 있다. 즉 그것은 “성인보다는 영웅, 순교자보다는 정복자의 이상을 드높이고, 박애와 비천함보다는 [전통주의적 의미에서의] 신실함과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죄보다는 비겁함과 불명예를 최악의 가치로 간주하며,.. 적을 사랑하기보다는 그와 싸우고 오직 그를 패배시킨 뒤에야 비로소 위대함을 누리도록” 만드는 그런 윤리체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기사도에서 북부-아리아적 요소가 로마세계를 정화하여 원래의 ‘보편성’을 되살려 내었음을 목도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에볼라의 주장이다.
근대초의 어떤 점이 전통세계를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에볼라는 정치 이념의 점진적인 세속화와 탈정신화 경향을 그 주요 원인으로 든다. 종교전쟁의 와중에서 상실된 것은 오랜 동안 유럽 통합의 기초로 작용해 왔던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신화였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는 대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여 프로테스탄트 군주들과, 심지어는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들과 손잡는 것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30년 전쟁 중의 리슐리외 역시 이와 똑같이 행동하였다. 에볼라는 국가이성 혹은 국가이익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이러한 정치 관념을 세속화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루이 14세의 절대주의조차도 온전한 ‘제국’의 이념과 유리되어 왕 스스로를 단지 하나의 세속적 전사이자 세속국가의 지도자로 격하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왕권신수설조차도 ‘초월적 실재’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에 알맹이 없는 잔여물에 불과하였다. 이제 ‘왕이자 사제’인 ‘신성한’ 제국은 사라졌고 오직 허명만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비록 그 지향점은 다르지만, 종교전쟁을 정치의 세속화 과정으로 본 에볼라의 분석은 타당하다.
단테와 마키아벨리에 대한 에볼라의 짤막한 논평들도 흥미롭다. 그는 단테가 황제 바르바로싸에 대한 이탈리아 북부 코무네들의 반란을 불법적이고 이단적이라 규정했으며, 그 이유로서 코무네들이 대항한 것은 황제가 아니라 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단테를 세속화에 저항하는 전통주의자로 보는 것이다. 반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세속화의 “바로미터가 되는 명료한 지표”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더 이상 신성함과 고귀함에 근거하지도 않고 더 높은 원리와 전통을 대표하고 있지도 않으며, 오직 “그 자신의 이름으로, 간계와 폭력을 사용하여”, 그리고 단지 하나의 기술로 전락해버린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통치하기 때문이다. 에볼라는 마키아벨리에게서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인 도를 넘은 개인주의와, 후일에 나타날 절대 정치 및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한다.
에볼라의 이러한 해석에는 분명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단테의 ‘왕국론’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또한 그는 마키아벨리의 부르주아적 성격에 대해서 비판 조로 얘기했지만, “인간은 운명에 휘둘리기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을 주장한 점에서 둘은 오히려 서로 매우 유사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이른바 ‘적극적 자유’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어서일까?). 하지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특징을 정확히 집어내고 있다는 면에서 그의 주장에는 탁견의 측면도 분명히 있다. 어쨌든 이로써 중세에 잠시 복원된 전통주의의 주기가 완전히 끝나고, 휴머니즘, 과학혁명, 계몽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오직 ‘이 세계’만 관심을 쏟는 ‘비실재주의(irrealismo)’(전통세계라는 과거 혹은 다른 자연의 실재, 즉 ‘정신성’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비실재적이다)와 ‘개인주의’의 시대로 넘어간다.
에볼라는 이러한 근대사의 과정을 ‘카스트의 후퇴’라는 틀로 설명한다. 그가 카스트를 고대 힌두 문명의 예에 따라 브라만(왕이자 사제), 크샤트리야(전사, 귀족), 바이샤(상인, 부르주아지), 슈드라(노동자, 프롤레타리아)의 네 계급으로 나누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첫 째 카스트의 시대는 거의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득한 과거이다. 이는 계속 쇠퇴의 길을 걷다가 중세의 신성로마황제를 끝으로 그 맥이 끊기게 된다. 그 뒤를 이은 두 번째 카스트는 브라만이 누렸던 교권과 속권 중 오직 속권만을 유지한 세속적 전사의 계급이다. 이들의 일원인 귀족들은 프랑스 혁명에서, 그리고 군주들(카이저, 차르)은 1차대전을 통해 권력을 상실한다. 세 번째 카스트의 주인공은 왕과 귀족을 넘어뜨리고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지 계급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등장으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위협에 직면한다. 에볼라는 이러한 과정을 네 개의 카스트가 상위에서 하위로 차례차례 “후퇴”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오랜 동안 지속되어 온 신화와 역사의 한 사이클이 끝난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민족주의와 집산주의는 각각 세 번째와 네 번째 카스트가 지배하는 시대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두 카스트의 역사적 구현이 바로 미국의 아메리카니즘과 러시아의 볼셰비즘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에볼라의 현실 인식은 암울하다. 자신은 칼리 유가, 즉 사이클의 최저점인 암흑시대 혹은 철시대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우연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확한 원인의 연쇄”에 의해 진행되어 온 것이다. 에볼라는 여기서 숙명론적 결정론에 호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의 강은 스스로가 깎아낸 하상(河床)을 따라 흐르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청난 기세로 밀려오는 탁류에 맞서 물줄기를 돌리기란 사실 쉽지가 않다. 그래도 그에게는 희망이 있다. ‘서구의 몰락’으로 한 주기가 끝난 바로 그 직후, 새로운 상승의 단계가 또 다시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계몽사상 이후의 진보주의적 역사관을 거부하고 오히려 퇴보의 단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바라보는 것. 에볼라의 순환론적(그러면서도 반결정론적인) 역사관이 잘 드러나는 지점이다.
에볼라에 따르면, 서구가 회생하는 길은 오직 “새롭게 통일된 유럽의 의식 속”에서 “전통적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가톨릭 신앙은 “위로부터” 부여받은 힘을 잃고 형식화 되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회생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는 중세에 가톨릭 신앙이 번성했던 것은 그 자체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통주의적 가치를 그래도 어느 정도는 보존한 로마-게르만적 세계의 영향 덕분이라고 본다. 그러면 이 암울한 파국의 순간 앞에 선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볼라는 매우 짤막한 경구 식 대답만을 남긴다. “파괴가 최고조로 달한 근대의 과정들을 해방이라는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러한 과정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한 가지, “어떤 특별한 내면적 마음가짐,” 즉 전통적 정신성에 대한 확신은 간직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는 마치 자신에게 독약을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 혹은 “호랑이를 타는 것”이거나. ‘호랑이를 타라’는 1934년의 경구는 약 30년 뒤 같은 제목의 책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행동적 니힐리즘(il nichilismo attivo)’이라는, 니힐 속의 실존 혹은 실존적 니힐을 목도한다.
-. 출처
곽차섭, 「율리우스 에볼라와 근대세계에 대한 반란 – 파시즘과의 관련성을 생각하며 -」, 『역사와경계』51(부산경남사학회, 2004), 215-2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