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의 키프로스 침공 | |||||||
---|---|---|---|---|---|---|---|
동서 교회의 냉전의 일부 | |||||||
![]() 니코시아에 진입하는 니케아군의 T-62 전차 | |||||||
| |||||||
교전국 | |||||||
![]() ![]() | |||||||
병력 | |||||||
니케아군 약 40,000명 정교회 의용군 11,000 – 13,500명 |
키프로스군 약 12,000명 조약군 1,800 – 2,000명 | ||||||
피해 규모 | |||||||
사망 1,500 - 3,500명 실종 약 800명 부상 약 2,000명 |
사망 4,500 - 6,000명 실종 2,000 - 3,000명 부상 약 12,000명 |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서 교회의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들어서게 되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동유럽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러시아가 니케아를 도와 라틴을 수복하려는 야욕을 보이자, 오랜 앙숙으로 대립하던 라틴과 니케아의 관계는 파국에 치닫게 되었다. 1949년에 라틴이 아우크스부르크 조약 기구에 가입하자 이에 니케아가 스미르나 조약 기구에 가입하기도 했고, 냉전이 한창인 1950년대와 60년대에도 양국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1960년 키프로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본래 키프로스 섬은 전통적으로 그리스의 영역이었고, 곧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교황령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라틴 정권을 수립하고, 퇴위된 동로마 황제 미카일 14세의 사위였던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가 동쪽으로 도망쳐 현재의 니케아를 수립하면서 동로마의 정통 후계자 문제를 두고 양국의 갈등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가톨릭교도가 주류를 이루었던 키프로스 정계가 독립 당시 라틴으로의 편입을 원했지만, 라틴을 동로마의 적법한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은 키프로스의 정교도들이 키프로스의 니케아 편입을 주장하면서 키프로스 내 가톨릭교도와 정교도 간의 갈등이 촉발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분쟁은 라틴이 가톨릭교도 키프로스인들을 지원하고 니케아가 정교도 키프로스인들을 지원하면서 라틴과 니케아 사이의 대리전 양상을 띄게 되었다. 결국 문제는 1967년 대규모 유혈사태로 이어져, 라틴과 니케아 사이에 전면전 가능성까지 고조되면서 악순환의 고리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