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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혁명에 관한 율리우스 에볼라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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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닉

최근 들어, 다양한 세력들이 우리 시대의 혼란 그 자체를 드러내는 극단적인 양식에 대항하여 사회정치 영역에서의 방어와 저항을 취하려고 한다. 이러한 짓거리는 질병의 근원을 다루지 않는 한, 제아무리 단지 노골적인 목적을 위한다 한들 무용한 노력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것의 근원은 역사적 차원에서 고려하는 범주 내에서 다뤄보면, 1789년과 1848년 혁명이 유럽에 가져다 온 전복(subversion)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병은 그것의 형태와 정도에 따라 전반적으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핵심 문제는 그러한 혁명의 개념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이데올로기, 모든 정치적 운동, 그리고 정당들을 (즉,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것) 직간접적으로 기꺼이 거부하고자 하는 부동의 인간의 존재성을 확립하는 것에 있겠다. 이러한 자들은 명백한 대항마로서 삶에 대한 폭넓은 식견과 국가의 근엄한 원칙을 담고 있는 지향점과 견고한 토대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반혁명(counterrevolution)이라는 표어를 내걸 수 있겠지만, 그러나 혁명의 기원들은 현 시점에서 너무 멀리 동떨어져 있으며 거의 대부분은 잊혔다. 전복은 아주 오래전으로부터 기원하고 있는데, 현존하는 상당수의 관습들에서 명백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목적을 전적으로 고려하면, “반혁명”의 공식은 세계 전복이 혁명적 공산주의를 통해 은폐하고자 하는 최종 단계를 명백히 바라볼 수 있는 경우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제 또다른 표어 하나를 추천받을 수 있을 것인데, 즉, 반동(reaction)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반동주의자”라고 칭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당기간동안 좌익 운동가들은 “반동”이라는 용어를 부정과 수치와 관련된 모든 것과 동의어로 만들었는데, 그들은 그리함으로써 자신들의 사유에 도움이 되지 않은 모든 이들, 그리고 그 흐름에 함께하지 않거나 그들이 말하는 “역사의 추세”에 따르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 낙인을 찍을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좌파가 이 전술을 활용하는 것은 대단히 당연한(natural) 일이겠지만, 나는 이 용어가 정치적 용기, 지적 용기, 그리고 물질적 용기의 부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번민을 유발하는 점에 있어 비정상적으로(unnatural) 여긴다. 이러한 용기의 부재는 심지어 소위 우파 내지는 “민족 보수주의”의 대변인들에게도 만연한데, “반동분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 그들은 항의하며 스스로 결백함을 내세우며 자신들에게 그런 꼬리표는 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것이다.

 

우파가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이란 말인가? 좌파의 운동가들이 “행동”(acting)하고 세계 전복의 과정에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와중에, 보수주의자는 반동(reacting)을 삼가고 오히려 그들을 지켜보고, 격려하며, 심지어 그들을 돕는 것이란 말인가?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인물의 부족, 수단의 부족, 그리고 질병이 여전히 초기의 단계에 머물러 있기에 감염의 온상에서의 즉각적인 소작(燒灼)을 통해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 –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유럽 국가들은 엄청난 재앙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 시기에 시의 적절한 원칙의 결핍에 따른 “반동”의 부재, 부족, 혹은 미온적인 상태로 있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피아를 구분 짓는 명백한 경계를 설정한 새로운 극단의 전선(radical front)이다. 만약 “시합”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면, 그 미래는 심지어 좌파에 속하지 않는 집단들에게도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가망 없는 잡종의 신념을 공유하는 자들에게 달린 게 아니며, 오히려 급진주의 – 감히 도노소 코르테스(Donoso Cortes)의 표현을 빌리자면 즉, “절대 부정”(absolute negation)의 급진주의 혹은 “당당한 긍정”(majestic affirmation) – 를 신봉할 용기를 지닌 자들에게 달려 있다.

 

물론, “reaction”이라는 용어는 본질적으로 약간의 부정적 어감을 가지고 있다: 반작용(react)을 일으키는 자들은 작용의 발단을 소유하지 않는다. 이미 확정되었거나 행해진 무언가를 직면했을 때 격론의 방식 혹은 방어적인 방식으로 반동한다. 따라서, 반동은 상대방과 반대되는 결정적인 것이 없는 상태에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회피하는 데 있지 않음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오해는 “반동”의 공식을 역동적인 요소가 자명한 “보수 혁명”의 공식과 연계시킴으로써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맥에서의 “혁명”은 더 이상 합법적인 확립된 질서의 폭력적인 전복을 뜻하지 않는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는 “반혁명”의 논쟁적이고 엄격한 의미보다 더 필요한 것은 “혁명의 반대편”에 있는 것, 즉 근원으로부터 고무되어진 절대적 행위임을 강조했다. 단어라는 것이 어떻게 발달하는 지는 참으로 신기한데, 혁명(revolution)이라는 단어의 본래의 라틴어의 의미에 따르면 (re-volvere), 결국에는 시작점, 근원으로 다시 이끌어내는 운동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현 상황에 반하여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회복을 이끌어내는 “혁명의” 힘은 근원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의 개념 (즉, “보수 혁명”과 같은)을 품고자 한다면, 주의를 해야 한다. 좌파가 부여한 해석을 고려해보면, “보수”라는 용어는 “반동”이라는 용어만큼 위협적이다. 분명, 가장 먼저 무엇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지를 가능한 한 정확히 확립할 필요가 있는데, 오늘날 특히 사회 구조와 정치 제도들을 고려하면 할수록,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탈리아의 경우, 이는 거의 예외 없는 사실이며,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그보다 덜할 지라도 [이 명제는] 유효하며, 심지어 고결한 전통의 자취가 일상의 영역에서 계속 남아있는 중유럽의 국가들조차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지식인들이 선택한 “보수 혁명”이라는 공식조차 상당히 최근의 역사적 참조를 담고 있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을 고려할수록, 우리는 보수주의자가 이념의 승리자가 아닌 특정 경제 계급이 (즉, 자본주의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특권과 사회적 부조리로 이루어진 체제에 지나지 않는 것을 영속화 하기위해 스스로 조직화한 이해논리에 불과하다는 지론에 따라 좌파의 논쟁거리의 손 쉬운 타겟이 되는 상황의 현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보수주의자, “반동주의자”, 자본가, 그리고 부르주아가 한 데 묶이기 십상인데, 이러한 방식으로 십자포화를 가하기 위해 차용된 전투적 용어를 활용하기 위해 이 “가짜 타겟”은 성공적으로 채택된다. 더욱이, 이 동일한 전략은 세계 전복의 전위 예술가가 아직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 깃발을 휘날리기 이전, 자유주의와 입헌주의에 의해 나타내어진 시대에 사용되었다. 이 전략의 효능은 어제의 보수주의자들이 (현대의 보수주의자와는 다르지만, 전자가 더 고귀한 가치를 지닌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더 상위의 권리, 자존, 그리고 가치, 신념, 원리의 비개인적 유산을 견고히 지키는 데 스스로를 헌신하는 대신, 자신들의 사회정치적 입지와 일정 계급, 특정한 카스트의 물질적 이익을 방어하는 데 스스로의 역할을 제한했기에 유용하다. 이는 과연 그들의 근본적인 나약함, 그리고 대단히 통탄할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낮은 단계로 침잠하고 있기에, “보수주의” 신념의 수호는 단지 타락한 귀족 그리고 특히 그저 경제적 계급 (즉, 자본가 부르주아)의 특징으로 대체되어가는 계급과의 관계를 맺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단호히 적대해야 한다. “혁명의 유행”으로부터 “지켜내고” 방어해야 할 것은 고결한 가치와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경제의 영역을 초월하는, 그러한 즉 경제 계급의 측면에서 정의되어 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분명히 초월하는 삶과 국가의 개괄적 시각이다. 이러한 가치들과 관련하여, 사실적인 지향점, 실증적인 제도, 그리고 역사적 상황을 나타내는 것은 단지 귀결일 뿐이다. 이것은 제 1의 원칙이 아닌 제 2의 원리이다. 만일 이러한 방식으로 상황을 구성한다면, 좌파가 “가짜 타겟”을 향해 노리고 있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논쟁술은 전적으로 무익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에 묶여 있는 특정한 양식들이 이미 생기를 잃고 시대와 동떨어져 있다 하여 그것들을 인위적이고 강압적으로 영속시키는 게 아니다. 진정한 혁명적 보수에게 진정으로 유의미한 것은 과거의 양식과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양식과 제도들이 특정 시대의 주기와 특정한 지리적 장소에 부합하는 특정한 표현을 담은 원리들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정 표현들은 주로 되풀이될 수 없는 역사적 상황들과 접점을 이루고 있기에, 이들은 마치 가변적이고 단명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져야 하며, 이들에게 생기를 부여하는 상응하는 원리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조건부적 우연의 사건들에 의해서도 불변한 가치를 지니는데, 이들은 영속적 실재를 향유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양식과 본질적으로 상응하는 새로운 양식들은 마치 씨앗으로부터 탄생한 것처럼 과거의 것으로부터 생겨나기에, 새로운 것들이 결국 과거의 양식을 대체한들 (그것이 “혁명적” 방식일지라도), 변화하는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요인들로 에워싸인 일련의 연속성은 여전히 남아있는다. 이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근원적인 원리들을 단단히 붙잡아 두는 한편, 위기가 발생하고 시대가 변할 때 그것에 경직되거나 공황에 빠지거나 새로운 개념들을 혼란스레 추구하는 대신, 폐기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결국 떨쳐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야 말로 참된 보수주의의 정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의 정신과 전통의 정신은 서로 다를 게 없다. 이것의 참된, 살아 숨쉬는 의의에 따르면, 전통은 그간 존재해왔던 것에 대한 비굴한 순종도, 과거를 현재에 조잡한 방식으로 영속화하는 것도 아니다. 전통, 그것의 본질은 메타 역사적인(meta-historical) 동시에 역동성을 지닌다. 이는 상급의 정당성의 성유(聖油)를 품은 원리에 따른 (우리는 이것을 “천래(天來)의 원리”(principles from above)라고 아마 칭할 것이다) 총체적 질서의 힘이다. 이 힘은 정신과 영감의 연속성을 이루는 세대를 관통하고, 상당한 다양성과 포괄성을 아마 드러낼 수 있는 제도, 법, 그리고 사회 질서를 관통하여 작용한다. 내가 앞서 비판했던 이에 관한 유사한 실수는 현대와 일정 부분 떨어져 있는 [단순] 과거를 전통 그 자체로 여기는 여타 체계화 논리들과 동일시하거나 혼동하는 것에 있다.


방법론적으로, 판단의 기준점을 탐구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양태들은 실증과 특정 원리의 다소간의 충실한 적용에 따라 고찰되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정당화의 절차이며, 수학에서 미분에서부터 적분으로의 이동으로 불리는 것과 비견되어진다. 이러한 경우에는 시대착오(anachronism)와 회귀(regression)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될 수 없고, 절대적일 수도 없는데, 이미 그러한 것은 없기 때문이며, 이것이 자연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이것은 일련의 고유한 정신의 미덕을 지키려는 자들에게 시대착오의 혐의로 고발하는 기제가 될 것인데, 단지 후자의 인물은 고도의 덕목을 지닌 과거의 몇몇 인물들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헤겔이 말했듯이, “이는 내재적 본질과 실제적 영원을 포함하는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들의 망령을 인식하는 문제”이므로.

 

이를 염두에 두면,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태도의 궁극적인 전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 혁명적 보수의 사고방식 혹은 혁명적 반동주의의 사고방식의 공리는 건전하고 정상적인 모든 관습이 지닌 지고의 가치들과 근본적인 원리들은 변화와 전화(轉化)의 영향에 쉽사리 가변성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마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가치들은, 예컨대, 참 국가, 절대적 통치권, 권위(auctoritas), 위계, 정의, 기능적 계층, 그리고 사회 경제적 원리를 능가하는 정치적 원리의 탁월함이다. 이러한 가치들의 영역에서 “역사”의 자리는 없으며, 이러한 것들을 역사적 측면에서 사고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이와 같은 가치들과 원리들은 본질적으로 규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공적 질서 그리고 정치적 질서에서 이들은 마치 사적인 삶에서의 가치 전형과 절대적 도덕률의 원리와 동등한 존엄을 지니는데, 이들은 직접적이고 고유한 인정을 요하는 단호한 원리들이다 (이와 같은 인정은 존재의 특정한 범주를 그 밖의 것들과 실존적으로 구분 짓게 한다). 이러한 원리들은 나약함의 발로이든 그 밖의 이유 때문이든 간에, 개인이 다양한 경우에서 이 원리들을 실현하거나 다른 것 보다도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한 때나마 부분적으로 이행할 수 없다는 사실과 타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개인이 마음속으로 이를 포기하지 않는 한, 비참함과 절박함 속에서조차 그는 인정을 받을 것이다. 내가 언급하고 있는 이 신념들은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비코(Vico)는 이를 “시대와 서로 다른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한 영원한 공화국의 자연 법칙”이라 부른다. 이러한 원리들이 역사적 현실로 객관화될 지라도, 이들은 그것에 전적으로 국한되지 않으며, 본래의 영역이자 불변의 장소에 속하는 더 고결한, 메타 역사적 차원을 언제나 가리킨다. 내가 “전통적”이라고 부르는 이 개념들은 이와 동일 선상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혁명의 사고방식에서 언제나 일정 부분 명백하게 드러나는 근본적인 전제는 이와 정 반대의 위치에 있다. 그것이 천명하는 진리는 역사주의적이고 경험론적이다. 혁명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만물은 시대와 시간에 따라 조건부화되고 형성된다고 믿어지기에, “전화”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정신의 왕국을 지배한다. 혁명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물리적 요인, 사회적 요인, 경제적 요인, 그리고 비이성적 요인으로 나타내어지는 조건부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양상에 준거하여, 역사적 유형을 상정하는 주기와 독립적인 가치들을 지닌 원리, 체계, 규범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 매우 극단적인 궤도를 돌고 있는 이 일탈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모든 구조, 그리고 자율적 가치와 공통을 지니는 것들의 진정한 결정 요인은 다양한 유형들과 생산 수단의 발전에 부합하며 그것의 귀결과 사회적 영향에 따른 조건부적 상황이라고 한다.

 

나는 이 두 전제들의 메워질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를 명확히 밝히고자 여기서 단지 개요적으로 다룬 실증주의의 테제는 이 책의 7장에서 좀 더 길게 할애하여 다루고자 한다. 따라서 이 차이를 선험적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 논의에 참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두 관점은 이들의 배후에 있는 사고 방식만큼이나 조화되기 어렵다. 전자는 혁명적 보수 그리고 정치 지형에서 진정한 “우파”의 일부로서 온당히 특정될 수 있는 모든 집단들이 지지하는 진리이며, 후자는 극단과 온건함의 정도, 혹은 얼마나 그러한 성격이 희석되어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 모든 유형의 공통적 뒷배경을 지닌 세계 전복세력이 지지하는 신화이다. 역사적 참조의 수단과 의미에 관한 이전의 고찰들 또한 실제적인 가치를 지닌다. 사실, 민족에게 있어 언제나 충분할 정도의 생기 있는 전통적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현존하거나 상대적으로 젊은 관습[제도]을 언급하는 것이 상응하는 개념과 직접적으로 관련성을 나타낼 수도 있다. 역으로, 이 연속성이 깨졌을 때, 이전의 절차가 취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나서 분명 다른 시대들을 바라보려 하겠지만, 이는 오로지 그 자체로 유효한 개념들을 다른 시대들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것일 뿐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전의 저서에서, 나는 이 나라에서 진정으로 “지켜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자주 의문을 제기해왔다.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전통의 과거로부터 충분히 온전하게 지켜진 그 어떠한 정치적 유형의 준거도 찾을 수 없다. 이는 주로 그러한 부류의 과거의 결핍, 그리고 다른 주류 유럽 국가들과 달리 이탈리아에서는 표상과 핵심, 왕조의 정치 권력과 접점을 이루는 세속적이고 연속적인 통합적 구조가 부재한 사실에 기인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일어난 이데올로기와 연계된 모든 것들을 이질적이고 부자연스럽고 파괴적으로 느끼게 할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유산의 흔적조차 이탈리아에서는 – 조금 조차도 –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은 다양한 형태로 이탈리아의 통합을 달랬었고, 통일된 이탈리아에서 계속 만연해왔으며, 그리고 파시스트의 시대 이후로 대단히 치명적인 형태로 증식했었다. 따라서 여기에는 중단과 공백이 존재하며, 그리고 이탈리아의 경우 전통적 원리의 언급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성격보다는 관념적 성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역사적 형태를 언급할지라도, 이들은 언제까지나 즉각적으로 뒤안길로 남기게 될 통합의 기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 대신 역사적 거리는 그 밖의 다른 목적들에 대해 논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다는 사실을 (고대 로마 세계의 경우나 중세 문명의 특정 양상들과 같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관점의 전반에 대한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데, 예컨대 만약 내가 암시하는 개념들이 새로운 운동에 의해 실현된다고 한다면, 이것들은 역사의 찌꺼기를 거의 품지 않은 사실상의 순수한 국가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원리들을 대변하는 이탈리아의 대표자들은 몇몇 국가들, 특히 중부 유럽 국가들이 잔존하는 역사적 실증성을 가진 준거 내지는 보수 혁명의 경향으로서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이로움을 취할 수 없을 것인데, 이 불리함의 완전한 대응물은 만일 내가 생각하고 있는 양상이 실현되었을 때, 절대적이고 비타협적인 특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는 전통적 과거로부터 나타나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으며 지금도 유효한 역사적 형태로 실체를 이루는 물질적인 지지가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탈리아의 보수 혁명은 필히 순수한 신념에 기초하는 대단히 정신적인 현상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는 점점 폐허의 세계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기에, 이와 동일한 행동의 노선은 어디에서나 발현될 것인 즉, 사람들은 보다 더 평범한 관습의 잔재를 여전히 품고 있으나 여러 개의 부정적인 역사적 요인들과 타협한 것에 기대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며, 마치 순수한 힘을 품은 채 복수와 재건의 반동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며 역사를 초극하는 것처럼, 근원으로 돌아가 그로부터 새로이 시작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깨달을 것이다.

 

특정한 맥락에서의 “혁명”이라는 용어에 대한 또다른 간략한 고찰, 즉 현재의 시스템을 적대하는 다양한 민족적 우익 운동들에게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혁명적”인 것이 되고자 하는 갈망과 관련하여 고찰하는 것은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가장 최근의 과거에서 일어났던 운동들로 존재하며, “파시스트 혁명”, “갈색 셔츠단의 혁명”, 그리고 “질서의 혁명” (예를 들어 포르투갈의 살라자르가 주도한 운동)과 같은 명칭의 선택을 고찰하게 한다. 당연히 이와 같은 물음이 뒤따른다: 무엇에 대항하는 혁명인가? 무엇을 기치로 하는 혁명인가? 그 어떠한 상황에서든, 모든 단어에는 그것의 “혼”이 깃들어 있으며 그것의 영향을 무의식적으로 받지 않고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내 관점에서 분명히 말하자면, “혁명”은 부정적 성격을 가진 무언가에 대한 공격 혹은 마치 몰락했던 사람이 다시 재기하거나 유기체가 암세포의 전이를 중단시킴으로써 퇴행적 성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과 같이 정상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무수한 변화 – 그것이 폭력적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이 – 에 관련하여, 마치 헤겔이 종종 말하는 “부정의 부정”과 같이 오로지 상대적인 의미에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이라는 용어의 숨겨진 “혼”이 설령 좌파가 아닌 자들조차 자신들이 혁명가라고 주장할 때, 어떻게든 간에 실제적인 것이 되고자 하여 앞서 지적했던 것으로부터 이탈시킨다는 점에서, 올바른 길로부터 그들을 이탈시키는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위험은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관념과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고 새로운 원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미래를 열어야 한다는 관념을 신봉하는 반대자의 전제들과 다를 게 없는 근본적인 전제들을 지극히 내재적으로 전용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 경우 “혁명”은 임계점과 격변을 암시하는 순방향의 측면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혁명 정신”은 위대한 존엄을 얻거나 마치 신화처럼 [그들의] 제언이 더 위대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는 몇몇 이들이 있다. 난 이것이 노선의 포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데, 그렇기에 이를 의식적으로 알아채지 않으면서, 모든 새로운 것들이 그것에 앞서 존재해온 것 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표상한다는 것에 따른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신봉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진보주의의 진정한 토대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 기술 문명의 신기루, 더할 나위 없는 물질적, 산업적 진보이나, 그것의 부정적 결함에 주목하지 않은 채, 그것이 인간의 삶에 있어 그 밖의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는 영역에 주로 가하는 영향을 무시한 채 칭송받는 진보가 유혹하는 꾐에 불과하다. 진보를 논하기 정당한 유일한 맥락만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 시대에 만연해진 물질주의에 굴하지 않은 자들은 현대에서의 “진보의 허상”을 반영하는 그 어떠한 지향에도 대항하여 스스로를 경계할 것이다. 고대에서의 물질은 대단히 순수한 의미를 지녔었다. 라틴어에서 전복을 지칭하는 단어는 revolutio가 아니었으며 (앞서 설명한 대로 이것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seditio, eversion, civilis perturbation, rerum publicarum commutatio와 같은 단어들이었다. 따라서, “혁명적” 이라는 용어의 현대적 의미는 novarum studiosus[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의 임무, 혹은 fautor[숭배자], 즉 새로운 것을 목표로 하고 그것을 촉진하는 자와 같은 완곡한 표현이 되어버렸다. 전통적 로마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새로운 것”은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혁명적” 야망과 관련된 오해를 치워내고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반대되는 입장, 그리고 이와 같이 서로 상반되는 두 방식을 결정 짓는 것들 사이에서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쪽은 모든 참된 질서에서의 불변한 원리들의 실존을 인정하는 자와 일련의 사건에 따라 그것이 일소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것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역사”와 “진보”가 신비로운 초운명적인 실체로 믿지 않으며, 대신 환경의 힘을 지배하여 이것이 더 고결한, 안정된 형태로 돌아오게 한다. 그들에 따르면, 이는 그에 따르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어제에 태어났으면서” 죽은 과거엔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자들, 오로지 미래만을 믿으며 근거없고, 경험적이고, 급조된 행위에 헌신하며, 물질과 조건부적 상황의 차원을 초월한 것들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상(事象)과 직결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많은 시스템을 고안해내지만, 그것의 최종 결과는 진정한 질서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상당 부분 다루기 쉬운 혼란들을 만들어낸다. “혁명의” 천직은 사고의 부차적 열에 속하며, 그것이 직접적으로 완전한 파괴의 이해관계에 직결되지 않더라도 그렇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부가 이미 일어났던 최근의 파괴행위가 그들의 관점에서는 앞으로 나아가고 새롭고 더 나은 지평선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이므로 감히 정당화하고 축성하는 것을 통해 원리의 부족분을 미래에 대한 미신으로 충당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의 그 어떠한 자취조차 가리키기 어려울 뿐이다)

 

이러한 용어들로 상황을 명확히 바라보았다면, 누군가의 “혁명적” 야망을 철저히 검토하고, 그동안 만일 이러한 야망이 정당한 임계치의 한도 내에서 존재할 때, 그 누군가는 역사의 파괴단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이 폐허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굳건히 서있는 자들은 더 상위의 단계에 임할 것이며, 그들의 표어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역동의 양태에 따르는, 전통(Tradition)이 될 것이다. 상황이 변할 때, 위기가 발생할 때, 새로운 요인이 작용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과거의 댐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 이러한 사람들은 침착을 유지하며 진정으로 본질적인 것은 타협할 수 없기에 버려야 할 것은 기꺼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 알고 있으며, 새로운 상황에 적절한 양식들을 태연한 방식으로 지탱하며, 이를 통해 어떻게 스스로를 주장할 것인지 알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비물질적 연속성의 복원과 유지 그리고 근본 없고 모험적인 행동 방침을 삼가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진정한 지배자의 수단이며, 단지 “혁명적”인 것과 대단히 다를뿐더러 더욱 강건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특별한 전념을 보임으로써 이 고찰을 마치고자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탈리아는 진정한 “전통적” 과거를 상실했기에, 세계 전복의 아방가르드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조직하고, 일정 부분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준거를 주창하고자 원리의 기준점과 파시스트 시대의 관습의 기준점을 찾아온 자들이 있다. 나는 이에 뒤따르는 원칙들을 확인하고자 한다. 만약 “파시스트적 신념”이 여전히 옹호될 자격이 있다면, 그것이 단순히 “파시스트”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며, 그것이 파시즘보다 더 유구하고 더 고상한 신념. “불변”의 성격을 나타내는 신념들의 출현과 확신을 지닌 특정한 양식을 나타내는 한 그러한 자격이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파시스트의 신념은 위대한 유럽의 정치적 전통에 통합된 일부로서 재발견될 것이다. 이러한 신념들이 이러한 정신에 따르지 않고, 그저 그것이 “혁멍적”이고, 독창적이며, 오로지 파시즘 본연의 것이기에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을 하찮게 만들어 버리는 것과 다름없으며, 제한된 관점을 받아들이고 상당히 중요한 해명의 과업을 난해하게 만들어 버린다. 모든 것이 파시즘에서부터 시작해서 파시즘으로 끝나는 자들, 그리고 파시즘과 반파시즘 간의 단순한 논쟁에 국한된 정치적 한계를 가진 자들과 이러한 두 극 이외에는 어떠한 기준점을 가지지 않은 자들을 포함하여, 이러한 사람들은 오늘날의 것과 맞서 싸워야 하는 공동의 악에 의해 병들어버린 이탈리아의 일부 측면과 과거의 이탈리아의 세계가 갖고 있는 최상의 잠재력을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에 어제의 이탈리아와 독일이 투쟁했던 신념들을 다룰 때, 항상 그렇듯이 혁명적-전통적 범위 내에서 다뤄볼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과거의 사건은 조건부적 언급으로 국한하고 특정 시대나 운동과 연계되지 않는 원리의 순수한 이상과 규범적인 성격을 강조하는데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 출처

Julius Evola, 『Men Among the Ruins: Post-War Reflections of a Radical Traditionalist』(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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