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㙔國
대한국

국새 국장
표어 광명천지 (光明天地)
온 세상을 밝게 하리라
국가 애국가
수도 북경부 북위 39° 54′ 50″ 동경 116° 23′ 30″ / 북위 39.913889° 동경 116.391667° / 39.913889; 116.391667
최대 도시 북경부
정치
공용어 조선어, 한문
지역어 한어, 진어, 형초어, 오월어
황제
영의정부사
영공의부사
영평리부사
영대간부사
영공거부사
이상
이재명
문희상
김명수
이종걸
유남석
역사
개국 1392년 8월 5일
 • 기사정난 1449년 8월 14일
 • 중국통일전쟁 1681년 3월 1일
 • 칭제건원 1683년 4월 11일
 • 홍범 제정 1831년 7월 17일
 • 대동양 전쟁 1937년 2월 28일
 • 대동양 동맹 발족 1944년 8월 15일
지리
면적 4,053,092.19‬㎢ (8 위)
내수면 비율 2.9%
인구
2019년 어림 증가 621,541,511명 (2위)
인구 밀도 증가 153.3 (88위)
경제
GDP(PPP) 2019년 어림값
 • 전체 38조 5449억 両 (1위)
 • 일인당 62015 両
명목 36조 6927억 両 (1위)
HDI 0.903 (22위, 2019년 조사)
통화 (両)

대한국(大㙔國, 영어: State of Korea, 독일어: Groß Koreanisches Reich) 또는 대한(大㙔), 한국(㙔國)은 동양의 중심에 있는 군주국이다. 1392년 태조[1]의 조선 개국에서 유래하였으며, 1683년 명나라로부터 선양받아 입관(入關)하였다. 수도와 최대 도시는 모두 북경이다. 주요 도시로는 17세기까지 수도로 삼았던 경성, 평양, 서안(西安), 심양, 대판(大阪) 등이 있고, 본토 외에도 남양제도[2]를 보호령으로 두고 있다. 이 나라는 서양에 '한국식 입헌군주정치(영어: Korean-style Constitutional Monarchy)'로 알려진 고유의 정체(政體)를 채택하고 있으며, 경제는 1886년 제출된 배위겸 보고서를 토대로 세워진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를 질서로 삼고 있다. 인구는 세계 2위, 명목 국내총생산과 실질 국내총생산은 모두 세계 1위, 국토 면적은 세계 8위를 기록하고 있다. 통화는 미국 달러($)와 등가 교환되는 대한국 양(両)을 사용한다.

훗날 대한국의 모태가 되는 조선은 명을 침공하여 정통제를 납치한 오이라트를 물리치고, 황제를 구출하였다(기사정난, 1449). 이후 북명 황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쇠약해진 명나라 대신 심왕(審王)의 자격으로 요동과 북방의 기마민족들을 통제하고, 명나라의 북조 사이를 조율하고, 교역로를 개척하여 해양으로 진출하면서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신농법·신품종·신작물의 도입 등 중농 정책에 따른 식산(食産)의 증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자세에 기초하여 이룬 과학기술의 진보, 상·공업과 도시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산업화의 전기를 마련하였고, 마침내 17세기에 이르러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중화 세계는 18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명나라가 멸망하고 유목민족이 침입하며 군웅이 할거하는 내란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때 고조는 군사를 일으켜 준가르를 정벌하여 외침을 봉쇄하고, 중국 대륙을 재통일하였다(중국통일전쟁, 1681~1683). 전쟁이 끝난 1683년에는 명실(明室)의 자손을 제위에 옹립하여 명나라를 복원하려 하였으나, 곧 명 황제의 선양(宣揚)에 따라 천명을 승계 받아 대한의 수립을 선포하고, 이어 제후를 분봉하였다.

20세기에 한국은 동양평화론을 내세우며,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소련을 격파함으로써 시베리아에 산재한 동양인을 해방하였고, 소동양[3] 지역에서 서양 제국주의를 몰아냈다. 그리고 영국의 압제로부터 인도를 해방한 데 이어, 미국과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벌인 끈질긴 사투 끝에 핵폭격을 감행, 신승(辛勝)을 거두고, 미국이 멸망시킨 하와이 왕국을 복국(復國)시킴과 더불어 호주 대륙 서부 황인들이 일으킨 혁명을 응원하여 호주 연방을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대동양 전쟁, 1937). 1944년 전쟁을 마무리짓고 1946년에는 영·미 등 연합 세력과 우세한 위치에서 강화(講和)함으로써 한국은 세계대전에서의 최종 승리와 서양 세력의 동양으로부터의 완전 축출을 확인하였다. 이후 대한은 동양 세계의 명실상부한 영도 국가로서 동양평화론에 입각한 동양 각국의 호혜적 체제(대동양 동맹)를 정립하고, 대단위 분업화 정책에 따른 동양 세계의 급속한 산업화를 촉진하였다. 에우로파 연맹 체제가 붕괴하고 제3제국이 해체되자 미국 및 NATO와 경쟁하며 자국과 동양 세계의 영향력을 증진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나라는 오늘날까지 대동양 동맹의 실질적인 맹주로서 기능하고 있는 나라로, 미국과 함께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세계 규모에서 자국의 이익을 보호·관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세계에서 유이(有二)한 초강대국이다. 전 세계 군비 지출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국제 정치, 경제, 문화를 누구보다도 앞선 위치에서 선도하고 있다.

국호

정식 국호는 대한(大㙔)으로, 개천 원년(1683)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흠종의 선양으로 칭제를 하게 되면서, 천조(天朝)의 일자(一字) 국호를 채택하고자, 종전의 조선(朝鮮)에서 새롭게 고친 이름이다. 고조 황제의 제안에 따라 옛 삼한의 땅에서 왕업이 흥기하였다는 점에서 '대한'이라는 국호를 정하였다고 전해진다.[4] 그 외에 별칭으로 중국(中國), 중화(中華), 천국(天國) 등이 있다. 특별히 '천자의 나라[天朝]'라는 점을 강조하여 대한천국(大㙔天國)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한(大㙔)에서 한(㙔)은 원래 한(韓)의 통자인데, 고조 당시 국호를 새로 정하면서 오덕종시설에 따라 명나라의 화덕을 잇는다는 의미[火生土]에서 흙 토 변을 가진 한(㙔)을 굳이 취한 것이다. 다만 이와 함께 본자인 한(韓)도 병용된다.

역사

근세 시대

도래인 조우

『세종실록』에는 "강화도 앞바다에 산채만한 거선(巨船) 수 척이 다가옴에 인민들이 이를 두려워 하여 떨었다." 따위의 기록[5]이 남아 있다. 선덕 4년(세종 11년, 1429) 작성된 이것이 한국 역사상 최초로 '도래인(到來人)'이 나타난 것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이들은 생김새는 당대 조선인들과 매우 닮았지만, 옷차림·키·말씨 등이 확연히 달랐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선 정부는 혹여 탐라(耽羅) 사람인가 하여 수소문하였으나 아니었다고 하며, 필담을 나누었는데 "이해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말을 늘여놓았다."라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이 부분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무언가 감추기 위하여 모호하게 작성되었거나, 후대에 수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기록은 그 때 거선에서 내린 이들을 일컬어 일관되게 '도래인'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들을 부르는 이름의 유래이다.

『연려실기술』은 도래인들이 강화도에 도착한지 고작 열흘 만에 당시 임금이던 세종을 알현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이들이 상(上)뿐 아니라, 또한 세자 시절의 문종을 만났다는 것이다. 더 유별한 것은 문종이 이들을 보자마자 땅을 치고 대곡(大哭)하였다는 점인데, 이방인들을 만났다고 하여 이러한 감정의 변화를 보인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아 후대 역사가들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그럴 리 없다며 훗날 나라에 막대한 기여를 한 도래인들과 연관시켜 어실(御室)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하려는 '후대의 각색'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어쩌면 병법과 무기에 관심이 많았던 문종이 더 선진적인 군사기술을 접할 기회를 마련하게 되어 몹시 기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린 것일 수 있다고 반론을 펼치고 있다.

임금과 세자를 알현한 도래인들은 곧 각자의 위치에 배속되어 조정을 위해 실무(實務)에 힘쓰게 되었는데, 특히 학술 분야에서의 활약이 눈에 띈다. 표류 전까지만 해도 출신국에서 일종의 박사(博士) 관위에 있었다고 한 이들은 곧 집현전에 배속되어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이들이 소개한 수리학(數理學), 화학(化學), 농학(農學) 등 학문이 이기(理氣)의 운행을 절묘하게 설명한다 하여, 곧 세종의 분부에 따라 설립된 '격물원(格物院)'[6]에서 강의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가르친 이치는 이후 수백 년 간의 번영에 밑거름이 되었다.

개중에는 이창익이라는 이름의 유생(儒生)도 있었다고 하는데, 비록 머리는 산발하고, 중화의 의관을 하지도 않았으나, 그의 학설에는 모두 조리가 있고 어느 하나 정결하지 않은 것이 없어 많은 선비들이 배움을 청하거나 토론을 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창익은 언제나 배움을 청하러 온 이들을 오히려 스승으로 모시는 등, 자신을 낮추며, 겸허하고 공손한 자세를 하여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 밖에도 일부 상인이었던 이들은 조선에 도착한 후에도 본업에 충실하여 금새 거상으로 성장[7]하기도 하였고, 부인들도 저마다 재능이 있어 어느 누구 하나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 도래인이라는 집단에게 유독 관심을 갖는 까닭은 바로 역사적 진보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들의 공식적인 출처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위치를 비정하도록 추측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 또한 전혀 없다는 점에 있다.[8] 이들의 출처가 민간의 사료에서 논해진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었다. 한편 관가의 기록에서 흥미롭게 느끼거나 의아하게 생각할 만한 부분이 한 가지 있는데, 다름 아닌 『세종실록』에서 제신(諸臣)들이 하염없이 이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밝혀야 함을 세종에게 주청하자, 세종이 답하여 말하기를 "그들에게 몸소 들었는데, 천하에서 찾아낼 수도 없고, 다만 머나먼 곳"이라며 그만할 것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시대의 성군으로 이름이 높은 세종 임금이 어째서 대신들을 입막음하였던 것일까?"라는 의문점은 지난 오백 년 간 이 나라의 사가(史家)들과 나름의 역사광들의 마음을 간질였다.

기사정난과 북방 개척

오이라트에 붙잡힌 영종

환관 왕진의 전횡과 더불어 명나라 초기의 안정적인 조정은 영종 때에 이르러 해이해지기 시작했고, 1449년에는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가 세력을 형성하고 무역의 확장을 위해 교섭을 청해왔으나 여러 차례 결렬되었다. 1406년 영락제는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 무역을 허락하였는데, 마시(馬市)라는 형태로 교역을 하여 영종 때까지 관례화되었다. 명나라는 이들로부터 말과 가축 등 그 부산물을 수입하고, 비단 등의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50명 정도의 사절단 규모가 에센 때에 이르러 3,000명까지 늘어났고, 주변 위구르의 상인들까지 가세하여 무역량이 늘어나고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이에 심각한 문제를 겪던 명나라는 오이라트 부족에 대한 무역을 제한하였고, 1448년 환관 왕진은 실제 인원에 대한 조공무역만 허용하였으며, 말 값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할만 지급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는 정통 14년(1449) 명나라 변방인 산시성 다퉁으로 침입하였다.

환관 왕진은 영종에게 친정(親征)할 것을 간청했으나 이부상서와 병부상서는 친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영종은 왕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이라트를 친정하고자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으나, 50만 명의 군사 중에는 문신, 귀족 등 전쟁과 무관한 이들을 포함시켜 군대의 규모를 과시하였다. 전투에서 비정예군이 오이라트에게 대패하였음에도, 여러 군신들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왕진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센이 이끈 오이라트 군은 명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연승하였으나 환관 왕진은 이 와중에도 신하들의 충고를 무시하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 피살당하였으며, 결국 에센 군은 토목보를 포위하고 명나라 황제 영종을 잡아갔다(토목의 변, 1449).

한편 북경 조정에서는 병부시랑 우겸 등이 주축이 되어 영종의 이복동생 경태제를 옹립한 후 항전을 이어갔다. 경태제와 명 조정 대신들은 온 힘껏 저항하였으나, 화약 무기를 동원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퍼부은 끝에 오이라트가 북경성을 함락하게 되었고, 경태제와 우겸을 필두로 한 명나라 조정이 남경으로 파천하는 사태까지 빚어진다.

명나라 조정의 요청으로 원군을 준비하고 있었던 조선은 명나라의 황제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북경에 군사를 급파하였다. 당대의 최신식 화약 무기와 200여 년은 앞섰다고 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창술(騎槍術)을 사용한 조선군은 이징옥 등의 활약으로 북경성을 탈환하고 에센 군을 격파하였으며, 마침내 명 영종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다(기사정난). 이후 복위한 영종은 남경의 경태제 조정을 역적으로 선포하였고, 이에 역사는 북명과 남명의 남북조로 분단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위험에 처한 황제를 구원한 공을 인정받아 당시 조선 왕이었던 세종은 심왕(審王)의 봉작과 함께 요동도지휘사의 지위를 얻었으며, 산해관 동쪽의 모든 야인(野人)들에 대한 관리권을 부여받았다. 이후 북명과 조선의 관계는 매우 긴밀해져서, 조선은 명나라의 제1번국이자 명 황실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북명 조정의 대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북방 지역으로 뻗어나가는 국가적 전략을 수립하고 시행할 수 있었다.

16세기 조선의 직접 통치 지역, 간접 통치 지역, 영향권. 당시 조선은 북방과 남방을 경략하였다.

기사정난 이후 조선은 명나라 조정의 요청으로 원군을 준비하고 있었던 조선은 명나라의 황제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북경에 군사를 급파하였다. 당대의 최신식 화약 무기와 200여 년은 앞섰다고 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창술(騎槍術)을 사용한 조선군은 이징옥 등의 활약으로 북경성을 탈환하고 에센 군을 격파하였으며, 마침내 명 영종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다(기사정난). 이후 복위한 영종은 남경의 경태제 조정을 역적으로 선포하였고, 이에 역사는 북명과 남명의 남북조로 분단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경제의 발전

근대 시대

준가르 정벌

중국통일전쟁

칭제건원과 7왕 분봉

기아의 종식

1712년 과학자 신유백이 공기로부터 안기(氨氣)를 추출하는 데 성공한 데 이어 1734년에는 이를 응용한 화학비료 제조법이 상용화되면서, (인구의 폭증이 시작하였고, 이렇게 범람하는 인구는 드넓은 영토 전역을 조선계로 물들였다.)

현대 시대

동방의 맹주

동양평화론대동양 전쟁

대동양 체제의 정립

정치

행정구역

경제

사회문화

과학기술

각주

  1. 고조태황제가 추존
  2. 현실의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3. 동남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4. 예정 -『고조태황제 실록』
  5. 강화도 앞바다에 산채만한 거선(巨船) 수 척이 다가옴에 인민들이 이를 두려워 하여 떨었다. 마침내 회탁한 색으로 보이는 거선단에서 내린 이들은 얼굴의 빛깔이나 생김이 아등(我等)과 다를 바가 거의 없었으되, 키는 머리통 하나씩은 더 큰 듯하였으며, 간혹 쳐다 보기에 민망한 의장(衣裝)이며 산발하거나 중처럼 짧게 깎은 머리털이며 아국의 양식과 맞지 아니한 바가 많았다. 이들은 지나치게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로 말하였는데, 혹자는 개성 사람들의 말씨와 닮았다고 하였고, 누군가는 혹 탐라도(耽羅島) 사람들이 떠내려온 것이 아닌가 하여 수소문하였으나 섬 사람들도 이들과 말을 제대로 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개중 한 명의 신사(紳士)가 유독 문언(文言)에 능하여 강화부사와 필담(筆談)을 주고 받으니 비로소 이들과 언어를 통할 수 있었다. - 『세종수정실록』
  6. 오늘날 과학기술원의 모체
  7. 많은 수의 회사들의 뿌리가 이들에게 있다. 주산사(朱山社), 삼우사(三宇社) 등이 해당한다.
  8. 정당인 허경응 씨는 이들이 자신보다 2세기 앞선 시대에 살던 미래인인데, 자신이 개발한 시광기(時光機)의 오작동으로 인해 선덕 4년으로 보내졌다는 황당한 주장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허씨는 줄곧 자신이 미래인이자 외계로부터 온 조물(造物)과 통하는 사이임을 역설하고는 해왔다. 사람들의 반응은 언제나 그랬듯 '재미있다'와 '괴력난신을 입에 담지 말라'며 화내는 사람들 양쪽으로 나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