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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주의에 관한 율리우스 에볼라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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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닉

1장 말미에서 혁명적 보수의 사상에 부합하는 전제조건들을 논할 때, 역사주의(historicism)의 주제로 돌아가보자는 의사를 표했었다. 이 장에서는 그것을 한 번 다뤄보려고 하는데, 또한 그 이후에 분석할 주제에 대해서도 소개해보려고 한다 (예컨대, 전통의 선별, 역사의 세번째 차원, 국내 문제에 관한 설명 [이탈리아와 관련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은 역사주의의 사고방식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난해함을 유발할 수 있다.

 

우리는 “역사”의 관념이 부여한 강조가 최근의 것이며 모든 보통의 문명들과 관련하여 이질적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데, 특히 역사의 체현을 미신적인 신념의 대상인 일련의 신비로운 실체로 속하게 하는 경우 더더욱 그러하며, “실증주의적” 그리고 “과학적”임을 표방하는 시대에서 유행이 되어가는 여타 수많은 의인화된 추상적 개념들 또한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은 역사(History)라는 용어에 대문자 H를 붙여서 쓰는 것에 익숙한데, 이는 마치 과거에 신의 이름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것과 같다.

 

역사주의의 가장 우선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는 존재의 문명에서 (안정성, 형상, 시간을 초월한 원칙으로의 고수로 특징되는) 생성의 문명 (변화, 유동성, 그리고 조건적 우연성으로 특징되는) 으로의 와해 혹은 비참한 변천과 연관이 있다. 이에 대해 다루는 것이 우리의 기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두번째 단계로는, 가치들이 전도되었고, 이와 같은 붕괴는 단지 저항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마땅히 받아들여지고, 극찬 받고, 그리 되어져야 할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기준으로, 역사의 개념, “진보”와 “진화”는 그 밖의 것과 상세히 연관되어진다. 따라서 역사주의는 합리주의, 과학성, 그리고 기술 문명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진보적이고 계몽적인 19세기에서의 통합된 일부로서 주로 등장한다. 이 외에도, 구체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주의는 본디 헤겔로부터 영감을 받은 철학의 기초적인 관점을 드러내며, 이것은 이탈리아의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조반니 젠틸레(Giovanni Gentile)에 의해 나타내어졌다. 나는 이제 후자의 유형에서 드러나는 역사주의의 정신과 “도덕률”에 관해 상술하고자 한다. 알다시피, 헤겔은 실체의 층위와 합리의 층위 간의 일치성을 보았고, 따라서 그의 유명한 공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합리성을 가지며, 합리적인 모든 것은 실재한다.” 이 문제를 형이상학적인 관점이나 영원성의 관점으로부터(sub specie aeternitatis) 검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체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러한 공리는 의문스럽기 그지없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이 공리가 유효성을 가지기 위해, 필히 “합리적”이라고 불리면서 역사와 모든 사건들이 언제나 반영해야 할 질서나 법칙으로서 활용되어지는 것을 직접적이고, 선험적이고, 확실한 방식으로 우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 역사[실증]주의자 사이에서의 불일치는 유의미할 정도로 상당하다: 진실은 이 부분에 있어 각각의 사람들은 학부 철학의 수준에서 자신만의 주관적인 추측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며, 현상의 세계 너머에 놓여있는 것뿐만 아니라 역사상 있었던 대격변들의 가장 명백한 사유들의 배후에 숨겨진 것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는 대단히 겸손한 유형에 속하는 조감도의 관점조차도 여기에 있어 참으로 결핍된 요소인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설령 우리가 이러나저러나 철학자가 “합리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것들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일상적인 경험의 추이에서 합리적인 것과 실제의 것의 완전한 동일성을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동일성을 단언하는 자가 합리적이거나 혹은 그 반대이기에 무언가를 “실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아마 의문을 표할 텐데, 만일 그 자가 무언가를 “합리적”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오로지 이것이 그저 실제이기에, 혹은 이것이 그 자체로 사실에 기반을 둔 실체를 나타낸다는 이유에서다.

 

설사 적절한 철학적 비평 – 내가 이른바 “초월론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이라는 것을 비판할 때 그래왔던 것처럼 – 을 가미하지 않더라도 역사주의의 애매모호하고 덧없는 특징을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는 바로 우리가 사건, 상황, 그리고 역학관계의 재빠른 변화로 특징되어지는 생성의 세계에 살아가고 있기에, 역사주의는 “기정사실에 수동적인 철학”(passive philosophy of the fait accompli) 그리고 스스로를 성공적으로 자기주장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이론으로 자기자신을 환원하는 한편, 역사주의는 실제의 것을 더 이상 “합리적”이라고 인정하기를 원치 않을 때 “혁명적인” 요구를 동시에 촉진시킬 것이다. 이 경우, 누군가의 입맛대로 해석된 “이성”과 “역사”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향해 비난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한 세번째 해결책은 이전의 두 특성과의 혼합, 다시 말해 만물을 자기자신으로서 스스로 내세우길 추구하거나 현존하는 질서가 아닌 [태고의] 질서의 실현 혹은 복원하려는 경향성을 나타내되,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합리성”의 이름을 빌리려는 행위에 대한 계속적인 반대를 표방하는 “반-역사”(anti-History)로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역사의 승리와 영향력의 행사에 관해 생각해보면, 그때가 되면 이는 “실제”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 의거하여 역사주의는 아마 이류의 보수주의와 혁명적 유토피아, 혹은 아마 더 높은 가능성으로 바람이 부르는 방향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 가변적인 충성심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 알고 있는 자들의 편에서 마찬가지로 서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 그리고 “반-역사”는 개인적 선호에 따라, 이러한 관점의 대변자들이 부르는 “변증법” 혹은 “변증사관”이라는 주사위 놀음의 맥락에서, 양측이 사용하고 있는 그 어떠한 구체적인 주제도 상실해버린 슬로건이 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는 한쪽에서는 독일에서 헤겔 역사주의의 전제와 권위 이론과 절대국가의 이론에서 파생된 전개가 있었고 (전통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그 어떠한 철학적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 체계의 배후에 존재하는 무익한 이론), 반대쪽에서는 마르크스의 혁명적이고 “변증법적”인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더 최근의 예시로는 이탈리아에서 젠틸레와 크로체 간의 대립을 들 수 있는데, 이 둘은 헌신적인 실증주의자였다. 그러나, 젠틸레는 정치 무대에서 스스로 내세우는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가정함으로써 파시즘에 “역사성”의 특성을 부여하고 자신의 철학이 이에 봉사하도록 수놓았다. 이와 반대로 크로체는 자신의 개인적 사상 선호 때문에 반-파시즘 자유주의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파시즘은 당시의 “실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의 질서를 “반역사적”인 존재로 치부하는 낙인을 찍었다. 흐름이 변한 이후, 어제의 파시스트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며칠 뒤 반-파시스트로서 다시 깨어났다. 이러한 변절자들은 아마도 이 세번째 가능성의 대표적인 예시로 여겨질 것이다. “역사” 그리고 역사의 “합리성”이라는 것에 관해 갱신하고자 하는 열망은 앞으로도 간혹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간략한 언급에서 역사주의가 어떤 것에 해당되는 지를 보여준다. 역사주의는 본질적으로 무형의, 무용한, 그리고 헛된 철학이며, 때로는 비겁함과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주의의 저작들을 이탈리아의 학구적 문화의 한 분야에 죄가 있는 철학 그리고 정신적 기형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 이외에도, 우리는 대문자 H로 나타내어지는 역사(History)의 허구를 반드시 폭로해야 하며, 특히 이 신화가 자기 자신을 에워싸는 힘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자들의 혼수상태를 조성할 때, 그리고 이것이 지금의 현재가 더욱 재빠르게 변하길 바라며, 중단에 대한 완전한 거부를 드러내며, 최후의 저지선마저 무너지길 바라는 자들을 도울 때, 더욱 이 필요성은 강조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역사의 의미”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것과 다른 모든 사고방식[태도]들을 “반역사” 혹은 “반동”의 것으로 낙인을 찍는다. 이러한 부류의 역사주의는, 조난당한 사람들의 무의미한 허상이 아닌 이상, 세계 전복 세력들이 가동을 가리는 연막임이 분명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구 질서의 복원을 갈망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일부는 이 부분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역사주의의 신화에 대한 전적인 거부를 표할 수 없기에, 설령 기회가 주어진다 한들 역사를 만들어내거나 원상태로 돌리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실패해버리고 만다. 우리는 현상 유지에 대한 그 어떠한 헌신도, “합리화”도 거부해야 하며 그것의 권력을 가정한 힘과 시대의 조류에 대한 그 어떠한 인정조차도 거부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반역사적” 존재와 “역사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의 파문(anathema)은 세계의 몰락을 촉발시키고 있는 과정들에 순응하는 대신, 이전의 형세의 방식을 여전히 기억하는 자들, 그리고 그것의 이름으로 전복을 외치는 자들을 향해 드리워짐을 상기해야 한다.

 

이점을 명확히 파악하게 된다면, 인간은 동향에 대한 근본적인 자유를 회복하게 된다. 동시에, 역사상의 이러저러한 대격변을 촉진시켜왔던 실질적인 영향력들을 판단하는 데 목적을 둔 적절한 연구를 위한 제반작업을 놓이게 할 수 있다. 처음에 지적한 것과 관련하여, 여기서 말해온 것들은 다음 주제의 도입부를 구성할, 전통의 선택이다. 이 모든 역사주의를 극복해낸 우리는 과거란 기계적으로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관념을 제거하고, 과거를 목적론(teleological)의 개념, 진화적인 개념으로 바라보고, 그리고 전적으로 현실적인 목적에 따라 우리를 결정론으로 후퇴시키는 관념들을 제거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나서, 모든 역사적 요인들은 제한된 역할을 가질 것이나, 결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를 향한 적극적인 태도의 가능성은 보장될 것이며, 특히 시간을 초월한 가치들에 고무된 모든 것들을 지지할 가능성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 출처

Julius Evola, 『Men Among the Ruins: Post-War Reflections of a Radical Traditionalist』(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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