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KBS 로고.svg 선정 위대한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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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흥 14년(2019년) 9월 대한조선국의 공영TV인 KBS가 조선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조선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세종대왕 이순신 장조대왕 박규수 김구
6위 7위 8위 9위 10위
손원일 성조대왕 손흥민 김가령 이국종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이건희 김연아 정조대왕 정약용 이범석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민영환 성준영 권기옥 안익현 김수환
김가령
金嘉零 | Kim Ga-ryeong
본명 김민숙 (金珉淑)
출생 1872년(광무 8) 10월 3일
조선 함흥부 흥남시
사망 1958년(태화 32) 4월 29일 (향년 85세)
대한조선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직업 소설가, 시인, 수필가,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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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교육제도 설정 이후)
본관 김해 김씨
활동기간 1897년 ~ 1940년
장르 조선 근현대 문학
묘소 함흥광역시 흥덕구 본궁대공원 공동묘지
부모 아버지 김대창
어머니 허연
배우자 박철승 (1907년 결혼)
자녀 박민주
형제 오빠 김대열 (1864 ~ 1932)
오빠 김무남 (1870 ~ 1894)
남동생 김성국 (1877 ~ 1962)
데뷔작 소설가 대주 씨의 일일 (1897)


개요

조선 최초 근대 문학가이자 여류 소설가이다. 광무 시대의 대문호이며, 근현대 조선 문학의 어머니로 추앙받는다.[1] 5만원권 도안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세기 말 ~ 20세기 무렵에 활동했던 작가지만, 현대에 와서 지금의 시점으로 다시 읽어도 세련되고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연보

연도 사건
1872년 10월 3일, 조선 함흥부 흥남시(현 함흥광역시 흥남구)에서 아버지 김대창, 어머니 허연의 4남 1녀 중 막내 김민숙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대대로 양반가였으나 당시 가운이 쇠퇴해 있었다. 엄격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나이차가 많은 오빠들 사이에서 관심을 받으며 자란다.
1877년 3월, 어머니의 장려로 고전 문학을 처음 접한다.
1879년 8월, 친구들과 놀다 넘어지고 왼쪽 팔에 상처가 남는다. 그녀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흉터 자국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1880년 문학도의 길을 결심하고, 가족들에게 알리자 아버지 김대창과 사이가 멀어진다. 함흥부 소재 양휘소학교에 입학한다.
1884년 양휘소학교에서 마찬가지로 훗날 광무 시대의 대문호가 되는 채영신을 처음 만난다. 선후배 사이였으나, 점차 함께 글을 쓰는 동문으로 발전했다.
1886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지의 유럽을 여행한다. 당시 그녀가 본 서양의 모습은 훗날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양휘소학교를 졸업한다.
1887년 가족과 함께 평양부 기림동(현 평양광역시 기림구)으로 이사한다. 평양부 소재 문중중학교에 입학한다. 함흥에 남은 채영신과는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문중중학교에서 동문 탁재응, 윤지성, 최강주를 만난다.
1888년 탁재응, 윤지성, 최강주와 함께 백일장에 참여했지만, 김가령 홀로 일등상을 받는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함흥시로 다시 이사한다.
1890년 채영신과 사이가 멀어진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함흥공고에 입학한다. 그러나 아버지 몰래 작품을 써 나갔다.
1891년 그녀의 등단작, [소설가 대주 씨의 일일]의 구상을 시작했다. 둘째 오빠 김무남이 한청전쟁에서 전사한다. 이후 반전주의적인 성격을 띄었다.

여담

조선 최초 원자력 잠수함인 김영철급 3번함의 함명이 HKMS 김가령이다. 함선 좌우명은 그녀의 작품 [새벽의 징조와 연인]의 한 구절인 '유령인 줄 모르는 병사의 영혼처럼'.

  1. 근현대 일본 문학의 아버지를 나쓰메 소세키로, 동시기 중국 문학을 루쉰으로 꼽는다면 김가령은 한국 문학의 어머니로 나란히 세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