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fee.org/articles/why-communism-failed/
편집자의 말: FEE(경제교육재단, 미국의 우파 자유지상주의 성향 싱크탱크)의 기명 논평 페이지(op-ed) 프로그램을 위해 작성된 이 글은 앨라배마, 아칸소, 캘리포니아, 인디애나, 미주리, 뉴저지, 뉴욕, 펜실베니아, 그리고 스페인어 번역문을 뉴멕시코, 뉴욕, 멕시코, 도미니카 공화국의 신문에 실렸습니다.
러시아 혁명(1917년 발생한 사회주의 혁명, 그 결과로 소련이 성립됨) 후 3년이 지나고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공산주의는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1920년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썼으며, 그 것이 자유 시장을 폐지했기 때문에 공무원들은 생산을 계획하는데 있어서 그들을 안내할 시장 가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예측을 할 때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에 오스트리아 학파(오스트리아 출신 비주류 경제학파로, 시장경제의 순기능을 옹호하고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을 의미. 훗날 신자유주의의 모태가 됨)의 수석 대변인으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가 죽은 1973년을 기점으로 그의 이론은 새로운 지지자들을 얻었고, 일부는 현재 동유럽에서도 존재하고 있다.
소련(1922년부터 1991년까지 존재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은 높은 기대를 가지고 출범하였고, 그 계획은 모두를 위해 많은 것을 보장하는 중앙위원회(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Центра́льный комите́т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에 의해 수행되어야 했다. 그 나라는 곧 시들어질 예정이었다(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나 해석은 없지만 러시아 제정이나 공화국 체제를 포함한 구체제 러시아가 몰락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
하지만 일이 그렇게 풀리지 않았다. 소련은 곧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인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수백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굶었다는 것이다¹. 미제스가 지적했듯이, 사회주의 생산에 사용되는 원자재, 노동력, 도구, 기계는 시장 외부에 있으며, 그 물품들은 정부에 의해 소유되고 정부 기획자들(government planners)에 의해 통제된다. 아무도 그 물품들을 사고 팔 수 없고, 교환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어떤 시장 가격(market prices)도 그들을 위해 발전할 수 없다.
현대적인 생산(Modern production)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복잡하다. 생산자들은 무엇을 생산할지 결정할 때 그 대안을 고려해야 하고, 그들이 생산 방법을 결정할 때 다양한 생산 수단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원자재, 도구, 기계는 가장 시급한 계획(most urgent projects)에 투입되어야 하며 덜 시급한 계획(less urgent ones)에 낭비되어선 안 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철도 계획을 생각해 보라. 그럼 아예 지어져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지어져야 하는가? 철도를 건설하는 것이 다리를 건설하는 것,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댐을 건설하는 것, 유전 개발을 하는 것, 아니면 더 많은 땅을 경작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가? 결국 통계학자의 직원이 있더라도 어떤 중앙 설계자(central planner)도 셀 수 없는 가능성을 완전히 익힐 수 없다. 기계는 어느 정도의 노동을 위해 나무나 알루미늄, 또는 새로운 합성물이 철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획자들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려면, 설계자는 관련된 수많은 생산 요인의 상대적 가치(환율 또는 시장 가격)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이 전부 정부 소유일 때 거래는 없으며 따라서 시장 가격도 없다. 시장 가격이 없다면, 설계자들은 철, 알루미늄, 목재, 새로운 합성물이나 철도, 유전, 농지, 발전소, 교량 또는 주택의 상대적 가치에 대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생산 요소에 대한 시장 가격이 없다면 설계자들은 소비자의 가장 급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을 어떻게 조정하고 채널링(channel production)해야 할지 막막해 할 것이다.
그렇게 러시아 혁명 이후 70여 년, 세계 대전이 끝난 지 45년(당시 이 칼럼이 올라온 시기가 1991년)이 지났다. 그렇다면 왜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충분한 주택과 여럿 일상 용품(many everyday items)이 부족한가? 왜 농지는 수확하고 운반할 장비가 부족하단 이유로 밭에서 썩는 것을 생산하는가? 왜 공장과 유전들은 잘 유지되지 않고 생산량이 감소하는가? 바로 원자재, 공구, 기계, 공장, 농장은 개인 소유(privately owned)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유자들(private owners)의 입찰과 제안 없이는 그들의 상대적 시장 가치를 반영하는 가격이 발전할 수 없다. 그리고 시장 가격이 없다면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생산 활동을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이다.
생산 요소가 개인 소유인 경쟁 경제(competitive economy)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소유주들이 다양한 요소들의 금전적 가치를 계산한 후 그것들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도록 사고, 팔고, 거래하면서 매일 해결된다. 미제스가 1920년에 작성했듯이, 생산 수단의 사적인 소유와 돈의 사용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 모든 단계는 또한 합리적인 경제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은 미제스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사유 재산과 금전적 계산(monetary calculation) 없는 사회주의 사회인 소련은 미제스가 "경제적 계산의 나침반 없이"라고 예견했듯이, 여전히 "가능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경제적 결합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소련은 이제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를 도입하기 위해 미제스가 추천한 중요한 단계를 밟을 수 있을 것인가²?
¹ 레닌은 1918년 적백내전 당시 전시공산주의(Военный коммунизм)를 채택하며 대소 간섭 전쟁과 적백내전 대항을 목적으로 삼았으며, 필요한 무기와 식량 공급을 시행하기 위해 당이 모든 기업을 소유하고, 곡물과 식량을 징발하거나 외국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식량 징발로 인한 농민들의 반발과 더불어 1921년부터 1922년까지 포보르지예 대기근이 일어나 약 500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아사하며 훗날 소련이 성립되는 후에도 식량 생산량에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신경제정책(NEP)이 유명세를 탄 후 자영농들은 비효율적인 콜호스(колхоз) 때문에 반발한데다,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계획 중 하나인 집단화(Коллективизация, 콜레크티비자치야) 정책과 더불어 탈쿨라크화(Раскулачивание, 라스쿨라치바니예)로 인해 동유럽의 부농(富農)이자 곡물 생산량을 담당한 쿨라크(кула́к)를 탄압함으로써 생산력이 급격하게 감소하기에 이르렀고, 이 것이 곧 대기근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에서도 우랄 지역과 서부 시베리아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인구의 10~25%가 사망하였고, 카자흐스탄 지역에서는 150만에서 230만까지 사망할 정도로 그 여파가 컸다.
² 소련의 계획 경제는 1960년대부터 그 한계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전까지는 신경제정책(NEP)나 5개년 계획(Пятилетка)이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소련을 그나마 평균 이상으로 경제 성장을 하는데는 성공했다. 다만 흐루쇼프 시절에는 피폐해진 경제와 사회를 재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농업 분야에서는 트로핌 리센코(Трофи́м Лысе́нко)라는 인물 때문에 실패함으로써 점점 후퇴하고 있었다.
흐루쇼프 사후 집권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1965년 알렉세이 코시긴이 추진한 개혁(생산 수단 및 설비에 대한 무상 제공의 폐지, 독립채산제 실시, 이윤상납제 실시)을 추진하도록 했으나 성과의 부진으로 1970년 중단되었고, 겉으로는 안정적이지만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상황에 처한다. 심지어 소련의 비효율적 구조와 맞물리며 소비재 산업이 취약해지고, 이로 인해 '암시장'을 비롯한 제2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1,500만 명 이상이 암시장에 참여하거나 종사할 정도로 꽤 높아졌다. 그 후로도 경제정책의 지연과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여파로 침체기가 지속되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를 추진하도록 했고 개인사업체의 설립 허용과 외국 투자자들이 산업 시설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합동사업법이 이루어지며 외국인 투자자들이 소련 산업 전반 곳곳에서 투자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보수파의 압박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1990년 소련의 경제는 경제개혁의 효과를 보지 못해 국영기업의 유통 구조가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배급제의 부활로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기에 이르렀고 오히려 독립 여론과 동구권의 붕괴를 부추겼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를 허용하는 시장 경제를 채택, 사실상 자본주의 요소를 대폭 수용하였고 오늘날 러시아는 옐친의 경제적 후퇴와 올리가르히의 성장을 막긴 했지만 여전히 심각한 부정부패와 낮은 소득, 극심한 부의 불평등이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다. 이와 더불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이루어진 서방의 경제 제재는 러시아 경제의 타격을 입으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은 계속해서 "공산주의 경제학"에 초점을 맞춰서 해설을 진행하고 있는데,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정치학자를 끌고 와서 이야기하는 것도 좀 논점에 어긋난 것 같기도 하구요.
아래의 댓글, 소련해체 = 공산주의의 패배는 완전히 등치시킬 수는 없어도 말씀하신 정치학적 견해에서 보자면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이론의 대부분을 실험할 수 있었던 역사상 가장 큰 실험장에서 마르크스 이론이던, 레닌주의건, 스탈린주의건 결국 70년 간 최소한 하나 이상의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면 지금 수준의 인식이 일부 극단적인 아나코-캐피탈리스트들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퍼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이런 연유로 경제학적 물음이건 정치학적 물음이건 공산주의라는 이념 또는 경제이론이 현상을 설명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지요.
전혀 동의하기 어려운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