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부 (도시 프로젝트)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개요

삼국시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개화기 및 대한제국

왜 인구가 많아지게 되었나?

제 2차 세걔대전 시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대한민국

승전 이후, 대규모 도시계획이 실시되어 주요 도로망이 재개발되었다.중앙대로왕건대로의 개성 시내 구간을 무신호로 통과할 수 있게 되어있는 것은 이때의 영향이다.

파일:1953년 개성시 상황.png 1953년 토성면 동부 편입 이후의 행정구역 상황.

1957년 5월 1일 주변 위성도시들이었던 개풍군 청교읍, 영남면 용흥, 현화, 대원리 및 장단군 진서면 전제리, 봉동읍 전체가 개성시에 편입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개성시구설치에관한법률[1]에 따라 5개구 분구가 실시되었다.

  • 중구:1953년 이전부터 개성시의 영역이었던 지역(1995년 송악구로 명칭 변경)
  • 서구:1953년 추가 편입된 지역
  • 북구:개풍군 영남면에서 편입된 지역 중 대원리를 제외한 곳
  • 동구:개풍군 영남면 대원리와 장단군 진서면 전제리, 봉동읍 동북부
  • 남구:봉동읍 서남부와 청교읍

1963년 12월 30일, 법률인 개성시정부직할및경기도청의이전에관한법률이 시행되면서 경기도 개성시는 경기도의 관할구역에서 제외되었고 직할시로 승격하였다.[2]

1963년 12월 30일, 정부 직할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잔여 토성면 전역이 서구에 편입되었으며, 영남면 소릉리 일부가 북구에 편입되었다.

1975년 7월 1일 동구와 남구의 일부를 떼어내 봉동구가 설치되었다.

1981년 4월 지방자치법의 개정에 따라 개성시는 부산, 평얄과 함께 개성직할시로 개칭되었다.

1983년 7월 1일자로 상도면 전역이 개성직할시 남구에 편입되으며 이와 동시에 기존의 남구의 불량주택들을 재개발하는 프로젝트인 청교신도시의 개발이 공시되었다.

1986년 12월 16일 남구 배야동에서 유적이 나오면서 청교신도시의 공사가 중단되었다.

1987년 7월 1일자로 서구에서 토성구가 분구되었으며, 자치구 간 경계 미세조정이 실시되었다.

1994년 12월 8일 개성부의설치등에관한법률이 제정되면서 1995년 1월 1일자로 개풍군을 포함해 부로 승격되었으며,[3] 중구가 송악구로 개칭되고, 남구에서 상도구가 분구되었으며 봉동구가 진봉구로 명칭을 바꾸고 동남구를 분구하였다.

1996년 3월 4일 청교신도시의 개발이 재개되었으며, 1999년부터 입주가 시작되었다.

1999년 12월 1일에는 개풍군 임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 현재는 시의 조례로일 반구의 관할구역과 명칭이 정해지지만, 과거에는 법률로 일반구가 설치되었다.
  2. 개성"직할"시라는 표현은 1981년 4월부터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등장했으며, 당시에는 직할시라는 표기 없이 그냥 개성시로만 표기했다. 편의상 이 시기를 (정부 직할)개성시로 표기하기도 한다.이는 평양부부산부도 마찬가지이다.
  3. 평양, 부산은 이미 한 달 전인 1994년 12월 1일을 기해 부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