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민주당 (세 개의 제국)



Deutscher Reichs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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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보르얀스 내각(2021 ~)
연립여당 (- 석)


209석



95석

야당 (- 석)


107석



101석



97석



68석



21석



11석

재적 709석
 독일집권 여당
독일 사회민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영문 명칭 Social Democratic Party of Germany
한국어 명칭 독일 사회민주당
약칭 SPD, 사민당
표어 Soziale Politik für Dich.

당신을 위한 사회 정치 (2021년 ~ 현재)
In die Neue zeit

새로운 시대 속으로 (2019년 ~ 2021년)
당원 수 404,305명 (2021년)
상징 컬러 빨강 (#E2001A)
자주 (#A1006A)
 
창당 1875년 5월 27일
선행 조직 전독일노동자동맹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수 올라프 숄츠
총리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
최고위원 사스키아 에스켄 외 5명
사무총장 라르스 클링바일
    
중도좌파 - 좌파
 
중앙 당사 독일 베를린 빌리 브란트 하우스 D-10911
기관지 《전진(Vorwärts)》
학생 조직 젊은 사회주의자의 SPD - 대학생 그룹
청년 조직 젊은 사회주의자의 SPD
여성 조직 사회민주여성협의회
국제 조직
 
국가의회 209 / 709석 (29.47%)
주의회 607 / 2,798석 (21.69%)
주지사 11 / 25석 (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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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포스터 - 더 나은 독일로.[1]

개요

독일 사회민주당(독일어: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조치알데모크라티셰 파르타이 도이칠란츠[*]), 약칭 SPD(독일어: 에스페데)독일의 집권 여당이자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좌파(사민주의) 정당이자, 독일 정당사에서 중앙당 다음으로 오래된 정당이며, 대표적인 수권 정당으로 영국노동당과 함께 유럽 사회주의 좌파 진영을 주도해왔다. 사회민주당은 사회민주주의를 원칙으로 민주적 의사결정과 기본적인 정치, 경제, 문화적 권리를 실현함으로서 민주사회주의로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이는 강령에도 나와있다. 사회민주당의 상징색은 빨강이며, 진보동맹에 가입되어 있는데 과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창립 회원이었지만 반민주적 정당 가입에 대한 반발로 탈퇴를 선언했다.

사회민주당은 1875년 창당한 사회주의노동자당이 1890년 명칭을 사회민주당으로 바꾸면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했다. 허나 1949년부터 콘라트 아데나워의 집권으로 사회민주당이 탄압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반공주의 이념을 채택하게 되고 기존의 노선을 포기했으며 1998년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취임으로 제3의 길로 노선을 수정했다. 최근 들어서는 사회민주주의로의 회귀를 시도하고 있다.

역사

창당과 초창기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개량적 사회주의 정당의 탄생
사회민주당은 1863년 페르디난트 라살이 이끄는 전독일노동자동맹과 1869년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베벨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을 그 전신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라살주의자들이 독일 주도의 통일(소독일주의)를, 사회민주노동자당은 오스트리아 주도의 통일(대독일주의)를 외치면서 해결하지 못하다가 1870년 독일의 통일 이후 의견이 없어지며 1875년 두 당이 합당해 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출범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반사회주의법으로 편법적으로 참여했었기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1890년 총선에서 대약진에 성공, 비스마르크가 물러남에 따라 반사회주의법도 폐기되었고 명칭도 지금의 이름인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변경하게 된다.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게 된 사회민주당은 말년의 엥겔스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줌으로서 성장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자유주의는 유럽에서 진보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시 사회민주당은 극좌 성향에 가까웠다. 이에 사회민주당은 제도권 진출을 위해 국가사회주의(Staatssozialismus)에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사회주의로 노선을 바꾸었고 그 당시 한 사람이던 카를 카우츠키는 "우리 당은 혁명적이지만 혁명을 하지 않는다"라며 사회민주당의 노선을 표현했다.

그래서 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를 핵심적으로 지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폭력적, 적극적인 방법보다는 내부에서 사회주의의 기반을 갖추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를 사회를 변화시킬 것을 의미했다. 허나 이 수정주의는 전쟁 이전, 당의 핵심 이념이 되기 전부터 곳곳에서 받아들여진 상태였다.

그러던 1914년 총선거에서 원내 1당을 차지했고, 중도 자유주의 성향의 진보인민당과 함께 과반수를 넘겼다. 당시에는 대전쟁이 시작된 시점이라 충분한 준비를 갖춘 독일이 전쟁에 참여해야 했고 정치권도 선거 직후 전시 정국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국채 발행과 전쟁 협조 여부를 놓고 내분을 겪었으며, 다수의 당원들과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지는 사이 소수 세력들은 전쟁 반대를 외치며 반발했다. 결국 로자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소수파가 탈당하며 공산당에 합류하게 된다. 한편 일부 소수파는 공산당의 합류 대신 독립 정당을 만들 것을 주장해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했으나 전쟁 이후는 1930년 사회민주당에 흡수된다.

전 세계가 전쟁으로 바빠진 상황에서 1919년 2월에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총리와 야당이던 중앙당 등의 정당들을 포함한 왕당파와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합의 하에 발표된 헌법 개정안을 국가의회에 제출했고 인민당의 다수 의원이 반대표를 던졌음에도 과반수를 넘기는데 성공,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렇게 되면 개정안이 통과될 시 헌법에 따라 당시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빌헬름 2세는 전쟁이 종전된 후 개정안을 승인하겠다며 반대했다. 이에 헌법 개정안의 승인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사회민주당도 시위에 참여했다. 결국 빌헬름 2세의 승인으로 기존 헌법을 폐지하고 현재 헌법의 기초가 되는 2차 개정 헌법이 공포되었다. 공포 이후 막강했던 독일의 황제권은 축소되었고 대신 전쟁 선포 등에 대한 권한은 유지했기에 황제가 계속해서 전쟁을 지도할 수 있게 되었다.

대전쟁 막바지이던 1923년 총선거에서는 우파 여당인 인민당보다 낮은 127석을 가져가며 제2당으로 추락했으나, 이번에는 대전쟁의 전후 처리를 두고 독일의 영토를 유럽 러시아에서 북유럽까지 확대하자는 세력과 독일의 영토를 유지하되 식민지와 영향권을 확대하자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당장 초기만 해도 국채 발행과 전쟁 협조에 대해 찬성하던 사람들이 또 당 내 갈등을 일으켜버린 꼴이 된 것이다. 이러한 당 내 갈등은 1926년까지 계속되었다가 결국 식민지 확대론자들이 육국 평화 조약에 참여함에 따라 종결되었다.

성장과 첫 여당 진출

독일 최초의 사회주의 총리 배출
대전쟁 종전 이후 사회민주당은 1928년 총선에서 약 168석으로 의석을 늘리는데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중앙당이 제1당을 유지함에 따라 중앙당과의 경쟁은 점차 치열해졌고 급기야 독일 공산당이 일으킨 봉기와 중앙당이 극우파와 손을 잡으려 한다는 것을 필두로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행보를 보이며 공산당과 중앙당을 견제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부터 자유우국단과 각종 공산주의 세력들이 등장함에 따라 정치권까지 입성한다면 지지층을 잃을 것이 뻔하기에 이들은 나라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극단주의를 배제하도록 했다. 하지만 내각은 이미 극우 인사 일부를 장관으로 등용했기 때문에 사회민주당도 탄압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탄압당한 사회주의자들 대부분이 사회민주당 지지자들이었고 공산당에 우호적인 사회주의자도 일부 발견된 바 있다. 이에 일부 당원들은 사회민주당이 폭력적 투쟁을 하지 못했다며 사회민주당을 대체할 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바로 후에 정당으로 활동하게 되는 무쇠혁명운동이다. 그리고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의 정책이 많은 비판을 받아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대신 재무장관인 요제프 하인츠부르크를 임명시켰지만 경제 정책 실패로 직격탄을 맞아버렸기에 1933년 총선거를 앞둔 사회민주당은 기회를 얻는다.

이후 총선에서 제1당으로 올라서며 다수당은 물론, 국가의회의 과반수를 가뿐히 넘길 수 있었으며 헤르만 아인츠자르트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렇게 사회민주당은 처음으로 총리를 배출한 사회주의 정당이 되었으나, 다음 해에 아메리카 전쟁이 발발하며 그의 집권이 불투명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아인츠자르트는 미국의 뉴딜 정책을 벤치마킹한 새로운 경제 정책을 발표해 경제 구조를 개혁하여 1935년 불황을 극복해내는데 성공했고, 나라 안에서는 유대인의 권리 신장, 노동·사회보험의 개편, 연금 제도의 시행 나이 감축 등 사회와 노동 개혁에 집중했다. 허나 다수의 왕당파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중산층 등의 계층 사이에서 긍정적인 여론을 보였으나 공산주의자, 일부 왕당파, 극우파들에게는 강력한 탄압을 벌이는 등 극단주의 척결에 나섰으나,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아인츠자르트의 성과 덕분인지 1938년 3월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편입된 후 치러진 첫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압도적인 득표율로 제1당의 자리에 올랐고, 같은 해에 치러진 총선거에서도 사회민주당이 의석을 크게 늘리며 보수 야당이 괴멸될 정도의 타격을 입혔다. 이번 선거를 통해 한스 요스터가 총리로 선출했는데 요스터는 민주사회주의자로 아인츠자르트보다 더 좌파적인 성향을 띄었다. 요스터는 구시대적 체제를 바꿔야 한다며 사실상 헌법에 위배될 수 있는 완전한 공화정을 어느 정도 민주적이라면 검토할 것이라 발표했는데, 이는 독일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파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당시 독일의 공화정 지지 여론은 약 30%에 달했고 이러한 여론이 요스터의 공화정 구상안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요스터는 민주적 경제 개발과 노동 인권의 강화를 목표로 최저임금을 기존의 25마르크에서 80마르크로 올리거나, 아인츠자르트의 농업화 정책을 포기하고 공업화와 산업 개발을 중점으로 하였다. 또 1939년 8월 황실에 대한 개혁을 필두로 호엔촐레른 가문을 대상으로 약 5배 많은 세금을 내라는 조치를 발표했고, 1939년 11월에는 사회적으로 오명을 쓴 일부 구성원에 대해 직위를 해제하고 전 재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빌헬름 2세는 황실의 붕괴를 우려해 요스터에게 사퇴를 압박했고 사회민주당 지도부도 요스터의 행보를 우려하며 제명까지 검토할 정도로 정치적인 신뢰를 잃었다.

그러던 1940년 반삼국 운동이 전 세계를 덮치자 극단주의 세력들이 약진하면서 요스터의 지지율은 폭락한다. 이로 인해 공화정 구상안은 백지화되었으며 논란이 됐던 정책들도 일부 수정하였다. 1941년 3월 15일 아메리카 내 점령지 주둔을 놓고 정부와 군 수뇌부가 충돌했고 결국 1941년 7월 혁명을 통한 공화정 수립 내부 문건과 지하 벙커에서 대량의 러시아제 무기가 발견된 것이 수뇌부는 물론 언론에도 보도되자 온 국민들이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뒤늦게 사건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대중의 여론은 변했고, 여기에 제국자유당에서 개칭된 자유당의 등장으로 양당 모두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1942년 총선이 치러졌다. 선거 결과 자유당이 예상대로 중앙당을 뛰어넘어 제1당을 차지했으며 사회민주당은 이 사건의 여파로 제3당으로 추락했고 지도부는 요스터와 관련 인사들을 제명시키는 등 사건 수습에 나섰다.

야당 시절과 전성기

15년 동안의 야당 생활, 선거에서 전성기를 맞다
요스터의 지지도 하락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던 사회민주당의 여당 시절은 이 사건으로 인해 막을 내렸고 1942년에 치러진 선거에서도 대패하는 등 국민들의 신뢰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요스터는 선거 이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이유로 제명당했으며 결국 무소속 신분으로 정치 참여를 해야 했다.

그 후 사회민주당은 수정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복원하려 했으나, 수정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한 친요스터 민주사회주의 세력이 대다수 이탈하며 민주사회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8명의 의원들이 탈당해 민주사회당에 합류하게 되자 사회민주당의 지위는 위험해진 상태로 위기를 감수해야 했고, 지지율도 사건의 후폭풍으로 크게 하락한 상태에서 재기를 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으며 이에 1945년 총선에서는 80석으로 반등했지만 여전히 사회민주당 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그러다 1945년 9월 9일, 중앙당의 루돌프 크리펜의 집권으로 반삼국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사회민주당은 정부의 행보를 비판하면서 노선을 반공주의로 수정하자는 논의가 나타났다. 그 후 두 의견 간의 충돌이 빚어지더니 1946년 2월에는 발하이머의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지며 당 내 갈등을 다시 촉발시켰다. 이러한 당 내 갈등은 1946년 5월 10일 발하이머의 사임과 새로운 당수인 쿠르트 슈마허가 취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슈마허는 당 내 갈등을 봉합시키면서 당헌을 고쳐 수권정당으로의 복귀를 추진하려는 개혁이 이루어지며 쇄신에 나섰는데, 이러한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1947년에는 중앙당의 유력 당수로 떠오른 콘라트 아데나워의 등장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 해 중앙당이 아데나워의 국민적 지지로 이득을 얻고 있는 가운데 사회민주당은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는 지지층과 크리펜의 우파적 행보에 반대한 일반 시민들까지 끌어모으며 대항한다. 1949년 총선을 통해 사회민주당은 중앙당에 이은 제2당으로 다시 재기에 성공했고 이후 1952년 후임인 에리히 루덴부르크가 취임할 때까지 최대의 라이벌로 자리잡게 되었다.

후임은 루덴부르크는 슈마허보다 온건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반삼국 운동으로 촉발된 정치적, 사회문화적 자유주의 운동을 지원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사회민주당 의원들의 대다수가 참여할 정도로 전통적 계층과 일부 서민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계층에 큰 주목을 받았고 1953년 총선에서는 중앙당과의 격차를 어느 정도 좁혀가며 독일의 제1야당이자 사회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정당이란 이미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인강의 기적으로 인해 국민적 반감이란 단점을 보완할 수 없었기에 다음 선거에는 패배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만 했다. 그 때 청년의 죽음으로 시작된 56 사태가 일어나게 되자 이를 적극 지원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고 여기에 경찰이 폴란드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부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이 이어졌다. 이후 1957년 총선에서 약 160석을 차지해 여당 자리에 올랐고, 이른바 전성기가 찾아올 정도의 큰 이득을 얻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수권적 국민정당으로 변모하기 위해 1959년 기존의 강령을 폐기하고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해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포기했다. 이에 따라 사회민주당은 사회적 시장 경제의 옹호,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내세워 기존의 지지층을 넓혀가는 등의 성과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 차별 문제는 프랑스, 영국과 마찬가지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1960년대 초 마틴 루터 킹 2세에 의한 흑인 민권 운동과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운동 등 반삼국 운동의 주체가 바뀌면서 세 나라 모두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자 1960년 8월 인종 차별의 근절을 위해 폴란드인 거주 지역(구 프로이센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하도록 결정했다. 거기다 1961년 2월에는 모든 인종이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인종보호법을 마련했으나 매우 부실한 상황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야 했고, 어찌하던 상황에서 9월 13일에 치러진 당수 선거에서 빌리 브란트가 선출되자 이와 함께 1961년 총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사회민주당이 인종 차별이란 이슈에 밀리고 있던 중앙당을 압도적으로 누르며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고 브란트는 독일의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이슈를 따르고 있던 자유당과 연정을 맺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적황 연정이다.

브란트는 전 정부 시절 인종 차별 근절을 위해 기획했던 인종보호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인종들 간의 대표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1962년 1월 8일 대표들 간의 협상안이 통과되면서 1962년 4월 공식적인 채택을 목표로 충분한 준비를 가졌다. 그러나 독일의 신생 우파정당인 제국인민당과 충돌하며 인종보호법의 무력화를 시도하자 제국인민당의 돌풍을 우려했는지 중앙당을 이용해 강력한 견제를 취하며 인종보호법을 통과시키려 했다. 그리고 4월에 치러진 표결에서 사회민주당, 중앙당, 자유당 등의 정당들이 통과표를 던지며 마침내 인종보호법은 황제의 동의를 통해 정식 채택되었다. 이후 1963년부터 1971년까지 브란트의 진보적 정책을 대거 추진해 국민적 지지를 끌어올렸으나 대표적인 사건이 터지게 된다.

1969년 PLB 선언에서 식민지, 노예제, 전쟁 범죄 등에 대해 전 국민을 상대로 사과를 하고 모든 식민지에 자치권을 보장받겠다는 선언을 하며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국민적 지도자로 거듭났고, 심지어 당시 독일 황제였던 빌헬름 3세가 브란트에게 훈장을 수여할 정도로 황실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69년 11월이 다가오자 약속대로 미텔오이로파의 회원국과 독일의 모든 식민지 총독들에게 자치권을 부여받으라는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3당의 합의에 따라 헌법 개정을 통한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표를 받으며 개헌을 실시했다. 또 미래에 있을 인구 감소와 저출산에 대비하고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민 정책을 실시해 독일의 인구 증가에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현재의 독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브란트의 정책과 성과 덕분에 브란트는 독일 역사상 위대한 총리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보수적 계층은 사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방대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1972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중앙당을 누르는 사태가 벌어졌고, 다음 해인 1973년에는 런던 협정이 붕괴된 직후 영국과 독립파 무장단체인 아라비아 저항군 간의 내전으로 싸우던 시기에 오일 쇼크가 터지며 경제에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에너지 급등과 경제 침체로 한동안 저성장을 겪었다. 허나 영국은 에드워드 히스의 리더십이 오일 쇼크로 인해 붕괴되었고, 프랑스 국가통령이던 조제프 마레는 경제장관이던 조르주 퐁피두를 불러야 할 정도의 타격을 받았으나 정작 독일은 1975년 말까지 경제 침체를 겪었다 1976년 반등한 것으로 보인다.

또 오일 쇼크로 경기 침체가 일어난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1974년 브란트의 비서인 귄터 기욤이 공산당과 결탁한 간첩이란 것이 드러나면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고, 여기에 성추문까지 추가로 터지며 그의 리더십이 한 순간에 몰락할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 결국 사회민주당은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에는 어렵다는 판단을 받아 1976년 총선에서 차기 총리 주자인 헬무트 슈미트를 내정했다. 그 후 브란트는 성추문과 간첩 사태로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당 내의 압박에 못 이기며 1974년 12월 사퇴를 발표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퇴가 이루어지지 않아 논란에 휩싸였으며 끝내 1976년 10월 3일에 공식적인 사퇴가 결정되었다. 그 때 하필이면 선거일이 겹쳤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은 자유당의 돌풍을 막지 못해 제2당으로 추락했다. 다행인 것은 제3당으로 추락한 중앙당보다 덜 깎였고 중앙당이 상당히 많이 깎였기 때문에 사실상 몰락이나 다름없었기에 운 좋게 충분한 의원 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3의 길과 대연정

떠오르는 제3의 길, 그 후 대연정을 맺다

다시 여당으로

총선 승리 후 여당으로, 하지만 위기를 맞다

2018년 총선거 이후

총선거의 아픔을 딛고 3년 만에 다시 여당이 되다
결과적으로 참패로 나타났던 2018년 총선 이후 사회민주당에서는 슐츠 당수가 사퇴함에 따라 올라프 숄츠의 임시 대행 체제로 개편되었다. 임시 대행 체제는 사회민주당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서둘러 민심을 안정화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고 선거 참패의 원인을 메르츠 총리의 대망론과 사회민주당의 전략적인 마케팅 실패로 분석하며 앞으로의 전략을 구상하도록 했다. 하지만 지지율은 이미 녹색당에 이은 3위로 추락했고, 좌파 지지층이 점점 넘어오는 상황에서 사회민주당이 독일 좌파를 대표하는 정당의 이미지가 갈수록 깨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은 꼴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숄츠 임시대행이 사퇴하고 새 당수 선거를 9월 16일에 치루기로 결정했고, 결과는 사민련의 안드레아 날레스가 제24대 당수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초반부터 숄츠의 구상안을 파기시키며 당 내 우파들을 당황케 했으며 중앙당과의 대연정을 거부하는 당론을 채택하였지만 일부 중도 성향 당원들이 대연정 거부 방침에 반발해 탈당하는 일까지 생기기도 했다. 결국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이 좀처럼 회복되질 않자 날레스 당수는 6월 3일 곧바로 선거 없이 파멜라 렌디바그너에 당수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렌디바그너가 당수가 된 후에는 중앙당의 우경화와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녹색당, 자유민주당 등과 협치하는 대신 연정을 하지 않겠다는 발언으로 다른 야당들과의 협력을 시도했다. 물론 초기에는 날레스의 부정적 영향 때문인지 지지율이 오르기는 커녕 오히려 줄어들었고 최악의 경우 자유민주당과 제국인민당 밑으로 추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2019년 11월 오스트란트 주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압승, 동시에 열렸던 잘츠부르크 선거에서도 사회민주당이 승리하는가 하면 11월 말에는 주지사의 성폭력 파문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오스트프로이센에서도 사회민주당이 녹색당을 누르고 승리해버리는 일이 일어나 렌디바그너의 리더십이 큰 효과를 얻으며 여당인 중앙당에 타격을 입혔고 이로 인해 지지율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반등하다 약 18%를 기록하며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

이후 렌디바그너는 12월 8일 당수 선거를 실시함과 동시에 당수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고 당 내 좌파로 불리는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이 당수로 선출되었다. 발터보르얀스의 당수 선출 이후 중앙당에 대한 비판과 하르츠 개혁으로 인한 비판을 상쇄하기 위해 좌파적 경제 정책을 들여오는 등 민심 회복을 약속했지만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숄츠 시기에 폭발해버린 사민당의 퇴화와 녹색당의 활약 등을 그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 2월 함부르크 주의회 선거에서는 4석만 잃고 제1당을 유지했는데, 만약 함부르크에서 사회민주당이 패배했다면 해산해야 된다는 거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2020년 베를린 테러로 메르츠 총리가 사망하고, 헌정 사상 초유의 테러 사건으로 많은 국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 가운데 사회민주당 지도부도 테러 피해자들에 대한 추모 행렬에 참석했다. 하지만 후에 들어선 임시 내각에서의 무능은 물론 여당과 정부가 테러의 충격이 컸던 탓인지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오히려 지지율만 깎아먹는 일이 일어났고 사회민주당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정부 책임론을 앞세워 여당을 비판했다. 그런데 제국인민당도 정부 책임론을 먼저 선점하면서 사회주의 테러를 척결해야 한다는 발언 때문에 왕당파 등 중앙당의 전통 지지층을 중심으로 흡수, 지지율이 무려 3위를 기록하며 2014년 선거의 재림이 우려되는 상황이 되고 있는데, 다행히 범인이 신나치주의자라는 것이 밝혀지며 지지율이 약 10%까지 떨어졌다.

조기 총선을 앞두고 발터보르얀스 자신을 총리 후보로 내세워달라 호소하였고, 그 후 12월 30일 당원 총 투표 결과 사회민주당의 총리 후보로 선출되었다. 발터보르얀스의 총리 후보 결정과 함께 숄츠 역시 유력 재무장관으로 떠올랐으며 메르켈의 2인자였지만 테러의 여파로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는 아르민 라셰트 중앙당 당수와,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던 아날레나 베어보크 녹색당 당수를 누르고 발터보르얀스가 호감도 1위를 기록하는 등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을 엄청나게 끌어올릴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특히 베어보크와 발터보르얀스의 호감도 조사에서는 각각 1, 2위를 다투고 있는 상황이라서 변수가 작용하지 않는 이상 접전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결국 3월 16일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209석을 차지, 제1당에 오르며 7번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다만 단독 집권으로는 불가능할 상황이 될 수 있어서 95석을 차지한 자유민주당과 연정 협상에 들어갔고, 협상이 마무리되던 4월 2일 공식적으로 적황 연정이 이루어졌다. 적황 연정이 형성됨에 따라 선거 당일 내정된 발터보르얀스 총리의 발표와 국왕의 승인을 통해 내각 성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11월 8일 발터보르얀스가 11월 8일 당수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으며 대신 총리직은 유지되기에 새 당수를 뽑는 당원 투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고 10월 29일 당수 선거에서 당 내 우파였던 숄츠가 당선됨에 따라 전임 당수직을 승계하여 11월 8일 숄츠의 당수 직무가 시작되었다.

이념

     
 

W i r t s c h a f t
 

D i p l o m a t i e
 

H e r r s c h e r t i t e l
 

S o z i a l
사회적 시장경제
친유럽주의
온건 왕당파
사회자유주의
 

R e l i g i o n
 

K u l t u r
 

W o h l f a h r t
 

Ö k o l o g i e
정교분리 지지
문화자유주의
복지국가 지향
적극적 탄소중립 지향
 

E i n w a n d e r u n g
  

H o m o s e x u a l i t ä t
   

M i n d e s t l o h n 
  

A t o m w a f f e n
소극적 이민 수용
동성애 인권 신장
합의 통한 최저임금
핵무기 폐기 찬성
   

A r b e i t s m a r k t
 

W o h n u n g
    

M e i n u n g s f r e i h e i t
   

T e r r o r i s m u s
하르츠 체제 유지
사회주택
극단주의 배제한 자유 보장
엄중한 대응 촉구

사회민주당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시장 경제,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다. 허나 신자유주의에 부정적이고, 노동자·농민에 대한 인권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지만 이민 문제에 관해선 각 당파마다 다른 입장을 내놓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이나 동성애, 여성 인권에 소극적인 부분이 있다. 오히려 좌파 성향의 녹색당과 비교될 정도이다.

친왕당파를 띄거나 왕당파에 비판적인 정당들과는 달리 사회민주당은 왕실 개혁을 추구하면서 왕실에 대해 온건한 지지 성향을 띄고 있다. 2021년 기준으로 당 내 좌파(민주사회주의)는 왕정에 부정적이고, 당권파의 경우 비판적 지지, 당 내 우파는 온건 지지로 각자 다른 입장을 보인다. 그럼에도 정교분리를 공통으로 지지하며 녹색당과 마찬가지로 문화자유주의, 탄소중립 정책에 적극적이다. 외교적으로는 영국, 프랑스 등 영향력이 큰 나라들과 교류하면서, 동시에 미텔오이로파 중심의 유럽 통합(친유럽주의)에 우호적이다.

사회민주당은 1998년부터 게르하르트 슈뢰더 시기 제3의 길을 기본 노선으로 채택했었으나 슈뢰더 사임 이후에도 제3의 길 노선은 유지되었다. 슐츠 시기부터는 사회민주주의로 노선 복원을 시도하되 중도적인 노선은 버리지 않았고, 2014년부터 다시 좌경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지금도 이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내부 정파


사회민주당의 분파

Fraktion von Soc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민주좌파포럼
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연합
사회민주주의
디 아겐다
제3의 길 / 사회자유주의
제하이머 지구
경제적 자유주의 / 실용주의

사회민주당은 전체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당 내 좌파와 슈뢰더의 제3의 길을 표방하는 당 내 우파로 나타내지만, 실질적인 분파는 민주사회주의 성향의 민주좌파포럼(DemoLinkeForum),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사회민주주의연합(Sozialdemokratische Union), 슈뢰더의 제3의 길 성향의 디 아겐다(Die Agenda), 경제적 자유주의와 실용주의적 성향의 제하이머 지구(Seeheimer Kreis)로 나타낸다.

민주좌파포럼은 민주사회주의 성향으로 당 내에서 가장 좌파로 분류되는 분파 중 하나이다. 그 전신은 1966년 설립된 프랑크푸르트 지구(Frankfurter Kreis)로 사민당 내에서 좌파를 대표하는 분파였는데, 1972년 레버쿠젠 지구(Leverkusener Kreis)가 조직된 후부터 당 내 좌파가 갈라졌고, 이후 1980년 레버쿠젠 지구가 사회민주주의연합으로, 2000년 민주좌파포럼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민주좌파포럼은 민주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인 자유, 정의, 평등 사상, 모든 문화분야에서의 관용, 국제평화와 국제평화를 장려하는 것을 표방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연합은 사회민주주의 성향으로 당권파이다. 현재 총리인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가 이 분파 소속이다. 1972년 레버쿠젠 지구가 그 전신이며, 1980년 명칭을 변경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케인스주의적 성향을 띄고, 복지 국가에 대한 현상 유지를 촉구하되 국채 제한 및 부채 제도의 도입을 반대하거나 상속세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슈뢰더의 아겐다 2010에 부정적이다.

제하이머 지구는 디 아겐다와 함께 당 내 우파로, 경제적 자유주의와 실용주의를 내세운 분파 중 하나이다. 현재 당수인 올라프 숄츠, 전 당수인 마르틴 슐츠가 이 분파 소속이다. 디 아겐다처럼 사회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띄지만 경제적으로는 제3의 길을 통한 실용적인 경제 정책을 지향하고 아겐다 2010을 지지하며, 신자유주의에 대해선 유연한 비판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 소득세 조정 외에도 외교적으로는 다자 외교를 표방한다.

디 아겐다는 제3의 길 성향으로 제하이머 지구와는 달리 중도에서 중도좌파에 가깝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자칭하고 대체로 사회자유주의적이지만 슈뢰더의 측근들과 지지 세력들이 뭉친 조직인지라 제3의 길을 지향한다. 또 사회적 시장 경제 체제를 유지해야 된다고 설명하며 실제로 노동 시장을 유연화하면서 독일의 노동 통계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다는 비평이 나올 정도이다.

지지 기반

진보 계층, 북부·대도시·공업 지역, 중년층·전학력, 남녀 등 다양한 지지 기반
대전쟁 이전 사회민주당은 개량적 사회주의에 가까운 정당임에도 비가톨릭 노동자, 사회진보적 명분과 경제적 평등을 지지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일부 사회주의자들까지도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헤르만 아인츠자르트 시기와 한스 요스터 시기에 사회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집권 여당인 중앙당 소속의 요제프 하인츠부르크의 경제 정책 실패를 통해 서민층과 노동자, 사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요스터가 후보로 나섰던 1938년에는 이러한 경향이 강해지며 사실상 왕정 개혁과 민주사회주의 정책을 펼친 것도 이 때문이다. 때문에 왕정의 붕괴를 우려한 왕당파, 국민주의자, 귀족 등의 보수적인 계층에서는 사회민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꾸준히 단일 왕당파 정당인 중앙당에 결집된 원인이 되었고 최근에도 입지가 크게 줄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지지층을 유지하고 있다.

1945년 이후 사회민주당은 민주사회주의적 경제 체제가 아닌, 사회적 시장 경제로 낮추며 경제 지향 정책을 수정했고, 미텔오이로파 주도의 유럽 통합을 핵심 당론으로 내걸고 있다. 물론 쿠르트 슈마허 시기였던 1946년부터 1952년까지는 반대했지만 1952년부터 중앙당의 이념을 일부 받아들임과 동시에 사회적 시장 경제와 유럽 통합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의 발표로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국민정당으로 탈바꿈함으로서 더 많고 넓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현재 사회민주당의 지지 기반은 베를린을 포함해 독일 대도시권, 공업 지대 등으로, 특히 베를린 외에도 독일 북서부 지역에 나타나 있다. 공업 지대이자 철강 생산으로 유명한 루르 지방의 경우에는 20세기 동안 사회민주당의 지지 기반이었고 지금도 사회민주당의 전통적인 텃밭 중 하나이다. 덴마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홀슈타인, 폴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구 프로이센 지역,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알자스에서는 국민주의 정당이 약진하는 곳이지만 이 곳에서도 사회민주당의 지지세가 강하다. 다만 구 프로이센 지역은 국민주의나 자유주의·보수정당의 지지세가 강하다는 특징이 있어 완전히 다수 정당이라 보긴 어려우며 해당 지역에서의 지지율은 중앙당에 이어 2위(자유민주당은 3위)를 차지할 정도에 그친다.

바이에른, 오스트란트, 티롤, 바덴 등의 남부 지역에서는 지지세가 덜하거나 약하다. 바이에른은 중앙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으로, 기독교 중 개신교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보니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개신교층은 20%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지지세가 큰 뮌헨 등의 대도시를 제외하면 중소 ~ 소도시기 때문에 지지세가 약하다. 실제로 2014년 선거에서 바이에른은 중앙당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했고 사회민주당은 뮌헨 등의 대도시에서 강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18년 선거에서는 뮌헨 지역까지 중앙당의 손에 넘어가며 사실상 사회민주당이 전패한 곳으로 불린다. 오스트란트 지역에서는 바이에른보다는 지지세가 강하지만 여전히 덜한 모습이다. 오스트란트는 최근 선거에서 사회민주당 소속 주지사가 어렵게 당선된 곳이라 볼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중앙당이 사회민주당보다는 더 우세하다. 물론 사회민주당의 또 다른 전통적 지역인 케른텐이 존재하고, 주도인 빈 역시 베를린 못지 않게 지지세가 강하지만 케른텐의 경우 2018년 총선 이후 더 이상 전통적 지역이 아니게 되었다. 티롤 지역에서도 빈보다 더 약하다는 특징이 있다. 다만 이 지역은 극우정당인 제국인민당의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라서 자국민을 우선으로 한다는 정책에 동의하는 국민이 많다. 지지율 조사에서 제국인민당이 60%, 중앙당이 15%, 사회민주당이 8%로 가장 낮다.

중소도시의 경우에는 지지율이 대도시보다 반에 그치지만 소도시나 시골 등의 경우 브란덴부르크, 북부 지역을 제외하면 지지세가 낮다. 이 외에도 헤센 북부, 라인란트팔츠 중 팔츠 지역 일부와 자를란트 지역 등에서 지지세가 강하다.

연령층으로는 25세 이하에서 녹색당 등의 진보정당에서 밀리고 중장년층에서 큰 지지를 받는다. 학력별로는 저학력층이 지지세가 강하고, 고학력층에도 지지세가 높지만 녹색당이나 중앙당이 1위 밑에서 선전하고 있다. 성별로는 남녀 모두 지지세가 강하나 2018년 선거와 비교하면 중앙당과의 격차가 확실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역대 당수 및 총리

사회민주당의 당수
대수 이름 임기 기간 집권 여부
1 아우구스트 베벨 / 파울 징거 1892년 ??월 ??일 ~ 1909년 ??월 ??일 야당
2 아우구스트 베벨 / 후고 하제 1909년 ??월 ??일 ~ 1913년 ??월 ??일 야당
3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후고 하제 1912년 ??월 ??일 ~ 1916년 ??월 ??일 야당
4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필립 샤이데만 1916년 ??월 ??일 ~ 1919년 ??월 ??일 야당
5 오토 벨스 / 헤르만 뮐러 1919년 ??월 ??일 ~ 1926년 ??월 ??일 야당
6 오토 벨스 1926년 ??월 ??일 ~ 1933년 ??월 ??일 야당
7 오토 벨스 / 헤르만 아인츠자르트 1933년 9월 15일 ~ 1938년 6월 6일 여당
8 오토 벨스 / 한스 요스터 1938년 6월 6일 ~ 1939년 9월 16일 여당
9 프리드리히 발하이머 1939년 9월 16일 ~ 1942년 7월 17일 여당
1942년 7월 17일 ~ 1946년 5월 10일 야당
10 쿠르트 슈마허 1946년 5월 11일 ~ 1952년 8월 20일 야당
11 에리히 루덴부르크 1952년 8월 20일 ~ 1957년 9월 15일 야당
1957년 9월 15일 ~ 1961년 9월 15일 여당
12 빌리 브란트 1961년 9월 15일 ~ 1976년 10월 3일 여당
13 한스-요헨 포겔 1976년 10월 3일 ~ 1980년 10월 5일 야당
14 헬무트 슈미트 1980년 10월 5일 ~ 1984년 10월 5일 여당
1984년 10월 5일 ~ 1988년 10월 1일 야당
15 요하네스 라우 1988년 10월 1일 ~ 1990년 7월 26일 여당
1990년 7월 26일 ~ 1991년 6월 30일 야당
16 조엘 클레르크 1991년 6월 30일 ~ 1994년 8월 19일 야당
17 요하네스 라우 1994년 8월 19일 ~ 1998년 8월 1일 야당
18 게르하르트 슈뢰더 1998년 8월 1일 ~ 1998년 8월 15일 야당
1998년 8월 15일 ~ 2006년 9월 9일 여당
19 쿠르트 벡 2006년 9월 9일 ~ 2008년 8월 7일 야당
대행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2008년 8월 7일 ~ 2008년 9월 25일 야당
20 크리스티안 케른 2008년 9월 25일 ~ 2010년 12월 9일 야당
21 하인츠 피셔 / 지그마어 가브리엘 2010년 12월 9일 ~ 2014년 9월 16일 야당
2014년 9월 16일 ~ 2017년 3월 19일 여당
22 마르틴 슐츠 2017년 3월 19일 ~ 2018년 9월 16일 여당
대행 올라프 숄츠 2018년 9월 16일 ~ 2018년 9월 19일 야당
23 안드레아 날레스 2018년 9월 19일 ~ 2019년 6월 3일 야당
24 파멜라 렌디바그너 2019년 6월 3일 ~ 2019년 12월 9일 야당
25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 2019년 12월 9일 ~ 2021년 3월 16일 야당
2021년 3월 16일 ~ 2021년 11월 8일 여당
26 올라프 숄츠 2021년 11월 8일 ~ 현재 여당

사회민주당 소속 총리
대수 이름 임기 기간
10 헤르만 아인츠자르트 1933년 9월 15일 ~ 1938년 6월 6일
11 한스 요스터 1938년 6월 9일 ~ 1942년 7월 17일
15 에리히 루덴부르크 1957년 9월 15일 ~ 1961년 9월 15일
16 빌리 브란트 1961년 9월 17일 ~ 1976년 10월 3일
18 헬무트 슈미트 1980년 10월 5일 ~ 1984년 10월 5일
20 요하네스 라우 1988년 10월 2일 ~ 1990년 7월 26일
22 게르하르트 슈뢰더 1998년 8월 15일 ~ 2006년 9월 9일
24 크리스티안 헤스 2014년 9월 16일 ~ 2018년 9월 16일
26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 2021년 3월 16일 ~ 현재

역대 선거 결과

선거 결과
년도 선거 종류 의석 집권 여부
1877년 국가의회 선거 13석 야당
1878년 국가의회 선거 9석 야당
1881년 국가의회 선거 13석 야당
1884년 국가의회 선거 24석 야당
1887년 국가의회 선거 11석 야당
1890년 국가의회 선거 35석 야당
1894년 국가의회 선거 44석 야당
1897년 국가의회 선거 56석 야당
1900년 국가의회 선거 65석 야당
1903년 국가의회 선거 81석 야당
1907년 국가의회 선거 43석 야당
1909년 국가의회 선거 49석 야당
1914년 국가의회 선거 110석 야당
1918년 국가의회 선거 119석 야당
1921년 국가의회 선거 106석 야당
1923년 국가의회 선거 127석 야당
1928년 국가의회 선거 168석 야당
1932년 국가의회 선거 160석 야당
1933년 국가의회 선거 189석 여당
1936년 국가의회 선거 191석 여당
1938년 국가의회 선거 219석 여당
1942년 국가의회 선거 73석 야당
1945년 국가의회 선거 - 야당
1949년 국가의회 선거 - 야당
1953년 국가의회 선거 - 야당
1957년 국가의회 선거 - 여당
1965년 국가의회 선거 - 여당
1969년 국가의회 선거 - 여당 (자민당과 연정)
1972년 국가의회 선거 - 여당 (자민당과 연정)
1976년 국가의회 선거 - 야당
1980년 국가의회 선거 - 여당
1984년 국가의회 선거 - 야당
1988년 국가의회 선거 - 여당
1990년 국가의회 선거 - 야당
1994년 국가의회 선거 - 야당
1998년 국가의회 선거 - 여당 (녹색당과 연정)
2002년 국가의회 선거 - 여당 (녹색당과 연정)
2006년 국가의회 선거 - 여당 (중앙당과 연정)
2010년 국가의회 선거 - 여당 (중앙당과 연정)
2014년 국가의회 선거 202석 여당
2018년 국가의회 선거 40석 야당
2021년 국가의회 선거 209석 여당 (자민당과 연정)

타 정당과의 관계

중앙당

올라프 숄츠 사회민주당 당수 (왼쪽)과 아르민 라셰트 중앙당 당수 (오른쪽)

역사적 라이벌
중앙당과는 이른바 역사적인 라이벌이라 불릴 정도로 독일 정당 사상 양대산맥으로 불리고 있는데, 문화투쟁의 반발로 탄생한 중앙당이 제국인민당, 자유민주당과 함께 독일 우파를 이끌고 있다면 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 정당에서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사실상 녹색당과 함께 독일 좌파를 이끌고 있는 정당 중 하나로 대표되고 있다.

과거에는 양당 모두 반비스마르크 이념과 함께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당이 반비스마르크에서 우파 빅텐트 왕당파 정당으로 변하였고, 사회민주당은 중앙당을 비판하는 개량적 사회주의 정당으로 변함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 악화를 거쳐 라이벌 체제로 굳어졌다. 그래서인지 각 선거마다 두 당이 번갈아가면서 정권이 바뀌는 경우가 잦았고 이는 1980년 슈미트 총리를 시작으로 짝수 단위로 징크스가 이뤄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1998년 슈뢰더 총리의 집권으로 깨졌고, 2010년 총선 직전 중앙당 소속이던 메르켈 총리가 탈당하는 사례가 벌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2018년에 중앙당이 집권하면서 많은 유권자들이 일명 '헬무트 징크스'를 예상하였지만 2020년 사상 초유의 테러로 사망한 후 조기 총선이 치러지며 1년 뒤 사회민주당이 여당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예상이 빗나간거나 다름 없었다.

이후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이 2006년 대연정을 선포하면서 약 8년 간 연립 정권을 맺었지만 2014년 사회민주당의 압승과 함께 중앙당이 야당으로 밀려났고 대연정 역시 깨지며 다시 이전의 관계로 돌아왔다. 2018년 중앙당에서 강경파인 프리드리히 메르츠가 집권함에 따라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2021년 총선에서 대패한 후 일부 의원들의 비판을 제외하면 관계 회복을 검토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21년 총선 이후 라셰트 당수가 발터보르얀스 총리 외에도 숄츠 당수와 만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면서 다시 양당 간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있으나, 양당 안에서의 반발은 물론이고 국정에까지 영향을 미쳐 최악의 경우 적황 연정 붕괴 우려 등의 가능성이 클 수 있어 대연정 재성립까지 가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자유민주당

빌리 브란트 총리와 발터 셸 당시 외무장관 (1969년 촬영)

2021년 기준 연정 파트너
자유민주당과는 이 당의 전신인 자유당을 포함해 녹색당과 함께 연정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회민주당과도 연정을 맺은 바가 있다. 가장 최근의 연정은 2021년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 연정으로, 1969년 브란트 내각에서의 연정 참여 이후 두 번째이다.

다만 적황 연정 이후 단독 집권이 불가능했던 나머지 중앙당과 연정을 맺기에 이르렀고, 1981년에는 합당까지 하며 사회민주당과의 관계는 사그라들었으나 합당에 반대한 일부 자유주의자들이 따로 뭉치면서 자유민주당을 창당하여 자유당의 정신을 잇고자 했다. 허나 사회민주당과의 관계는 창당 초기 거의 활발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가 틀어졌고 이후에는 중앙당과의 연정으로 더 악화되었다.

현재 자유민주당과 사회민주당 간의 이념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당장 기본 이념만 봐도 각각 고전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며, 그 중 자유민주당의 자유주의 우파는 사회주의와는 대척점에 서 있을 정도로 진보좌파와는 맞지 않는 구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브란트 시기를 제외하고 대부분을 중앙당과 연정을 맺은 바가 있다. 다만 친기업, 시장 개입, 반규제에 찬성하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이 지향하는 경제 정책과는 다르지만 사회적으로 인권과 자유주의적 성향이 드러나기에 사민당은 물론 더 좌파적인 녹색당과 일부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2020년 베를린 테러의 여파로 중앙당과의 연정을 거부한 자유민주당은 차기 사회민주당과 연정을 구상하겠다는 발표 이후 적황 연정의 가능성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고 이는 2021년 총선에서 협상을 거쳐 4월 초 연정 내각이 성립되었다. 성립 이후 잠깐 동안 떠오른 대연정 구상론에 양당이 단호하게 반대하는 등 중앙당을 견제하고 있으며 지금도 반중앙당으로 돌아선 자유민주당과의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

녹색당

올라프 숄츠 당수 (오른쪽)와 아날레나 베어보크 녹색당 당수 (왼쪽)

사회민주당의 사실상 우군
녹색당과는 현재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로 적녹 연정을 이룰 정도로 활발한 관계이다.

녹색당은 전체적으로 진보 성향이고, 사회민주당은 녹색당보다 덜한 사회민주주의 성향이다보니 차이점과 공통점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데, 차이점이라면 녹색당은 청년층의 높은 지지와 적극적인 녹색 정치를 지향하는 신흥 좌파인 반면 사회민주당은 사회적 시장 경제를 지향하면서 하르츠 개혁 등의 정책을 추진했던 기성 좌파이다. 뿐만 아니라 대마초에 대해서는 녹색당이 찬성하는 반면 사회민주당은 당론으로 채택되지 않았지만 찬반 논쟁이 강한 의제 중 하나이다. 이민 수용에 대해서도 두 당에 대한 차이가 나며, 여성 인권 등의 의제 역시 이민 수용에 대한 차이처럼 비슷한 성향을 보이고 있다. 다만 공통점으로는 사회문화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이민 수용에 긍정적인 편이라는 점이다.

1979년 창당한 녹색당은 본래 환경 정책을 중점으로 정치 활동을 주도했으나 본격적으로 사회민주당과 적녹 연정을 이룬 시기는 1985년 헤센주에서의 정부 참여가 그 시초였다. 1993년 합당 이후 사회민주당과의 관계는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1998년에는 슈뢰더의 취임에 맞춰 두 번째 적녹 연정이 성사되었고 이는 2006년까지 이어졌다. 그 후로 하르츠 개혁의 성과 덕분인지 녹색당의 일부 당원들이 하르츠 개혁을 지지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녹색당이 좌경화되면서 하르츠 개혁은 양극화를 촉진시키는 정책이라며 비판했고 사회민주당과의 관계는 이 때부터 악화되었다. 심지어 2014년 총선에서 패배한 녹색당은 좌파 성향으로 변모되어 반사민당-중앙당 색채를 띄었다가, 2018년 베어보크 당수가 취임함에 따라 사회민주당의 진보 지지층까지 대거 흡수하면서 압승하는 등 사회민주당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2021년 총선을 앞두고 녹색당과 베어보크가 여론 조사에서 약 40%를 돌파하며 사회민주당의 몰락이 예상되었으나, 중앙당의 실책과 함께 진보 결집에 성공한 사회민주당의 발터보르얀스 당수의 지지율이 상승해 베어보크는 물론, 중앙당의 유력 후보였던 라셰트까지 누르며 1위로 올라섰다. 결국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재기에 성공했고 녹색당은 지지층과 지지율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90석 정도를 유지하는데는 성공했다. 이후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의 주도로 적황 연정을 구성하기 시작했고, 녹색당도 이에 합류하려 했으나 후폭풍으로 타격을 입은 녹색당이 연정을 구성하기에는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이탈하며 최종적으로 적황 연정이 출범하였다.

제국인민당

사회민주당의 영원한 적
제국인민당과는 사실상 독일의 4대 원내 정당을 포함해 대부분의 독일 정당들이 기피할 정도로 악명 높은 강경 왕당파 우파정당이란 점에서, 사회민주당도 제국인민당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선 이념부터는 강경한 왕당파 성향이고 독일 국민주의, 우파 포퓰리즘을 띄고 있으며 하르츠 개혁은 물론, 사회민주당이 지향하는 이념과 과거 사회민주당이 사회주의 정당이었다는 것을 싸잡아 독일 황실에 충성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이 전부이기에 사회민주당을 포함하여 지지자들에게는 비난을 넘어서 증오에 가까운 수준이다. 실제로 2015년 드레스덴에서 사회민주당 당원과 제국인민당 지지자들 간의 유혈 사태가 벌어지자 병원에 실려가는 일도 벌어졌었고 제국인민당 지도부는 이들을 제명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지원금을 받으면서 논란이 일기도 한 바 있다.

사실 제국인민당은 창당 이후부터 대놓고 사회주의를 혐오하진 않았고 대신 공산당에 대한 증오가 강했기에 사회민주당은 제국인민당의 네거티브를 피할 수 있었으나 1970년대 초부터 브란트 내각의 사건사고가 터져나오면서 비난의 화살을 사회민주당으로 돌리며 공산주의 세력들과 함께 공격하였다. 심지어 1976년 루퍼트 블랑케 당수의 집권으로 극우화되자 사실상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을 포함해 모든 정당들이 기피하게 되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 제국인민당의 극우화는 1990년대 이민 정책에 대한 불만과 2000년대 이후 불거진 이슬람공포증의 확산으로 계속되었고 특히 2014년 선거에서는 제3당의 자리에 오르며 독일 정치권에 적신호가 켜지기도 했다. 당연히 제국인민당은 정통 왕당파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극우파로 몰아가는 것 때문에 억울하다는 입장이지만 이미 극단주의에 대한 불신이 강해졌기 때문에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시 호감이 되기에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2017년 카를 헨돌린 당수 집권 이후 우경화가 서서히 약화되었고 극우화를 벗어날 것으로 예상했고 실제로 우경화를 막기 위해 강성 우파 세력을 제명시키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을 황실에 충설할 자격이 없다거나 하르츠 정책은 실패한 정책이라고 주장하는 등 강경한 행보를 보이고 있어 한동안 관계를 회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제국인민당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은 걸 보면 어차피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기타 정당

원내 정당 중에서 독일의 개혁, 유권자당, 인민당과는 사회민주당에 대해선 중립을 유지하는 편이지만, 독일의 개혁, 유권자당은 중앙당과 경쟁하는 정당이고, 인민당은 소수 정당임에도 대형 정당들과 교류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의 개혁, 유권자당을 제외하면 관계가 거의 없다. 다만 독일의 개혁은 자유민주당과 많이 교류하나 베른트 루케 당수가 사회민주당 당사에서 당수를 만난 적이 있었고, 유권자당도 포젠 지역에서 연립 정부를 결성하는 등의 행보도 했었기에 교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바가 있다.

극단주의 정당들이나 반왕정 정당들의 경우에는 기피하는 편이 크다. 당장 공산당과 나치당으로 대표되는 극좌와 극우정당 양 측을 국가 질서에 위배되기 때문에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이는 다른 정당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당제를 추구하면서도 합법화 안해주느냐며 정부를 비난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넘어선 불법 행위라는 점에서 극단주의를 처벌하는 것은 독일 국민들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이 이 것을 받아들기엔 불가능하다. 종교정당들 중에서 온건적인 경우, 사회민주당에 대해 비판적인 지지를 표방하지만, 극단적인 경우 사회민주당을 악으로 취급하며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반왕정 정당들도 극단주의 정당들과 동급으로 취급되지만 무쇠혁명전선이라는 사회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강경 민주사회주의 정당이 존재하기에 두 정당 간의 사이도 좋지 않다. 분리주의 정당들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은 이들을 독일의 분열을 추종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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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주의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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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의 정당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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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된 정당
공화주의 ● 공화당 · ● 연방당 · ● 자유공화당
좌파·진보주의 ● 녹색당(-석) · ● 사회민주당(-석) · ● 당 · ● 민주농민당 · ● 반파시스트당/쿠데타 피해자 연합 · ● 사회자유당 · ● 우니온 오이로파
중도·자유주의 ● 인민당(-석) · ● 독일의 개혁(-석) · ● 자유민주당(-석) · ● 민주자유당
보수주의 ● 중앙당(-석) · ● 신민당 · ● 자유보수당
우파·극우 ● 제국인민당(-석) · ● 우파당 · ● 진보우파
종교 ● 기독교민주당(가톨릭) · ● 기독당(가톨릭) · ● 민주진리당(개신교) · ● 유대인민당(유대교) · ● 프로테스탄트당(개신교)
지역주의 ● 유권자당(-석) · ● 바이에른당 · ● 브란덴부르크 유권자 연합 · ● 슐레스비히 유권자 연합 · ● 알자스 자치당 · ● 외스터라이히-티롤 민주당 · ● 이탈리아인 자치동맹 · ● 작센-안할트 자치당 · ● 체코인당 · ● 폴인-프로이센 지역연합 · ● 프리슬란트당 · ● 쾨니히스베르크-볼가 독일인당 · ● 하노버 독일인당
단일쟁점 ● 기본소득 위원회 · ● 동물당 · ● 사회정의를 위한 당 · ● 여성당 · ● 해적당
괄호 안은 독일 의회 의석 수, 종교정당일 경우 종교명
법외정당·금지된 정당
좌파·극좌 ● 공산당 · ● 베르크파르타이 · ● 사회주의통일당 · ●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 · ● 스파르타쿠스당 · ● 아나키스트당 · ● 포사다스당
우파·극우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 애국당 · ● 파시스트당 · ● 흑색당
종교 ● 게르만 이슬람당(이슬람) · ● 가족수호당(개신교) · ● 반유대자유당(가톨릭)
반왕정·공화파 ● 무쇠혁명전선 · ● 반왕국당 · ● 자유를 위한 공화국 · ● 해방민주당 · ● 혁명당
분리주의 ● 남독일당 · ● 동맹 · ● 바이에른 독립당 · ● 보헤미아-모라바 인민당 · ● 슐레스비히의 자존심 · ● 슬로베니아 국민당 · ● 알자스 자유당 · ● 오스트리아의 애국자들 · ● 작센당 · ● 폴란드 국민전선 · ● 헤센-튀링겐 자유당 · ● 헬베티카 인민당 · ● 혁명과 독립
  1. 사진 속의 인물은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 총리 겸 前 당수이며, 올라프 숄츠 당수는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