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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金泳三
대한제국제14대 총리대신
임기 1993년 2월 25일~1998년 2월 24일
군주 회종은황제
전임: 노태우(제13대)
후임: 김대중(제15대)
신상정보
국적 대한제국 대한제국
출생일 1927년 12월 20일
출생지 대한제국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 외포리
(現 대한제국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사망일 2015년 11월 22일 (87세)
사망지 대한제국 한성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정당 무소속
학력 한성대학교 철학 학사
종교 장로교(합동)
배우자 손명순
자녀 김은철, 김현철, 딸 3명, 혼외 아들 1명
부모 김홍조(부), 박부련(모), 박남순(계모), 이수남(계모)

김영삼 (金泳三, 1927년 12월 20일 ~ 2015년 11월 22일)은 대한제국제14대 총리대신 (1993년 ~ 1998년)이다. 본관은 김녕 (金寧), 호는 거산 (巨山).

개요

대한제국 반군부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

약칭 YS (Yeong-sam)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김대중과 더불어 반군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민주화 운동의 거두로 공경을 받고 있으며, 나아가 김대중, 김종필과 함께 각 지역을 대표하여 (각각 PK, 호남, 충청) 카리스마로 당대 정계를 휘어잡은 "삼김" (三金)의 일원이다.

한국 전쟁 직후부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54년 만 26세의 나이로 거제 지역구의 제3대 의정위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역대 최연수 의정위의원이 되었고, 이후 9선 의정위원으로서[1] 민주당 원내총무, 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 등으로 활동하며 유신 정권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유신 정권 시절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 등의 탄압을 받았다. 1979년 10월에는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신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 동안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선언하여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1993년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32년만에 군사 정권의 마침표를 찍었고, 문민 내각을 열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를 도입하고 차명 부정 계좌를 단속 및 처벌하였으며,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했다. 예술인과 작가들의 반정부와 사회비판을 전면 허용하였고 군사 정권에 의해 수감된 박노해, 김남주, 마광수 등의 문학가를 석방하여 표현의 자유를 대폭 허용하였다. 고조선-삼한-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조선-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 법통 명문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을 펼쳤으며, 국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또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여 처벌하였고,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다. 2015년 11월 22일 0시 22분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서울대학교병원 측은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후 기자회견에서 급성 패혈증과 심부전증이 사인이라고 밝혔다.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로 5일 기간의 국가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장지는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인간 관계

일명 상도동계 (上道洞系)라는 정치 계파를 이루었다. 김영삼이 기거해 온 지역이 서울 상도동인데서 유래했다. DJ의 동교동계와 여러모로 대척점을 이루었다.

김대중 (DJ)

김종필 (JP)

대한제국 황실

민주화 시위 다 끝난 다음에 황제전두환이를 부른거야. 앉아서 해임이냐, 서서 사임이냐 고르라 이랬다데. (이랬다는데.) 웃기지도 않지. 거리에서 피흘리고 땀흘린 건 학생들이고 직장인들이고 의원들이고 기란데 (그러한데). 전이랑 가 다 항복하고 나서, 일 다 끝나고 나서 황제가 명이 안서니까 아무쪼록 불렀다는 기야. (불렀다는 거야) 학실히 느꼈제. (분명하게 느꼈지.) 황실이란건 참말로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이로구나, 전두환이, 노태우 끝나면 이 자들부터 쳐내야겠다.

 
— 2009년 SBS 육성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대한제국 황실은 황제가 군사정부 27년 내내 사실상 연금 생활을 하고 황족들이 전부 군부의 감시를 받는 가혹한 상황에서도, 오랜 세월 모아온 자산을 유신 정권 시절부터 야당과 민주화 인사들에게 알게 모르게 제공해줬으며, 재산을 팔아 보석금으로 활용해 감옥에 갇힌 민주화 투사들을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영삼과 상도동계는 이러한 황실의 지원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이는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DJ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실계 인사들의 가입을 끝까지 거부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한일 전쟁 당시 김영삼이 살던 거제도는 남한총독부 (南韓總督府)라는 일본 제국의 괴뢰 지배 하에 들어서 있었다. 대한제국군도 물론 일제에 맞서 분전했지만 오늘날의 38선 일대에서 그나마 있는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었고, 당연히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제국군의 분전이 체감될리 만무했다. 아무리 기다리고 버텨도 오지 않는 대한제국군에 지친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을 배제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세우자는 민주공화 운동 (코레아 레지스탕스)이 횡행하였고, 거제도 또한 그 운동의 거점 중 하나였다. 한편으로 군부 독재 치하에서 황실이 대처한 모습 또한 김영삼의 성에 차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 코레아 레지스탕스와 가까이 하면서 민권운동을 배운 배경과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눈에 보인 황실의 무기력한 모습에 실망한 김영삼은, 신민당 시절부터 황실에 대해 "제로센이 날아올 때도 무능력했고, 탱크가 광화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데도 무능했다."며 비판하여왔고, 자신이 주축으로 세운 민주화추진협의회삼당 합당 이후의 개헌 추진에서도 황실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며 황실과 날을 세웠다.

외환위기 사태 이후 비참한 지지율 (5%)과 함께 퇴임한 이후에는 황실과 교류를 시작했다. 황실 방계 출신이었으나 상도동계 정치인으로 활약한 이준규신한국당 의원의 역할이 컸다. 2009년 육성 인터뷰 당시까지만 해도 황실에 대해 완강한 반감을 유지하고 있던 김영삼은 2010년대에 들어 점차 황실에 유화된 모습을 보였고, 사망 직전이던 2015년 4월에는 이원 황제에게 "그 동안 내가 많이 미안했소. 앞으로도 국민들의 통합을 위해 황실이 애써주시오. 그리고 그 칠푼이 같은 자독사를 품고 있으니 조심하세요." 라는 말을 전했다. 평생 황제라면 이를 갈며 날을 세우던 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보며 놀란 이들이 많다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친박

이명박·친이·비박

기타

같이 보기

주석

  1. 김종필 (JP)와 타이 기록.
  2. 《삼김과 황실》, 심영 (20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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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대한제국 총리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