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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령 金嘉零 | Kim Ga-rye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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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민숙 (金珉淑) | |||||||||||||||||||||||||||||||
출생 | 1872년(광무 8) 10월 3일 | |||||||||||||||||||||||||||||||
조선 함흥부 흥남시 | ||||||||||||||||||||||||||||||||
사망 | 1958년(태화 32) 4월 29일 (향년 85세) | |||||||||||||||||||||||||||||||
대한조선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 ||||||||||||||||||||||||||||||||
직업 | 소설가, 시인, 수필가, 평론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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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최초 근대 문학가이자 여류 소설가이다. 광무 시대의 대문호이며, 근현대 조선 문학의 어머니로 추앙받는다.[1] 5만원권 도안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세기 말 ~ 20세기 무렵에 활동했던 작가지만, 현대에 와서 지금의 시점으로 다시 읽어도 세련되고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2 연보
연도 |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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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 10월 3일, 조선 함흥부 흥남시(현 함흥광역시 흥남구)에서 아버지 김대창, 어머니 허연의 4남 1녀 중 막내 김민숙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대대로 양반가였으나 당시 가운이 쇠퇴해 있었다. 엄격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나이차가 많은 오빠들 사이에서 관심을 받으며 자란다. | |
1877년 | 3월, 어머니의 장려로 고전 문학을 처음 접한다. | |
1879년 | 8월, 친구들과 놀다 넘어지고 왼쪽 팔에 상처가 남는다. 그녀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흉터 자국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 |
1880년 | 문학도의 길을 결심하고, 가족들에게 알리자 아버지 김대창과 사이가 멀어진다. 함흥부 소재 양휘소학교에 입학한다. | |
1884년 | 양휘소학교에서 마찬가지로 훗날 광무 시대의 대문호가 되는 채영신을 처음 만난다. 선후배 사이였으나, 점차 함께 글을 쓰는 동문으로 발전했다. | |
1886년 | 가족과 함께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지의 유럽을 여행한다. 당시 그녀가 본 서양의 모습은 훗날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양휘소학교를 졸업한다. | |
1887년 | 가족과 함께 평양부 기림동(현 평양광역시 기림구)으로 이사한다. 평양부 소재 문중중학교에 입학한다. 함흥에 남은 채영신과는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문중중학교에서 동문 탁재응, 윤지성, 최강주를 만난다. | |
1888년 | 탁재응, 윤지성, 최강주와 함께 백일장에 참여했지만, 김가령 홀로 일등상을 받는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함흥시로 다시 이사한다. | |
1890년 | 채영신과 사이가 멀어진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함흥공고에 입학한다. 그러나 아버지 몰래 작품을 써 나갔다. | |
1891년 | 그녀의 등단작, [소설가 대주 씨의 일일]의 구상을 시작했다. 둘째 오빠 김무남이 한청전쟁에서 전사한다. 이후 반전주의적인 성격을 띄었다. |
3 여담
조선 최초 원자력 잠수함인 김영철급 3번함의 함명이 HKMS 김가령이다. 함선 좌우명은 그녀의 작품 [새벽의 징조와 연인]의 한 구절인 '유령인 줄 모르는 병사의 영혼처럼'.
- ↑ 근현대 일본 문학의 아버지를 나쓰메 소세키로, 동시기 중국 문학을 루쉰으로 꼽는다면 김가령은 한국 문학의 어머니로 나란히 세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