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스포주의)「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에서 '대속'의 현상학적 분석

Profile
감동란

Ⅱ. 기존 비평의 한계

 

madoka title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이하 <마도카>)는 방영 당시 두 가지 이유로 호평을 받았었다. 1)우선은 작중의 절망적 세계관에 집중된 것이었다. 순수한 인물들을 통해 절망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에서 농담조로 '치유물(치명적 유해물)'이라고 불리움으로서 조명받았다. 2)첫째의 연장선의 측면에서 '장르 해체적 시도'로서 주로 일반 오타쿠 대중과는 거리가 있는 전문적 비평에서 적용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마법소녀물의 서사를 해체하고, 단절-전복시킴에 주목한다.

 

하지만 논자는 <마도카>를 단지 '이단적 마법소녀물'로 규정함에 관하여서 아니꼽게 생각한다. 앞서 언급하였던 절망적 세계관에 입각한 시선은 <마도카>를 단순한 고어물로 만들어버리며, 후자의 장르 해체적 시도에 주목하는 입장은 일종의 패러디물로 만들어버리는 한계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Ⅲ. 현상학적 서사 분석

 

에드문트 후설 (r97 판) - 나무위키

현상학의 아버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현상학적 서사 분석'은 논자가 택한, 작품 <마도카>를 충실하게 해석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은 20세기 유럽에서 형성된 철학적 전통인 '현상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분석은 현상학 운동에서 강조된 세 가지 '환원(Reduktion)'을 통해 수행될 것이다. 그 세 가지란 1)'현상학적 환원'으로 외적 비평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함을 중지시켜 기존의 사건에 억지로 해석을 끼워맞추려는 행위를 거부할 것이다. 2)'초월론적 환원'은 우리가 지닌 태도에 따라 이야기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상대주의적인 작업으로서 적용될 것이다. 3)'형상적 환원'을 통해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기술한다는 것으로, 이야기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거부하고 사태 자채로 다루고자 하는 입장으로 설명될 수 있다.

 

논자는 현상학적 서사 분석을 통해 <마도카>를 '대속의 이야기'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강조되는 대속의 사건은 ‘절망적 세계관’과 맞지 않는 예외적 요소 정도로 무시될 수도 없고, ‘장르 해체적 시도’와 무관한 부가적 요소 정도로 간과할 수도 없다. 이야기를 사태 자체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입장은 작품이 마도카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속의 사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정당하게 강조해야 한다.

 

또한 논자는 '대속'의 지닌 의의를 밝혀내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학과 같은 용례가 호명될 필요성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주된 입장.

 

현상학적 서사 분석은 어떠한 외적 비평도 요구하지 않고, 어떠한 외적 비평도 강요하지 않는다.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표어를 지향하는 비평은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순수하게 기술하고자 할 뿐이다.

 

 

 

Ⅳ. 마법소녀: 타자를 위한 존재

 

attachment/madom...

 큐베 

너가죽였어..

 

"<마도카>에서 마법소녀는 한 가지 소원을 성취하는 대가로 큐베와 계약을 맺어 마녀와 싸우는 사명을 부여받는다. 소위 ‘마녀’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괴물은 세계에 절망을 퍼뜨려 이유가 불분명한 자살과 살인사건을 일으키는 존재로 묘사된다. 큐베를 통해 강력한 힘을 얻은 마법소녀조차 마녀와 싸우기 위해서는 매 순간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마법소녀가 되는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소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단순히 요술봉을 휘두르는 변신미소녀에 대한 동경으로 마법소녀가 되기를 지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법소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한 가지 소원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icon sayaka   icon kyoko   icon homura   icon madoka

차례대로,

 사야카   코쿄   호무라   마도카 

 

"작품 속에서 마법소녀가 되기로 선택한 인물들은 흥미롭게도 모두 ‘타자’를 위한 소원을 이루고자 한다. 즉, 사야카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카미죠 쿄스케를 위해, 쿄코는 목사인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호무라는 자신의 진정한 친구인 마도카를 위해, 마도카는 비극적 운명을 감당해야 하는 모든 마법소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소원을 대가로 ‘마법소녀’가 된 인물들은 결국 ‘마녀’로 변화하여 최후를 맞이한다. ‘큐베’ 혹은 ‘인큐베이터’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는 제2차 성징기의 소녀가 ‘마법소녀’에서 ‘마녀’로 변화하는 순간 경험하는 희망과 절망의 상전이를 통해 에너지를 발생시켜 우주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 즉, 마법소녀는 단순히 이러한 상전이를 위해 소모되는 수단일 뿐이다. ‘마법소녀’가 되어 엄청난 희망에 부풀어 있는 인물들은 언젠가 ‘마녀’가 되어 엄청난 절망에 빠지게 되고 만다. 따라서 마도카는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모든 소녀를 구원하기 위해 ‘마법소녀’가 ‘마녀’로 변화하지 않도록 우주를 구성하는 인과율 자체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icon mami   icon nagisa

차례대로,

 마미   나기사 

 

토모에 마미는 작품 속에서 ‘타자’를 위한 소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맡는다. 얼핏 마미는 다른 마법소녀와 달리 순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소원을 빈 존재처럼 보인다. 그녀는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상황 속에서 큐베에게 살려 달라고 요청하여 마법소녀가 되기 때문이다. (중략) 그녀야 말로 마법소녀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즉, 마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루어야 하는 중요한 소원일수록 진지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중, 마법소녀는 타자를 위해 비극적인 운명을 감당하는 자로서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마법소녀가 된다는 것은 타자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법소녀가 직면한 절망적 상황은 결코 마법소녀가 이기적 소원을 바라도록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를 위한 소원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절망적 상황 속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로 다듬어진다."

 

 

 

Ⅴ. 마녀: 불행과 절망

 

external/img1.wi...

과자의 마녀 '샤를로테'

 

작품 초반부에 마법소녀와 마녀는 '희망'과 '절망'을 상징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후에, 상반되는 것 같이 묘사되는 이 둘의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이야기된다. 그리고 마법소녀는 어느 순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마녀의 모습으로 변화하게 된다.

 

마법소녀가 비극에 직면하는 상황은 두 가지이다. 1)"마녀를 소멸시키기 위한 싸움에서 패배하여 결국 살해"당하는 상황이다. 2)자신의 영혼을 담은 보석인 '소울젬'의 정화에 실패하여 마녀로 변화는 상황으로서, "'정신적으로' 혹은 '기능적으로' 한계에 직면한 인물들은 마녀로 변화한다."

 

마법소녀가 품은 강한 희망은 그만큼 강한 절망을 생성한다. 앞의 문단에서 제시된 두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은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마법소녀가 되기로 선택한 모든 인물은 마녀에게 살해당하거나 마녀가 되고 만다.

 

희망을 퍼트리는 마법소녀는 자신이 지닌 한계에 도전하는 위협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작중 등장하는 대부분의 마법소녀들은 이러한 싸움에서 절망을 극복치 못하고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결심은 애당초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다음의 명제는 이전의 명제를 보충한다.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기로 선택한 모든 인물은 불행에 빠지거나 절망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불행과 절망은 우주적 질서로 묘사될 정도의 필연성을 가진다. 실제로 작중에서 큐베와 마도카 사이의 대화는 마법소녀의 비극적 운명이 우주적 질서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Ⅵ. 발푸르기스의 밤: 원죄의 신화

 

attachment/b0044...

무대장치의 마녀, '발푸르기스의 밤'

 

하지만 그러한 '우주적 질서'가 필연성을 가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얼마든지 마법소녀가 마녀에게 죽임당하지 않고, 또한 마녀로 변화하지도 않은 세계관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앞서 먼저 제시되었던 명제는 다음의 반례가 발견되는 즉시 부정된다.

 

마법소녀가 되기로 선택한 어떤 인물은 마녀에게 살해 당하지도 마녀가 되지도 않는다.

 

실제로 호무라와 마도카는 그러한 반례를 증명하는 사례로 작중의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후자로 제시되었던 명제 또한 반례가 등장한다는 전제 하에 반박된다.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기로 선택한 어떤 인물은 불행에 빠지지도 절망에 빠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명제를 증명하는 사례를 현실에서도, <마도카>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인물 마도카는 불행과 절망에 빠지지 않으면서 모든 마법소녀들을 구원해낸다. 또한 "‘모든’ 마녀를 없애고자 한 자신의 소원을 따라 ‘그녀 자신’ 역시 마녀가 되는 절망에서 구원 받는다."

 

"그러나 마법소녀가 감당해야 하는 비극적 운명이 아무런 필연성도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은 작품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작품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마법소녀가 불행과 절망에 빠지는 메커니즘을 벗어날 수 없는 우주적 질서처럼 묘사하고자 한다." 때문에 작품 속에서는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장치가 등장한다.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마녀는 마법소녀 모두가 힘을 합쳐도 이겨낼 수 없는 거대한 시련으로 묘사된다.

 

그런고로,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장치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서 작중 결여된 필연성을 어거지로 메꾸기 위한 존재로밖에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발푸르기스의 밤이 작품 속에서 떠맡고 있는 역할을 ‘원죄의 신화(myth of original sin)’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라틴신학에서 떠맡고 있는 역할에 비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발푸르기스의 밤은 작품이 제시하는 세계관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처음 발생하게 되었는지가 불분명하다. 마치 모든 것이 완벽한 태초의 에덴에 어떻게 처음 뱀이 들어오게 되었는지가 불분명한 것처럼 말이다."

 

 

 

Ⅶ.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대속의 이야기

 

그렇게 하여 작중에서 상반된 종류의 두 필연성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마법소녀가 가진 비극적인 운명을 강조하고, 타자를 위한 존재는 불행과 절망 속에서 끝나는 것처럼 여겨진다. 2)하지만, "작품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소원이 언제나 '타자'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어서, 논자는 그러한 필연성을 각각 '표면적 필연성'과 '근원적 필연성'이라고 명명하여 설명한다.

 

1) 표면적 필연성은 큐베가 내심 주창하는 우주적 질서로서 어디에도 희망을 퍼트리고자 하는 인물들이 불행해진다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절대적 장치의 호명은 역설적으로 "마법소녀가 감당해야 하는 비극적 운명이 아무런 필연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작품이 설정에 대한 모든 반론을 차단하는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작품이 필연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 근원적 필연성은 마법소녀가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작품을 성립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자신의 목숨 자체가 결단의 대상이 되는 순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소원을 빈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루어야 하는 가장 소중한 소원 앞에서 언제나 ‘타자’를 위해 살아가기로 결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필연성은 어떠한 불행과 절망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대속’이란 바로 근원적 필연성이 표면적 필연성을 폐기시키는 사건이다. 즉, 타자를 위한 존재가 반드시 불행과 절망에 빠진다고 주장하는 현실에 반대하여 참된 삶이란 다른 사람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증명하는 사건이다."

 

‘큐베’로 대표되는 냉혹한 현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이익과 손해의 계산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삶의 방식인 것처럼 주장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은 우주적 질서에 따라 불행과 절망 속에서 실패하는 운명인 것처럼 묘사될 뿐이다. 그러나 ‘마법소녀’로 대표되는 희망은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가장 소중한 소원이 언제나 ‘타자’를 향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은 ‘계산 가능한’ 현실의 법칙 너머에 존재하는 ‘계산 불가능한’ 삶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때문에, 타자를 위한 존재는 현실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신'처럼 묘사된다. 타자를 위한 존재는 이익과 자기항상성을 초월하여 '대속'이라는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 전혀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속은 우주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신적 사건이다." 여기서 논자는 신적 사건이 전혀 종교적일 필요가 없다고 다시 못박는다. 이전의 현상학적 기술을 한번 더 피력하며 레비나스와 벤야민의 철학적 작업에서의 '신적'의 의미를 든다.

 

Emmanuel Levinas Biography — AILS

E.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레비나스는 타인과 대면하는 사건 속에서 경험되는 삶을 ‘신적’이라고 표현한다. 타인은 우리가 손쉽게 규정할 수 있고, 해명할 수 있고, 제약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중략) 우리는 타인을 통해 노동과 향유로 구성된 좁은 일상을 벗어나 새롭고, 무한하고, 낯선 삶을 경험한다.

 

Walter Benjamin - Wikipedia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벤야민은 법을 내려치는 순수한 폭력을 ‘신적’이라고 표현한다. 법은 기득권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여 자신에게 저항하는 진영을 억누른다. 새로운 법을 만들어내는 ‘법정립적’ 폭력과 기존 법을 유지하는 ‘법보존적’ 폭력은 서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반대자를 처단하는 방식으로 기득권 세력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폭력의 순환이 무너지기 위해서는 법을 폐기시키는 새롭고, 순수하고, 강력한 폭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법적 폭력에 대항하여 생명을 해방시키는 권위는 ‘신적’ 폭력이라고 기술된다.

 

"대속의 사건 역시 우리에게 현실의 법칙을 넘어서는 신적 차원을 열어준다. 우리는 현실의 법칙이 대속의 사건을 통해 무너지는 순간 신의 존재를 경험한다. 타자를 위한 존재가 바로 세상의 한 가운데 현현한 ‘신의 형상’과 ‘신의 모양’이다. 이러한 존재는 우주적 질서에 구애받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마도카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마법소녀를 인과율에서 구원해내는 신으로 존재하기로 작정한다."

 

"‘희망’은 대속의 사건이 우주적 질서를 폐기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필연성을 지닌다고 생각한 우주적 질서는 사실 대속의 사건 속에서 매 순간 무너져버리고 만다. 타자를 위한 존재는 대속의 사건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참된 삶을 향한 희망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한다."

 

"우리는 <마도카>가 현실의 표면적 필연성과 희망의 근원적 필연성 사이에서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대속의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한 이익과 손해의 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타자를 위한 존재가 불행과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참된 삶을 향한 ‘희망’은 타자를 위한 존재야야 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가장 가치가 있는 소원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대속’의 사건은 현실의 표면적 필연성이 희망의 근원적 필연성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그 자체로 참된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러한 사람은 우주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신’의 증거이자 참된 삶을 향한 ‘희망’의 근거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향해 끝까지 자신을 믿고서 타자를 위한 존재로 살아가기로 결단해 달라고 소리 치고 있다. 다음 대사는 타자를 위한 존재가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당신들의 희망이 절망으로 끝나도록 두지 않겠어! 당신들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해를 입히지 않아……. 인과는 모두 내가 받아들이겠어. 그러니 부탁이야. 마지막까지, 자신을 믿어!

 

―카나메 마도카

 

 

 

Ⅷ. 나가는 말

 

대속의 이야기로서 는 우리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소원 앞에서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기로 결단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마미, 쿄코, 사야카, 호무라, 마도카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퍼뜨리는 ‘마법소녀’이다. 인물들 각각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불행과 절망에 빠진 채 ‘마녀’로 변하고 마는 비극적 운명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법소녀가 감당해야 하는 불행과 절망을 ‘이치’, ‘규칙’, ‘인과율’이라는 우주적 질서로 묘사하고자 하는 시도는 허구이다. 이러한 시도는 ‘발푸르기스의 밤’ 같은 원죄의 신화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조차 없다. 마법소녀가 감당해야 하는 비극적 운명은 단순히 ‘표면적 필연성’을 지닐 뿐이다. 오히려 타자를 위한 존재야 말로 이야기를 움직이는 ‘근원적 필연성’을 지닌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위한 이익과 손해의 계산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삶의 방식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소원은 언제나 타자를 지향한다. 여기서 우리는 ‘대속’, ‘신’, ‘희망’이 지닌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즉, ‘대속’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타자를 위한 존재의 가능성이 증명되는 사건이다. ‘신’은 현실의 법칙이 대속의 사건을 통해 폐기되는 순간 자신을 계시한다. ‘희망’은 우리가 필연성을 지닌다고 생각한 우주적 질서가 대속의 사건을 통해 무너지는 상황에서 정당화된다. ‘대속의 이야기’란 바로 희망의 근원적 필연성이 현실의 표면적 필연성에 언제나 선행한다는 진리를 외치고 있는 서사이다.

 

 

 

 

 

-. 참고문헌

 

윤유석, 「대속은 어떻게 우리를 냉혹한 현실에서 구원하는가?: 대속의 이야기로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만화애니메이션 연구』61(2020).

 

 

 

댓글
1
Profile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