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우국단

Freie Patriotkorps|自由憂國團

깃발 문장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
활동 지역 독일 전역
총통 (퓌러) 에른스트 룀 (1933 ~ 1934)
프리드리히 드베르프 (1934 ~ 1944)
오토 에른스트 레머 (1944 ~ 1959)
결성 1933년 1월 30일
독일 제국 뮌헨
해산 1959년 7월 5일
독일 제국 작센주 드레스덴
활동 기간 1933년 ~ 1959년 초
선행 조직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후계 조직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파생 조직 독일 국가사회주의운동
이념 나치즘
범게르만주의
독일 국민주의
반공주의
반슬라브주의
반유대주의
반제국주의
군국주의
회원 수 700명 (결성 당시)
2,600명 (1939년)
5,000명 (1945년)
250명 (1958년)
1952년의 모습
오토 에른스트 레머 총통, 프리츠 도리스, 울프 그라프 폰 베스트아프

개요

위대한 독일을 위하여!
Für das große Deutschland!

독일 자유우국단(Deutsches Freie Patriotkorps), 약칭 DFP독일의 극우정당인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후신 조직이자 1933년부터 1959년까지 활동한 극우 무장조직이다.

1923년 뮌헨 폭동에 실패한 나치당이 1924년 반나치법으로 해산되자, 안톤 드렉슬러, 에른스트 룀 등의 나치당 출신 지도자들이 나치당을 재건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1925년 아돌프 히틀러의 사형으로 나치당의 충격이 커진 가운데 호엔촐레른가공산당을 타도하고 이상적인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해 1933년 1월 30일 약 700명의 나치당, 돌격대 단원들을 모아 뮌헨에서 결성되었다.

그러다 1934년 6월 30일 독일 정부가 제국육군을 앞세워 에른스트 룀 총통을 암살하고 베를린에 있던 자유우국단 본부에서 룀을 포함한 장교들과 정치가들이 체포됨에 따라 결국 본부를 슈투트가르트로 옮겨서 활동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자유우국단은 1930년대 후반부터 점점 회원 수를 늘려가며 무장 폭력 조직으로 확대되었고 1940년대에는 반삼국 운동에 가담하면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944년 독일 정부의 나치 진압 작전을 계기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952년에는 오토 에른스트 레머에 의해 나치당이 재조직되었고 1958년에는 나치당과의 흡수합병에 승인, 1959년 7월 5일 나치당에 흡수되었다. 이후 자유우국단 잔당들은 독일 국가사회주의운동으로 계승되면서 나치당의 사실상 준군사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역사

1933년 이전: 뮌헨 폭동과 나치당의 해산

자유우국단의 시초는 1919년 안톤 드렉슬러에 의해 설립된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에서 시작되었다. 독일 노동자당은 1918년 두 단체의 합병으로 창당하였으며 범게르만주의, 반자본주의, 반공주의, 반유대주의를 지향하던 정당이었고, 회원 수는 약 40명에 불과하였다.

그 때 아돌프 히틀러의 입당을 시작으로 히틀러의 연설을 통해 DAP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0년 2월 24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며 대중들과 국민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후 나치당은 1920년 6월 친왕정 우파 성향의 인민당에서 탈당한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설득하며 나치당에 가입시켰고, 베니토 무솔리니의 국가안보의용민병대에서 따온 돌격대(SA)를 조직하며 나치에 대한 친위적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2년 로마 쿠데타프랑스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자 분노한 히틀러는 독일 전체를 지배하겠다며 맥주 홀에서 반란을 계획하게 된다.

1923년 9월 30일 히틀러는 의제 통일과 주정부-중앙정부 간의 분열을 준비하기 위해 나치당, 오버란트 동맹, 돌격대 등의 극우 국민주의 단체들과 함께 독일 투쟁동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이는 11월 8일 SA의 단원들에 의해 맥주 홀을 점거하고 반란을 시도했으나 제국육군제국경찰, 그리고 바이에른 주정부의 진압으로 실패하게 된다. 히틀러는 1924년 재판에 회부되며 선동과 반란을 공모하고 국가 전복을 시도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고, 폭동에 참여한 에른스트 룀과 헤르만 괴링 등은 실형 5년 형을 선고받는다. 루덴도르프 역시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무죄 석방을 받는 대신 불명예 제대를 받았고 인민당에서도 입당 금지 처분을 받았다.

결국 바이에른 주정부는 1924년 10월 1일 인민당과 사회민주당의 공동 발의를 통해 반나치법이 통과되며 나치당의 활동이 금지되었고 11월 8일에는 나치당을 공식적으로 해산시키며 바이에른에서의 나치 활동은 사라졌다. 그리고 히틀러는 1925년 2월 사형으로 사망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나치당의 당원들은 바이에른 주정부의 반나치법에 반발했고, 뮌헨 폭동에 참여하였지만 재판에 참여하지 않았던 자들과 독일 노동자당 출신 인물들은 뮌헨의 한 건물에 다시 모이며 나치당의 재창당을 논의했지만 만약 또 발각된다면 지도자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대다수가 거절했다. 대신 나치당의 명맥을 이을 새로운 단체를 조직할 것을 결의했고, 1933년 1월 30일 마침내 탄생한 단체가 바로 자유우국단이다.

1933년 ~ 1934년: 장검의 밤

1933년 1월 30일 결성된 자유우국단은 처음엔 바이에른에서 활동하여 히틀러와 비슷하게 반공산당, 반왕정, 국가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1930년대 후반 완전한 무장 투쟁 활동을 하는 것과는 달리 선동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전부였다. 자유우국단은 돌격대 사령관이었던 에른스트 룀을 총통으로 임명하며 선동 활동 외에도 무장 투쟁 등에도 앞장섰고 뿐만 아니라 자유우국단 산하의 친위부대였던 무장돌격대(Waffen-SA)를 조직하여 돌격대 단원들을 철저히 교육하였다.

1934년 6월 30일, 프란츠 폰 파펜 등 자유우국단에 소속되지 않은 일부 장교, 정치인들과 함께 바트비제에서 휴가를 즐기던 자유우국단 장교들이 자고 있는 사이 루덴도르프가 이끄는 제국육군과 제국경찰 요원들이 이들의 자택을 급습하여 룀 총통과 파펜을 포함해 자유우국단 출신들과 비우국단 출신들이 체포되었고, 결국 뮌헨에 이송되어 전원 사살되었다. 그 중 슈트라서는 제국육군을 피해 뮌헨에서 오스트리아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몇 일 뒤 잘츠부르크에서 발견되어 사살당하고 만다. 드렉슬러와 간부들은 돌격대 출신 장교들이 사살당한 것이 통신외교실에 알려지며 단체가 발칵 뒤집혔고, 루덴도르프는 작전 수행에 대한 기여로 제국육군 대십자 철십자장을 수여했다.

장검의 밤 전후로 총 30명의 열성 회원들이 체포되거나 사망해 전력을 상실했고 결국 자유우국단의 본부를 뮌헨에서 슈투트가르트로 옮김에 따라 사실상 바이에른에서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자유우국단 회원들은 나치당 출신이었던 루덴도르프가 결국 말살을 위해 배신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그 중 하인리히 힘러는 루덴도르프가 뮌헨 폭동 이후 육군에서 자유우국단을 처리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룀의 측근이던 루돌프 헤스는 루덴도르프를 정부의 지시로 일부러 무죄 석방시켰다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1934년 ~ 1944년: 결집 시도와 드베르프 시기

본부를 슈투트가르트로 이전한 후 자유우국단의 회원 수는 고작 약 300명 밖에 남짓으로 세력의 규모는 전보다 줄어들었다. 자유우국단은 룀이 사망했으니 새 총통을 뽑자는 투표를 진행했고, 결과는 프리드리히 드베르프가 새 총통으로 임명되었다. 드베르프는 해산 전까지 나치당의 당원이었고, 당시 국민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히틀러를 동경했기에 자유우국단에 입단하며 스스로를 히틀러의 후계자라 칭하였다.

드베로프는 유대인에 적대적이었으며,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을 싫어했었기에 베를린에서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이 높은 이유가 사회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며 음모론을 펼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은 말살해야 하고 독일인은 아리아인의 일부일 뿐이라는 원칙 아래 인종주의를 표방하기도 했다.

이 시기 자유우국단은 이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국민주의자들은 물론 반유대주의자들까지 끌어들이며 결집을 시도했다. 자유우국단은 또 1936년 3월 유대인에 대한 혐오적 선전물을 내포함으로써 반유대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그렇게 해서 자유우국단의 회원 수는 1936년 11월 약 900명 가까이 상승했다.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한창일 때 무장돌격대와 드베로프의 친위대들이 유대계 선수촌에 불을 질러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언론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는데 당연히 정부와 경찰은 이들을 반나치법 위반 혐의로 전부 구속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1937년 4월 자유우국단은 기존의 선동, 선전물을 통한 활동을 버리고 사실상 무장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 또 온건한 투쟁보다는 강력한 투쟁을 요구하며 무장 투쟁론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유우국단이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게 되고, 무장 투쟁의 여파로 수많은 국민주의자들의 인기를 얻으며 자유우국단의 회원 수가 증가했다. 1938년 2월부터는 유대인이 거주하는 지역에 불을 지르거나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는 등 반유대주의적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무장돌격대를 이용해 공산당의 집회를 방해하거나 아예 탄압하였으며 1938년 7월에는 무장돌격대 단원들을 투입하여 오토 벨스 총리를 암살하려다 저지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1939년에는 남독일은 물론 오스트리아 지역에서도 자유우국단이 결성되기도 했으며, 6월에는 해외조직까지 결성되는 등 전 세계로의 확대를 시도했다.

아메리카 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반삼국 운동이 전 세계에 퍼지자 자유우국단은 반삼국 운동에 참여하여 무장 투쟁을 통해 독일 정부를 무너뜨리고자 했고, 이런 양상은 1942년이 되어서야 베를린에도 퍼지면서 전국적인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무장 투쟁도 동시에 활발하게 진행되며 자유우국단이 공산당과 조금씩 엮이게 되었고 결국 1943년 2월 자유우국단은 공산당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정부와 공산당을 향해 무장 공격을 감행했다. 드베르프 총통은 2월 18일 베를린에서 연설을 통해 목숨을 바쳐 무장 투쟁에서 결사 항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 6월 말 자유우국단의 회원 수가 5,000명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의 무장 조직으로 성장했다.

1943년 5월 독일 정부는 자유우국단과 공산당의 무장 봉기로 인해 국가적 치안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제국군의 강경한 진압 작전 밖에 없다며 칼을 빼들었고, 결국 1944년 2월 자유우국단에 대한 대규모 진압 작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진압 작전은 1944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진압 작전으로 자유우국단 단원들은 제국육군과 경찰들과 싸울 수 밖에 없었고, 뿐만 아니라 공산당원들까지 싸워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 되자 드베르프는 1944년 6월 총통직을 내려놓기로 한다.

1944년 ~ 1958년: 에른스트 레머 시기

드베르프의 사임 이후, 새 총통으로 오토 에른스트 레머가 선출되었다. 레머는 반삼국 운동 당시 무장전략사령관을 맡은 바 있고 그 과정에서 슈트라서주의자들과 연합해 세를 불렸으며 반공주의와 반시장주의를 지향하되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자는 주장까지 할 정도로 나치 좌파적 성격이 강한 인물이었다. 레머는 기존의 반유대주의의 참여보다는 사회주의자들과 구 공산당 출신들까지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했고, 드베르프 계열은 반유대주의자들과 인종주의자들을 더 많이 참여시키고 공산주의자들과 군주주의자들은 탄압시켜야 한다며 레머의 주장을 거절했다.

이 때문인지 힘러는 구 공산당 출신들과 인종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선동 밖에 없다며 두 사람을 중재하고 나섰다. 그렇게 해서 자유우국단은 1946년부터 구 공산당 출신을 끌어오는가 하면 반유대주의적 인종주의자들까지 끌어들이며 회원 수를 늘려나갔고 동시에 공산당의 활동이 집중된 베를린과 함부르크 등의 대도시에 폭탄 테러를 시도하기도 했다. 1952년 레머는 나치당을 재건하여 과거의 명성을 되찾겠다는 명목으로 정치적 활동까지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1954년 독일 정부에 의해 금지 정당으로 지정되었고, 레머는 정부의 행위가 부적절하다며 나치당의 금지 정당화를 반대했다.

그리고 1950년 약 5,000명으로 역대 최다 회원 수를 기록했던 것과는 별개로, 이 시기 때부터 일부 장교들과의 갈등과 슈트라서주의, 사회주의자들의 영입으로 드베르프를 신봉하던 반유대주의자들은 레머를 매국노라 불리며 탈퇴를 선언했고, 동시에 드베르프 시절 나치즘의 일부였던 인종주의적 성향이 조금씩 사그라들게 되었다. 이렇게 자유우국단은 1933년 결성 이래로 서서히 쇠락을 맞았고 특히 1956년에는 약 700명까지 떨어지며 세력이 크게 감소했다. 1957년에는 제국경찰의 단속이 시작되며 일부 회원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1958년 ~ 1959년: 나치당과 흡수와 해산

나치당이 재조직 된 후 레머는 자유우국단의 정치 활동을 위해 나치당과 흡수 합병하는 협정에 승인하였다. 괴링 당수는 나치당이 자유우국단과 합병하는 것을 매우 긍정적이게 여겼으며 다른 나치당원들도 이러한 경향에 찬성하였다.

결과적으로 1958년 9월 9일 나치당은 자유우국단과의 합병을 승인함에 따라 공식적인 합병 준비는 4월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959년 4월 1일 레머는 자유우국단의 총통에서 사표를 수리하겠다고 밝혔으며 4월 2일 총통직이 공석이 된 상태로 합병 절차가 거의 완료되었다. 1959년 7월 5일 자유우국단은 결성 24년 만에 나치당에 흡수되었고,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자유우국단 출신 잔당들은 강경 투쟁의 명목을 잇기 위해 독일 국가사회주의운동을 결성하며 나치당의 사병조직으로 들어갔다. 국가사회주의운동은 1992년 범죄조직으로 지정되어 해산되었고 나치당도 사실상 금지 정당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반면 자유우국단의 일부 잔존 세력과 나치당의 일부 당원들은 1970년대부터 제국인민당에 합류하며 명맥을 이어나갔으나, 2018년 이후에는 모두 제명되어 갈 곳을 잃다가 국가민주당에 합류했다. 한편 제국인민당 소속이자 나치파의 사실상 수장이라 불리던 비요른 회케는 과거 나치당 소속이란 비판을 받았다가 2016년 반국가적 선동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아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제국인민당의 좌경화에 반발하여 합류한 국가민주당마저도 2020년 금지 정당이 되면서 나치즘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성향

자유우국단은 전체적으로 보면 극우에 가깝지만 나치당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좌파적 이론과 급진적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이들의 목표가 범게르만주의를 위시하여 제정을 무너뜨리고 혁명적인 정부를 건설하겠다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주류 학계에서는 나치당 출신의 세력들이 주도하여 급진적인 폭력 활동으로 탈국민주의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거리가 멀지만 독일 국민주의와 인종주의, 백인 우월주의, 반유대주의 등의 이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극우 단체로 보고 있다.

이 단체는 나치당 출신 계열(조직 내 우파)과 돌격대 출신 계열(조직 내 좌파)로 나뉘어져 있으나, 나치당 출신 계열 중에서 좌파 성향이 강한 인물이 존재하기도 한다. 조직 내 좌파는 돌격대 출신이고, 사회주의 성향을 가졌었는데 초대 총통인 에른스트 룀, 그레고리 슈트라서, 오토 슈트라서 등이 대표적이다. 국민사회주의, 봉건사회주의 등 우파사회주의적인 면모를 띄며 나치 정부 수립 시 기업의 국유화, 대기업 소득 분배 등을 제창하고 있다.

조직 내 우파는 인종주의, 국민주의 우파 세력들이 주축이 되었고, 헤르만 괴링, 프리드리히 드베르프 등이 대표적이다. 2대 총통이었던 드베르프가 이 시기 반유대주의자들과 국민주의자들을 끌어들이며 세력 확장을 주도했다는 점이 있고 독일인 이외의 민족은 배척하면서 외국인을 공격하거나 우생학 연구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활동

  • 1936년 올림픽 선수촌 방화 사건: 자유우국단이 이름을 알리게 된 사건이자 후에 자유우국단의 몰락을 가져오게 된 사건.
  • 오토 벨스 암살 미수
  • 외국인 살해 및 탄압
  • 약탈 및 방화

관련 인물

※ 괄호에는 활동 기간을 의미함.

  • 에른스트 룀 (1933 ~ 1934): 자유우국단의 창립 회원, 초대 총통을 역임. 장검의 밤 당시 체포되어 사살.
  • 고트프리트 페더 (1933 ~ 1941): 자유우국단의 창립 회원, 초대 재정경제부장을 역임. 1941년 사망.
  • 안톤 드렉슬러 (1933 ~ 1942): 자유우국단의 창립 회원, 초대 국민계몽선전부장을 역임. 1942년 지병으로 사망.
  • 한스 프랑크 (1933 ~ 1949): 자유우국단의 창립 회원, 초대 법학법무부장을 역임. 1949년 체포되어 사형.
  • 헤르만 괴링 (1933 ~ 1954): 자유우국단의 창립 회원, 초대 무장돌격대장과 재건 나치당 초대 당수를 역임. 1954년 지병으로 사망.
  • 루돌프 헤스 (1933 ~ 1959): 자유우국단의 창립 회원, 초대 총통 최측근을 역임. 1964년 체포되어 사형.
  • 오토 에른스트 레머 (1933 ~ 1959): 자유우국단의 창립 회원, 제2대 총통 최측근, 제2대 무장돌격대장, 초대 무장전략사령관, 제3대 총통을 역임. 해산 후 도주했다 프랑스 주둔군에 의해 사살.
  • 그레고어 슈트라서, 오토 슈트라서 (1933 ~ 1934): 前 흑색전선 수장, 장검의 밤 당시 오토는 체포되어 사살되고, 그레고어는 오스트리아에서 사살.
  • 쿠르츠 폰 슐라이허 (1933 ~ 1934): 前 제국방위부 장관, 장검의 밤 당시 체포되어 사살.
  • 프리드리히 드베르프 (1933 ~ 1959): 제2대 총통을 역임. 해산 후 체포되어 1978년 사형.
  • 아돌프 아이히만 (1934 ~ 1959): 초대 국민우생교육부장을 역임. 해산 후 팔레스타인에서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며 1962년 사형.
  • 하인리히 힘러 (1934 ~ 1959): 제3대 조직내무부장을 역임. 해산 후 반나치로 전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