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 (일상 속 사람들)


대한민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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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7대 대통령
권영길
權永吉 | Kwon Young-ghil
출생 1941년 11월 5일(1941-11-05) (83세)
일본 제국 야마구치현
사저 서울특별시 강남구 광평로10길 6, 한솔마을아파트 (일원동) [1]
재임 제17대 대통령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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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2]
본관 안동 권씨[3]
조부모 조부 권양호[4], 조모 청주 한씨[5]
부모 아버지 권우현, 어머니 하영애
배우자 강지연[6]
자녀 딸 권혜원(權蕙洹)[7], 장남 권호근(權浩根)[8], 차남 권성근(權聖根)[9]
학력 남부민국민학교 (졸업)

경남중학교 (졸업)
경남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잠사학 / 학사)

병역 육군 상병 귀휴전역
(1961년 12월 28일 ~ 1963년 12월 29일)
종교 천주교 (세례명: 가롤로)
소속 정당 무소속
약칭 權, KY

개요

대한민국의 前 대통령이자 前 언론인, 노동운동가, 현재는 사단법인 '권영길과 나아지는 살림살이'의 이사장. 민주화 이후 진보정치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생애

유년시절

1941년 음력 11월 5일(양력 12월 22일),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아버지 권우현(權宇鉉, 1915. 11. 13 ~ 1953. 1. 19)[10]과 어머니 진주 하씨 하영애(河永愛, 1921. 3. 12 ~ 2014. 4. 28)[11] 사이의 1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8.15 광복 후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권우현은 빨치산 활동했으며, 한국전쟁에서 전사하였다. 이후 홀어머니와 두 여동생과 함께 부산광역시로 이주해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하였다. 남부민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잠사학과[12]에 진학했다. 1961년 12월 28일 육군에 입대하여 1963년 12월 29일 상병으로 귀휴전역하였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대한일보, 서울신문 기자로 재직하였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신문 파리 특파원으로 주재하였다.

노동활동 시작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1988년 '서울신문 노동조합'을 결성해 초대 노조위원장을 맡으면서 노동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13] 이후 같은 해에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초대 위원장, 1990년 5월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14] 초대 위원장, 1995년 11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15] 초대 위원장을 맡으면서 노동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1996년 12월 24일 새벽에 신한국당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기습적으로 날치기#s-2 처리하려 하자, 이에 항의하는 역사적인 총파업 투쟁을 이끈 끝에 철회시켜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정계 진출

총파업 투쟁으로 노동법 날치기를 막아냈어도 권영길은 진보 정당의 뒷받침이 없는 노동 운동의 한계를 절감했고, 직접 진보 정당 건설에 뛰어들었다. 1997년 9월 7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을 앞두고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이 결집한 임시대책기구 국민승리21초대 대표 겸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9월 29일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적인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 선거에선 득표율 1.2% 고작 30만 6,000표 득표에 그치며 목표했던 100만표 이상의 득표에 실패했다. 당시 기사

대선 참패로 진보 진영과 노동 운동 상당수가 진보 정당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여주는 중에도[16], 국민승리21 대표로 진보정당 건설운동을 계속 이어가면서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초대 당대표를 맡았다. 같은 해 4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경상남도 창원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주영 후보[17]에 밀려 낙선하였다.[18]

이후에도 계속 민주노동당 대표로 활동하면서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때 여론조사에서 3%이상을 넘으면서 중앙선관위 결정에 의거해서[19] 최초로 대선후보 TV토론회에 참여하여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오랜 기간의 꾸준한 활동과 대선TV토론 참여로 민주노동과 권영길에 대한 지지도가 급상승하여 선거운동기간 도중 한때는 지지율 10%에 육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표 전날 정몽준의 일방적인 단일화 철회 선언으로 상당수 지지표가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지지로 넘어가면서[20], 최종적으로는 득표율 3.9% 약 96만표를 득표하였다.[21] 그러나 이것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조봉암 후보가 216만표를 득표한 이후 진보정당이 거둔 최고의 성과였다. 이때부터 민주노동당과 권영길은 국회의원 한명 없는 원외정당이면서도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인식된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역시 창원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 한나라당 이주영 후보에게 설욕하였다.[22]

재보궐 선거에서 김혜경 지도부가 물러나면서 2005년 11월 민주노동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기사 이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결정한다.

대한민국 17대 대통령

대통령 선거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치뤄진 민주노동당 경선에서 심상정, 노회찬 후보를 꺾고 [23] 경선에서 승리하여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선출되는 과정도 모험적이었지만, 당시 상황은 진보정당에게 있어서는 꽃놀이패였다. 당시 참여정부의 민생, 경제 파탄과 실정을 심판해야 한다는 정권 심판론이 매우 우세했고, 노무현 정부의 임기 후반 ~ 말기(2006년 ~ 2008년)의 지지율 저하와 민주당 정권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 및 당시 분열과 막장을 보여주던 여당 대통합민주신당의 바닥을 찌르는 지지율로 인해 후보선출 이전부터 보수계 정당인 한나라당 소속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기정 사실화될 정도였지만 상황이 계속 바뀌고 있었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에도 거부감을 느끼는 유동층을 노리기로 한다.

이 때부터 본선은 이명박 후보의 높은 지지율을 꺾는데 집중했다. 비록 이회창의 한나라당 탈당 및 후보 독자출마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은 이명박의 절반수준, 이회창은 정동영 후보의 절반의 양상으로 흘러갔다.[24] 정동영후보와 이회창 측은 BBK 주가조작 사건을 내세우며 이명박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12월 5일 BBK 주가조작 사건 유죄 판결과 연달아 서울신문에서 다스 실소유주 논란을 터뜨리며 이명박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 덕에 정동영 후보와 접전을 펼친 끝에 당선되었다. 진보정당이라는 은근한 페널티를 안은 상황 속에서 정동영과 이회창 외에도 이명박, 문국현 등의 유력후보가 난립한 선거였기 때문일까, 선술했듯 과반 득표율은 달성하지 못하고 35.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덕에 권영길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부활 이후 서울에서 이긴 최초의 진보정당 후보이자 서울에서 가장 근소한 득표수 차로 이긴 후보가 되었다.

대통령 재임 시기

3일간의 평화

권영길은 취임한 직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인 후진타오, 그리고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과의 만남을 잡으며 제2세계 국가들과의 친분을 다져나감과 동시에, 압록강과 두만강에 있던 군사분계선을 철거하여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었다.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면 양 국가 모두 육로 국경을 열 것이고, 이전과 같이 군사비를 올리지 않아도 세 나라 모두 협동하여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5]

하지만 이러한 권영길의 움직임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사건이 발생하며 태도를 확 바꿔버리게 된다.

원산 사태 발생
임기 시작 후 권영길 대통령은 군축을 시행하려 했다. 하지만, 임기 시작 3일만에 원산에서 문제가 생기자 1초만에 태세를 바꿔 강경대응 하라고 지시했다. 만약 이 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가 멸망했을 것이다.
2009년 2월 27일 대한민국 국회 원산 검은 균열 사태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2008년 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뒤 서울공항에 도착한 권영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아니, 당시 세계사상 최악의 사건을 맞닥들이게 되었다. 함경남도 원산시 춘일 신도시 건설 현장의 차원균열 발생 소식을 들은 권영길 전 대통령은 급히 청와대가 아닌, 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함경남도청이 소재한 함흥시로 이동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진행하고 태스크포스를 세운다.

점점 국가적 차원을 넘어 국제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권영길 전 대통령은 판단력을 잃지 않고 어떻게든 고원과 고성군 일대의 방어선을 잃으면 안된다고 지시했고, 군과 경찰을 동원해 괴수들을 막아낸다.[26] 군의 사상자가 증가하던 때에 미국은 현재가 전시라고 판단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져가 미합중국 국군과 같이 대한민국 국군을 통제하였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우방이라 해도 국가의 군대가 타 국가에 통제되는 것을 본 국민들은 그간 전시작전통제권 회수를 주장했던 권영길 전 대통령의 행보와 전혀 다른 모습에 지지율이 하락한다.

괴수들을 권영길 전 대통령이 지시한 방어선 안에서 막아내는 동안, 국방부장관에게 현장의 군인들에게 자율 판단권을 주어 해당 사태를 빠르게 해결하라고 지시했고, 특수차원탄환을 개발하고 있던 국방과학연구소에 방문하여 연구진들을 격려하는 등 전시작전통제권을 잃은 상황 속에서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그 덕에 약 30일의 길고 긴 시간 끝에 원산 사태는 괴수들을 원산시 경계선 안으로 격리하고, 통제선을 세워 한미 양국 군대가 경계하는 결정을 끝으로 매듭이 지어졌다.

사태 수습 이후 2008년 5월, 수십년간 정착되어 있던 모병제를 원산 사태의 특수성과 국가 안보 유지를 위해 부분 징병제를 시행하자는 내용의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여당이었던 민주노동당은 반대하였으나, 아직 30일까지는 여소야대의 형국이었기 때문에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찬성을 얻어 병무청이 세워졌고, 부분 징병제가 시행된다. 이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 내에서 큰 반발이 일었다 카더라

노르딕 모델 도입 및 각종 시행착오

원산 사태 수습 이후, 참여정부의 행보보다 더 급진적으로 나아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주장했던 권영길 전 대통령 답게 국민건강보험 제도 개선과 고등학교 무상교육, 그리고 등록금 반값 제도를 시행한다. 입시제도의 개편도 이 때에 이뤄져 입시 위주 교육이 아닌 전인교육, 인성교육을 위주로 진행되게 되었으나 학부모들과 사교육 강사들의 반대가 매우 심했다. 의료개혁은 국민건강보험 제도 개편과 공공의료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으로 대표되는 공공의료 확대와 의료진 확충을 위한 의과대학 인원 증원, 투 트랙으로 이뤄졌다.

두 개혁 모두 초반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업고 속전속결로 진행되었으나 대한의사협회의 의사 파업으로 의료체계가 붕괴될 뻔하자 공공의대와 의과대학 인원 증원은 일부만 이뤄졌고, 입시제도 개편은 일본의 유토리 교육 실패를 본 교육계 종사자들의 우려와 야당인 한나라당의 여론 물타기로 일부만 개선되게 된다. 이 외에도 중소기업 내실 강화와 고용노동부 권력 확충과 같은 다양한 행보를 이어나갔으나 공약에 있던 미래의 정부를 이은 북부지역 개발 계획은 원산 사태로 군축 움직임이 없어졌고[27], 적극적인 노동개혁과 삶의 질 개선에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문민정부와 비교를 받기 일쑤였다. 이로 인해 국회와 국무의원 모두 안정적으로 구성이 되었음에도 레임덕을 맞이했다.

결국 2012년 12월에 진행된 18대 대선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가 48.1%로 진보정의당[28] 심상정 후보와 민주통합당의 문영현 후보를 압도적으로 따돌리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진보 정권의 수반이었던 권영길 전 대통령은 당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정권을 이양할 수 밖에 없었다.

퇴임 이후

퇴임한 이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시골로 내려가지는 않았고, 이종찬 전 대통령과 같은 케이스지만 다르게 자신과 정치생활을 함께한 서울특별시 강남구의 아파트로 돌아가 진보 원로 정치인으로서 종종 얼굴을 비추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6년 7월에는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과 비밀회견을 하여 기본소득과 관련하여 의논을 나누었으며,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집회에도 개인자격으로 참여하였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는 정의당 선대위 고문단으로 참여하였고 옛 지역구인 창원에서 심상정 후보 지지연설을 하기도 했다.

  1. 대통령 사저가 아파트인 유일무이한 케이스로, 퇴임 후 대통령경호처에서도 경호에 한때 난항을 겪었다고 한다.
  2. 인근의 강누리, 사월리와 함께 안동 권씨(安東 權氏) 복야공파(僕射公派) 집성촌으로, 권경석, 박계동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
  3. 감정공세손(監正公世孫) 36세 '泳'자 항렬이나 영자의 한자가 달라서 '永'자이다. 다만 아버지 이름이 35세 현(鉉)자 항렬을 써서 권우현(權禹鉉)이며, 아들들 이름이 37세 근(根)자 항렬을 써서 이름이 태어난 순서대로 각각 권호근(權浩根), 권성근(權聖根)이다.
  4. 權良浩. 족보명은 권재상(權載上). 1899. 3. 11 ~ 1979. 7. 7.
  5. 1896 ~ 1939. 2. 15. 한기호(韓琦灝)의 딸이다.
  6. 동방생명의 사주 강의수의 외동딸이다.
  7. 동덕여자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8.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한화그룹 취직.
  9. 언론인
  10. 안동권씨대동세보 15권 348쪽에는 權鉉으로 등재되어 있다.
  11. 하인진(河仁鎭)의 딸이다.
  12. 누에치기(양잠업)와 비단실을 연구하는 학과였다. 현재는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 바이오소재공학. 여담으로, 가수배우 김창완이 그의 대학 직속 후배이다.
  13. 노조를 만들긴 했는데, 누가 위원장을 맡을 것인가로 노조원들끼리 갑론을박을 벌이다가 결론이 나지 않자, 당시 마흔 일곱살로 노조원 중에서 최연장자였던 권영길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14. 약칭 업종회의. 언론·금융·교사·병원·공공기관 등 사무직/전문연구직 노조들의 연합체. 14개 연맹 586개 노동조합, 200,197명 조합원으로 출발하였다.
  15. 생산직 노조 연합체였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과 사무직 노조연합체였던 '업종회의' 그리고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약칭 현총련) 3개 조직의 대통합으로 출범하였다. 만장일치로 권영길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3개 조직 출신을 골고루 안배해서 초대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16. 심지어 당시 전국금속노동조합 사무처장으로 민주노총의 숨은 실세라는 이야기를 듣던 심상정도 진보정당에 대해서 냉소적인 자세였다. 대다수 노동운동가들은 현장에서 싸워야한다는 입장으로, 심지어 지금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탄압당하고 있는데, 당신네들은 무슨 금뱃지 타령이냐면서 비아냥대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하는 사람들도 한국사회에선 오랜 기간 형성된 냉전반공의식 때문에 실현불가능이라고 보는 진보인사들도 상당했다. 이런 사람들은 그나마 가까운 민주당 계열에 대한 '비판적지지' 노선을 고수했다.
  17.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의 해양수산부장관 맞다
  18. 이주영 후보도 불과 44.1%를 득표한지라 37.8%를 득표한 권 후보로서는 아까운 석패였다. 13%를 득표한 여당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았거나 단일화를 했다면 이탈표가 좀 있더라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박빙이었다.
  19. 당시 국회에 의석이 없던 민주노동당은 TV토론회 참여를 위해서 법원에 소송까지 제기한 끝에 여론조사에서 3%가 넘는 후보는 TV토론회에 참여가능하다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20. 언론과 여론조사 전문가들에 따라서 최소 50만에서 최대 100만표 이상으로 추정한다.
  21. 이 기록은 15년 뒤에서야 정의당심상정 후보에 의해 깨진다.
  22. 이후 이주영은 김태호 경상남도지사 밑에서 경상남도 정무부지사를 거쳐 2006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마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해 2년만에 원내복귀 하였고, 이후 내리 4선을 하였다.
  23. 1차 경선에서 과반에 근소하게 미달, 결선투표에서 근소한 차이(52.7% 대 47.3%)로 심상정 후보를 이겼다. 권 후보는 상대 두 후보가 PD 조직의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권영길 후보진영에서 2030 청년층들을 노리는 모험수를 뒀고, 이것이 성공하여 근소하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이후부터 청년정치의 바람이 잠시 불었다.
  24. 이회창이 이명박의 지지율만 흡수할 것이란 여권의 예상과는 달리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도 상당수 흡수했다. 대통합민주신당한나라당도 좋아하지 않았던 20대의 표심이 반영된 것이다. 이후 이명박, 정동영, 권영길 3강 체제로 굳어지자 이회창의 지지율을 권영길이 흡수했다.
  25. 실제로도 러시아 연방과는 이 당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연해주 일대의 군사분계선이 철거되었고, 이 시기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평원선, 함흥선, 그리고 경의선, 경부선과 직결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26. 당시 언론 보도 기준, 현재는 이차원 생물체라는 정식적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27. 2010년 광명함 피격 사건이 중화인민공화국이 자유조선을 이끄는 김정일에게 사주하여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도 한몫 했다.
  28. 권영길 전 대통령의 보수적 움직임으로 친중과 극좌 계열의 의원들이 대거 탈당해 통합민주당을 세웠고, 남은 의원들은 민주노동당을 쇄신해 진보정의당으로 개편한다. 권영길 전 대통령은 진보정의당으로 당적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