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方合衆國
United States of Oriental
동방합중국
Зүүн Ази Холбооны улс
국기 국장
표어 東亞協和, 民族協治
동아협화, 민족협치
국가 동아화합가東亞和合歌
수도 한성漢城, 경제 제1 중심지
신징新京, 경제 제2 중심지
후레Хүрээ, 정치 중심지
카슈قەشقەر, 종교 제2 중심지
가르 종སྒར་རྫོང་, 종교 제1 중심지
최대 도시 한성(漢城)
신징(新京)
정치
공용어 영어, 러시아어
지역어 한국어, 만주어, 몽골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외 소수 언어
연방 수상
聯邦 首相
엘리 한 카심
Ali Khan Qasim
연방 최고의회 의장
聯邦 最高議會 議長
카루 린포체 2세
Kalu Rinpoche II
역사
연방 성립 과정  
 • 동아회의東亞會義 개최 1929년 5월 11일
 • 연방조약聯邦條約 체결. 1947년 1월
 • 동아전쟁東亞戰爭 발발. 1949년 9월 ~ 1951년 5월
 • 동아협상東亞協商 타결. 1951년 5월 21일
인구
2018년 어림 324,565,796명
경제
통화 연방 달러 (F$)

동방합중국(한국어: 동방합중국, 중국어: 東方合衆國, 러시아어: восточный Соединённые Штаты)은 동북아시아 위치한 연방제 국가이다. 북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인접하게 위치하고 있다. 동방합중국이라는 정식 국호 외에도 "동아세아 합중국"(東亞細亞 合衆國)이라고 칭해지며, "대동아 연방", "동아시아 연방"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연방 소속국대한국(大韓國), 만주국(滿洲國), 몽골국(Монгол Улс), 위구르 민주공화국(Уйгурын Ардчилсан Бүгд Найрамдах Улс), 티베트 왕국(བོད་)으로 구성된다.[1] 위구르를 제외한 나머지 소속국들은 자국의 세습 군주들을 두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2][3]

개요

연방제를 채택한 국가로서 위에서 언급한 5개의 합중국 소속국(合衆國 所屬國)과 그외에 합중국 직할령[4], 합중국 자치령[5] 등의 광역 행정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방국기는 통칭 연방오색기(聯邦五色旗)라 부르며, 과거 중화민국 북양정부(中華民國 北洋政府)와 과거 만주국(滿洲國)이 사용했던 색 구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國歌)는 동아화합가(東亞和合歌). 대동아 연방 전역을 횡단하는 동방합중국 횡단철도(東方合衆國 橫斷鐵道)를 통해 각지의 특색있는 파노라마를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철도 관광 산업이 큰 각광을 받고 있다.

현재 연방 수상(聯邦 首相)은 위구르 민주 공화국 출신의 엘리 한 카심(Ali Khan Qasim)이며, 연방최고의회의 의장은 티베트 왕국 출신의 카루 린포체 2세(Kalu Rinpoche II).

역사

동방합중국의 역사의 기원을 따지게 된다면 1929년에 극비리에 진행되었던 동아민족회의(東亞民族會義)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동아민족회의는 섣부른 민족자결주의 적용과 열강들의 무관심, 일본제국의 만몽 진출 과정에서 와해되었으며, 1943년부터 일본제국이 주도 한 대동아회의(大東亞會義)가 추진되면서 명목상 동아민족회의를 계승하는 형태를 띄면서 동아시아 국가들의 통합을 논의해 볼 수 있었다. 이후에 합중국의 수립이 본격화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 종결 이후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 동아 전쟁 이전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패망 이후[6] 국공합작(國共合作)에 따른 양당제 공화국인 중화민국 국공정부의 성립은 소련의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한 차질을 빚게 만들었으며, 특히나 국공정부에서 사실상 국민당 출신의 장개석(蔣介石)을 제치고 내부 권력을 장악한[7] 공산당마오쩌둥(毛澤東)이 장개석의 뒤를 이어 2대 중화민국 총통 직책에 선출되어 반소 정책 및 마오이즘(Maoism)을 자체적으로 고안하면서 소련을 견제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몽골과 티베트를 비롯하여 주변 소국들에게 군사적인 큰 압박을 주었다. 이에 소련미국은 자칫 제3 세력인 중화민국의 대두로 냉전 체제의 붕괴와 제3차 세계대전의 촉진을 야기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고, 미소 양측간의 전면전을 극히 꺼려하던 해리 S. 트루먼(Harry S.Truman)과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의 이해관계가 합치됨에 따라 비밀리에 각각 조지 C.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Jr.)과 라브렌티 베리야(Лаврентий Павлович Берия)를 일본(日本)에 파견하여 중화민국을 비롯한 동북아 정세에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소련중화민국 사이에 완충 지대로서 다민족 연방 국가의 수립을 결의할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협약을 맺게 되었는데, 이것이 마셜-베리야 협약(Marshall-Beria)이라고 지칭한다.

이윽고 소련미국은 공식적으로 도쿄(東京)에서 미소연방설립위원회(美蘇聯邦設立委員會)가 11차례에 걸쳐 개최되었으며, 개최 초기에는 양국간 이해 관계의 대립과 냉전 체제의 영향으로 갈등을 빚었으나, 대중화민국 포위망에 따른 불간섭 다민족 연방 국가 설립에 대한 궁극적 목적을 통해 가장 민감한 문제였던 연방 영토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대동아 연방 수립의 전초격인 연방조약(聯邦 條約)을 체결토록 하였다. 이에따라 소련이 주도했던 만주 공략 전세 작전(Манчжур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에 의해 해체된 만주국 정부를 개편을 통해 부활시켰으며, 각기 티베트 지역과 외몽골, 신장 지역에서 독립적인 정부를 수립하고서 해당 조약에 체결에 응답했고, 한반도는 내부의 이념 대립으로 연방 가입을 주저하였으나, 조선 노동당 궐기(朝鮮勞動黨蹶起)를 진압한 후에 비로소 연방조약 가입에 응했다. 이에 국제 연합대동아 연방(大東亞 聯邦)의 설립과 국가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협약안을 골자로 하여 안전보장이사회(安全保障理事會)를 소집하였고, 이에 소련미국을 비롯해 프랑스, 영국이 동의하였으며, 중화민국도 소집 초기에는 대동아 연방의 설립을 거절했으나, 국제적인 압박으로 인해 마지못해 승인함에 따라 1947년 7월 13일, 만주국 신징(新京)에서 연방 가입국간 국방, 외교를 연방 정부에 위임하고 연방상비군(聯邦常備軍) 창설, 연방 내 자유 무역 실시 등의 내용을 담은 동아세아협약(東亞細亞協約)의 체결 및 대동아 연방선언(大東亞 聯邦宣言)에 따라 새로운 연방제 다민족 국가의 설립을 알렸다. 초대 연방 수장으로는 만주국(滿洲國)의 황제를 지냈던 아이신기오로 푸이(愛新覺羅溥儀)가, 연방최고의회(聯邦最高議會)의 의장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이끌던 김구(金九)가 선출되었다.

대동아 연방은 외교적으로 제3세계(Third World)를 표방하여 미국소련 간 패권 대립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고수하였다. 이는 소련미국의 이해 관계와 함께 중화민국의 포위망이자 절충 지대로서의 인식이 강했다. 이때문에 동방합중국 설립 초기에는 미국, 소련, 중화민국의 대립관계에서 큰 혼란을 겪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연방 가입을 반대하거나 탈퇴를 추구하는 민족주의 혹은 무정부주의적 반연방단체(反聯邦團體)들의 활동도 거세였다.

또한, 대한국 내에서는 조선노동당 궐기 사태 이후에 귀국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실 일원들에 대한 처리로 고민을 앓고 있었는데,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은 민주공화정(民主共和政)을 목표로 한 대통령제 공화국 수립과 의친왕(義親王)과 일부 지식인 및 독립운동가들이 주체가 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입헌군주정(立憲君主政) 수립 주장 사이에서 체제 대립이 극심하였다. 결국 1948년, 정해타결(丁亥妥結)이 맺어짐에 따라 의친왕과 그 일가를 새로운 대한국 군주로 인정하되, 전적인 국정 실권을 내각이 갖는 형태를 지니는 의원내각제를 도입하고 김구연방최고의회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대한국의 총리는 이승만이 당선하게 되었다.

만주국의 경우에는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만주국 황제 작위를 복고하였으며, 푸순전범관리소에 유치되었던 장징후이(張澄煇)를 임시 만주국 국무대신으로 임명되었는데, 후에 동아 전쟁의 종전 이후 혼란한 상황을 뒤로 한 채 장징후이는 푸이의 권세를 뒤로 하는 독재적인 자치 헌법안을 발의, 통과하였는데, 이것이 "49년 체제기"(四十九年 體制期)라 부른다. 외몽골에서는 젭춘담바 후툭투 9세를 군주로 하되, 몽골 인민당(蒙古人民黨)의 일당 사회주의 체제가 혼합되었으며,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 14세(བསྟན་འཛིན་རྒྱ་མཚོ་)를 필두로 하여 민주주의에 입각한 불교 신정 국가를, 위구르는 초기 무슬림 과격파를 억누르고 민주공화정(民主共和政)을 채택하였다.

이처럼 대동아 연방은 외적 혼란 외에도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사상과 이념 및 체제 대립이 극심하였고, 각기 연방 소속국들의 체제 역시 판이한 차이를 보였기에 연방 가입국들은 고도의 자치권이 폭넓게 인정되는 반면, 연방 정부는 초기부터 구심점을 잃는 등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를 눈여겨 보던 중화민국마오쩌둥은 "대중국 포위망 철회 및 대동아 연방의 설립 무효"를 내걸면서 1949년 9월, 만주 전역(滿洲戰役)과 몽골 전역(蒙古戰役)을 방면으로 침공함에 따라 동아 전쟁(東亞戰爭)이 발발하였다.

동아 전쟁의 발발과 종전 직후

중화민국의 예상치 못한 선전 포고로 미국제1세계(First World)은 경악하였는데, 이러한 중화민국의 전면 침공은 테렌티 스티코프(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8][9]스탈린에게 중화민국의 대동아 연방 침략을 귀띔하는 역할이 작용하였다. 소련의 입장은 대동아 연방의 위치를 절충지대로서의 역할을 극대화시킨 것으로 충족시켰는데, 반대로 미국은 대동아 연방을 중화민국과 함께 소련을 견제하는 창구로서 활용하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의 동아 전쟁의 의도는 당시 미 8군(Eighth United States Army)의 전력 소비 및 동아시아 내 소련중화민국의 연방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기도하였기에 중화민국의 고토 회복 의식과는 고려치 않고 있었다. 반대로, 중화민국은 소련의 비호 아래 만주, 외몽골, 티베트, 위구르를 흡수하려는 영토 회복 계획을 사전에 준비하였기에, 소련중화민국동아 전쟁의 의도 차이가 벌어지면서 상황은 일촉측발의 냉전 붕괴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몽골국의 상임 간부회 주석이었던 허를러깅 처이발상(Хорлоогийн Чойбалсан)이 이끄는 연방 소속 몽골군(聯邦 所屬 蒙古軍)이 국공당군(國共黨軍)의 공세에 괴멸되면서 몽골 전역이 붕괴되었으며, 이에 따라 동아 전쟁의 전역은 티베트위구르를 중심으로 하는 연방 서부 전역, 만주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연방 동부 전역으로 분리되었다. 이에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을 역임하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동아 전쟁의 배후가 소련에게 있음을 지적하고서는 드롭샷 작전(Operation Dropshot)을 실행해 옮길 것을 해리 S. 트루먼에게 건의한다.[10] 이에 트루먼은 당시 미 전략공군사령부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Curtis Emerson LeMay)를 통해 해당 작전을 실제로 옮길 것을 지시하기에 이른다.[11]

이 상황에서 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를 다시끔 소집하여 당면한 중화민국의 연방 침략에 대한 항전 및 연방 군사원조 결의안을 표결에 부쳤는데, 이에 소련중화민국의 대표가 불참함에 따라 발생한 기권표를 제외한[12] 나머지 상임이사국들의 찬성으로 유엔군이 소집되어 연방의 동서부 전역에 파견되기로 결정되었다.

소련미국의 개입과 함께 냉전 체제의 붕괴를 두려워 하였으며, 급히 백악관으로 소련의 입장을 정리한 전보를 보내게 되는데, 주 내용은 동아 전쟁의 발발은 순전히 중화민국마오쩌둥의 의지가 강하게 투영되었다는 점이며, 자신들과는 그 어떤 사전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유엔군에서 미군의 주도로 수소폭탄(水素爆彈)을 사용한다는 의견까지 도마에 올라왔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의 주된 쟁점이 되는 부분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당시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은 노골적으로 맥아더의 전면적 핵무기 시나리오를 비판하고 소련과의 당면된 문제 해결의 외교적 노력을 기울일 것을 권고했고, 이에 트루먼 역시 애치슨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소련과의 동아 전쟁 해결에 대한 종전 협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종전 협상 과정에서도 유엔군연방 서부 전역에서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위구르 민주 공화국보얼타라 지방(ئوبلاستى) 일부를 포함하여 위구르 서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채 국공당군에게 전세가 기울이면서 밀려나가고 있었다. 반대로 연방 동부 전역에서는 만주 진공 작전(滿洲進攻作戰)이 성공함에 따라 전세가 역전되면서 몽골 전역을 회복함과 동시에 내몽골 자치구(內蒙古 自治區)까지 전세를 반전시키면서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각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한편으로 중화민국 내에서도 반전여론이 들끓기 시작함과 동시에 국민당의 정권 회복을 위한 내부 공작은 중화민국의 전쟁 유지의 큰 차질을 빚게 하였다. 결국, 마오쩌둥도 소련미국에 제의된 종전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면서 사실상 전면전은 종결되었다.

약 1년에 걸친 종전 협상 테이블은 마침내 1951년 5월에 이르러서야 소련이오시프 스탈린, 중화민국마오쩌둥,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13], 대동아 연방아이신기오로 푸이의 4국 정상은 1951년 5월 21일, 신징(新京)에서 동아협상(東亞協商)에 대한 서명을 마침으로써 종전을 맺게 되었다.

동아 전쟁으로 연방은 서부 지역에 상당한 영토를 잃게 됨에 따라 사실상의 경제 주도권은 합중국 동부지대(合衆國 東部地帶)로 올인되었으며, 이는 현대의 연방내 극심한 민족 차별 및 경제 극단화를 야기하였다. 중화민국의 경우에는 전쟁의 패배로 질책된 마오쩌둥공산당의 정권이 무너지고 국민당을 주축으로 하는 중화민국 제2차 국민정부(1951~1978)가 수립되면서 소련, 미국 간 온건 노선을 지향하게 된다.

종전 이후 ~ 80년대 동방 합중국

독립 이후 1954년, 아이신기오로 푸이에 뒤를 이은 부르한 샤이디 연방 수상은 식민 전쟁(植民 戰爭, 1945-1955)[14]에 개입하여 연합군(사실상 미군)을 도와 우수리스키 지방[15]을 점유하던 제국령 녹우크라이나연방군을 파견하여, 동아시아 내 전쟁 혼란을 막기 위한 부분에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본격적인 연방 경제 계획안을 수립하였고, 이에 소련미군의 양대 국가로부터 암암리에 지원[16]을 받아 경제 개발에 착수하였다. 위구르티베트 등지에서는 몰락한 공산당을 따르는 마오안잉 망명괴뢰정권(毛岸英 亡命傀儡政權, 1952-1960)의 수립을 선언하고 펑더화이(彭德怀), 린뱌오(林彪) 등의 공산계열 몰락 정치가들의 공작 활동이 이어졌다.

한편으로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루나찰프라데시 지역을 두고 중화민국인도와 함께 동방합중국의 급격한 분쟁 요소로 치닫게 되면서 삼국전쟁(三國戰爭, 1962~1963)이 발발하였다. 결과적으로 아루나찰프라데시 서부 지역(지금의 장난藏南)을 수호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동부 지역은 인도에게 넘기면서 전쟁은 마무리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동방합중국의 국경 분쟁 참조. 동시대에 한반도 내에서는 장면 연방 수상과 조병옥을 지지하는 민주당(民主黨)과 이승만을 지지하는 자유당(自由黨) 사이에서 급격한 정쟁이 벌어졌고, 이에 이승만자유당3.15 부정선거를 단행하여 독재를 시도하자, 4.19 혁명이 일어났으며 결국은 자유당이 총사퇴를 결의하면서 정권은 무너졌고, 뒤를 이어 민주당조병옥(趙炳玉)이 후임 총리로 선출되었다.

후임 수상에 오른 대한국 총리 출신의 장면(張勉)은 연방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임 연방 정부들은 경제제일주의(經濟第一主義)를 표방하여 연방 산업개발위원부(聯邦 産業開發委員部)가 주도하는 공업화 정책에 착수하였다. 특히 이들은 초기 아이신기오로 푸이 정권과 부르한 샤이디(Burhan Shahidi)[17] 정권의 불균형 발전에서 장면 정권이 균형 발전을 최초로 채택되었다는 데에 큰 상징성을 갖추고 있다. 이에 연방 사상 최초의 종합적 중기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존 연방 내 파행적 경제 구조 청산 및 전력원의 적극적 개발 추진과 원조 등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종합물동계획 등을 수립하게 되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이 발발했을 당시에 미국중국과 함께 암암리에 무자헤딘에게 군사 및 인적 지원을 했다. 특히 만주국 출신으로서 새로 취임한 강영훈(姜英勳)[18] 수상은 직접적으로 소련의 행태에 "실망과 암담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침략 전쟁임을 강조했다. 이외에도 수소폭탄을 이용한 소규모 핵실험을 감행하는 등 독자적인 군사력 확보에 나서자, 미국소련의 제재를 받는 등 전 연방적 위기 상황이 조성되기도 했으며, 특히 중화민국 제2차 국민정부의 몰락 이후 수립된 인민정부(1978~1989)가 중월전쟁(中越戰爭)을 단행하자 곧바로 비판 서명을 내놓고 친중정권이었던 캄보디아폴 포트크메르 루주 정권 전복을 지지하는 등 동아시아 이권 대립에 중심에 서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인민정부의 새로운 총통으로 취임한 덩샤오핑(鄧小平)이 미중친선과 함께 동중친선 관계에도 나서면서 군사협력까지 이루어냈을 정도로 우호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다. 다만, 1989년의 천안문 혁명(天安門革命)이 발생하자 시민 혁명을 지지하고 인민 정부를 비판하였고, 인민 정부가 독재에 대해 대항하는 일반 시민들을 진압하려고 하자 이례적으로 고강도의 비난 서명을 발표하면서 일시적으로 동중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다행히 인민 정부가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 몰락함에 따라 제3차 국민정부(1989~1995)와의 우호 협력 관계를 맺었다.

80년대 이후 ~ 현재의 동방 합중국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냉전이 종식됨에 따라 새로이 성립된 러시아 연방과의 관계 정립에 나섰다.

각주

  1. 식민전쟁(植民戰爭, 1945-1955) 이후에 가입한 녹우크라이나 지역에 대해 지위를 두고 오랜 논쟁이 있었으나, 대폭적인 자치권을 허용하는 것으로 합중국 자치령으로 편입되었다.
  2. 우루무치 봉기로 위구르 민주공화정이 단절되고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표방했던 이슬람 괴뢰국인 우루무치 토후국(ئۈرۈمچى شەھرى‎, 1971~1975)의 경우를 포함하면 위구르 역시 일시적으로나마 왕정제를 유지한 바 있다.
  3. 다만, 몽골국의 현 군주이자 대칸인 젭춘담바 후툭투 9세가 환생하지 않겠음을 선언함에 따라 몽골 군주정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일각에서는 위구르와 마찬가지로 민주공화정을 수립하자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만큼 또다른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창캬 후툭투(ལྕང་སྐྱ་ཧོ་ཐོག་ཐུ།)를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는게 어떠냐는 의견이 대세다.
  4. 대표적으로 다롄 직할시제주 직할령 등이 있다.
  5. 대표적으로 유대인 자치주, 사할린 자치주, 녹우크라이나 자치주 등이 있다.
  6. 다만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 필리핀을 비롯한 일본군의 점령지에서는 일본 식민 제국(日本 植民 帝國, 1945-1955)이라는 독자적인 식민 국가를 건립함으로서 연합군과의 항쟁을 선언함에 따라 태평양 전쟁(太平洋 戰爭)이 이어졌다. 동아전쟁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그 위협적 인식이 떨어지고 소련이 암암리에 지원을 하는 등에 여러 변수로 1950년대 중반까지 그 세력권이 존속할 수 있었다.
  7. 초기에 국민당은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결합한 1946년 체제, 즉 "3당 훈정"(三堂訓正)을 계획하였으나, 지방의 튼실한 기반을 마련하였던 공산당의 위협이 대두되면서 국공협치를 통해 다당제 헌정에서 국민당, 공산당 간 양당제 헌정 체제를 발휘하였다.
  8. 그는 또한 일본 식민 제국의 관할하에 있던 제국령 녹우크라이나그리고리 세묘노프(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емёнов, 1890~1955)와 비밀리에 협상하여 에조 식민 정부와 연계하여 일본 본토 침공 및 알래스카 침공 계획에 관여하기도 했다.
  9. 이러한 비밀 협상이 가능했던 것은 사실상 일본 식민 제국이 녹우크라이나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음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서, 심지어 일본 식민 제국에 의해 세워졌던 그리고리 세묘노프조차 에조 식민 정부가 통솔하여 식민 해군 최후의 보루였던 야마토급 전함, 시나노(信濃)를 격침시키기 위하여 소련에게 협력했을 정도였다.
  10. 물론 트루먼소련과의 전면전을 개시할 정도로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국제 정세를 고려치 않고 당면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제3차 세계 대전의 기우를 일으키려 하는 맥아더에 대해 비판하였다.
  11. 위 각주에서도 언급했듯이 해당 작전으로 미칠 여파와 영향을 고려한 트루먼커티스 르메이에게 "해당 작전에 대한 검토"만 할 것을 따로 통보하였다.
  12. 중화민국의 경우에는 불참에 대한 공식적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동아 전쟁으로 인한 제3차 세계대전의 우려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으며, 소련의 경우에는 동아 전쟁에서 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함이라는 설이 강하다.
  13. 이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해리 S. 트루먼의 경질로 인하여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직에서 퇴임하였으며, 뒤를 이은 매튜 B.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역시 나토(NATO) 총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마크 클라크가 3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14. 일본 본토는 1945년에 항복했으며, 시베리아 일부와 필리핀 일부 점유 지역에 한하여 결사항쟁(決死抗爭) 및 팔굉일우(八紘一宇)를 내세워 일본 본토에 항복을 치욕스럽다고 치부하며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秩父宮 雍仁親王)을 신일본제국(新日本帝國)에 천황으로 추대하였다.
  15. 후에 이 곳은 녹우크라이나 자치주로 동방합중국에 편입된다.
  16. 냉전 시기에 양국은 각자 이 곳을 자신들의 입에 맞는 정권을 세우도록 노력했으며, 이 때문에 수차례 소련과 미국을 지지하는 지방정부 혹은 연방정부가 번갈아 수립되기도 했다. 예외로는 동아주의(東亞主義)를 주창한 잠빙 바트무흐(Жамбын Батмөнх) 등이 있다.
  17. 위구르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동아 전쟁 당시 연방 소속 위구르군 사령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18. 대한국 출신으로서 일본제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1932~1945) 시기 건국대학(建国大学)의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장징후이의 뒤를 이어 만주국 국무대신직을 역임하게 되었다.